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월시인의 만주이야기

남한땅 물위의 러브호텔 그리고 등소평 별장 '왕복 5시간 거대호수 위의 별난 세상'

▲ 경박호 주변에는 '물위의 여관'들이 즐비해 있다. 오색 깃발까지 꽂아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 목단강시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나는 지금 도문역에서 열차로 목단강시를 향해 동북쪽 철길을 따라 거슬러 가고 있다. 창밖을 보니 역시 하늘은 푸르고 흰구름 날고 온 들판은 옥수수를 비롯한 잡곡들이 누런 색깔을 띠면서 주인인 양 익어가고 있었다. 목단강시에 다 와갈 무렵 창밖에 큰 간판이 눈에 띄었는데 ‘발해풍정원’이라는 큰 글씨였다. 옛 발해의 땅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유민의 나라 발해! 그 이름이 그대로 남아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목단강시에 내렸을 때 시각은 오후 2시 40분이었는데 목단강시역 높은 건물벽에 걸려있는 시계가 그 시각을 알려주었다.

목단강역에 도착하니 소설가이며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 근무하는 림승환씨가 마중나와 주었다. 소설가답지 않게 빼어난 큰 키를 가진 림승환씨와는 두 번째 만남이 된다.우리 일행이 곧바로 도착한 곳은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였다.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층에 마련된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림승환씨는 ‘대하력사소설 고구려전 『 동명성왕 』 상,하 (림승환 최금산 저,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라 쓰여져 있는 두 권의 책을 가지고 와서 싸인을 해서 내게 주었다. 나는 너무도 기쁘고 반가웠다. 림승환씨는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민담과 현지고증까지 거친 지식으로 대하역사소설 『 동명성왕』’상.하권을 펴냈다 한다. 동명성왕은 누구인가? 만주땅에 우리 한민족의 웅대한 나라를 새로이 정립한 대고구려의 시조 아닌가.

우리가 목단강시에 온 것은 경박호를 보는 것인데 림승환씨는 경박호 가기전 자신의 저서인 ‘동명성왕’ 앞부분을 꼭 보라고 일러주었다. 발해왕조의 건국에 대해 언급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경박호 주변이 발해왕조 발생지로 그 역사가 증명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 경박호를 가다

▲ 경박호에 있는 등소평 별장. 1983년 경박호를 찾은 등소평은 호수의 빼어난 절경에 감탄했다고 한다.
마침 림승환씨의 대학에 다니는 아들 림장천(林長天)군이 가이드해 주기로 해 이튿날 새벽 6시, 우리 일행은 숙소에서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목단강시역으로 갔다. 새벽부터 소형버스가 여러대 대기하고 있었는데, 시간은 10~20분마다 출발하는 것이었다. 모두다 ‘목단강시→경박호’라는 안내판이 소형버스의 앞유리에 붙어 있었는데 우리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했다.

도대체 난생 처음 들어봤던 이곳 만주땅의 ‘경박호’가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이토록 신대륙을 찾아가듯 가슴 벅차고 설레인다는 말인가 싶었다.

우리 한국에서는 잘 몰라서 그렇지 경박호는 우람한 호수다. 경박호는 중국에서 제일 크고 전세계적으로는 스위스의 레만호 다음으로 크며 뛰어난 경관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거기다가 우리의 고대국가 발해의 현장이라는 웅대함까지 곁들어 있으며, 마음 설레지 않은 사람 있겠는가. 목단강(牡丹江) 상류에 위치해 있으며 목단강시에서 경박호(鏡泊湖)까지는 85㎞라 한다. 약 1만년 전에 화산이 분출해서 만들어진 호수로 면적이 95㎢인데 길이가 62㎞, 남북의 길이 45㎞, 수심은 가장 깊은 곳이 62m나 된다 한다.

일설에 의하면 발해의 두번째 도읍지였는데 백두산이 화산폭발해 발해가 하루 아침에 망했고, 거기서 화산 분진이 나오고 지진이 일어나면서 발해의 도읍지가 가라앉아 버렸는데 비가 내려서 계곡이 호수가 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그곳에 발해의 신묘한 거울이 잠자고 있어 경박호라는 뜻의 '거울 경(鏡)', '숙박할 박(泊)'자를 쓴다는 것이다. 그리고 발해의 멸망이 926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백두산 폭발시기와 맞물린다는 것이다.

경박호라는 이름은 거울 같이 깨끗하고 조용하다는 뜻으로 호수 수면은 이름처럼 거울과 같이 맑고 번쩍번쩍 빛나는 환상적 풍경으로 봄에는 꽃, 여름에는 물, 가을에는 낙엽, 겨울에는 설경이 한데 어루러지는 경관을 두루 맛볼 수 있어 사계절 모두 아름답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호수 아래로 떨어지는 관수루폭포는 "동양의 나이에가라"라는 별명에 어울리듯 360개의 물줄기가 동시에 떨어지는 장관을 연출한다. 파도가 용솟음치며 물보라를 휘날리면서 아래로 내리꽂히는 소리의 진동은 마치 우뢰소리와 같아 그 경치는 실로 장관을 이룬다.

