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한국산업인력공단수기공모 우수상-이정숙 수기]

[서울=동북아신문]중국 용정시 출생인 나는 소위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사회교육, 학교교육, 가정교육을 잘 받지 못하며 자라다보니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 지금 생각해도 입가에 웃음이 절로 난다. 입국할 때 꾀죄죄한 옷을 입고 함경도 사투리를 쓰면서 인천공항 심사대를 통과하지 못할까봐 간이 콩알만 하여 몸을 잔뜩 오그렸던 모습이 어제 같다. 자그만 치 천만 원이란 빚을 지고 있는 맹꽁이 같은 나를 보고 언니 친구는 혀를 차며, "에구, 니가 어찌 돈 벌겠노?!"하면서 탐탁하지 않게 보았다.

처음 찾은 가게는 새로 오픈한, 직원만 80여명 되는 어마어마한 갈비집이었다. 나는 커다란 장화를 신고 13시간 밥 하고 채소를 다듬었다. 천생 착하게 태어난 내가 죽기 살기로 일하고, 고분고분 말 잘 들으면 만사 OK일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아니었다. 분초를 다투는 시각에 종종 뭔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을 때가 많았다.

생소한 물건과 명칭은 수십 가지이고 모두가 바빠서 쩔쩔 매는데 마음마저 약해서 감히 무엇을 물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 앞에 일도 벅찼지만 "쓸모없는 여자"란 말 듣기 싫어서 짬짬이 어깨 넘어 훔쳐도 보고, 잠깐씩 거들어 주고는 모를 것을 물어보곤 했다. 일하면서 "톳나물?","재첩?"하고 열 번, 스무 번씩 곱씹다가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리고 아무리 머리를 짜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면 다시 쓸고, 씻고, 닦는 허드레 일을 도와주고 나서 은근슬쩍 묻고 또다시 외우곤 하였다. 밤에는 팔이 너무 아파서 잘 수가 없어 벽에 팔을 기대어 놓을 지경이 됐지만, 그래도 매일 바뀌는 야채이름과 조리법을 부지런히 적어 놓았다.

쉬는 날은 일부러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서 각가지 과일, 야채, 생선…등등을 익히고 적어 오기도 했다. 그로부터 2개월 지나니 3년 한국식당에서 일한 동포언니는 "나보다 아는 거 더 많네!"하고 혀를 찼고,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참모님은 "정숙씨만 있으면 일이 저절로 돼요!" 하셨다. 첫 달 월급부터 세종대왕님이 10명 더 오셨다! 그런 칭찬에 뭐가 빠지는 줄도 모르고 일을 배워 나간 덕에 지금까지 음식 때문에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고 대신 칭찬은 많이 들었다.

본래 식당일이 적성이 아닌데다 체력도 바닥이 나서 앉았다 일어만서도 사방이 뱅글뱅글 돌아갔다. 그 때로부터 나는 지금까지 입주가정부 일을 하였다.

강남의 어린 꼬마들이 "캔디 주세요.", "치킨 먹고 싶어요.", 또는 애기 아빠가 "브러시 주세요."하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여 어리벙벙한 얼굴을 하였다. 게다가 가전과 생활용품 모두가 꼬부랑 글로 씌어져 죽으라는지 살라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곱삭곱삭, "예스!"만 하면 장땡일 줄 알았는데 아무 것도 모르니 스스로 죄인이 된 것 같았다. 새로운 문화와 환경에 동화되지 않고 일 잘 한다는 건 새빨간 거짓 말라는 것을 절실히 체험하였다. 하루는 아파트 앞에서 애를 업어 재우는데 "buffet" 라고 커다랗게 글을 쓴 냉동차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애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듯 웅얼웅얼 외우며 다시 집에 올라가서 기억을 더듬으며 종이에 적어 놓고 나중에 찾아보니 "부폐"였고, 손님이 손수 갖다먹는 간이 식사란 걸 알게 되었다.

