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화 저

1. 7. 동북항일연군

1936년 2월 10일, 중공중앙은 ‘전동복항일연군총사령부를 건립하기 위한 결의 초안’에서 동북항일연군의 건립을 명확히 지적하였다. 같은 달 20일에는 ‘동북항일연군통일건군제도선언’을 발표하였다. 1936년 3월 동북인민혁명나라 군대 제2군을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재편성하고 산하에 3개 사와 교도여단, 소년영을 소속시켰다. 제2군은 2000여 명 병력을 가진 부대로 급부상하였으며 1사의 대부분은 조선인으로 구성되었고 3사의 7여단과 8여단의 대부분 전사들도 조선인이다. 동북항일연군 각 군에는 우수한 조선인 지휘관들도 있었다.
남만지역에는 동북항일연군 제1군의 전신인 동북인민혁명나라 군대 제1군 독립사 참모장 이홍광, 동북인민혁명나라 군대 제1군 참모장 박한종, 제1사 참모장 이민환, 동북항일연군 제1군 군수처장 엄필순, 군의처장 서철, 제2사 참모장 이송파, 제3사 정치부 주임 유만희, 교도퇀 정치부 주임(후에는 경위여 1퇀 정위) 황해봉, 제2사 8퇀 퇀장 박영호, 제1로군 군수처장 손영호, 경위여 제3퇀 퇀장 박선봉, 이송학 등 우수한 조선이주민 지휘관들이 있었다.
동만지역에는 제2군의 전신인 동북인민혁명나라 군대 제2군 독립사 제1퇀 퇀장 김순덕, 제2퇀 퇀장 김호철, 정위 차룡덕, 제3퇀 정위 남창익, 제4퇀 정위 김현, 항일연군 제2군 제6사 사장 김일성, 제7퇀 퇀장 김주현, 제8퇀 정위 김산호, 제4사 제1퇀 퇀장 최현, 독립여 제1퇀 퇀장 최춘국, 제1로군 제2방면군 제7퇀 퇀장 오중흡, 제8퇀 정위 박덕산, 제3방면군 제 13퇀 정위 조정철, 제14퇀 퇀장 김동규, 정위 양형우, 제15퇀 퇀장 겸 정위 이룡운, 정위 안길 등 우수한 지휘관들이 있었다.

▲ 사진 1-11-05 동북항일연군 지도여 부분적 간부(1945.3),첫 번째 줄 왼쪽부터 심태산 김경석 서철 박낙권 최명석 장광적, 두 번째 줄 왼쪽부터 와스커유츠(소) 최춘국 김책 강신태 양청해 도우봉 주암봉, 세 번째 줄 왼쪽부터 장석창 유철석 범덕림 고만유(이청산) 교수귀 유안래 진덕산

북만지역에는 항일연군 제4군 정치부 주임 황옥청, 항일연군 제5군 제2사 정치부 주임 이광림, 항일연군 제6군 제1사 사장 마덕산, 정치부 주임 서광해, 항일연군 제7군 군장 이학복, 항일연군 제8군 제1사 정치부 주임 김근, 항일연군 제11군 정치부 주임 김정국, 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 최석천(최용건), 중공북만성위 서기 겸 제3로군 정위 김책, 제3로군 참모장 겸 제3로군 군장 허흥식, 제3로군 제12지대 지대장 박길송 등 우수한 지휘관들이 있었다.
동북항일연군은 창건되어서부터 1937년까지 4000여 차의 전투를 진행하였는바 그중 일본군과의 접전이 근 2000차였다. 1940년 겨울부터 항일연군 제3로군의 일부 소부대가 흑룡강성과 요하평원에서 유격전을 벌리는 외에 동북항일연군 각 로군의 소속부대는 육속 구소련 경내로 들어가 정돈과 훈련을 하였다.
