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률박사의 퓨전 로드맵

[서울=동북 아신문]3박 4일의 일정 가운데 마지막 숙박지로 우리 일행이 묵었던 곳은 소하룡(小河龍)이라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연길시를 관통해서 흘러온 부르하통하(河)와 용정 벌을 지나온 해란강이 만나서 구비 돌아가는 합수(合水)목 마을이다. 백두산에서 돌아온 일행을 숙소의 주인 내외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 내외는 한국인들로 이곳에 와서 생활한지 벌써 15년이나 되는 분들이다.

2층으로 지어진 이 집은 우리 전통대로 소나무로 골격을 잡은 다음 황토를 빚어 담을 올린 한옥으로 기와지붕 위에 장독을 얹어 토속적이면서도 독특한 멋을 자아낸다. 또 황토의 은은한 빛깔과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실내복도 위로는 묵화 그림으로 가지런히 도배를 한 천정이 품격을 느끼게 했고 그 아래로 정갈하게 뼈대를 드러낸 소나무 서까래에는 옥수수, 조, 조롱박들이 매달려 한옥의 정취를 한껏 자아낸다. 잠자리는 물론 우리 전통의 온돌방이 여러 개나 되어 단체 숙박이나 연수팀들도 너끈히 묵어갈 수 있을 정도다.

저녁 식탁은 정갈하면서도 먹음직스런 우리 음식이 가득하다. 술은 주인내외가 직접 담은 동동주 막걸리를 내놓아 그 걸로 우선 목을 추겼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아 나중엔 맥주와 고량주를 주로 마셨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가무가 뒤따랐다. 고와 박사의 딸 애리가 춤으로 우리들을 마냥 즐겁게 해 주었는데 그중에 나의 심금을 울린 것은 몽골민요였다.

우런 박사, 고와 박사, 진영충 박사가 번갈아 불러준 몽골민요는 그 음색이 듣는 이로 하여금 한(恨)을 느끼게 했고, 잃어버린 역사의 슬픔을 되새기게 하는 것 같았다. 가사 또한 순박하고 애절했다. 이 노래는 고와 박사가 불러 주었는데 가사 내용이 너무 좋아 여기 한수 적어본다.

아름다운 초원은 나의 집

1.
美麗的草原我的家 아름다운 초원은 나의 집
風吹綠草遍地花 바람은 초록 풀 위에 불고 대지는 꽃동산
彩碟紛飛百鳥唱,다채로운 나비가 날고 새들은 노래 부르누나
一彎碧水映晚霞,푸른 물결에 저녁 노을 비치고
駿馬好似 踩雲朵,준마는 구름을 타듯 달린다.
牛羊好似珍珠灑,소와 양들은 진주를 뿌린 듯 한데
啊哈呵, 아하아
牧羊姑娘放聲唱,목양처녀는 소리 높여 노래 부르고
愉快的歌聲滿天涯, 유쾌한 그 노래소리 하늘가에 울려퍼지네
牧羊姑娘放聲唱, 목양처녀는 소리 높여 노래부르고
愉快的歌聲滿天涯 유쾌한 그 노래소리 하늘가에 울려퍼지네

2.
美麗的草原我的家,아름다운 초원은 나의 집
水清草美我愛他,물 맑고 잔디 아름다운 그 곳을 나는 사랑하네
草原就象綠色的海,초록은 마치 녹색 바다같고
氈包就象白蓮花,몽골 집은 백련꽃 같이 희어라
牧民描繪幸福景,목민들은 행복한 정경을 그리며
春光萬里美如畫,봄빛 가득한 세상은 그림같이 아름답구나
啊哈呵,아하아
牧羊姑娘放聲唱,목양 처녀는 소리높여 노래부르고
愉快的歌聲滿天涯,유쾌한 그 노래소리 하늘가에 울려퍼지네
牧羊姑娘放聲唱,목양 처녀는 소리높여 노래부르고
愉快的歌聲滿天涯 유쾌한 그 노래소리 하늘가에 울려퍼지네

