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2010년의 달력 한 장만 남겨놓고 만감이 교차하는 이 순간, 내가 한국에 온지도 어느덧 1년이 되어가는 시점이다. 이 짧고도 긴 1년 동안 내가 겪어온 일들을 돌이켜보면 기분이 묘하면서 절로 웃음만 터져 나온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왜 그때 그 순간에는 심하게 나를 괴롭혔던지 그때의 나 자신에 대한 답답한 마음만 남게 된다. 솔직히 말하면 대학에서도 기숙사 생활을 경험해보지 못한 나로 하여금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쓴 맛을 제대로 맛보게 한 1년 이였다. 

 중국에서 석사과정을 마치면서 취직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하던 끝에 유학의 길을 선택한 나에게 있어서 한국을 선택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중 첫째로 손꼽히는 이유는 주위 사람들의 추천대로 우선 언어가 통했다. 물론 한국에 오기 전 까지만 해도 나는 이 말을 굳게 믿었었고 또한 한국에서는 절대로 언어장애가 없을 거라고 장담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었다. 하지만 눈앞의 현실은 이것은 그냥 나의 바보스런 생각 이였음을 절실히 느끼게 하였고 오로지 초라하고 작아진 내 모습만이 거울 속에 비춰지고 있었다. 분명히 상대방이 하는 얘기가 아야어여를 사용한 명백한 한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귀담아 들어도 도저히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고 마치 영어처럼 느껴지기만 했던 것이 나의 한국에서의 첫 시작 이였다. 

나의 전공은 임상의학이다. 지금은 논문에 대한 욕심으로 날마다 실험실에서 의학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중이다. 한국에서 유학생활을 했었던 선배들한테서 들은바가 있기 때문에 나는 학위과정을 무사히 마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실험실 생활에 적응하는 것과 연구에 필요한 실험방법을 숙지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요소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학원으로부터 외국인전형 합격통지서를 받자마자 나는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새로운 생활에 대한 동경과 낯설고도 친숙한 한국에 대한 설레는 마음으로. 

 어른들은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다. 이 세계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기에 어디를 가더라도 사는 방식이나 인간관계나 다 똑같은 거라고. 그때까지만 하여도 나는 문화학적차이가 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었다. 그리고 서로 다른 환경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었다. 또한 나의 생각이 얼마나 짧고 단순했는지에 대해서도 인식하지 못했었다. 한국드라마를 많이 접촉해왔던 나였기에 한국인에 대한 인상은 드라마 속 인물들에 대해서 느낀 정도에만 그치고 있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상냥하고 예의바르고 배려 심 많고 오로지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1% 예외라는 것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 순간에는 까먹고 있었던 나였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첫인상이 제일 중요하므로 사람들은 첫 만남에 서로서로 따뜻하게 웃으면서 인사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첫인사를 외면하던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면 나를 믿어 줄 수 있겠는가. 