또한 독특한 호광산색(湖光山色)로 주목을 받고 있는데 2008년에는 국제레저산업협회, 유엔국제생태안전합작조직, 중국국제명표협회로부터 중국10대 레저관광명승지로 선정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이후 유소기(刘少奇), 등소평(邓小平), 강택민(江泽民) 등 많은 중앙 지도자들이 경박호를 관광하기도 했다 한다. 경치가 아주 뛰어나 등소평 별장도 있었으며 김일성도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또한 경박호는 일제치하 독립군 전투현장이 되기도 했는데 1933년 2월 천도교인 신숙과 홍진 지청천, 이동녕 등의 한국독립군과 중국의 길림구국군 제14사가 한중연합군으로 조성되어 일본군과 만군을 섬멸한 곳으로도 유명하며, 발해국의 옛 왕궁터인 상경용천부도 있는데 발해궁성 입구 봉분모양의 둔덕에는 ‘발해국상경용천부유지’라 새겨진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 산은 물위에 떠 있고 물은 산위에 흐른다

▲ 시원한 물줄기가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경박폭포.
경박호 입구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 30분, 그러니까 2시간 남짓 달려온 셈이다.

24인승 소형버스에 빽빽이 앉아서 달려오는데 차창밖 풍경은 대단했다. 이곳 역시 끝없이 펼쳐진 벌판과 구릉이 눈에 띄었다. 2000~3000년 전만 해도 이곳에 수많은 종족들이 일어나고 몰락하며 변화무쌍했던 대역사의 소용돌이 그 현장이다. 거기에 고구려가 탄생되었으며, 고구려가 망한 후에는 발해의 말발굽이 또 얼마나 많이 진동했겠는가. 바로 우리 한민족의 역사가 펼쳐진 땅인 것이다.

「경박호(鏡泊湖)」라고 써 붙여놓은 관문 앞에 내렸는데 오른편 바위벽에는 ‘산은 물위에 떠 있고 물은 산위에 흐른다'는「山上平湖 水上山, 北園風光 勝江南」이라는 경박호의 뛰어난 경관을 읊은 시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걸어 들어가서 다시 버스에 올랐는데 한참을 숲속 비포장길을 지나 오른쪽으로 굽이도니 비로소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는데 폭포가 일대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입구의「경박승경(鏡泊勝景)」이라 새겨놓은 붉은 글씨의 기념비가 인상적이었다. 등소평동지가 1983년 8월 7일에서 11일까지 이곳에 와 머물면서 경박호의 절경에 감탄했다는 문구까지 뒷면에 자세하게 소개해 새겨 놓았는데, 등소평의 필치로 1987년에 경박호 관리국에서 이 기념비를 세웠다고 적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 앞에서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수많은 인파 속에서 우리 일행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경박폭포의 장관이었는데,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아까워 경박폭포 아래까지 내려가 발도 담그고 손을 담구어 보았다.

그때 마침 우리 일행이 기념촬영 하려는데 젊은 중국여성이 눈에 띄였다. 이국땅에 와서 이것도 인연이라 내 곁에 다가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게 되었는데 그녀도 아주 좋아라고 반가워하며 폭포 아래 흐르는 폭포수의 돌 위에 나란히 앉아 기념촬영까지 하게 되었다. 전혀 말은 통하지 않아도 그녀가 내게 손수 써서 남겨준 건 자신의 이름인 ‘당림려(唐琳麗)’ 였다.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당국화(唐菊花)의 성씨(姓氏)였다.

경박폭포는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경박호의 물이 일제히 머리 빗질하듯이 떨어져 모였다가 흘러내리는 건 천상의 선경 같았다. 우리 일행은 물이 떨어지는 맨 위쪽 절벽 위까지 가 보기도 했다.날씨는 무덥고 햇볕은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경박폭포를 뒤로 해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경박호 안의 언덕과 숲길을 돌아 호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선착장에 도착했다. 경박호 유람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선착장에는 조그만 유람선 수십 척이 대기하고 있었다. 한국사람은 우리 일행뿐이었다. 누가 만주땅을 오기나 하나? 대부분 구라파나 동남아로 가지. 아니면 중국 본토나 갔다오면 그만이지 뭐. 우리의 조상의 숨결이 배어있고 뼈아픈 한이 서려있는 지금은 남의 땅인 만주땅 밟아보며 우리 선조들이 걸어간 이 하늘밑 땅끝의 훈기를 느껴보아야지 안 그런가? 아아, 만주땅은 내 마음을 살찌우는 그런 땅이었다.

