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얀 누에꼬치에서 가늘고 고운 명주실이 뽑혀 나오듯이 거창한 멜로디 속에서 완만하면서도 정서적인 멜로디가 뽑혀 나온다. 온 마루방에 엷고 투명한 기운이 고요 속에 즐거움을 안고 흐른다.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마단조 "신세계로부터”의 선율이 신비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 속에 네 살짜리 아이가 앉아 쬐고만 손에 색색의 크레용을 바꿔가면서 열심히 그림을 그린다.
명작을 만들어 낸듯한 흡족한 기분에 사로잡혀 테이블에 앉아 만두를 빚으면서 이 풍경을 감상하는 선희는 만면에 평화롭고 행복한 기색이 역력하다.
매일 반복 되는 일상이다.
오후 세시쯤 되어 서연이를 어린이 집에서 데리고 오면 습관처럼 서연이는 먼저 클래식이 흐르는 마루방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선희는 그 사이 식구들의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이모, 서연이 이모랑 엄마랑 다 그렸다.>>
<<어디 보자. 우리 서연이 그린 이모랑 엄마랑을 >>
<<아이구 이모가 이렇게 예뻐>>
<<이모 제일 예뻐 그 다음 엄마…>>
<<그래. 아이구 내 강아지.>>선희는 서연이를 안고 엉덩이를 토닥거리면서 뽀뽀를 해준다. 서연이도 이모에게 뽀뽀를 한다.
<<이제 서연이 오빠랑 언니랑 그릴거지>>
<<아니야 아빠 그릴 거야>>
<<맞다ㅡ 먼저 아빠를 그려야지>>
<<이모 같이 그리자 응~>>
<<이모는 서연이가 잘 먹는 만두 해줄 건데>>
<<으응~>>인젠 싫증이 났다고 제법 작은 몸을 귀엽게 흔들어댄다.
<<그럼 이모랑 같이 놀자 서연이도 요리 하구 이모도 요리하구>>
서연이는 신이 나서 방으로 뛰어간다. “뽀로로” 주방놀이 장난감을 안고 나온다.
<<서연이는 여기에서 요리해서 음식 차려놓고 이모는 주방에서 요리해서 음식 차려놓고 엄마랑 아빠랑 오시면 식사하는거야>>
엄마랑 아빠랑 오신다는 말에 인제야 며칠 보지 못했던 엄마 아빠, 오빠 언니가 생각났는지 꼬치꼬치 물어본다.
아이가 묻는 말에 일일이 대답하면서 선희는 주방에서 일손을 다그친다.
<<엄마가 서연이에게 예쁜 옷이랑 고운 인형이랑 사준다고 했지. 조금만 기다려 보자>>
<<이모, 우리 엄마 아빠 마중 가자>>서연이는 제법 조바심이 난 듯 하다. .
<<응 그래 먼저 서연이 엄마에게 어디까지 왔냐 전화 한번 해 봐>>선희는 아이를 달랜다.
서연이는 송수화기를 들고 제법 엄마의 핸드폰번호를 외우면서 하나하나 다이얼을 누른다.
<<엄마 어디야>>
<<응 서연아 엄마 지금 집에 거의 가고 있어. 이모랑 잘 있었어>>
<<응 엄마 빨리 와. 나 이모랑 맛있는 만두 해놓고 기다릴게>>
해외여행을 갔던 식구들이 곧 도착 할 시간이다.


(2)


여름 휴가를 타서 승우와 나연이를 데리고 남편과 같이 해외여행을 다녀온 수진이는 저녁식사가 끝나자 여장(旅裝)을 푼다.
<<이모, 나 이모에게 어떤 선물 사왔는지 맞춰봐>> 열살 짜리 승우가 천진한 얼굴에 함박꽃웃음을 물고 선희 앞으로 다가온다.
<<뭘까?>> 선희는 제법 천진한 마음인양 기대하듯이 묻는다. 승우는 예쁜 카드를 두 손으로 넘겨준다.
