1.1. 제4절 중공영도하의 반일투쟁

1.1.1. 5. 항일유격근거지 건설

9․18사변 후 만주는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었으며 일제는 치안숙정을 벌리는 동시에 정치, 경제, 문화 등 면에서 파쇼통치를 실시하였다.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일제와 대항하자면 일제의 통제가 상대적으로 박약한 지역에 항일근거지를 건설해야 했으며 이 역사적 발전규칙에 순응하여 만주에는 항일유격근거지가 창설되기 시작하였다. 만주에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전파. 동만, 남만, 북만의 중공조직의 건립, 항일유격대의 건립, 각 계층 인민들의 반제반봉건투쟁은 이 지역의 항일유격근거지의 창설조건으로 되었다
김창국 씨는 「동북항일유격근거지사연구」(1992)에서, 박청산 씨는 「연변항일유격근거지답사」(2004)에서 항일유격근거지에 대하여 상세한 연구를 하였다. 아래의 서술은 이에 기초한 것이다.
중공동만특위는 1932년 여름과 가을에 4개의 유격구를 개척하였다. 연길유격구는 둘레길이가 250킬로미터 되는 도가선 이서, 장도선 이북과 할바령 이남의 연길현, 안도현 북부와 왕청현 서부 지구였다. 왕청현유격구는 둘레길이가 250킬로미터 되는 지금의 도가선 이동, 마반산 이북의 왕청현 동부지구이다. 훈춘유격구는 둘레길이가 100킬로미터 되는 대황구, 밀강하를 중심으로 한 훈춘현 서북부 지역과 둘레길이가 100킬로미터 되는 연통라자를 중심으로 한 훈춘현 동남 지구였다. 화룡유격구는 둘레길이가 50킬로미터 되는 우복동을 중심으로 한 화룡현 남부 지구였다. 유격구를 토대로 1932년 봄부터 1936년 봄까지 왕우구, 팔도구, 삼도만, 어랑촌, 처창즈, 대황구, 연통라자, 소왕청, 요영구, 나자구, 내두산 등 11개 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였다. 각 중공현위는 근거지에 구위와 당지부 등 중공기층조직을 건립하였으며 공청단, 반일회, 공회, 농민협회, 부녀회, 소선대 등 대중적 조직을 건립하였고 1932년 겨울부터는 소비에트정권을 수립하였다.
1932년 여름부터 1939년 가을까지 중공당이 영도하는 항일무장부대는 남만에서 선후하여 반석, 하리, 나얼훙, 환인, 흥경, 관전, 노령, 장백 등 6개 항일근거지를 창설하였다. 각 항일근거지에서는 당조직을 건립, 경제건설을 다그치는 동시에 지방무장조직을 건립하였다. 1937년 초에는 생산유격대 등 반군사조직도 세웠다.
북만에서는 팔도하자, 주하, 학립, 서북구, 태평천, 탕왕하, 조양산, 폭마정자, 대라륵밀 등 9개 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였다.
동북항일유격근거지는 불안정성과 잠시성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활동범위도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항일무장투쟁의 후방기지로서 역량을 보존, 장대시키는 위대한 사업에서 역사사명을 훌륭히 완수하였다.
동만항일유격근거지는 1936년에 이르러 종말 지었고 남만에서는 1939년 겨울, 북만에서는 1941년에 유격근거지가 기본상 파괴되었다. 적아역량의 현저한 차이, 중공당의 미성숙, 독립작전 등이 근본적인 원인으로 되었다.

1.1.2. 6. 반‘토벌’투쟁

1932년 가을, 일제는 대량의 병력을 출동하여 동만, 남만의 유격근거지역에 대한 ‘토벌’을 발동하였다. ‘어랑촌 13용사’가 바로 이 시기의 이야기이다.
1933년 음력 1월 18일 새벽, 어랑촌의 항일군민이 한창 자고 있을 때 토벌대가 어랑촌에 기어들었다. 일본수비대 200여 명, 일본경찰과 특무 10여 명, 삼도구에서 출동한 100명 등으로 무어진 360명 토벌대는 기관총, 박격포 등 중무기로 무장하고서는 어랑촌을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날 밝기를 기다렸다. 김세 대장을 비롯한 10여 명 용사들은 수십 배나 되는 적들과 반나절 넘어 혈전을 벌였다. 토벌대는 18명이 죽고 20여 명이 중상을 입는 큰 대가를 냈다. 그날 저녁, 어랑촌 사람들은 13명 용사를 안장했다. 그들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생명으로 어랑촌 백성과 현, 구의 대부분 간부들이 안전하게 전이하도록 담보하였다. 1981년 8월 1일, 화룡현인민경기장 주석대 맞은쪽에 ‘13용사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 좌우 양쪽에는 조․한문으로 ‘희생된 선열들 그 뜻도 장하여라, 일월을 휘어잡아 새 세계 이룩하네’라는 중국 모저뚱 주석의 저명한 시구가 새겨져 있다.
1933년 11월, 일제는 보병, 기병, 포병, 공병 도합 6000여 명을 출동시켜 동만근거지역에 대한 제2차 토벌을 발동하였다. 이번 토벌의 주요한 목표는 연길현과 왕청현 유격근거지, 규모가 큰 전투는 팔도구습격전투와 동녕현 현소재지진공전투였다.
1934년 9월부터 1935년 초까지 일제는 동만유격근거지역에 대한 제3차 토벌을 발동하였다. 항일유격대는 부분적 유격근거지와 유격구에서 철퇴하여 새로운 지역에 옮겨갔다.
1933년 1월부터 6월까지 일제는 대량의 병력을 집중하여 버리하투 지역에 대해 포위토벌을 감행했고 1933년 10월에는 1만 2000여 명의 병력으로 버리하투 홍석라자 유격지를 향해 추기 대토벌을 감행했다.
1934년 11월 7일, 동북인민혁명나라 군대 제1군이 건립되었으며 양찡위(杨靖宇, 1940년 2월 23일, 몽강현 삼도위자 밀림에서 일본토벌대에 피살)가 군장 겸 정치위원으로 추대되었다. 제1군 산하에 2개 사를 두었고 이홍광이 제1사 사장 겸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36년 10월, 일제는 괴뢰군을 주력으로 ‘추기겨울철 위만주국군독립토벌’을 개시했다. 양찡위와 이홍광은 1000여 명의 대오를 거느리고 4개월 남짓한 기간에 적과 500여차 접전하였다. ‘통화토벌지도부’는 1936년 10월 1일부터 28일까지의 동변도동기대토벌에서 항일부대와 528차의 전투를 하여 살상자 297명을 내였는데 고위급군관 10명이 포함되었다고 밝히었다(「동북대사기」 하권).
1934년 6월 28일, 북만에 합동지대가 편성되었다. 북만유격대는 1934년 5월 중순의 오상보전투, 1934년 11월의 소전지전투, 1935넌 1월 중순 대왕라자 섬멸전을 통하여 겨울철토벌을 분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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