애를 유모차에 태우고 한 가게를 지나는데 "내추럴"이라고 씌어 있었다. 종이장에 적어서 외래어 사전으로 "자연의, 천연의"란 것을 찾아보고야 마음 편했다. 또 한 번은 애를 데리고 좀 멀리 나갔는데 내가 그토록 정체를 알고 싶어 하던 나무에 "메타세쿼이아"라 적혀있고, 나무에 관한 해설이 있었다. 책가방 메고 지나가던 학생에게서 종이와 펜을 빌려 휘갈겨 베꼈다.

그렇게 생소한 모든 단어, 길거리 간판, 눈에 보이는 모든 외래어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 걸 찾느라고 사전을 하나하나 사다보니 세 권이 되었다. 모 교회에서 가르치는 주일 영어교육 프로그램에 밤이고 낮이고 빠지지 않고 참가하였다. 덕분에 1년 만에 일상에서 쓰이는 외래어를 거의 알게 되어 얼음에 박 밀듯이 소통하고 생활하게 되었다. (지금은 애 앞에서 "THE kids TIMES" 를 보는 흉내도 낸다.)

온갖 정성을 다하여 애들을 돌보았고, 한 달 두 번 휴식도 오갈 데가 없으니 돈과 상관없이 일을 하였다. 처음엔 시답지 않게 대하던 까탈스러운 주인들로부터 참으로 열심히 일하였기에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우리 동포 형제자매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주인의 도움과 허락으로 애를 재우고 난 다음 밤 10시부터 컴퓨터로 2400여 개의 외래어(사전에 근거하여)를 모아서 "동포들이 알아두면 편리한 외래어 단어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주인께 감사한 마음에 낮엔 팽이처럼 쉴 사이 없이 일하고, 거의 한 달 밤을 지새우고 나니 머리는 한 줌씩 빠지고, 얼굴은 새카맣게 되었지만 내 사랑하는 고국을 위하여 용기를 낼 수 있었고, 마칠 수 있었다.

물론 거기에 "전 세계 정보량의 95%가 국제어가 된 영어로 입력되었습니다. 영어가 통용되는 글로벌 시대입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애들도 일상에서 영어를 사용합니다. 조만간 우리들의 평균수명은 90세가 됩니다. 남은 몇 십 년을 남에게 무시당하는 "까막눈, 귀머거리"로 살고 싶지 않겠죠?! 알차게 살기 위하여 지금부터 외래어를 배우십시오! 시작이 절반입니다!"하고 호소하면서 많이 나누어 주었다.

공장에서 제품이 잘못 나오면 폐품으로 한 번에 끝내면 되고, 농사를 잘못하면 일 년을 망치면 되지만 자라나는 애들은 나라와 가정의 백년대계이다. 맞벌이 부부들은 어린애를 우리에게 맡기고 아침에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오기에 애들의 건강, 인성, 교육이 우리의 몫이 되었다. 가사도우미도는 막중한 책임을 요하는 직업이다. 프로패셔널로 일하려면 세상을 알고, 두루 섭렵해야 애들의 존중을 받을 수 있고, 잘 가르치고 잘 키울 수 있다.

나는 가정부 10년에 TV와 철저히 담을 쌓았고, 흔한 연속극 한 편 본 적이 없다. 완벽증과 결벽증에 가까운 벽들이 있어서 많은 시간 음식 장만에 청소하고 난 자투리 시간이라도 있으면 애들에게 책을 읽어 주어서 선생님 한 번 안 청하고 한글을 깨치게 하였다. 다섯 살 된 애가 "이모, 차 몰 줄 알아요?"하고 물을 때 "지금은 모르지만 이제 배울 거야! 약속한다!"고 한 애와의 약속대로, 재입국으로 중국에 있는 동안 운전면허증을 따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핸들을 잡고 싶어 자동차 운전전문학원에 가서 학원등록비를 물고 다시 일요일마다 도전하여 2종과 1종 보통면허를 취득하였다. 비록 교육비에만 한화 135만원이 들어갔지만 여러 가지로 많은 것을 배웠고, 훨씬 더 큰 가치를 얻은 시간이었다. 지금은 애와 학원으로 오가면서 차에 대한 온갖 이야기로 꽃을 피우며 보람을 느낀다.