<<곰 인형 카드구나>> 세트로 된 우리의 전통의상을 입은 귀여운 곰 인형 카드다.
<<이모에게 왜 이걸 선물하는지 알아?>>정찬 눈길로 아이를 바라보면서 선희는 머리를 절레절레 젓는다.
<<이모는 옛날 노래를 좋아하니깐 꼭 전통을 좋아 할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전통의상을 한 인형을 골랐어>>제법 어른스럽게 말하는 폼도 놀랍지만 자신의 취향까지 알고 마음을 읽어준 어린애가 너무 대견스러워 선희는 저도 모르게 승우를 품 안에 꼭 껴안는다.
<<이건 이모에게 드리는 약이 얘요>> 수진이가 포장한 곽을 두 손으로 공손히 내민다.
<<뭔 약인데요?>>
<<이모가 지난번 다리가 아프다고 하시기에 이번엔 약을 사왔어요. 관절염과 연골을 튼튼히 하는 "조인트헬스"인데요 함량이 국산의 몇 배가 되여 약효가 아주 좋대요. 일년은 잘 드실 수 있는 분량이얘요.>>
<<아니, 제법 값지겠는데요. 뭐 번번히 이렇게 염려하나요>>
<<당연하죠. 우린 한집 식구잖아요>>평소 말수적은 승우 아빠도 한 수 뜬다.
아, 그래 우린 한집 식구지. 주인들이 언제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선희를 한집식구라면서 빠짐없이 챙겨주니 실로 눈물 겹도록 고맙기만 하다.
식구, 한집에서 한솥밥을 먹으면서 타박녀의 설음을 안고 가정부라는 이름으로 주인과의 격차를 줄이고 <<식구>>로 되기까지 선희는 얼마나 높은 산을 기여 오르고 얼마나 깊은 물을 헤엄 쳐 왔던가?


(3)


타박타박 타박여야 너 어디로 울며 가니
우리엄마 찾아서 젖 먹으로 떠났단다
산이 높아서 못 간단다 물이 깊어서 못 간단다
산이 높으면 기여 가지 물이 깊으면 헤엄 치지

선희가 태여 난지 두 달밖에 안된 셋째 서연이를 품에 안고 남몰래 설음을 토하면서 자장가처럼 전래동요 <<타박녀>>를 부르기 시작한 그 날이 사년전이였다. 직업소개소의 소개로 여섯 살짜리와 네 살짜리, 그리고 갓난아기까지 아이 셋인 집에 가정부로 들어온 첫 날 수진이는 선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일일이 요구사항까지 가르쳐주고는 서연이를 선희의 품에 안겨주었다. 모국에 온지 한 달도 안 된 선희는 영어가 섞인 수진이의 말을 많이 알아듣지 못한 상태로 아기를 받아 안는다.
제일 처음으로 하는 일이 아기를 품에 안고 우유병을 잡고 우유꼭지를 아기 입에 물리는 일이었다. 얼마만인가? 여자의 본능일가? 하나도 서투르지 않다.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야릇한 감정! 여자가 아니고서는 느껴볼 수 없는 모성이 선희의 가슴속에 샘물처럼 고인다. 한결 젊어 지는듯한 기분으로 얼굴에 홍조까지 비끼는 듯 하다. 옛날 같으면 벌써 할머니가 되였을 불혹도 막바지로 치달아 오르는 나이인데 아기 엄마로 된듯한 기분이 선희를 기이아의 부드럽고 너그럽고 인자한 원초적인 자연으로 돌려보냈다.
아기의 천사 같은 눈빛을 따라 선희의 눈빛이 반짝인다. 아기들은 모두가 천사다. 천사를 키우는 마음도 천사의 마음이어야 하리. 천사의 마음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돈을 벌려고 선택한 길이지만 돈을 떠나서 느껴본 감미로운 생각은 거친 삶의 현장에 선희를 아름다운 감수로 끌어들인다.
