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률 박사의 퓨전로드맵

8월 7일. 점심 경에 연길 공항에 도착했다. 마중나온 이상열 사장(전 연길기독실업인회 회장)과 함께 숙소인 덕명(德銘)호텔로 갔다. 그곳에서 전신자 교수와 민박회원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만찬이 있는 저녁까지 자유시간을 갖기로 했다. 일행들이 모두 시내구경을 나간 사이 나는 숙소에서 연변대 최후택교수를 만나기로 했다. 그는 필자가 처음에 「동북아시대와 조선족」을 집필할 때 조선족 이민사 관련 자료와 중국 정부 내부문건 및 통계자료를 입수해 번역해주었고, 나중에 책을 중국어판으로 다시 출판하게 됐을 때 1차 기초 번역을 맡아주었던, 내게는 참으로 귀하고 고마운 분이시다.

그런데 이런 기쁜 일이 또 있을 수 있을까. 그와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자리에 막 앉으려고 하는데 서울 사무실의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졸저 「동북아시대와 조선족」이 대한민국 학술원에서 선정한 2008년 기초학문 육성부문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 소식에 벅찬 감격을 느낀 나는 최후택 교수의 손을 힘껏 움켜잡고 기쁨을 나누었다. 나는 참으로 기쁘고 감사했다. 특히 오늘 연길에 와서 소수민족 학자들의 모임인 「민박회」 행사를 갖는 첫날에 이런 기쁜 소식을 듣다니 정말 민박회와는 특별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최후택 교수가 돌아간 뒤 나는 한참동안 눈을 감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갑자기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솟아오르며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그동안 18년에 이르는 세월동안 연변과기대 사역을 통하여 만나고 교제했던 많은 중국인들 특히, 조선족 지도자와 청년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동북아시대와 조선족」책을 펼치면 첫 페이지에 이런 글을 써 놓은 것을 보게 될 것이다.

“1990년 10월 이후 지금까지 만 16년이 넘는 세월동안 연변 을 드나들면서, 그동안 함께 동고동락했던 연변과학기술대학의 동역자들과 사랑하는 조선동족들에게 이 책을 드리고 싶다. 저자는 감히 이들을 ‘역사의 새벽을 깨우는 선구자들’이라고 부른다.”

그 글은 나의 참 마음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조선족 사회를 이 시대의 독특한 창의적인 집단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자질과 문화적 특질을 실감 있게 깨닫고 있지 못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걸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반도 분단을 뛰어넘어 동북아사회를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거듭나게 하는 일에 유용한 중간 매체역할을 할 수 있는 선구자적 집단이다.

이처럼 내가「동북아시대와 조선족」을 통해서 깨닫게 된 역사의식은, 양대 국가사이에 끼어 있는 변경 소수민족의 이중문화 형성과 문화적 특질이 오늘날과 같은 정보화·세계화 시대에는 초국가적 탈(脫)중심화 현상의 용도로 유익하게 쓰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동북아 지역의 조선족 사회야 말로 가장 대표적인 이중문화 구조의 촉매집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 그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얻은 나의 최종 결론이었다.

그날 저녁 민박회는 경희궁이라는 조선족 한정식 식당에 모였다. 모일 때마다 나는 생각이지만 민박회와 같은 모임이 또 있을까 싶다. 한마디로 소수민족의 연합체나 마찬가지다. 이날 모인 12명의 면면을 봐도 그렇다.

몽 고 족 : 우런 박사(女, 내몽고사범대학 민속학 사회학원 교수),
고와 박사(女, 중앙민족대학 중국소수민족언어문학학원 교수)
애리(고와 박사의 딸, 소학교 4학년),
진영충 박사(女, 내몽고민족대학 몽고학학원 교수)
장 족 : 기진옥 박사(男, 중앙민족대 민족학 사회학학원 교수)
한 족 : 서영 박사(男, 내몽고대학 예술학원 교수)
다워얼족 : 우언퉈야(서영박사의 부인)
위구르족 : 장궈웬 박사 (女, 북경 우전대학 민족교육학원 교수)
완호탠(장궈웬 박사의 아들, 중학교 3학년)
조 선 족 : 전신자 박사(女, 연변대 사회학과 교수)
손춘일 박사(男, 연변대 민족연구원 원장, 전신자 교수의 부군)
한 국 인 : 이승률(男, 연변과기대 대외부총장, (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 회장)

종족별로 따지면 일곱 족속이며 아이들까지 합쳐 12명이 모였다. 조선족의 삶이 배어있는 식당의 인테리어를 처음 본 다른 민족출신들은 식당 내부 인테리어와 한식 가구, 비품, 방석, 의복 등의 디자인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틈만 나면 사진을 찍었다. 이런 광경에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서영박사가 가장 크게 감동을 받는 듯한 표정이었다. 경희궁의 밤은 그런 특별한 감흥으로 시작됐다.

우리의 요청에 따라 식당 직원들은 음식을 가져올 때마다 한정식의 재료와 조리법 등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술은 맥주와 고량주 두 가지를 각자가 편한대로 마시기로 했다. 사람들은 나의 책이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도서로 선정된 것을 돌아가며 축하해주었다. 특히 몽골족인 고와 박사와 딸 애리는 축하노래와 함께 춤을 추었는데 모녀가 서로 마주보며 추는 몽골의 전통춤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서영박사는, 내가 8월 8일 저녁에 개최된 북경올림픽 개막식 입장권 구입에 당첨되었으나, 이번 민박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그 티켓을 중국사회과학원에 있는 지인에게 양도하고 연길에 온 것을 매우 고마워하면서 민박회 일행을 대표해 ‘신의를 지키는 아름다운 정신’이라는 내용의 인사말을 했다. 그리고는 경극 ‘적벽가’의 한 소절을 불러주었다. 나도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감사와 사랑의 말로 화답했다.

“나는 여러분들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우리는 소수민족들의 문화와 역사를 존중하면서, 마음을 합쳐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미덕을 갖추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 시대는 바로 공존과 상생의 시대입니다. 이웃과 이웃 간에, 민족과 민족 간에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며 살아가는 이 사랑의 능력이야말로 중국과 한국, 그리고 동아시아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 가는 원동력이 될 겁니다. 민박회는 이와 같은 일에 인생을 나누는 동지들이 될 겁니다.”

경희궁의 밤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흥겹게 깊어갔다. 그것도 일곱 족속들이 모인 사뭇 이질적인 자리일 수 있었지만 우리들은 결국 하나가 되었다. 하나 됨의 역사의식은 이렇게 소통하는 사랑의 능력으로 꽃피우는 우정의 한마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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