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향미 수기

[서울=동북아신문]1999년, 먼먼 길 기차역까지 날 배웅하고, 돌아서며 눈물을 훔치시던 엄마의 뒷모습이 내 인생을 바꿔 놓을 줄 생각도 못했다. 나에게 거절당하고 울던 엄마, 나에게는 가슴 아픈 추억이다. 길림 가는 기차 안에서 내처 울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결정을 내렸다. 

 나는 길림화공병원에서 하던 양의연수를 마무리하고, 병원에 사직서를 낸 후 곧바로 약혼남이 있는 천진으로 향했다. 꿈을 버리지 못하고 의학의 길을 계속 가려는 노력을 거듭했지만 천진이라는 대도시에서 병원취직이 쉽지 않았다. 

 그때 내 눈을 사로잡은 구인정보가 잡지사 번역이었다. 의학의 길을 못갈바엔 글과 씨름하는 번역이 적성에 맞는 고상한 직업이라 생각되었다. 

 그 당시 잡지사 봉급은 600원, 삼성, LG같은 한국기업에 취직할 경우 절반에도 못 미치는 봉급수준이다. 

 번역테스트 하고 취직이 되었다. 한, 중, 영, 일 4개 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는 격주잡지였다. 한국인, 일본인, 한족, 조선족, 그리고 며칠에 한번 씩 얼굴 보이는 미국인, 꾀나 재미있고 단란한 글로벌 가족이었다. 

 인터넷이 크게 보급되지 않았던 때라 연필로 번역을 하고 지우개로 수시로 고쳤다. 자료 수집하는 한족이 여러 경로를 통해 자료를 가져오면, 번역사들이 번역을 하고, 원어민 감수를 거쳐 잡지에 냈다. 글 읽기 좋아하는 나는 볼거리, 먹거리, 관광, 뉴스, 건강 등 다양한 글속에 푹 빠져 들어갔고 단순한 언어의 전환에 그치는 번역이 아니라 색깔이 각각 다른 원본의 어감과 분위기, 미묘한 뉘앙스를 포착하여 상대 언어로 번역하는 내공 쌓기에 전력했다. 실로 즐거운 날들이었다. 봉급이 적은데다 두석 달 체불될 때도 있었지만 번역이라는 고되고 힘든 신비의 세계 속에서 행복에 푹 빠져있었다. 두툼한 사전도 보풀이 일도록 번졌다. 편집 마감날짜가 다가오면 새벽까지 근무하고 퇴근할 때도 많았지만 싱그러운 인쇄냄새 풍기는 잡지를 받아 들고, 내가 번역했다는 자부심에 들뜬 마음으로 배달도 나가군 했다. 

 연필로 번역한 자료에 원어민이 볼펜으로 수정을 하면 노트에 메모해놓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 하듯 생소한 단어 하나, 글자 하나를 내 것으로 만드는 승리감과 맛깔스런 번역, 재창작의 희열을 만끽하던 날들이었다. 

 같은 연령대 여성들이 삼성, 엘지 유니폼을 입고 남부럽지 않은 봉급, 대기업 직원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을 때 나는 임금체불이 자주 되는 작은 잡지사에서 묵묵히 일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봉급인상은 꿈도 꾸지 못하지만 불평 없이 잘 지켜봐줬던 남편에게도 고마울 뿐이다. 

 나의 행복한 번역 이야기는 결혼하고 임신해서부터 그늘이 끼기 시작했다. 임신 후에도 번역일은 계속되었고 과로로 하혈이 되어 유산이 될 번도 했지만 번역을 향한 도전과 열정의 고삐는 늦춰지지 않았다. 출산으로 오래 자리를 비우는 동안 바짝 뒤따라오는 후배들에게 위기감을 느낀 나는 걸음마 떼기 시작하는 딸애를 머나먼 시골 친정에 맡기고 본격적인 도전에 달려들었다. 사랑하는 내 딸아, 엄마는 할 일이 많아. 인정받는 번역사가 될 거야. 번역의 정상에 오를 거야. 좀만 참아다오. 우는 딸애 떼어놓고 오면서 지독하게도 눈물이 없었던 것 같다. 