허나 아름다운 생각은 예술 같지만 현실은 사악하고 슬펐다. 며칠 안 되여서부터 부딪치는 곤혹들이 선희에게 비바람과 같이 우박까지 들씌운다.
<<이모, 우유병을 들고 우유를 타면 안돼요.>>
<<이모, 약을 그렇게 타면 비례가 안 맞아요.>>,
<<이모, 그린플라스틱박스의 블록을 레고와 섞어놓으면 어떡해요>>
<<애들이 먹는 곰국에는 소금을 넣지 말라 했잖아요. 소금은 위궤양을 초래한다고 해서 반찬을 싱겁게 하라는거얘요>>
<<…….>> 수시로 안 된다는 엄마의 짜증 섞인 불만이었다.
<<어, 이것 뭐야? 이런걸 어떻게 먹지?>>,
<<이모, 우린 기름이 둥둥 뜨거나 기름이 질벅한 건 질색이거든요. 기름에 볶아 하는 건 절대 하지 마세요.>>,
<<너무 짜. 도무지 못 먹겠어>>,
<<아니, 너무 느끼해>>
<<…….>>
가끔씩 식탁에 마주앉는 승우 아빠의 빠짐없는 반찬투정이었다.
<<이모 싫어…>>,
<<이모 미워…>>,
<<이모 집에 가>>
<<…….>>
말투까지 이상한 정들지 않은 낯선 이모에 대한 어린것들의 거부감이었다. 하루 이틀 지나고 한달 두 달이 지나도 날이 갈수록 더욱 힘들어 간다. 모국생활에 적응 못 한 선희는 어차피 순탄하게 지나칠 수 없는 가시밭길이라고 생각하고 감수해야 했다.
어느 날, 가끔씩 다녀가는 승우 할머니가 와서 주방의 여기저기를 둘러보시더니 냉장고 문을 여는 것이었다. 야채 함을 들여다 보던 할머니는 신경질적으로 야채를 와락와락 꺼내 음식쓰레기 백에 집어넣으면서 훈계하신다.
<<이모야, 이거 뭐야 ~ 무슨 살림을 이렇게 해~ 아무리 제 살림이 아니라고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
사실은 처음 보는 이름 모를 야채와 나물들인지라 반찬 할 줄 몰라서 방치해 둔 것이 시들다 못해 썩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스테이크소스랑 드레싱이랑 케찹이랑 유통기한이 지난 거면 버려야지 냉장고 자리 차지하고 냉장보관 하느라 전기 값 나가고 … 에이그 쯧 즛…>>뭐가 뭔지 어디에 어떻게 쓰는 건지 알 수 없는 병 속에 담겨져 있는 것들은 주인들이 필요에 따라 쓰는 양념이겠지 하고 생각만 하고 이름부터 낯 설은 것들에 대해 물어도 보지 않았거니와 들여다보지도 않았으니 더욱 손이 닿을 리 만무했다.
<<아이구, 냉동실 생선은 어느 옛날에 보낸 것인데 지금도 고대로냐? 아무리 냉동상태라 해도 오래 두면 못 먹어~?>>바다 멀리에서 바다 구경 한 번 못한 선희에게 있어서는 생선이란 갈치와 명태밖에 모르다 나니 참서대요 도미요 우럭이요 광어요 하는 등등은 외계세상의 것으로만 여겨졌다.
<<아이구, 속 터져~ 이 따위로 하고도 월급은 꼭꼭 챙기겠지. 이래서 우린 중국교포들을 꺼린단 말이야~>>
그 언제면 타박녀의 신세를 모면할가? 엄마 찾아 타박타박 숨 가삐 오르는 타박녀의 앞에는 이중삼중의 정신적으로 받는 타박(打撲)이 끝이 없었다. 돈 때문에 선택한 길이지만 선희는 정을 갈망했고 이해를 더욱 갈구했다. 다행이 서연이가 선희에게는 판도라 항아리의 마지막 열어야 할 뚜껑이었다. 젖먹이는 순간만은 하늘 끝으로 드리우는 파란하늘이 보이는듯했다.
