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현재의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약 700여 년 동안 지배했던 강성했던 국가ㅡ고구려의 시조는 성은 고(高). 이름은 주몽(朱蒙)·추모(皺牟)·상해(象解)·추몽(皺蒙)·중모(中牟)·중모(仲牟)·도모(都牟) 등으로 기록되어 전한다. 〈삼국사기〉·〈삼국유사〉·〈제왕운기〉·〈동국이상국집〉·〈광개토왕릉비문〉 등의 관련기사에 의하면,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와 정을 통하고 버림받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가 태백산(太白山) 우발수(優渤水)에서 북부여(北扶餘)의 왕 금와(金蛙)를 만나 그의 궁중에 유폐되어 있었다. 어느 날 해모수가 햇빛이 되어 나타나 유화에게 잉태시켜 알을 낳게 했는데, 여기서 태어난 것이 주몽(부여의 속어로 '활을 잘 쏜다'는 뜻)이라고 전해진다. 총명하고 활을 잘 쏘아 촉망받던 중 대소(帶素) 등 금와왕의 7명의 왕자가 그 재주를 시기하여 죽이려 하자 어머니의 권고로 마리(摩離)·오이(烏伊)·협보(陝父) 등과 함께 화를 피해 남쪽으로 도망갔다.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佟佳江) 유역의 홀본(忽本 : 懷仁·桓仁)에 이르러 땅이 비옥하고 산천이 험준한 것을 보고 도읍으로 정했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성을 고라 하니, 대략 BC 37년에 해당된다. 당시 동가강 유역에는 여러 성읍국가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우세한 것이 비류국(沸流國 : 일명 多勿國)이었다. 비류국의 지배층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주몽집단보다 먼저 이동해 정착한 집단이었다.

주몽은 BC 36년 비류국의 왕인 송양(松讓)을 굴복시켜 합병했으며, BC 34년에는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이듬해에는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하고, 다시 BC 28년에는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키는 등 여러 성읍국가들 사이에 연맹국가(聯盟國家)로의 통합운동을 전개, 국가기틀을 마련해갔다. BC 19년 4월 부여로부터 도망쳐온 아들 유리(類利)를 태자로 삼았다. 그해 9월에 죽자 용산(龍山)에서 장사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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