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월 시인의 만주 이야기

얼음 천안문·얼음 궁전·얼음 피라미드…실물 버금가는 장엄한 스케일 "역시 중국!"

◇ 하얼빈의 유래

▲ 송화강 세계빙등축제에서 선보인 얼음으로 조각된 천안문(위쪽)과 얼음 신전
하얼빈은 흑룡강성의 성도로 만주땅에서 2번째로 큰 도시로 항일 독립운동가였던 안중근이 1909년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곳으로서 한국인에게는 익숙한 지명이다.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러시아인들이 중둥[中東] 철도를 건설하면서 이 도시가 생겨났다 한다. 이 노선은 시베리아 바이칼호의 동쪽 지점에서 시작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동해에 접해 있는 러시아 항구 블라디보스토크와 이어주었다. 또한 하얼빈은 러일전쟁 동안 만주에서의 러시아의 군사작전기지였으며 전쟁이 끝날 무렵 일시적으로 중국과 일본이 공동관리하기도 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뒤 러시아에서 도망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으며 한때는 소련 밖의 도시 가운데 러시아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전해진다.

일본이 만주국(1932~1945)을 지배하던 시기에 하얼빈은 '빈강(濱江)'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1945년 소련군이 이 도시를 점령했으며, 1년 뒤에는 중국공산군이 진격해와 이곳에서 만주 정복작전을 시도해 1949년 이후 하얼빈은 중국 북동부의 주요산업기지가 되었다. 러시아의 문화를 보여주는 건물들이 즐비해 있는데 여느 도시와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다.

특히 시가지가 보도블록이 아닌 청석돌을 깔아놓아 산책하는 이들에게 색다른 느낌을 주고 있으며 백두산에서 발원한 송화강이 길림을 거쳐 하얼빈에 와서 굽이돌아 가목사를 거쳐 동강시에서 흑룡강과 우수리강과 만나 북태평양으로 흘러가는데 5000리나 되는 만주땅의 긴 젖줄이다.


◇ 장엄한 겨울빙등제

▲ 하얼빈 조선족문화예술관에 있는 안중근 의사 흉상.
경우, 겨울이면 오후 4시 30분 정도가 되면 해가 지는데 이 시각부터 빙등제가 시작된다.송화강의 겨울은 영하 30℃~40℃ 정도로 겨울내내 송화강변과 조린공원에서는 세계적인 얼음축제가 열리는데 세계빙등축제가 그것이다. 빙등축제란 하얼빈 송화강의 얼음이 겨울이 되면 1m 이상의 두께로 얼어 그것을 가지고 얼음조각품을 만들어 송화강 강상에 전시하는 축제로 전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실물과 똑 같은 크기와 형상을 갖춘 얼음건축물로 얼음속에는 철골 대신 형광전등을 넣어 색색의 불이 켜지면 송화강상의 겨울풍경을 현실을 아닌 다른 세상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일대장관을 이룬다. 피라미드 신전 등 건축물 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나 이름난 갖가지 형상들을 얼음조각으로 재현해 놓은 100여개의 모형이 겨울 송화강을 뜨겁게 달구며 오색찬란하게 한다.

그러니까 얼음으로 복원해 놓은 천안문, 피라미드, 궁전, 정자, 하늘로 찌를듯한 고궁의 위풍 등이 얼음과 형광불빛으로 잘 조화되어 있었다. 천안문의 경우 모양과 채색은 그대로인데 워낙 큰 건물이라 이곳에서는 반으로 축소해 놓았는데도 실물크기를 보는 듯한 우아함과 장엄함을 느낄 수 있었다.「대한민국」이라 표기된 우리나라의 상징인 태극마크와 함께 우리 고유의 큰북을 얼음으로 조각해 놓은것도 전시되어 있었다. 송화강 옆 조린공원에도 규모는 작지만 갖가지 얼음조형물들로 전시하고 있어 설국 다름 아니었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데도 한두 장 찍다가는 얼어붙어 더 이상 찍지 못해 얼른 호주머니에 넣거나 품안에 넣어야 한다. 이런 현상도 하얼빈에 와 처음 경험해 보았다. 알고보니 외국인 관광객들은 아예 카메라를 헝겊으로 둘둘 말아 들고있는 걸 봤는데 바로 그것이었다. 기온이 영하 30℃~40℃라니 비디오 카메라의 경우도 얼어붙어 작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송화강 강둑에서 바라보는 「하얼빈송화강빙설제」는 보기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중국이 아니면 할 수 없고 중국이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장엄한 스캐일을 지닌 하얼빈 특유의 문화였다.