이십오 년 전 선희가 시집 갈 때 "시집 가면 귀머거리 삼 년 벙어리 삼 년"으로 살아야 한다고 인내를 가르쳐주신 할머니의 훈육도 한국생활에서는 전부의 도움은 안 되었다. 여우처럼 눈치 빠르게 어깨너머로 빨리 배우면서 센스 빠른 생활의 프로가 되여야 했다. 선희는 주말마다 승우 할머니네 집에 가는 기회만 있으면 열심히 주인들의 구미에 맞는 반찬과 요리를 배우고 한 달 두 번 차례지는 휴무 때도 식당에 알 바를 뛰면서 어깨너머로 한식을 배운다. 아무리 부지런한 노력이래도 생활자체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4)


반년이 지나도록 살림이며 반찬이 익지 않아 주인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니 주인들의 눈총이 따갑기만 하다. 대신 주인들이 시키는 일이면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달갑게 하여야 한다.
어느 날 수진이는 산 낙지 여러 마리를 들고 와서 싱싱한 그대로 먹어야 한다면서 흐르는 물에 씻어 산채로 잘라서 참기름 깨소금과 같이 식탁에 올리란다. 선희는 비닐 백 속 물을 찌워 낸 다음 들어있는 낙지를 대야에 담는다. 꿈틀꿈틀 기여서 그릇에 찰싹찰싹 들어 붙어 있는 낙지는 조금만 다쳐도 징그럽게 온 몸을 길게 늘인다. 보기만해도 온몸이 오싹해난다. 그런데 그것을 일회용 장갑마저도 끼지 말고 맨손으로 하란다.
<<아이, 무서워, 난 못하겠어요>>처음으로 거절하는 말을 해 보았다.
<<아니, 나이가 얼만데 낙지를 무서워해요?>>수진이의 말은 야멸찼다.
<<난 벌레도 무서워요. 산 낙지를 처음 봐요, 아유- 무섭고 징그러워>>
<<그럼 일회용 장갑을 끼고 해봐요>>말을 흘리면서 수진이는 부엌을 나간다.
<<아무렴, 내가 낙지한테 당하겠냐>>하고 배짱을 다지면서 선희는 낙지 한 마리를 잡는다. 낙지 발 여덟 개가 선희의 손을 잡고 온몸을 늘이면서 팔목까지 벋치면서 찰싹찰싹 들어붙는다. 당장 기절할 것만 같다. 선희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지만 소리도 못 내고 부들부들 떨기만 한다. 있는 힘껏 팔을 털어 낙지를 뿌리치려 하나 낙지는 더 기세를 돋구어 조롱하듯 더욱 죄여 들면서 길게 늘어진다. 당장 낙지에게 잡힐 것만 같다. 저도 모르게 <<으흐흐 흐흐....>>
하고 귀신에게 잡히어가는 소리가 나간다. 수진이가 소리를 들었는지 부엌으로 들어온다. 수진이는 낙지를 떼여주고는 선희를 보란 듯이 굼틀대는 산 낙지를 도마 위에 놓고 토막 낸다. “탕탕”. 낙지를 토막 내는 소리는 선희의 정신까지도 아찔하게 토막 낸다. 낙지는 토막 나서도 꼼지락거리고 머리 타박상을 입은듯한 선희는 정신이 아물아물해난다.
너무 긴장했던 탓으로 선희는 하루 종일 기운이 다 빠지고 쿵쿵 뛰던 가슴이 죄여 들어 안절부절 못한다.
