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월 시인의 만주 이야기

산 전체가 밭이 된 '강 건너 北'
마치 한폭의 모자이크畵 같아

▲ 남평해관에서 바라 본 북한의 무산. 꼭대기까지 개간한 모습이 마치 한폭의 모자이크 그림처럼 보인다.
◇ 연변의 금강산, 선경대

연길에 가서 열흘 넘게 머무는 동안 나의 애제자이기도 하며「연변지용문학상」을 수상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연변조선족 여류시인 심예란씨가 연길에서 자신의 스승이기도 한 최룡관시인이 한국에서 온 나를 선경대와 두만강 상류 남평기행에 초대해 주었다. 연변작가협회 원로시인이기도 한 최룡관시인은 시이론가로도 중국 조선족문단에서는 널리 알려진 분인데 화룡출신이었다. 그래서 화룡으로 가서 화룡시청에서 내어준 승용차를 타고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화룡시청에서 내어준 승용차가 화룡시청 청사를 빠져 나오가도 전에 고장이 나버려 회룡시청 공무원이 다른 방법으로 물색해 준 영업용택시를 타고 선경대로 향했다. 그날따라 날씨는 아주 청명했으며 들판의 오곡도 향기롭게 익어가고 있었다.

연변의 금강산이라 불리우는 '선경대' 는 화룡시에서 남으로 30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동으로 두만강과의 거리도 불과 8킬로미터이다. 화룡시 덕화진 경내 두만강 상류에 위치해 있으며 "천하제일선경"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중국에서는 황산, 태산과 같은 국가중점풍경명승지로 해발 926미터이며 724년 발해국 3대왕 문왕 대흠무가 선경대에 올랐는데 기봉과 괴석, 고송, 산꽃, 운해, 해돋이 풍경 등 단청화 같은 기묘한 풍경에 탄복해 '아, 실로 선경대로다!'하여 선경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먼저 찾은 곳은 칠성사 유적지로 칠성암 앞에 흰대리석 불상이 모셔져 있었다. 여름밤, 이 절벽앞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면 북두칠성이 신통하게도 절벽위에 뜨기에 지어진 이름의 칠성암이다, 옛날에 이 칠성암앞에 한채의 절이 세워져 있었다고 하는데 그 절을 북두칠성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자라봉과 고려봉은 다정한 연인마냥 가지런히 솟았는데 자라봉 잔등에는 한 마리 자라가 하늘로 기어오르려다 한 숨 쉬려는듯 멈춰있는 모습의 커다란 바위가 굳어져 있었으며 칠성암 오른쪽 비탈을 꺾어돌면 산으로 오르는 통로가 나오는데 이 모퉁이를 돌고 돌면 고려봉 오르는 길이며 나무가 바위를 끌어안고 있는 형상의 '와수포석'이라고 적어놓은 글귀도 있었다. 돌과 나무의 사랑으로 맺어진 천선배합 경관이라고 불리우는 이 참나무의 무게는 1톤정도 되며 가로 누워서 1.2미터 되는 부채암에 업혀서 백여년간 서로 사랑하면서 돌과 인연을 맺엇다고 한다.서로 어울릴 수 없는 돌과 나무일지라도 서로 돕고 사랑하면 행복과 쾌락이 넘쳐난다는 대자연의 명언이되었으며 사랑의 게시가 되었다 한다.또한 여기에는 사철푸른 초선송(招仙松), 팔괴송(八怪松), 자매송들이 있어 유람객들의 눈길을 모으는데 진달래 피는 봄이 오면 그 풍경은 더욱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산비탈 등산로를 따라 오르니 화룡출신 네 시인의 시비가 붉은 글씨로 한자와 조선어로 동시에 세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조선족시인들의 시비가 대자연의 절경에 맞게 조화를 이루며 지나가는 등산객들에게 정서를 제공해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조선족 최룡관 시비 <나의 강장골> 앞에서 최룡관시인과 심예란시인과 함께 기념촬영도 했는데 바위 하나 건너 하나씩 바위 옆면에 세겨져 있는 시를 둘러보았는데 김문회 시비 <사랑의 의미>, 리근영 시비 <고사리>, 박화 시비 <비망록>, 등이었다. 길림성사회노동보장청 신봉철부청장의 후원으로 건립되었다 한다.

▲ 북한 무산시 두만강변의 아이들. 철 모르는 아이들의 장난이 한국과 다를 바 없다.
◇ 남평으로 가는 길

선경대에서 내려와 남평으로 향했는데 난생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들판을 가로질러 한참을 가니 절벽같이 강건너 산이 다가서 보였다. 북한땅이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촌락들은 북한의 산간촌락을 구김없이 보여주었다. 끝까지 다다르니 조그만 시골소읍이 나타났는데 바로 남평진(南坪鎭)이었다. 우리네 60~70년대 다름 없는 정경이 고스란히 재현되는 듯 했는데 상점 미용실 식당 간판들이 그냥 페인트로 칠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봉숭아 맨드라미 사루비아 코스모스 같은 여름에서 가을로 건너가는 꽃들의 표정은 정겨웠으며 낯 익어서 정겨웠다.