1945년 중국항일전선의 총반격과 함께 동북항일연군 주력부대도 전 동북의 56개 지점으로 진출해 일제와의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동북항일연군의 우수한 조선인 지휘관들의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
이학복(李学福) 1901년 음력 12월 11일, 길림성 연길현 태생, 원명은 이학만(李学万), 또는 이보만(李葆满)이다. 1933년 가을, 중공당에 가입, 1937년 봄에는 제7군 제2사 사장(정위 및 군장대리는 최석천(일명 최용건), 1938년 1월에는 제7군 군장으로 활약하였다. 장기간의 간고한 항일전쟁 중 하신불수증에 걸려 1938년 8월 8일 세상을 하직하였다.

허흥식(许亨植) 1909년 조선 경상북도 선산군에서 출생, 1930년 초, 중공당에 가입, 1937년 7월에는 항일연군 제9군 정치부 주임, 1939년 1월에는 항일연군 제3로군 참모장 겸 제3군 군장(총지휘는 리이쪼린)으로 있었다. 1942년 8월 2일 아침, 파언, 목란, 동흥 등 지역에서 사업검사 중 토벌대의 포위를 뚫다가 2시간 남짓한 격전 끝에 희생되었다.
이홍광(李红光) 1910년 조선 경기도 용암군에서 출생, 본명은 이홍해(李弘海)였고 이의산이라고도 불렀다. 1930년 5월 중공당에 가입, 1931년 10월 ‘개잡이대’ 대장 직을 맡았다. 1935년 5월 초, 노령구에서 200여 명의 일본수비대와 위만경찰과 뜻밖에 마주친 전투에서 희생되었다. 이홍광은 반석항일유격대의 창시자이며 양찡위장군의 친밀한 전우였다.
김근(金根) 원명은 김광진(金光珍), 1903년 1월 조선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출생, 1928년에는 용정대성중학교에서 중국어와 영어를 가르쳤으며 1930년 6월, 영안에서 중공당에 가입, 1936년 9월 동북항일연군 제8군 제1사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1937년 12월 3일, 화천현 칠리립자 자신의 거처에서 경위련의 2명 반역자한테 피살되었다.
이동광(李东光) 원명은 이상준(李相俊), 1904년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출생, 1922년 용정 사립동흥중학교 재학하였고 1930년에 중공당에 가입하였다. 이홍광과 함께 남만유격대를 창건하였다. 1937년 7월 16일, 신빈현 영릉진 부근의 황토강자에서 일본토벌대와 맞붙었는데 불행히 희생되었다.
박한종(朴翰宗) 1910년 경상남도 섬천군에서 출생, 1930년 중공반석현위가 건립된 후 이내 중공당에 가입하였다. 1934년에 동북인민혁명나라 군대 제1군(군장 겸 정위는 양찡위)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35년 양력설 후 괴뢰군 제5여 제5퇀 기병련을 임강에서 몽강으로 가는 도중에 습격하다가 전투가 결속될 무렵 총탄에 맞아 희생되었다.
한호(韩浩) 원명은 김한호(金翰浩), 1905년 조선에서 출생, 1932년 6월 초 반석유격대에 참가하였으며 1934년 가을, 동북인민군 제1군(군장 겸 정위는 양찡위) 제1사(사장 겸 정위는 이홍광) 부사장으로 임명되었다가 이홍광이 희생되자 제1사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1935년 8월 28일, 일본군, 괴뢰군과의 접전에서 희생되었다.
마덕산(马德山)과 서광해(徐光海) 마덕산의 원명은 김승호, 고향은 조선 평안북도이다. 서광해는 1907년 조선 경상남도 태생, 9․18사변 후 둘은 탕원 반일유격대에 가입하였다. 1937년 마덕산은 1사 사장으로, 서광해는 사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1사는 삼강평원에서 거듭되는 승리를 거두었으며 총병력이 거의 1000명으로 늘어나 삼강평원에서 이름 있는 항일주력부대로 되었다. 1938년 3월 29일, 마덕산은 수빈현 삼간방에서 괴뢰경찰대를 매복습격하다가 희생되었다. 서광해는 1938년 11월 23일, 완달산맥 와회산후방병원의 20여 명 상병원과 병원일군을 거느리고 이동하다가 장가요에서 괴뢰군 35퇀과 격전을 치렀는데 서광해를 비롯한 20여 명이 희생되었다.