정말로 인젠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아무리 구린 똥 삼년을 안고 사는 인내를 가진 성미라 해도 타향에서 병들고 죽고 나면 볼 것 없지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다.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노예근성이 뿌리를 깊이 내렸지. 돈, 돈, 그 놈의 개도 안 먹는 돈. 돈이라는 물건이 한스럽다 못해 저주스럽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저녁에 선희는 쓰레기 버리러 나갔다가 아파트 단지내의 공중전화박스에 들어가 동전 몇 잎을 넣고 고향언니에게 전화를 한다. 낮에 있었던 일을 대충 말하고 다른 일자리 알아봐달라고 부탁한다. 고향에서 학교교장으로 사업했던 언니도 인제는 모국에 와서 가정부로 제법 자리매김 했나 본다. 언니는 네가 이 세상을 너무 약하게 살아 그만한 것조차 받아내지 못하면 더 큰 일을 당할 때면 어찌 하겠냐며 그보다 더한 일도 참아내고 마음을 비우고 현실을 정시하면서 한국생활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5)


주인들은 아예 외식을 하면서 장보는 것조차도 포기한 것 같았다. 선희는 맨밥에 고추장으로 끼니를 에우기가 일쑤다. 본의 아닌 다이어트가 잘 되였다. 한국에 올 때 입고 온 옷가지들이 삼 개월 사이에 헐렁해져 빌려 입은 옷 같다. 수진이는 대신 잔심부름으로 고용대가를 메우려 한다. 적지 않은 월급을 그냥 쉽게 줄 수 없으니 월급만큼은 부려먹어야 한다는 심산인 것 같다.
<<이모, 죄송한데 물 떠 줄래요>> 처음에는 죄송하다는 말을 붙이더니 나중에는 그 말조차도 인색하게 아낀다.
<<이모, 휴지 주세요.>>
<<이모, 냉장고에서 화장품 꺼내 주세요>>
나이를 보면 조카 벌밖에 안된 젊은 여자가 주인행세 하느라 앉아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꼴이 눈꼴 시리지만 고용주와 고용인이라는 신분 차이니깐 어쩔 수 없다고 선희는 생각한다. 분을 삭이는 방법은 그냥 혼자 속으로 <<아이구, 개떡 같은 내 신세>>하고 돌아서서 주인들이 들을세라 조용히 한숨을 토한다.
엄마의 본을 받아 애들까지도 스스럼없이 이모만 불러댄다.
<<이모, 휴지 줘~ 코 나왔어~>> 승우는 휴지가 놓인 탁자 곁에 서서 방에서 서연에게 우유를 먹이고 있는 선희에게 호령한다.
<<이모가 서연에게 우유 먹이고 있으니깐 승우가 빼서 닦아~>>선희는 치미는 분을 삭이면서 애한테는 극 구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씨, 이모, 휴지 주란 말이야~>>아이는 버럭 화를 내면서 씽 하니 방 쪽으로 달려오더니 장난감야구방망이로 선희의 잔등을 사정없이 내리친다. 깜짝 놀란 선희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아이에 대한 분이 아니라 수진에 대한 분이다. 선희는 서연이의 입에서 젖꼭지를 떼고 손으로 승우의 종아리를 살짝 친다.
<<이모가 날 때렸어>>승우는 엉엉 울면서 안방으로 들어간다. 수진이가 노기에 찬 얼굴로 씽 나오더니 왝 소리를 지른다.
<<웬 일이야? 왜 그러는데요?>>
때가 온 것이다. 인내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남몰래 눈물을 삼키면서 벙어리 노릇한지 반년도 되였다. 짧은 시간이 아니다. 선희는 그 사이 가슴속에서 쌓이고 쌓인 분이 화산같이 터져 올랐다. 개도 안 먹는 돈 때문에 선희는 언어와 풍속이 같다는 이유로 모국의 낯선 집에 와서 이렇게 타박여가 되여야 하는 것이 원통하고 분했다. 당장 뛰어나가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지만 한국으로 올 때 진 빚을 다 갚기 전에는 참고 또 참으려 했다. 그런데 인젠 도저히 더 참을 수 없다. 늙은이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선희에 대한 타박은 스트레스로 쌓일 대로 쌓였다. 이렇게 벌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 더냐? 갈 것이다. 다른데 가서 벌어 빚만 다 갚으면 중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선희는 결심을 굳혔다.
