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았는데 크게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들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특히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창룡문·장안문·화서문·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점이 화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화성은 쌓은 후 약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특히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되었는데,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원래의 수원은 지금보다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화산< 華山 > 아래가 그 중심이었으나, 조선 정조가 동왕 13년(1789) 그의 생부인 장헌세자 (속칭 사도세자< 思悼世子 >)의 원침< 園寢 >인 현륭원(후에 융릉으로 추증함)을 양주 배봉산에서 현 위치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그 아래에 있던 읍치와 민가들을 수원 팔달산 아래로 집단 이전시킴으로써 현재의 수원이 형성되었다. 정조는 부왕인 장조< 莊祖 >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천도를 계획하고, 정조 18년(1794)에 축성공사를 시작, 2년 뒤인 1796년에 준공되었다.

이 화성은 실학자로 불리는 유형원과 정약용의 성설< 城說 >을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아, 좌의정 채제공이성역을 주관하고 조심태 등이 전력하여 이룩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는 가장 과학적으로 구조물을 치밀하게 배치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한 면모를 갖춘 것이다. 특히, 성곽의 축조에 석재와 전 을 병용한 것 그리고 화살과 창검을 방어하는 구조뿐만이 아니라 총포를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 또한 용재를 규격화 하여 거중기 등의 기계장치를 활용한 점 등에서 우리나라 성곽사상 가장 특기할 일이다.

성곽의 전체 길이는 5.52km이며 거기에 동쪽으로 창룡문 서쪽으로 화서문, 남쪽으로 팔달문 북쪽으로 장안문 등 4대문을 내고 암문 4개, 수문 2개, 적대 4개, 공심돈 3개, 봉돈 1개, 포루 5개, 장대 2개, 각루 4개, 포루 5개 등의 다양한 구조물을 규모 있게 배치하였다. 그리고 팔달산 아래 에는 행궁을 지어 현륭원에 행차하는 임금이 일시 머물 수 있게 제반 시설을 갖추었던 것이다. 그런데 약 2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성곽이 퇴락하고 제반 구조물이 무너지기도 하였으며, 특히 6·25동란을 통해 문루가 파손되었다가 1975년부터 3년간 복원하였다. 이때에는 이미 시가지가 성터 일부를 점하고 있어서 팔달문에서 동서남루까지의 450m 구간과 방대한 행궁은 시가지의 형편상복원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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