정겨운 노랫가락을 들으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벽에 기대앉아 여러 가지 생각을 나누다가 내년도 민박회 모임을 어디에서 할 것인지 정하기로 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동안 내몽고와 조선족 사회를 둘러보았으니, 이제 내년에는 신장지구 우루무치와 뚜루판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특히 ‘서유기’에 나오는 화염산이 있는 뚜루판의 고성(古城)에 가서 삼장법사를 만나 한판 종교적인 영적 싸움을 벌려 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일행들이 떠나갈듯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농담인 줄 알았지만 내 딴에 오래전부터 해오던 생각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내가 이곳 연길에 중국 최초의 기독실업인회(CBMC)를 창립한 때는 1994년 8월 1일이었다. 그 후 올해까지 만14년이 경과하는 동안 중국 전역에 한국인 CBMC 40여곳, 중국한족 CBMC 20여곳, 조선족 CBMC 10여 곳으로 확대 발전했다. 또한 2000년도에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쉬켄트에 한국인 CBMC를, 카자스탄 알마티에 고려인 CBMC를 창립했으며, 그 다음해인 2001년도에 터키 이스탄불에 한국 기업인과 터키인들로 구성된 기독실업인회를 창립하기로 되었다. 그때 서울에서 KAL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항공기 좌석 뒤 포켓에 있는 항공잡지를 꺼내들고 평소의 습관대로 세계지도를 펼쳤다.

중국을 볼 때 베이징을 기준으로 동쪽 아니면 남쪽만 바라보는 건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습관인 것 같다. 베이징 북쪽 어디쯤 몽골이 있고, 그 너머 시베리아 땅을 지나가면 멀리 유럽으로 연결되는 길이 있을 것이라는 정도의 막연한 생각만 하고는 그냥 책을 덮어 버리는게 십상이다. 나도 과거엔 그랬다. 그런데 그 날 비행기 안에서 본 한 장의 세계지도는 마치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 여태껏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베이징 서쪽으로 나의 시선을 이끌어갔다.
그리고 그 서쪽으로 난 길은 이전에 여러번 다녀온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연속성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길인데, 그날 항공잡지의 지도를 보고나서야 비로소 한 눈에 그 모든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세계역사의 서진화(西進化)현상을 이끌어가는 하나님의 섭리를 재발견하는 각성이었다.

나는 중국의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CBMC사역을 확장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 왔으나, 그러한 행적이 하나의 ‘예정된 로드 맵’을 그리고 있었던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냥 그렇게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면서 한국에서 중국에 진출한 기업인들을 만나 컨설팅을 하면서 그들에게 선량하고 유능한 중국인들을 소개해 주기도하고, 또한 중국에서 지켜야 할 기독실업인으로서의 삶의 덕목을 나눈 것에 불과한데, 그 길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는 삶의 궤적을 그려왔던게 틀림없었다.
일례로, 2000년 여름,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의 청년들을 중국 연변과기대에 유학시킬 목적으로 찾아갔던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에서 우연한 기회로 한인 CBMC를 창립하게 되었으며, 또한 그 연줄로 인접국가인 카작스탄 알마티에서도 고려인 CBMC를 창립하게 되었고, 나아가 그것이 기반이 되어 터키 이스탄불에까지 CBMC를 창립하는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던가!

여러분들, 세계지도를 펴 놓고 한번 손으로 짚어 보시라!
북위40도선의 아시아대륙 맨 동쪽 끝에 있는 도시가 조선족자치주의 수도가 있는 연길이다. 그리고 나서 시선을 왼쪽으로, 즉 서쪽으로 옮기면 심양과 북경이 보이고 다시 서쪽으로 가면 서안과 우루무치가 나온다. 그리고 그 서쪽으로 (천산산맥을 넘어) 알마티, 타쉬켄트가 나오고 거기서 다시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그곳에 아시아대륙 맨 서쪽 끝에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이 나온다. 이것이 바로 1994년 8월 1일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내 손을 붙잡고 차례대로 CBMC 창립을 통해 이끌어 가신 실크로드 미션의 길이다. 이것은 곧 세계역사의 서진화 현상과 궤를 같이 하는 흐름이었다.