<<미안합니다만 가더라도 할말은 해야겠어요>> 선희는 평소에 없었던 냉정한 기색으로 수진이를 마주 앉았다.
<<승우 엄마는 중국보다 경제적으로 앞선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유명대학의 우월한 교육을 받았고 세계각지를 어디라 없이 관광하면서 살아온 젊은 사람으로서 글로벌시대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를 나보다 더 잘 알거라 생각해요. 더욱이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잖아요>>
수진이는 혼란스러운 눈길을 선희의 얼굴에서 떼지 못한다.
<<나는 승우 엄마보다 배운 것도 모자라고 세상구경도 못해 보고 하나님도 믿지 않아요. 그렇지만 승우 엄마를 보면 하나님이 비감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셔요?>>
톤은 낮으나 당당하면서도 격발된 선희의 말에 승우 엄마의 목소리는 조금 주눅이 들어 있다.
<<인간성을 놓고 하는 말입니다. 현재 한국에는 종이 없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승우네 집에 종신지장을 찍은 종은 아니지만 온 식구들의 종 노릇 해왔지요. 그래도 참았습니다. 언젠가는 나의 노력이 헛되지 않을 날이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정이 들면 나아질 거라고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한심하군요. 승우네는 인력이 필요해서 나를 베이비시티와 가사 도우미로 고용하는 것이지 개개인의 종으로까지 고용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내가 몸을 쪼개 쓴다 해도 종까지의 일을 할 수 없어요. 이것은 나 한 사람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일거예요. 나는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죽도록 종으로까지는 전락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등가교환을 하는 겁니다. 일의 업종에는 귀천의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인격은 누구나 물론하고 차이가 없습니다. 서연이까지 포함해서요. 그러기 때문에 나는 승우 엄마가 나를 종으로 착각하고 딱 앉아서 함부로 자질구레한 신 부름은 다 시키고 심지어 아기를 안고 식후 물까지 떠드려야 했지요. 제가 언제 한 번이라도 품에 안았던 서연이를 마루바닥에 내려놓고 신 부름 한 적이 있었나요? 나는 수유 끝나면 안고 토닥거려서 트림 시켜야 하는 상식까지 지키면서 힘들어도 안고 일어나서 심부름을 했지요. 그런데 아기를 안고 있는 나에게 승우 엄마는 어찌했나요? 신부름을 시키지 않으면 <이모, 애를 안고서도 낮은 곳의 유리는 닦을 수 있잖아요?>
< 이모, 애를 안고서도 애기의 옹알이를 받아주고 애기에게 말을 하면서 애들 장난감은 정리할 수 있잖아요> 하면서 볶았지요. 엄마의 의식세계가 그러하니 애들도 이모를 저들이 함부로 부려먹는 종 인줄로만 알고 있잖아요. 나도 한계가 있는 인간입니다. 더 이상 이렇게 못 합니다. >>선희는 단호했다. 수진이는 한마디 대구도 하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선희는 짐은 챙기지 않았지만 떠나갈 마음의 준비를 이미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막상 나가자고 맘 먹으니 인젠 제법 재롱까지 부리는 서연이가 마음을 밟는다. 키운 정도 낳은 정 못지 않다는 실감을 가슴 깊이 느낀다.


(6)


그 풍파가 있은 후로부터 수진이는 더는 잔 신부름을 시키지 않는다. 애들에게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하도록 타 이른다.
<<오늘 우리 승우가 절로 물을 부어 마셨거든요>>
<<오늘 우리 나연이가 절로 옷 입고 양말 신었어요>> 선희는 수진이 앞에서 애들을 자랑하면서 속으로 승리의 쾌가(快歌)를 불렀다. 그런데 또 허파를 찌르는 말이 기분을 잡친다.
