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화 저

1.1. 제5절 토비숙청에서의 조선인

1945년 8월 8일, 구소련은 일본에 전쟁포고를 낸 후 동북에 출병하였다. 8월 9일, 마오저뚱은 ‘일본침략자에 대한 최후의 일전’ 성명을 발표, 전면적인 대반공이 시작되었다.
간도의 주요한 시가지가 해방된 시간을 보면 훈춘은 8월 12일, 나자구는 14일, 왕청은 15일, 도문은 17일, 연길은 18일, 용정과 돈화는 19일, 화룡은 20일이다. 이로써 조선이주민은 일제의 통치하에서 해방되었다.
8월 19일, 용정 3․1소학교(현 용정실험소학교)운동장에서 구 소련홍군을 환영하는 대회가 성황리에 펼쳐졌으며 1946년 3월 1일, 3․1소학교 운동장에 동북해방기념비를 세웠다. 1945년 10월 하순, 도문시 각계 인사들은 우의거리와 명성로 교차점에 소련홍군열사기념탑을 만들었다. 도문해방전투에서 소련홍군은 20여 명이 전사, 그중 2명이 여전사였다. 탑은 ‘동북해방기념탑’으로 명명되었다가 ‘소련홍군열사기념탑’으로 개칭되었다.
1945년 9월 23일, 연길시에서 연변노농청부(劳农青妇)총동맹이 성립되었고 10월에는 연변민주대동맹으로 개칭하였으며 그 인수는 14만 5000여 명에 달하였다. 같은 시기 조선독립동맹의 지하사업자인 김택명은 할빈에서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를 조직하였고 남만에서도 민주연맹이 건립되었다.
조선인무장대오가 신속히 조직되었다. 팔로군기열료군구에서 파견되어 심양에서 지하사업을 하던 한청은 광복 후인 8월 18일부터 조선의용군 독립지대 창건사업을 추진했으며 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서 사업하던 기열료군구의 주연이 조선의용군 선견대 100여 명을 영솔하고 동북으로 진군하였는데 9월 중순 심양에 도착했을 때는 400명으로 늘어났다. 선견대와 독립지대는 곧 합병하여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로 개편되었다. 당시 선견종대는 1400여 명의 무장대오로서 12개 중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김택명은 할빈에서 길흑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를, 김광협은 목단강에서 고려경찰대를, 강신해는 연길에서 연변경비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팔로군 주더어 총사령의 명령을 받고 동북에 진출한 조선의용군은 1945년 11월에 제1, 3, 5지대로 편성되어 남만, 북만, 동만으로 진출하였으며 제5지대는 길림지구에 이르러 일부 병력을 떼어내 당지의 인민무장대오와 합쳐 제7지대를 조직하였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1945년 11월에 심양에서 조직되어 그 후 이홍광지대로, 동북 민주연군 독립 제4사로,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로 개편되었다. 제1지대 지대장은 김웅, 정치위원에 방호산, 참모장에 안빈, 정치부 주임에 주연이였다.
한청, 주연이 조직한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를 기초로 한 1600여 명 병력과 연안 조선혁명나라 군대정학교 졸업생, 각 항일근거지역에서 북상한 청년군관들을 골간으로 하여 조직된 제1지대는 1946년 2월, 동북민주연군 이홍광지대로 개칭되었고 총 병력은 6000명에 달하였는데 후에 또 한 개 대대가 증가되었다.
1945년 11월 25일, 할빈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가 조선의용군 제3지대로 재편성되었다. 지대장에 김택명, 정치위원에 주덕해, 부지대장에 이덕산였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1945년 11월 초순에 심양에서 조직되었고 9월에는 동만으로 진군하였다. 5지대는 원 태항산 조선혁명군 군정학교의 간부와 학생을 골간으로 조직되었다. 정위에 박일우(조선의용군 부사령을 겸임), 지대장에 이익성, 참모장에 전우와 이권무, 정치부 주임에 주혁, 대원이 900여 명이 되었다. 조선의용군 5지대의 성원을 골간으로 하여 조직된 포병대대는 그 후 포병퇀으로 확대, 발전되어 제4야전군 포병부대의 건설에 큰 기여를 하였다.
8․15광복 후 길림시에서는 길림성보안총대 제7대대가 조직되었다. 1945년 11월 29일 조선의용군 제7지대로 개편되었다. 이 부대는 화북에서 온 의용군을 골간으로 하고 7대대를 주력으로 하였다. 당시 지대장 겸 정치위원으로는 연안에서 온 조선의용군의 박훈일이고 부지대장 겸 부정위는 최명였다.
광복 후 동북근거지역에는 무려 10여 만을 헤아리는 토비들이 창궐하였다. 북만의 송강군구 8퇀, 목단강군구 제2지대와 359여에 편입한 조선인관병들은 아군부대와 배합하여 1947년 5월까지 7만 9000여 명의 토비를 숙청하고 북만근거지를 튼튼하게 건설하였다. 남만에서는 이홍광지대가 아군부대와 배합, 작전하여 통화의 2․3반혁명폭동을 진압한 뒤 해성, 수암, 내호산, 임강, 장백 등 지역에서 토비를 숙청하여 남만근거지 건설에 기여했다. 동만지구의 조선인관병들은 1945년 11월부터 6월까지 남만과 목단강지구의 아군과 배합, 작전하여 1만여 명의 토비를 숙청함으로써 한 시기 중단되었던 동만, 북만 두 근거지를 연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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