2001년 9월, 터키 이스탄불 CBMC 창립을 지원하기 위해 타고 갔던 비행기 안에서 깨달은 ‘진실’이 바로 이것이다. 그 서진화 역사의 흐름을 깨닫는 순간, 나는 「환단고기」란 책에 수록되어 있었던, 잃어버린 역사의 고토 회복을 예표하는 길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한민족 역사의 새로운 부흥을 감지하는 듯한 희열이 가슴에 차올랐다.
그때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어떤 힘에 눌려 고꾸라지듯 비행기 좌석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뜨거운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벅찬 감격이 온몸과 정신을 떨리게 했다.
“아, 하나님. 이 길이 당신께서 예비해주신 신 실크로드 사역의 길이었군요. 중국을 통해 중국을 넘어서는 새로운 역사의 진로가 이 길을 통해서 열려 지겠군요.
이 길을 앞장서 개척하고 이끌어 나갈 선구자들이 바로 한민족 후예인 우리들 자신이군요. 중국에 있는 조선족들과 함께 한국기독실업인들이 짊어지고 가야 할 사명이 바로 여기에 있군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저희들에게 믿음의 능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담대한 희망의 새 길을 열어 주시옵소서.”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그리고 기도한대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이 생기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와 같은 사역의 과정에 특별한 인연을 맺은 곳이 바로 우루무치다. 이름만 들으면 생소하겠지만 한국인이라면 그야말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손오공이 종횡무진 뛰놀던 땅, 그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진리를 깨우치게 했던 삼장법사의 고향인 천산이 있는 <서유기의 무대>가 바로 우루무치다.

우루무치는 중국의 서북쪽, 중앙아시아와 맞닿아 있는 신장 지구에 있는 고대도시다. 북쪽으로는 눈 덮힌 보거타봉(博格達峰) 5,445m을 병풍처럼 두르고 서쪽으로는 염호를 사이에 둔 해발 800미터 높이의 오아시스에 위치해있다. 200만명 조금 넘는 이 지역 인구의 약 20%가 소수민족이다. 위구르족이 가장 많고 그 외에 후이족, 카자흐족, 만주족, 시버족, 몽골족, 키르기스족, 타지크족, 타타르족, 우즈벡족, 러시아인, 다우르족 등 49개의 소수민족이 함께 살고 있다. 중국전역에 사는 소수 민족이 55개이니 인종상으로 보면 중국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다.

아마도 이렇게 많은 소수민족이 여기에 모여 살게 된 것은 이 지역이 중세 중국과 유럽을 잇는 실크로드의 통로였기 때문일 것이다. 우루무치의 메마른 광야 한가운데 사시사철 만년설을 쓴 천산이 우뚝 솟아 있다. 그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지하수로를 통해 끌어내려 농사를 짓고 삶터를 일군 사람들의 주류(主流)가 바로 우루무치의 위구르족이다.

그런데 우루무치의 뚜루판 고성(古城)을 관광하고 돌아가는 길에 아내가, 자신에게 (현관문에 매다는) 풍물을 선사했던 위구르 소녀 한명을 입양하고 싶어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지만 나는 아내의 마음을 받아들여 그 소녀를 입양하고 이름을 한나로 고쳐주었다. 한나는 딸이건 아들이건 장자는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위구르 민족의 전통에 따라 중학교 도중에 공부를 그만두고 가계를 책임지기 위해 관광지의 풍물장사가 된 것이었다. 우리는 우루무치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 한분을 선임하여, 뚜루판 고성(古城)에 있는 한나의 집을 내왕하게 하면서 한나로 하여금 풍물장사 일을 그만두게 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하도록 권고하는 한편 한나의 가정을 도와주기로 했다. 학교로 돌아간 한나는 지금 고등학교 1학년 2학기를 맞고 있다. 눈이 맑고 웃을 때 너무나 천진스러워 보이던 한나는 이제 우리 부부가 매일같이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위구르족 선교 비전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지금 울란바토르의 몽골국제대학(MIU) 부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이용규 박사(하버드대, 역사학)에 의하면, 원래 ‘위구르’란 말은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란 뜻이라고 한다. 중앙아시아 유목민에게 전파된 초기 기독교의 대종(大宗)을 흔히 네스토리안파(Nestorianism) 교회라고 한다. AD 5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기까지 중앙아시아를 석권했던 투르키스탄, 위구르, 몽골, 티무르 등 왕조역사의 부침과 함께 유목민에게 나타났던 기독교 역사는 천년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부흥기와 침체기를 반복하면서 중앙아시아와 중국 북부지역에 널리 전파되었다. 실크로드가 그 중심 교통로였으며, 뚜루판은 당시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중간 교통요충지였다.