김정국(金正国) 원명은 김상주(金相周), 1912년 3월 조선 경상북도 예천군 산합동에서 출생하였다. 1930년에 중공당에 가입하였고 1937년 10월, 동북항일연군 제11군 정치부 주임 겸 제1여 정치부 주임을 담임하였다. 1938년 5월 상순, 부찌인현 리가분방에서 변절자에게 살해되었다.
김책(金策) 제3군단 제4사 정치부 주임, 중국공산당 북만성위 서기를 역임하였다. 1903년 8월 14일 조선 함경북도 성진군에서 출생, 본명은 김홍계(金洪启)였다. 3․1운동 후 용정 대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27년 4월 7일,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40년 북만의 항일부대가 소련 경내에 들어가 정돈하고 훈련하던 시기에도 북만성위 서기 김책과 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은 소련에 들어가지 않았다. 1942년 9월 13일 중국공산당 동북당조직 특별지부국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거되었다. 김책은 북만지구 중공당의 최고지도자로서 제일 마지막까지 일제와 무장항쟁을 견지하였다. 1951년 1월 31일 조선 평양에서 서거하였다.
최현(崔贤) 걸출한 활동개고 군사지휘개다. 1907년 6월 8일(음력), 길림성 훈춘시 훌루투거우라는 작은 마을에서 출생, 본명은 최득권이고 그의 아버지는 홍범도, 임병국의 반일부대에 있었으며 홍범도, 임병국 등 반일부대장령들은 매일과 같이 최현의 집에 드나들었다. 1932년 10월 12일 최현은 중공당에 가입했으며 제1로군 4사1여 여단장, 제1로군 제3방면군 제13여단 여단장을 역임, 1940년 말 소련 경내에 진입하여 군사훈련기지를 건립하였고 일제가 투항하자 조선으로 나갔고 1982년 4월 9일에 평양에서 서거했다.
이밖에 동만에는 신춘(황포군관 출신, 중공훈춘현위 군사부장), 김훈(중공왕청현위 초대 서기), 김상화(중공왕청현위 제2임 서기), 채수항(중공화룡현위 초대 서기), 최상동(중공화룡현위 제4임 서기), 이용국(중공왕청현위 서기), 서광(중공훈춘현위 서기), 김일환(중공화룡현위 서기), 영성효(왕청항일유격대 대대장), 김철(왕청유격대 초대 대장), 이광(항일구국군 전방사령), 차룡덕(동북인민혁명나라 군대 제2군 독립사 제2퇀 정위), 박동근(중공연길현위 군사부장), 김순덕(동북인민혁명나라 군대 제2군 독립사 제1퇀 퇀장), 남창익(동북인민혁명나라 군대 제2군 독립사 제3퇀 정위), 최철관(항일연군 제1로군 경위여 제3퇀 퇀장), 김주현(항일연군 제2군 제6사 제7퇀 퇀장), 김산호(항일연군 제2군 제6사 제8퇀 정위), 오중흡(제1로군 제2방면군 제7퇀 퇀장), 양형우(항일연군 제3방면군 제14퇀 정위), 이룡운(제3방면군 제15퇀 퇀장 겸 정위) 등 열사가 있으며 남만에는 유만희(항일연군 제1군 3사 정치부 주임), 이민환(동북인민혁명나라 군대 제1군 제1사 참모장), 박선봉(항일연군 제1로군 경위여 3퇀 퇀장), 이송파(동북인민혁명나라 군대 제1군 제2사 참모장), 엄필순(항일연군 제1군 군수처장) 등 열사가 있으며 북만에는 이성림(중공벌리현위 서기), 배치운(중공 탐원중심현위 서기), 박봉남(중공밀산현위 서기), 이광림(중공길동국 순시원), 황옥청(항일연군 제2로군 정무처 주임), 박진우(중공요하중심현위 서기), 박길송(항일연군 제3로군 제12지대 지대장) 등 열사가 있다.
