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화 저 '1.1. 제7절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의 활동'

1918년 6월 26일, 연해주의 하바롭스크에서 조선민족의 최초의 사회주의단체인 ‘한인사회당’이 건립되었다(의장 이동휘). 1921년 1월 10일, 상해에서 ‘고려공산당’으로 개칭되었는데 세칭 상해파였다.
1919년 9월 5일, 하바롭스크에서 ‘전 러시아한인공산당’(의장 김철훈)을 성립하였으며 1925년 5월 ‘전 러시아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였다. 세칭 이르꾸쯔크파이다. 이르꾸쯔크파에서 조선에 파견한 김재봉, 신용기 등이 1924년 11월 19일에 ‘화요회’를 성립하였으며 세칭 ‘화요파’이다.
1924년 2월, 일본유학 귀국생을 골간으로 ‘신청년동맹’이 건립되었다. 그 후 ‘건설사’를 흡수하면서 ‘북풍회’라고 개칭하였다. 세칭 ‘북풍파’이다.
공산주의계열의 상해파, 화요파, 북풍파가 서로 반목, 상쟁하던 끝에 1925년 4월 17일 서울에서 상해파 6명, 화요파 6명, 북풍파 5명이 참가하여 조선공산당을 창건하였다.
1925년 12월, 조선공산당의 김재봉 등 요원 30여 명이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12월 중순, 강달영이 두 번째로 조선공산당중앙기구를 조직하였으며 만주와 일본에 해외총국을 건립하기로 했다.
1926년 5월 16일, 조봉암(曹奉岩), 최원택(崔元泽), 윤자영(尹滋英), 김하구(金河龟), 김철훈(金哲勋) 등은 주하현 일면파 하동의 김철훈의 집에서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을 설립하였다. 조봉암이 책임서기를 담임하다가 상해의 조선공산당해외연락부로 돌아간 후 오의선(吴义善)이 책임서기를 맡았다. 조직부장은 최원택, 선전부장은 윤자영이였다. 만주총국은 산하에 동만구역구, 남만구역구, 북만구역구를 세웠다.
1926년 10월 28일, 용정 삼리촌에서 만주총국에서 파견한 한응갑, 전룡락은 이주화, 김소연, 임계학, 채세진, 박두환, 이순. 김인국, 임민호) 등 각파 대표들은 동만구역국을 세웠다. 전룡락이 책임서기로, 김인국이 조직부장으로, 이순이 선전부장으로, 이주화, 김소연이 표면검사위원으로, 채세진, 김인주, 이주화가 기율검사위원으로 당선되었다. 동만구역국은 용정, 평강, 화룡, 국자가, 동불사, 명월구, 왕청, 나자구, 훈춘 등 지역에 17개 당지부 또는 당소조를 건립하였다.
남만구역국은 1927년 8월에 성립되었다. 김로해(金鲁海)가 책임서기를 맡았으며 후엔 이구호(李九浩)가 맡았었다, 남만구역국은 길림, 화전, 교하, 청원, 집안, 통화, 흥경, 심양, 안동 등 지역에서 기층조직을 확대하였다.
북만구역국은 만주총국에 이어 이내 성립되었다. 총부를 의란현에 두었다가 선후하여 영안, 아성으로 옮겼다. 책임서기는 강화린, 우룡선, 이병서가 선후 임명되었다. 아성, 주하, 영안, 탕원에 4개의 기층조직이 있었고 후에는 해림, 목단강 일대에도 당지부가 있었다.
이상 3개 구역국 중 동만의 역량이 가장 강했다. 1927년 통계에 따르면 동만에는 19개 기층당조직, 116개 외곽단체가 있으며 성원은 9766명이었다. 만주총국의 임무는 민족민주 혁명을 진행하는 것이다. ‘일제의 침략세력을 내몰고 조선독립을 쟁취하는 동시에 일체 봉건제도를 없애며 독립자주적인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방침’에 따라 모든 사업을 진행하였다,
만주총국은 성립된 후 조기공선주의단체를 정돈하였으며 강령과 당장에 따라 당원을 발전시켰고 기층조직을 확대, 신건하였다. 반일혁명역량을 단결하여 반일민족통일전선을 건립하였고 동북조선이주민의 실제상황에 비추어 자치운동을 진행하였다. 이 밖에 군중을 발동하여 반일시위를 조직하였다,
1927년 5월 1일, 동만구역국은 5․1절을 계기로 용정 및 부근의 수백 명 학생들을 동원하여 반일시위를 단행하여 좋은 성과를 보았다. 이에 고무를 받은 만주총국은 10월 2일에 대규모의 반일시위를 거행하여 일제가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 중 체포된 반일지사를 공개심판하는 운동을 벌이려 했다. 이날따라 용정에 비가 왔기에 이튿날로 미루었고 총국과 구역국의 책임자들은 책임서기 안기성의 집에 모였다. 일본용정총영사관은 정보를 접한 뒤 군경을 풀어 29명 만주총국의 간부를 체포하였으며 동만구역국의 간부는 개별인을 제외하고는 다수가 체포되었다. 일제는 이번 사건을 단서로 100여 명 반일단체 의 간부와 군중을 체포, 구유하였다. 이것이 ‘제1차 간도공산당사건’의 진상이었다.
1928년 9월 3일, ML파는 국제청년절을 계기로 용정, 국자가 등 지역의 천 명 청년학생의 반일시위를 조직하였다. 이에 일제는 대규모의 수색을 해가며 72명 청년을 체포했다. 이것이 ‘제2차 간도공산당사건’이다. 제1차사건과 마찬가지로 제2차사건 중 미터L파의 많은 골간들은 남만 각지로 피난했다.
1930년 2월, 3․1운동 11주년을 기념하여 성세 호대한 반일시위운동을 거행하기로 결정짓고 화요파는 준비위원까지 구성하였다. 2월 28일과 3월 1일 용정과 화룡의 수천 명 청소년학생과 농민들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화요파는 이동선, 이철권, 김상근, 안평 등을 위수로 하는 동만폭동위원회까지 성립하고 무장봉기의 준비사업을 다그쳤다. 하지만 4월 17일 일제한테 폭로되어 5월 중순까지 130여 명 간부와 군중이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동선 등은 남만과 북만으로 피난했다. 이것이 ‘제3차 간도공산당사건’이다.
1927년 10월 29일, 제1차 간도공산당사건이 발생된 후 원래의 화요파, ML파, 서울-상해파의 대표로 구성되었던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이 각파로 분립되어 세 개의 만주총국의 건립을 보았다가 1928년 7, 8월간에 열린 공산국제 제6차 대회에서 조선공산당의 공산국제지부자격을 취소하고 일국일당의 원칙에 따라 통일적인 조선공산당을 건립할 것을 요구하였기에 다 같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는 기회를 얻었다. 이에 대응해 중공만주성위는 산하에 ‘소수민족운동위원회’를 설치하고 구체적인 문제를 지도하였다.
1930년 6월을 계기로 동북에서의 조선공산당의 활동은 결말을 지었다. 조선공산당원은 조선혁명과 조선해방의 노선에서 벗어나 중국혁명에 직접 참가하고 조선혁명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새로운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1926년 5월에 건립되어 조선인 농민 대중에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하고 무산계급의 계몽교육을 진행하는 데 적극적인 작용을 놀았다. 그러나 파벌의 싸움으로 끝내는 해산되는 결과를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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