◇ 조선족들의 호의

▲ 만주 시가지에서 돼지고기를 팔고 있는 노점상 노인(위쪽)과 인력거. 차가운 겨울날씨만큼 을씨년스럽다.
기회에 밝히지만, 이곳 하얼빈도 다름없지만 만주땅에 오면 절대적인 호의을 받는다. 한국과는 달리 이분들은 예의가 깎듯하다. 그리고 상하구분없이 모두 함께 나와서 환영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직장의 근무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디를 가겠다면 우리측을 위해 반나절이 아니라 하루를 통째로 그리고 밤늦게까지 있어준다. 만찬도 꼭 환영식같이 베푸는데 순순히 그분들이 값을 지불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일은 한국처럼 당연한 듯 대접 받으면 안된다. 이튿날이이라도 꼭 봉투에 소정의 금액을 준비해 환대해 주어 고맙다 하며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은 한국에 비해 경제적으로 아주 열악하기에 한국손님 네다섯번 정도 대접하면 한달 봉급이 날아간다고 한다.

◇ 탈북자 이야기

그날 저녁만찬은 「남대문식당」에서 흑룡강신문사 문체부팀 임국현선생과 한춘, 리삼월시인 등과 함께했는데 이 만찬의 화제는 임국현 선생의 실감나는 이야기었다. 내가 한국에서 이곳 만주땅으로 올 때 한국의 KBS-1TV에서는 신년대하다큐멘터리 「대고구려」 4부작이 방영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 4부작 가운데 하나로 이곳 '흑룡강 7천리'을 취재해 간 것이 임국현선생에 의해 밝혀졌다.

이곳 만주땅과 러시아와 국경지대인 흑룡강 상류쪽과 하류쪽 나누어 한국 KBS-TV 다큐팀이 며칠전 취재해 갔는데 흑룡강 윗쪽부분 취재는 현지인으로는 연길의 조선족소설가 유연산선생, 아랫쪽부분 취재 현지인으로는 바로 흑룡강신문사 임국현선생이 함께 했다 한다. 여기서 풀려나온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홍계호에서 발원한 우수리강이 흑룡강과 만나 하얼삔에서 흘러온 송화강과 함께 북해로 흘러드는데 그 삼강이 만나는 동강시의 탈북녀 이야기였다. 15호되는 조그만 부락인데 청진에서 시집온 여자로 이공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의과대학까지 나왔는데 한국기자와 함께 TV 카메라를 들고 취재할 땐 혹시나 고발당할까 봐 전전긍긍 했다 한다. 흑룡상신문사에서 왔다고 했는데도 신분이 탄로날까 봐 떨더라는 것. 북조선에서 온 사람들 많이 도와줬다고 하며 걱정말라고. 그리고 한국기자들이니까 고발하는 일은 없다고 안심시켰다고 한다. 이처럼 탈북자가 조선족 마을 곳곳에 숨어들어 살고 있다고 한다. 비공개 된 탈북자의 수효는 대략 20만명 정도로 지금도 또다른 이산가족을 만들고 있는 심각한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는 우려였다.

동강소학교의 경우 학생수는 고작 8명. 그 가운데 유치원생 4명, 소학생 4명인데 젊은 층은 다 도시로 나가고 조선어를 가르칠 선생이 없어 심각하며 한족이 중국어로 가르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한다. 동강소학교만이라도 그나마 벽돌집이며 나머지는 모두 초가집으로 문명의 혜택이 없는 낙후된 시골마을이라 한다. 중국 조선족들도 풀뿌리 캐먹고 살다가 어릴 때 죽은게 3000만명 이상된다고 한다. 죽 한 그릇으로 다섯 식구가 먹어야 하는데 잘못해 죽그릇을 쏟아버려 어머니한테 귀쌈맞은 이야기도 있으며 이토록 8.15 해방전에는 못 먹어서 만주땅에서 두만강 건너 북조선으로 갔다가 이제는 다시 만주땅으로 돌아오려고 하는 추세라 하니 말이다.

◇ 조선족의 우수성

중국 56개 민족 가운데 가장 적은 수효가 허저족이라 한다. 임국현 부장의 경우, 북경의 중앙민족 대학으로 졸업했는데 중앙민족대학에는 56개 소수민족이 다 모여있다고 한다. 그중에 조선족이 단연 뛰어나다고 한다. 문화수준이 높고 문명이 앞서있고 총명하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이곳 하얼삔과 대련에 미인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송화강변 백사장을 해지는 것 보며 거닐고 있으면 100m 간격으로 걸어가는 미인을 한 명씩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라 한다. 여자들의 대담한 노출, 옷차림 등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는 것이다. 하얼삔은 또 러시아 영향을 많이 받아서 러시아풍이 강하게 풍기는 동방의 파리라 불리우는 곳으로 중국 남방의 대표적인 도시가 광주라면 북방은 하얼빈이라는 것이다.

식당에서 나선 시각은 밤 9시 52분, 중국 CCTV에서는 내일 하얼빈 기온이 -27℃~14℃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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