동북의 항일투쟁 중 많은 여성열사도 있다.
김순희(金顺姬) 1910년 길림성 안도현 신사하에서 출생, 1931년 약수동적위대 대장 송태익과 결혼하고 약수동으로 왔다. 화룡현 약수동부녀구국회 주임, 1932년 11월 체포된 후 조직의 비밀을 수호하기 위하여 혀를 깨물어 끊었다. 적들은 김순희 등을 빈집에 밀어 넣고 불을 지른 후 기관총소사를 하였다. 그때 김순희는 22살, 만삭이 된 몸이었다.
김영신(金英信) 중공동만특위 부녀위원, 1932년 겨울에 체포되었다. 절개를 굽히지 않고 영용히 희생되었다.
이추악(李秋岳) 중공에 가입한 첫 조선인여성, 양림의 부인, 중공주하중심현위 여성위원, 1936년 8월에 체포돼 희생되었다.
배성춘(裴成春) 항일연군 제6군 피복공장장, 1938년 11월 23일, 보청현 장가요에서 포위를 돌파하다가 희생되었다.
허성숙(许成淑) 1915년 안도현 차조구 중안촌에서 출생, 1931년 소년선봉대에 가입, 1936년 중공당에 가입, 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제4사 1퇀 1련의 첫 여기관총사, 1937년 6월 에 있은 간삼봉전투에서 무비의 용맹을 떨쳤고 1939년 4월의 시베이차(西北岔)전투에서는 단신으로 적기관총진지에 뛰어들어 적들을 쓰러 눕히고 기관총 한 자루를 노획하였다. 1939년 8월 23일, 대사하전투에서 적의 지원병을 혼자서 저격하다가 희생되었다.
황정신(黄贞信) 반일의사 황병길의 둘째 딸, 훈춘현 연통라자 남구당지부 여성위원, 1934년 정월 초하룻날, 토벌대의 추격으로 희생되었다.
이계순(李桂旬) 원 중공화룡현위 서기 김일환의 부인, 항일연군 제2군 6사에서 후원사업에 종사. 1937년 12월에 체포된 후 갖은 혹형과 유인을 물리쳤으며 1938년 1월에 희생되었다.
김로숙 남만항일지도자의 한 사람인 이동광의 부인, 홍석랍자, 금천하리 항일유격근거지역에서 후원사업을 하였다. 1936년 10월, 물자구입 중 집안현 대청구에서 일본수비대과 싸우다가 희생되었다.
안순화(安顺花) 동북인민혁명나라 군대에서 후원사업을 하였다. 1937년 3월, 부상으로 체포된 후 나무꼬챙이를 몸에 박는 등 갖은 혹형에도 굴하지 않다가 희생되었다.
안순복(安顺福) 1915년 흑룡강성 목릉현 목릉진 신안툰에서 출생, 1936년 중공당에 가입했고 항일연군 제4군 피복공장의 책임자, 1938년 10월 상순, 대부대의 포위를 엄호하다가 탄알이 떨어진 상황에서 우스훈강에 몸을 던진 ‘8녀투강’의 한 사람(이외 조선인 여전사 이봉선이 있음)이다.
최희숙(崔姬淑) 항일연군 제2군 제6사의 재봉대 책임자. 1941년 2월 연길현 용신구에서 적의 포위를 뚫다가 부상입고 체포된 후 그녀의 두 눈을 오려내는 등 갖은 혹형에도 굴하지 않았다. 적들은 마지막에 그녀의 심장을 도려내었다.

[저작권자(c) 동북아신문(www.dbanews.com), 무단복제-재배포 금지! 단, 공익 목적 출처 명시시 복제 허용.]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