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조선족 김춘식

[서울=동북아신문] 지금은 중국에서도 애완견을 많이 기르고 있지만 개에게 물려도 광견병 왁친을 사지 못할까 걱정하는 사람이 없다. 병원, 위생방역소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5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이 아니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는 왁친을 사려고 동분서주했던 지난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때는 1987년 여름이였다. 그때 나는 중국 흑룡강성 연수현 중화진에 살았는데 겨우 다섯살난 아들애가 하도 강아지를 기르자고 졸라 친구 집에서 겨우 젖을 뗀 강아지를 안아왔다. 물론 흔히들 말하는 똥개였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어느 하루 저녁, 마당에서 놀던 애가 쿨적이며 들어왔다.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똥을 누다 그만 강아지에게 엉덩이를 물렸다고 했다. 그래서 급급히 바지를 벗기고 보니 과연 이빨자국이 두 개 있었다. 보나마나 장난이 심한 아들놈이 똥을 누면서도 강아지를 괴롭힌 것이 분명했다. 

   우리 부부는 애 상처를 비누물로 씻어주기는 했지만 섬찍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우리가 사는 이 진에서도 개한테 물려 광견병에 전염된 사례가 있어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진병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애 상처를 보던 의사가 지금 진에서는 왁친을 구할 수 없다고 했다. 이튿날로 현 위생방역소나 현병원에 가보라는 것이었다. 상처를 소독하고 소염제 주사를 한 대 놔주는 것이 전부였다. 

  애가 걱정돼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나는 이른 아침에 버스를 타고 현성으로 나갔다. 그런데 인민병원에도, 현위생방역소에도 왁친이 없다고 했다. 우리를 맞은 현위생방역소 일군은 전 현을 다 뒤져도 왁친을 찾지 못할 것이니 할빈시에 가보는 것이 좋을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주소 몇 개를 적어주었다. 

   그길로 나는 애를 업고 할빈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통해 3시간이면 족하지만 그때는 버스, 기차를 갈아타야 하기에 다섯시간도 더 걸려야 했다. 오후 세시가 넘어서야 할빈에 도착한 나는 시간이 급한지라 택시를 잡아타고 적어준 주소를 찾아갔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약이 없다고 했다. 

  네 번째로 찾아간 곳은 어느 연구소였다. 그런데 연구소에도 없다고 했다. 나를 맞아준 의사는 광견병 왁친을 생산하는 공장이 길림성의 장춘시와  안휘성의 합비시 두곳 밖에 없으니 애를 데리고 직접 장춘의 모 연구소를 찾으라고 했다. 산해관 이북, 즉 관외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개에게 물리면 모두 장춘에 가니 그곳에 가면 꼭 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내가 하도 초조해하니 의사는 개에게 물려 48시간 내에 주사를 맞으면 되니 너무 걱정말라고 위로했다. 그러면서 장춘 모 연구소의 상세한 주소를 적어줬다. 생면부지인 나에게 그처럼 관심을 베풀어주는 의사가 너무 고마워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였다.

   장춘역에 도착하니 새벽 세시였다. 마침 광장에 택시들이 있어 모 연구소를 아냐고 물었더니 광견병 주사를 맞으러 왔냐고, 방금 전에도 손님을 실어다 주었으니 걱정 말고 어서 타라고 했다. 지금쯤이면 주사를 맞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을 거니 빨리 가야 한다고 했다. 

   기차역에서 십분 거리밖에 안되는 가까운 곳이였지만 정작 도착하고 보니 이미 수백명이 두 줄로 늘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알고보니 제일 앞에 선 사람들은 이미 밤 열두시부터 대기 중이라고 했다. 

   오전 8시가 돼서야 환자들을 맞기 시작하는데 앞에 선 사람들이 하도 많아 좀처럼 우리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날 나는 애를 데리고 꼬박 열두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10여시간을 기다린다는 것은 참으로 고역이었다. 8월의 땡볕도 무서웠지만 애를 건사하기가 더욱 힘들었다. 장난이 심한 아들애는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내가 잠시만 눈길을 팔아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면 뒷사람에게 자리를 부탁하고는 여기저기로 찾아다녀야 했다. 그런 아들놈이 하도 싫어 한바탕 욕을 퍼부었더니 어린놈이 울먹거렸다. 순간 아픈 놈에게 너무 모질게 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품에 안아줬더니 아들놈은 서러웠던지 엉엉 소리 내 울었다. 그런 아들 놈이 불쌍해 나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점심때가 되자 애는 또 잠이 와서 칭얼거렸다. 뒤에 서있던 사람들이 고맙게도 자기네가 자리를 지켜주겠으니 애를 가로수 밑에 데리고 가서 좀 재우라고 했다. 나는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바로 근처에 있는 장사군에게서 양산을 사들고는 그늘을 찾아 앉았다. 내 옷을 펴고 자리에 눕히자 아들애는 곧바로 잠이 들었다. 고마운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나는 끝내 12시간을 견지해 오후 세시반이 돼 주사를 맞힐 수 있었다. 10여원밖에 안되는 눅은 약이었지만 인당 한통으로 통제돼 있었다.

   애에게 광견병왁친주사를 맞히기 위해 옹근 사흘동안 천여리길을 달렸던 그때 그 일이 지금도 내 눈앞에 선이 떠오른다. 아들 위해 마음 졸이는 나를 위안하고 도움의 손길을 주던 의사, 간호사들이 지금도 고맙다.
   왁친 주사를 맞으려고 하도 혼났기에 나는 집으로 오는 길로 강아지를 남에게 줘버렸다. 아들애도 그 후로는 감히 강아지를 기르겠다고 조르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20년이 지나 또다시 강아지를 기르게 될 줄이야. 대학을 졸업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아들애가 친구네 집에서 애완견을 주어온 것이었다. 퍽 내키는 것은 아니였지만 이미 성인이 된 아들애를 이래라 저래라 꾸짖는 것도 아니다 싶어 묵인하고 말았다. 그리고 몇 달 기르다보니 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였다. 

   왁친 때문에 고생한 나지만 이제와서는 애완견을 기르면서도 별다른 걱정이 없다. 애완견에게 예방주사를 놓은 것도 있고 또 요즘세월에는 왁친을 얼마든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발전하고 의학이 발달하니 생활이 편리해진 것도 사실이다. 왁친 사러 천리길을 오가는 일이 중국에서도 더 이상 재현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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