유람선 승선료가 1인 40위안이니 한국돈으로 환산하면 5천원 정도가 되는 셈이다. 왕복 5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대한 크기의 호수임엔 분명하다. 선착장에서 호수 끝까지가 85km라니 양쪽의 폭 보다도 길이가 엄청난 셈이다. 양측을 끼고 있는 산세도 일품이었는데 그 중에 산 중턱에 솟아있는 개구리모양을 한 바위 형상이 눈에 들어왔는데 고구려 이전 부여국시대 금와왕의 설화가 서린 것이라 한다.

동부여의 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천제를 올려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는 바 하루는 말이 곤연에 이르렀을 때 큰 바위를 보고 말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바위를 굴려보니 금빛나는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그가 곧 금와왕이 된 것이다. 물론 그보다는 한참 후대(後代)인 발해국의 도읍도 이 변방으로 경박호는 고대국가때부터 우리 한민족의 터전이었음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 목단강시역 전경.
장관인 것은, 진풍경이 2시간 가까이 연출되고 있었는데, 오른 켠에 솟아오른 산봉우리들의 장엄함에 비해 좌측 켠에는 아담한 산맥들이 늘어선 풍경이었는데 그 호숫가 산기슭에 오색찬란한 호텔, 별장들이 천국에 온 듯 즐비해 눈길을 끌었다. 좀 과장하면 끝없이 이어진 별장들의 잔치라 할까. 호화로운 형형색색의 제각기 다른 모양의 집들이 시네마스코프처럼 연출 되는 것이 눈부셨다. 덴마크나 스위스 이탈리아 스웨덴 그런 나라의 서구풍의 집들이 모두 모여 모델하우스 경연대회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경박호 끝 배가 닿았을 때는 거기엔 물위의 집들이 즐비해 있는 풍경이 형형색색이었다. 그러니까 이곳은 물위의 여관이었다. 각목과 나무판자로 대충 짜맞혀 그 안에 시트 하나 깔아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게 중국만주땅에는 여러 곳이 있는데 하얼빈 송화강에도 가면 물위의 조그만 판자집을 지어놓고 색색의 페인트로 칠해놓고 5위안을 받고 있었다. 흑하시의 흑룡강변에도 가면 별장식으로 간이숙소를 나무판자로 대충 짜맞추어 지어놓고 쉬다가라는 것이었다.

이곳 경박호에는 더 아기자기하게 꼭 개선군이 지금 막 돌아오는 듯 수중 개선문도 만들어 세워놓고 전쟁에 나간 깃발들 다 불러 모은 것처럼 오색깃발들을 나부끼게 꽂아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게 참 재미있는 발상 같았다. ‘물위의 여관', 그러니까 그 모두가 중국의 개방적 에로티시즘의 세계였다.

다시 유람선이 경적을 울리며 승선했을 때, 이 머나먼 한국땅에서 찾아간 관광객은 나를 비롯한 이별리 우이정 백민 정해안시인 등 다섯명 뿐이었지만 조선족 몇 사람이 함께한 것을 이때 알게 되었다. 살아생전 이런 곳 한번 찾아오기 쉽지 않을 것이다. 참말이지 그림같이 잔잔한 호수, 바다와 같이 거대한 호수 위에 떠서 한나절의 시간을 모두 보낸다는 거, 이런게 유유자적함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신선이 따로 있겠는가. 나는 신선처럼 아니 이백처럼 도연명처럼 선상에 비스듬히 누워 움직이며 지나가는 주위의 경관을 감상하며 가만히 생각에 잠기어 보았다. 내 스스로 생각해도 내 인생이 의아할 정도로 느껴졌다. 누가 오라해서 온 것도 아니고 누굴 따라 온 것도 더더욱 아니니 말이다. 경박호는 한 바퀴 돌아나오는데 반나절이 소요될 정도로 크고 넓은 호수였다.

◇ 호랑이뼈로 담근 술 대접

유람선에서 내려 다시 ‘경박호 목단강시’라고 적혀있는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목단강시로 돌아오면서 느낀 것은 차창 밖의 광활한 벌판이었다. 주로 옥수수밭으로 가득 채워진 저 벌판위로 광개토대왕이 말을 달렸을 것이 분명하고 보면 그 소리 이제는 어디로 갔는지 흔적 없는게 역사의 흥망성쇠인지.

저녁엔 림승환씨 집에 초대받아 갔는데 호랑이뼈로 담근 술을 대접 받았는데 술맛은 독했으나 호랑이뼈로 담근 술이라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술이었다. 그것도 오랫동안 아껴 두었던 술이라 하니 아주 귀한 술임엔 틀림없나 보다. 이밤이 지나면 아침 일찍 하얼빈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틀간 목단강시에서 머물렀고 보면, 갈길이 멀다. 목단강시에서 하얼빈까지는 버스로 5시간이 넘게 소요되는 먼 거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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