남평진은 전체 인구가 1만여 명으로 조선족이 70%를 차지하는데 집집마다 남편 아니면 아내가 한국으로 돈 벌러가 가정은 반으로 쪼개져있는 현실이라고 한다. 남평의 지명유래가 흥미로웠다. 지형적으로 마을 뒷산 남쪽 비탈이 평탄하다 해서 남평이 되었다는 설과 민간에 전해지는 야사로 개척 초기 두만강 건너에서 애타게 부르던 남편이 '남평'이 되었다는 것이다. 강건너 북한 쪽엔 '로덕'(아내를 뜻하는 함경도 사투리)이란 지명도 있다한다.

문학은 하지 않지만 최룡관시인의 중학교 제자 도움으로 식사를 마친 우리는 남평해관으로 들어가봤는데 바로 앞에 두만강이 흐르고 있었으며 강너머 북한의 산은 꼭대기까지 개간을 하여 가파른 밭을 일구어놓은게 한폭의 모자이크 그림 같았다. 평평한 한쪽 산기슭엔 울창한 숲이 보였는데 북한의 김일성이 쉬어간 곳이라 하여 신성시여겨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관내이니 찍어도 된다고 허락해 주었다. 이곳 두만강은 다른 곳의 두만강처럼 평화롭게 흘러가거나 뱃놀이 즐기는 두만강이 아니었다. 포크레인으로 두만강 모래를 채취하고 있었다. 뭐하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두만강 바닥의 모래를 중국이 사서 철분을 채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강물은 왼통 흙탕물이었는데 모래까지 팔아야 하는 북한에 대해 비애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함경북도 무산시 무산읍을 중심으로 노천철광 광산이라 불리는 이곳 일대에는 철광산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 호곡령에서 내려다 본 두만강 너머 북한 무산시 풍경
죽음이 감도는 무산시

여기서 강변언덕 비포장길 따라 거스러오르니 천하절경 같은 북한땅 무산시가 한눈에 들어왔다.너무나도 초라해 보이는 무산시 풍경이었는데 나즈막한 판자집들이 연립주택처럼 질서정연하게 줄지어있었으며 2층집이라곤 관공서 건물 한두 채였다. 그 뒤론 우뚝 솟은 산들의 모습이었는데 왼 편으로는 철을 채취한다고 마구 파헤쳐있어 온통 민둥산이 되어있는가 하면 오른편엔 개간을 하여 그 가파른 정상까지 다락밭을 일구어 놓았으니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몸부림이 산의 피폐함을 보고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앞서 표현한 대로 두만강은 무산시를 끼고 돌아흐르고 있었으며 이곳 만주땅 언덕에서 내려다보니 한눈에 들어오는 자연경관은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호곡령이라 부르는 이곳 산언덕에는 연변조선족 시단의 대부로 존경받는 리욱(1907~1984)의 '할아버지 마음'이라는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칠순 / 할아버지 / 나무 심으며 / 어린 손자를 보고 / 빙그레 웃는 / 그 마음...... ', 고갯마루에 시비를 세운 것은 두만강을 바라보며 조국땅을 그리는 마음으로 읽혔다.

▲ 용을 상징하는 화룡시 시가지 풍경.
한 탈북을 막기 위해 중국은 중국대로 국경경비대가 지키고 있었으며 강 건너 북한땅 강변에는 총을 든 경비병이 서성거리고 있는가 하면 몇 미터 간격으로 호를 파서 감시를 하고 있는 삼엄한 분위기였다. 이곳까지 왔으니 그냥 갈 수 있겠느냐며 내가 제의를 해 강변기슭까지 가보기로 했다. 강변에 도착하니 중국 경비병들이 나무그늘 아래 불을 지피고 고기를 구우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강건너 지척에는 북한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고 철 모르는 북한 아이들은 목욕을 하며 서로 장난치는 모습은 우리 한국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이쪽 중국측 경비병들이 먹을 것을 주면 북한 아이들은 목욕하다가도 잠시 건너와 받아가지고 간다하나 어른이 건너오면 월경죄에 해당되니 단 몇 분도 강을 건너오지 못하는 삼엄한 국경지대임을 실감할 수 있였다.

식량난이 극심할 때는 산사람의 강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강이었다 한다. 시신이 발견되면 북한과 중국에서는 장대로 서로 국경 너머로 밀어내기도 하고 추운겨울 마을의 굴뚝에서는 연기 한 오라기 올라오지 않는다 한다.

여기서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두만강 최상류 숭선인데 그것까지는 못 가고 아쉽게 돌아오게 되었는데 북한땅을 바라보는 나의 참담한 심정을 가늘 데가 없었다. 다시 화룡시로 와서 화룡작가협회가 마련한 저녁만찬에서 동족문인들과의 의미있는 만남의 장이 개최되었다. <계속>

[저작권자(c) 동북아신문(www.dbanews.com), 무단복제-재배포 금지! 단, 공익 목적 출처 명시시 복제 허용.]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