<<이모, "절로"란 단어를 쓰지 말고 "스스로"를 쓰세요. 서울에서는 "절로"라는 말을 사람에 한해서는 안 쓰거든요. 쓴다면 의식이 부여되지 않은 물건 같은데 쓰는 거에요. 예를 들면 물건이 절로 떨어졌다 이렇게 말이에요. >>
<<아니 "절로"라는 말은 우리의 고유 말인데 왜서 안 될 것 있나요? 쓰는 범주의 지방 차이겠지요. 서울말이 몽땅 표준어란 규범은 없는데요. 서울 "표준어" 배우러 어느 어학원에 가면 되나요? >>
선희도 만만치 않게 나온다. 그러면서 외래어로 얼룩이 낭자하여 우리 말까지 잃어가는 모국에서의 우리의 언어소실에 비관하면서 비록 타국에서 살아오면서도 우리의 풍속과 언어와 문자를 지켜온 동포들의 극성(極盛)은 흠모(欣慕)를 넘어 절찬을 받아야 한다고 연설가를 뺨 칠 정도로 열변한다. 외래어 때문에 스트레스는 많이 받았지만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우리의 고유한 언어를 잃어가는 것은 실로 안타깝다.
<<우린 골키퍼를 문지기라 했어요>>
<<이모, 그럼 슬리퍼는 뭐라 해>>승우가 묻는다.
<<끌신>>
<< 재미있다. 순수 우리 말이 정겨운 느낌이 든다.>>
그 후 평소에 사투리보다 표준어를 많이 써온 선희는 애들과 수진이 앞에서 이따금씩 서울에서는 이미 옛말로 되여 간 우리의 고유어를 사용하면 신기해도 하고 재미 있어도 한다. 억양은 서울말씨에 점점 가까워진다.
<<이모, 일없어요>>수진이도 가끔 <<괜찮아요>>를 교포들이 자주 사용하는 언어로 표현하여 분위기를 밀착시킨다.
<<내가 서울 사람으로 엄마가 교포로 바뀌는 거 아니야>> 서로 마주 보면서 웃는다.
언어란 의사소통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감정소통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어른들은 물론 애들과의 거침없는 감정소통을 위해 선희는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적응이다. 글로벌시대에는 공존할 수 있는 적응능력이 학력보다 못지않은 인간의 높은 수준이라는 것을 선희는 느꼈다.
눈물의 이년이 설음과 반죽되어 지겹게 흘러갔다. 선희는 인내와 지성(知性), 성근 함과 부지런함으로 믿음을 바꿔왔고 타박녀의 신세를 면하고 주인들과 한식구로 되였다. 인내의 꽃은 피우기까지는 쓰디써도 인내의 열매는 무르익으면 달디달다.

량즈로우후 량즈로우후
쩐치꽈이 쩐치꽈이
이거메이유얜징 이거메이유얼두어
쩐치꽈이 쩐치꽈이

집안은 온통 유치원 같은 분위기다. 애들은 작은 손을 나폴 대면서 선희를 따라 재롱 치면 어른들의 웃음소리가 행복송이가 되여 온 방안에 향기가 그득하다.
선희는 애들을 앉혀놓고 짬만 나면 책을 읽어주고 중국어동요는 한국어로 한국어동요는 중국어로 번역하여 두 가지 언어로 불러주고 배워 준다. 나연이와 서연이는 틈만 있으면 책을 안고 와서 읽으라고 조른다. 철없는 서연이는 영어책도 선희에게 들이민다. 영어책을 엄마가 읽어주겠다면 <<싫어. 엄만 재미없단 말이야>>하면서 떼를 부려 분위기를 민망스럽게 한다. 하여 선희는 대신 중국어 책을 읽어준다. 선희의 표현에 따라 기뻐도 하고 슬퍼도 하는 나연이와 서연이의 표정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아이, 워 어 러. 츠판바(이모, 나 배 고파. 밥줘)>>
서연이의 유창한 중국어에 수진이는 더욱 자랑거리가 많아졌다. 서연이에 대한 자랑은 승우와 서연이의 시기심을 유발하여 공부욕심으로 이어진다.