AD 15세기 이후 중동지역 대상(隊商)들에 의한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쇠락한 기독교세력을 대체하여 이슬람권 상업 종교 세력이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그 후 중앙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슬람교를 신봉하게 되면서 지금과 같은 ‘스탄’제국을 형성하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소비에트 연방에 참여한 중앙아시아 5개국(CIS)국가 중 카작스탄과 중국의 국경문제가 대두되면서 천산산맥 일대를 중심으로 살고 있던 위구르족들이 카작스탄과 중국 신장지역으로 분할됨에 따라 국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국가체제 아래 최하위급 소수민족 신분으로 전락해 있는 실정이다.

내가 주목하는 점은 바로 이점이다. 조선족사회는 한반도라는 모국이 있으면서 중국에 이주한 자생적인 소수민족 집단이지만, 위구르는 중앙아시아에 개입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해관계와 침탈에 의해 분리된 비운의 역사를 갖고 있다. 자원 확보와 영토 확장을 위해 각축전을 벌렸던 주변 열강들의 「그레이트 게임(저자 피터 홉커크)」의 희생물이 되었던 이들과 접하면서 폐쇄적인 민족심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불행의식을 극복케하고,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그들에게 자립할 수 있는 기초적인 생산수단을 가르쳐 주는 일은 CBMC 사역을 통해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003년 알마티(카자스탄)와 우루무치(중국) 양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선교사들과 기독실업인들을 연계하여 BMF(Business Mission Fund)라는 소액융자대출 프로젝트를 추진함으로서 위구르족들에게 복음전도와 함께 생산성을 이끌어내는 일을 돕기 위해 주력해왔던 터였다.

그런 가운데 한나를 입양하게 되었으니 이는 원래 기독교인이었던 위구르족과의 관계를 복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뜻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한나는 너무나 소중한 영적 선물과 같은 존재다.

그와 함께 또 한가지 특별한 의미는 내가 한나와의 만남을 통해 점차 중앙아시아에서 위구르족의 역할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서는 중국과 카작스탄에 흩어져 있는 위구르족들이 과거역사에 매이지 않고, 주어진 현실여건 안에서 중국과 카작스탄 사이의 가교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조선족사회가 중국과 한국, 중국과 북한 사이에서 중간매체 역할을 잘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희망과 전략으로 CBMC 실크로드 사역을 통해 위구르족의 미래를 위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나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그래서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나의 집을 거점으로 주변 위구르족 농가들이 조합을 구성하여 건포도생산을 위한 자립생활공동체를 만들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원래 그 지역은 사막지대라서 일교차가 심하고 여름에는 영상 45도, 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 오르내리는 등 연중 기온편차가 극심한 지방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은 자고로 세계에서 당도가 제일 높은 포도생산지로 유명하다.

지금도 대부분의 생산량을 유럽으로 출하하고 있다고 하는데, 언젠가는 그곳이 프랑스에 있는 ‘때제 수도원’과 같은 신앙공동체로 발전 할 것을 기대하면서 그 기초를 마련해주고 싶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때 나는 그곳을 「화염산 포도수도원」이라 이름 짓고,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와 고성(古城)에서 한판의 일전을 벌려 볼 생각이다. 이 영적 싸움은 누가 누구를 이기고자 하는 싸움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믿음을 그에게 전달해서 고행자의 약점을 보완하고 갈등을 해소시켜 줌으로서 마침내 그 자신이 스스로 윤회의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도와 줄 작정이다.