처음엔 돌잡이 애의 아침부터 저녁까지 물, 우유, 쥬스 몇 cc, 김 몇 장, 밥, 죽, 등 얼마 먹이냐고 적어 놓게 하고, 채문하고 감시하던 데로부터 주인은 나를 소중한 식구로 인정을 하였다. 재입국으로 중국에 돌아갈 땐 전세집에서 살면서도 150만 원이란 큰돈을 쥐어 주셨다. "이모 없으면 우리 애는 어떡해?…누가 이모처럼 따뜻이 보살피며 글까지 가르칠 수가 있어요? 중국 갔다 빨리 와야 해요, 네?"하고 눈물 보이는 애 엄마를 보니 나도 눈물이 났다. 열심히 일하고 배우며, 서로 사랑하고 챙겨주며 살아가는 가운데서 우리에겐 가족 같은 끈끈한 정이 생겼다.

학교 다니는 애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숙제 좀 하렴!"이 아니고 시간만 나면 애 앞에서 닥치는 대로 읽고 쓰고 하면서 본을 보여 주는 것이다. 돌보는 애는 내가 밤마다 자격증을 따려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보고 꼭꼭 체크한다. 나는 그런 애가 기특하여 "국가공인 한자급수인증시험"성적표를 보여주었다. "야, 이모 짱이다! 4급이 100점, 3급도 94점을 맞았고, 그럼 2급도 90점 넘어 맞을 수 있다고요?"하고 내 목을 끌어안으면 나는 큰일이나 한 듯 어깨를 으쓱하며 "고것 맞고 뭐, 니가 더 짱이지!"하면서 얼굴에 뽀뽀를 해준다. 애가 키득거리며 "이모, 우린 가족이니까 이모도 또 1급시험 보고, 나처럼 최우수가 돼야 해요?"하고 다짐을 받는다. "옛-썰! 우린 같게 생긴 가족이니까 이모도 점수 잘 맞겠습니다!"하고 거수경례로 애와의 약속을 정중히 받아들인다.

나는 정말 극진한 모성애로 애들을 키웠다. 주체할 수 없는 엄마사랑에다 내가 건강하고 살집도 좋아서인지, 아니면 음식에 온갖 정성을 쏟아서인지 애들마다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자라서 병 한 번 하지 않았다. 애들의 안전에도 각별한 신경을 썼고, 끝없는 질문에도 기꺼이 즐겁게 대답하였다. 오늘까지도 함께 먹고, 자고, 가르치고, 학교 보내고, 마중하고…애와 함께 숨 쉬며, 예절바르고 씩씩하고 명랑한 애들로 키워 왔었다. 애의 장래가 곧 가족과 한국의 미래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단순한 '가정부'가 아닌, 내 사랑하는 고국의 가족, 그 엄마가 되어 가족 모두가 사회에서 의젓이 한 몫 다 할 수 있도록 온갖 정성을 다하여 일하였다.

이제는, 꾀죄죄한 옷을 입고 함경도 사투리를 쓰며 두려운 눈길로 대한민국 네거리를 살피던 어제 날의 내가 아니다. 사랑하는 고국과 고국가족은 내가 쏟은 정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나한테 안겨 주었다. 세련된 옷도 많이 사 입고 다니며, 연길에다가 집도 장만했다. '노인복지사' 자격증 같은, 이런 저런 자격증도 많이 땄고, 방송에도 글들이 나갔으며, 신문에 부지런히 글을 올리며 세상을 논하기도 한다.

그런 나를 두고 언니의 친구는 "네가 용이 됐구나!"한다. "아니, 멀었어요. 더 잘해야죠, 뭐!"하고 쑥스럽게 웃었지만, 나는 내 고국가족의 사랑 속에서 애와 함께 배우고, 일하며 사랑하며 사는 삶이 너무나 만족스럽고 자랑스럽다.

2010 년 11 월 26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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