    나의 실험실 생활은 그렇게 시작 되었다. 비록 학생의 신분이지만 어떻게 보면 신입사원과 비슷한 신세였다.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실험하는 것을 보고 실험하는 것을 배우고 모든 것이 제로에서 시작되면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나가야 했다. 다행히 친구가 있었기에 지나치게 힘든 상황에 처해있지는 않고 무사히 이틀을 보냈다. 하지만 모순은 삼일 째부터 시작 되였다. 내가 온지 얼마 안 되였기 때문에 아직 자리 배정은 안 된 상태였다. 그리하여 친구자리에서 잠깐 메일을 체크하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아있던 선생님 A양께서 한마디 건네 왔다. “한국이 어떠세요?” 나는 내가 한국에 온지 이틀밖에 안 되였고 또한 이 동네밖에 모르기 때문에 A양의 말을 자연스레 네가 생각하기에 이 동네는 어떤 것 같아 하는 뜻으로 받아들였고 별다른 생각 없이 대답했다. “이 동네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작은 것 같아요.” 여기에서 나는 A양의 말에 대한 나의 이해와 대답 포인트가 틀렸다는 것을 한국생활에 적응 된 몇 개월 후에서야 알아차렸지만 그 당시는 내가 느낀 대로만 대답하는 것이 옳은 줄로 알았었다. “하긴, 중국은 원래 땅이 크니깐.” 나를 보고 있던 A양이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갑자기 한마디 던졌다. 그의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내가 혹시 틀린 말을 했나 하는 생각과 이건 중국과 먼 상관이냐는 물음만 내 머릿속에 계속 맴돌고 있었다. 가만히 있던 나를 힐끔 쳐다보던 A양이 또 말을 건네 왔다. “연길은 어때요?” 이때의 나는 그녀의 말에 짜증이 났었고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던 차라 퉁명스레 대답했다. “여기보다는 넓어요.” “한국의 70, 80년대랑 똑같겠네요.” 재빨리 이어지는 그녀의 대답에 나는 저도 모르게 양미간을 찌푸렸고 지금 이것은 나를 무시하는 태도에서 나오는 막말이라는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머라고 대꾸하려던 그 순간, 여기에서는 많이 참아야 한다며 신신당부하던 친구의 말이 내 머릿속을 재빨리 스쳐 지나갔고 잠시 주저하던 나는 내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졌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슬그머니 그 자리를 뜨고 말았다. 나는 A양과 말한 적도 없었고 A양한테 실수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A양이 왜 나를 이렇게 비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 누구한테서도 해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A양 사건이후 나는 속으로 말실수라도 하지 않게 조심하자고 몇 번이나 다짐을 했었고 남들과의 대화에서 하고 싶은 말도 참아가면서 조심스럽게 대처했었다. 그렇게 A양 사건을 잊으려고 노력 할 무렵, 한국에 온지 다섯 날 째 되는 날의 B양 사건은 나에게 국적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명백하게 가르쳐주었고 내가 어떤 처지에 처해있는지도 똑똑히 느끼게 하였다. 여기에서 미리 말해두는데 A양은 나보다 네 살 위고 B양은 나보다 한 살 아래다. 세 사람이서 이런저런 수다를 하던 중 갑자기 B양이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백두산이 어느 나라에 속한다고 생각하세요?” “장백산이요? 중국하고 북한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여기에서 또다시 나의 어리석음이 표현 되였지만 그때의 나로서는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역시 아무 생각없이 내뱉었다. 나의 대답에 B양은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왜 중국꺼죠? 선생님은 조선족인데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B양의 말에 오히려 어리둥절해진 건 나였다. “그럼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러자 B양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왜 한국꺼라고는 생각하지 않는거죠?”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고 머라고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나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B양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독도는 어디꺼죠?” “당연히 한국이지!” 그때까지만 해도 가만히 잠자고 있던 A양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B양도 거의 비슷한 순간에 대답을 했었지만. 그 순간, 두 사람을 향해 소리치고 싶었다. 나도 한국의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래를 알고 있고, 노래방에서 부른 적도 있다고! 장백산은 중국경내에 있는데 왜 한국꺼라고 그러냐고? 물론 그때는 그렇게 못했었던 비참하고 초라한 나다. 나는 그냥 웃기만 했다. 그리고 피하듯이 대답했다. “정치문제는 나하고 묻지 마.” 

 B양 사건 이후 내 친구에게는 언제나 웃으면서 대화하는 A양이 아침에 만나 안녕하세요, 라고 먼저 인사하는 나를 본체만체하는 태도가 날마다 악몽처럼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해가 안 되였고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나의 잘못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는 나에게 있어서 마지막에 나 자신을 설복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문화적 차이 라는 변명뿐 이였다. 내 친구는 A양보다 먼저 실험실에 왔었고 나는 A양보다 늦게 왔기 때문에 한국에서 흔히들 말하는 선후배 이런 것 때문에 그러는 거겠지, 하는 빈곤한 변명뿐이 나의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줄 수 있었다. 날마다 그들의 무시하는 태도에 화가 나있는 나, 그리고 그것을 따지고 있는 나 자신이 갈수록 더 싫증이 난 나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은 내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였고 부모 곁을 떠나 독립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거나 굴레를 벗어나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것도 그렇게 기쁜 일은 아니라는 것 이였다. 그랬다. 솔직히 말해서 집을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수긍하게 된 것 이였다. 하지만 그만큼 내가 너무 부모님의 품속에서만 자랐다는 것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는 안타까운 나의 현실 이였다. 

 한국에서 살면서 날마다 새롭게 느끼는 것은 우리들이 생활하는 환경이 다름에 따라 표현 방식도 다르다는 것 이였다. 나의 표현을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그들과 그들의 표현을 이상하게 이해하는 나라는 것을. 한국이 좋아? 이것은 한국에 있는 유학생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적어도 한번쯤은 듣게 되는 물음이다. 1년 전의 내가 이 물음을 들었다면 당연히 추호의 주저함도 없이 싫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의 나는 나이에 맞지 않게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날마다 전화하면서 울고불고 난리법석을 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당당하게 한국이 좋다고 대답할 수 있다. 내가 한국에 와서 이상한 상황에서 이상한 대화를 나눴다고 한국이 나쁜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은 아주 작은 환경에서 극소부분의 사람들과의 생활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름답게만 상상했었던 한국에서 여짓것 상상 못했었던 대우를 받았었다는 것만이 실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사람은 지내보아야 그 속을 알 수 있다고 한국에서도 여러 사람들을 만나 보아야 진정한 한국인을 요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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