이는 희생적인 사랑의 힘이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고, 이런 사랑을 위해서는 내 생명을 바쳐도 좋다는 각오가 되어있어야 가능한 싸움이다. 그런 영적 싸움을 한번 걸어보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내년에 ‘민박회’ 일행들과 함께 뚜루판을 찾아가고 싶은 나의 궁극적인 이유였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내 마음은 벌써 뚜루판의 화염산 위를 힘차게 나르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천산산맥과 파미르 고원을 넘어, Back To Jerusalem으로 나아가는 순례의 길에 ‘민박회’ 일행들도 동역자로 함께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연길의 ‘민박회’ 일행들은 나의 제안을 모두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다. 다만 내년 8월 초에 일단 북경에서 만나 그동안 뵙지 못했던 학교(중앙민족대) 스승 교수님들을 모시고 세미나를 가진 후, 다같이 우루무치로 갔다가 뚜루판과 서안을 거쳐 각자 임지로 돌아가는 코스를 결의했다.

그리고 난 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서영 박사가 지난해 우리 일행들이 다녀왔던 징기스칸 유적지 주변 사막지대에 한국 KAL 직원들과 시민단체들이 황사방지용 녹화사업을 많이 지원해줘서 큰 진전을 보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우리들의 대화는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전략으로 번져 나갔고, 중국 내몽골 지역의 초원을 지키기 위한 한 방안으로 태양광발전과 풍력발전의 필요성이 강조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야기는 급기야 유목민의 기질과 성향, 대 몽골제국의 성립이 가능했던 이유 등에 대해서 언급하기 시작했다.

나는 ‘민박회’에 몽골족 출신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중국 원나라의 역참제와 글로벌 네트워크 기능을 비교하는 쪽으로 대화를 풀어 나갔다. 결국 이 시대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해보라면, 신 노마드(유목민)운동을 기초로 하는 가치경영에 승패가 달려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의 IT기술과 인터넷강국이란 점이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 가는 첨단능력이 될 것이라는 점을 설명한 후에, 나는 과거 750여년전 대 몽골제국 쿠빌라이 시대에 마르크 폴로가 썼던 「동방견문록」이 같은 베니스 동향인 컬럼버스에게 꿈을 심어 주어 마침내 미주 신대륙을 발견 하는 계기를 이루었듯이, 징기스칸의 후예들인 ‘민박회’ 몽골족 여러분들이 장차「서방견문록」을 쓰게 된다면, 이 ‘민박회’가 신 노마드의 꿈과 용기를 회복시켜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얘기를 잊지 말고 기록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나는 다시한번 건배 제창을 하면서 이렇게 강조했다.

"이 시대는 탈(脫) 중심화를 지향하는 지식정보 시대입니다. 이제 모든 개인들이 네트워크상(上)의 중심 역참이 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우리 민박회의 소수민족들처럼 변방에 위치해 있는것이 오히려 외부와의 다양한 접촉을 통해 복합적인 능력을 갖출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갖게 될 것입니다. 중심에 갇혀있는 큰 자들보다 변방에 있는 작은 자들이 더욱 민첩하게 세계의 변화에 직면하고 소통하는 감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 민박회가 이 시대의 흐름을 변화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할 수 있다고 믿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서 이웃을 변화시키고, 사회와 국가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궁극적으로 이 시대의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촉진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 다함께 건배 합시다. 내가 당신하면 멋져라고 건배하세요. 이 말은 당당하게 살자. 신나게 살자. 멋지게 살자. 그리고 가끔은 져주면서 살자는 뜻입니다. 우리 함께 건배합시다. 당신! 멋져!"

이것이 내가 민박회 소수민족 엘리트들에게 거는 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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