 육아, 자녀교육에 투자해야 할 시간과 정력을 번역 일에 쏟아 부으면서 비상을 꿈꾸었지만 잡지사는 하루아침에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문을 닫게 되었다. 번역관련 일자리를 찾아 나선 나는 피아노 제조회사에 번역 겸 강사로 취직하여 한국본사에서 나온 교재들을 중국어로 번역하고, 책자를 만들어 직원들을 교육 시키며 또다시 비상을 꿈꾸었다. 각종 사내규정과 ISO 규정은 이미 중국어로 번역되어있었는데 오역이 많았고 현지화 되지 않았다. 예하면 조립을 組立, 분임조를 分任組로 번역해놓고 천여명 사원들이 모두 그렇게 사용하고 있었다. 마침 주재원으로 오신지 얼마 안 되는 과장님이 오역과 현지화에 대한 나의 견해에 귀 기울이시고 전폭 지지해서 대량의 문서를 검토하고 재번역하는 과정에 들어갔다. 퇴근 후에도 번역 검토를 계속했고 시간이 남으면 여러 번역회사의 일감을 받아 늦게까지 완성하군 했다. 1년 동안 친정에 맡겼다가 다시 데려온 딸애는 완전히 방치해놓고 나만의 번역세계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었다. 딸애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컸는지 기억에 없다. 딸애를 품에 안고 동화책 한번 읽어준 적 없었고 짧은 시간이나마 딸애와 질 높은 친밀한 대화를 나눈 적도 거의 없을 정도였다. 

 2004년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자그마한 번역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사업허가증 내고, 광고 내고, 번역사 모집하고, 번역물을 수주 받고 완성하여 납품하느라 밤샘을 밥 먹듯 했다. 납기준수를 위해 1분1초가 전쟁과 다름없었고 항상 시간이 딸렸으니, 재롱부리는 딸애에게는 조용하라고 을러메고 침대로 끌어당기는 남편에게는 성폭행 당하는 여자처럼 분노하고 화를 냈었다. 

 그 시절, 딸애는 심심찮게 엄마를 바꿔야 한다고 했고 남편은 쩍하면 아내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시간이 없다고 아우성치며 잔뜩 스트레스에 쌓여 있었다. 심지어 나는 독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나만의 성취와 개발을 위해 무작정 앞으로 달리기만 했으니, 딸애와 남편이 내 앞길을 가로막는 군더더기로 여겨질 때도 있었다.
 여자와 가정, 사업이라는 어려운 과제에 나는 속수무책이 되어 엉망으로 되는 가정을 무시한 채 불철주야 사무실에 붙어있었다. 저녁이면 남편과 딸애에게 어서 자라고 윽박지르며 잠재운 뒤에 나는 홀가분한 마음이 되어 커피 한잔에 은은한 음악을 틀어놓고 번역의 세계에서 마음껏 노닐 군 했다.

 무연고방취제가 실행되던 2007년, 정신병환자가 되기 전에 환경을 바꿔야 된다는 남편의 강력한 권유로 한국 온지 어언 3년이 되어간다. 한민족의 문화와 정서를 현지에서 직접 체험하면서 많은 경험을 하고 소중한 인생의 지혜를 얻었으니 귀국 후 계속할 프로번역사 활동에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위안과 자부심을 가져본다.

한국에서의 고된 노동, 고달픈 삶의 현장에서 육체는 힘들지만 마음의 여유와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지나온 세월을 뒤돌아보면서 삶의 의미와 보람에 대해 사색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귀국 후 계속될 나의 행복한 번역이야기 속에는 사랑하는 딸애와 남편의 기쁨도 함께 하고 그들의 협조와 동참을 이끌어내 보다 더 알차고 보람 있는“우리 행복한 번역이야기”로 아름답게 엮어갈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본다. 삶의 무게를 같이 공유하고, 삶의 즐거움과 보람을 함께 하는 가족의 잔잔한 일상을 통해 더욱 행복해지는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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