일찍 말문을 연 서연이를 놓고 수진이는 이모가 책도 많이 읽어주고 말도 많이 해주고 음악도 많이 듣게 한 이유라고 칭찬도 아끼지 않는다. 올망졸망 애들은 나름대로의 천부적인 특성이 있어 너무 재미 있다. 중국에서 산아제한 정책으로 아이 하나만 키워온 선희에게 있어서 애들 셋의 엄마 노릇 하는 것이 여자의 본능인 모성을 찾는 행운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저도 모르게 달콤해 난다.

(7)

맏이로 태여나 너무 일찍 부모 품에서 떨어져 혼자 쿠션베개를 안고 자는 승우 가 늘 안쓰러워 선희는 자주 품에 안아 준다. 그때면 제법 어리광부리는 승우, 그렇게도 정을 그리워하는 승우는 쿠션베개에도 "씨" 자를 붙여 생명으로 여겨주라면서 자기의 친구로 대해달라고 한다. 엄마 품이 그리운 정을 "베개씨"에게 의탁하는 승우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베개씨"부터 찾아 안고 입과 코에 대고 떼지 않는다. 손때와 입김에 반지르르해진 쿠션베개를 보고 선희는 승우가 학교에 간 틈에 빨아놓았다. 학교에서 돌아와 "베개씨"를 찾던 승우는 울며불며 고함을 지른다.
<<내 베개씨 제대로 해놓으란 말이야. 내가 좋아하는 냄새가 사라졌단 말이야. 그 말랑말랑하던 느낌도 없잖아~>> 진짜로 화가 나서 두 눈에 심지를 올리고 황소같이 육박해오는 승우를 선희는 꼭 껴안으면서 달랜다.
<<미안해. 이모가 지저분하다는 생각만 하고 그토록 정을 그리워하는 네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구나. 정말 미안해.>>
누가 시간이 보약이라 했던가? 고용 당하는 가정부라는 열등감이 엄마의 마음으로 바뀌어 진 선희는 제법 애들이 떼쓰는 것도 정과 사랑과 믿음으로 받아줄 수 있는 것이 스스로도 대견스럽다. .
선희는 인간에게 있어서 정이란 쌀만큼 중요한 감성의 에네지이고 삶의 동력이라는 것을 느낀다. 가족과 부모형제와 고향에 대한 절절한 정을 선희도 그 어디엔가 의탁하고 싶다.
시간이 흐름과 같이 정은 정으로 합류했다. 예로부터 정에 약한 것이 우리 민족의 천부가 아닌가 싶다. 정이 들자 수진이도 승우 아빠도 선희에게 관심을 보인다. 주인들이 처음으로 중국에 있는 가족에 대해 물었을 때 선희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힌다. 몇 년 동안 맘속으로 한없이 그리워만 하면서 아침마다 북녘을 바라보면서 두 손 모아 맘속으로 기도를 하고 또 하면서 살아온 나날들, 자기 가족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여주니 수진이와 승우 아빠 그리고 승우 할머니에 대한 야속했던 감정들이 봄눈같이 녹아버린다. 그 후로부터 선희는 주인들의 권유로 주인들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중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전화로 한국생활과 주인집식구들의 배려와 아이들의 재롱거리들을 이야기 하면서 우리 보다 일찍 서구문화를 받아들인 한국선진계열의 열린 사유방식과 부자라도 낭비 없는 생활관습 그리고 문명한 사회질서와 사회환경에 대해 직접 피부로 느낀 그대로 이야기 한다. 주인들도 가끔 중국에 있는 선희의 가족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중국에 대한 호감으로 선희에게 이것저것 많이 물어본다. 날이 갈수록 그들 사이에는 생활로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공통어도 많아진다.
서연이는 두 돌 지나도록 선희를 엄마라고 부른다. 오빠와 언니가 <<엄마가 아니고 이모야>>하고 또박또박 가르쳐주니 수진이는 <<이모도 엄마와 마찬가지야>>하는 것이다.
<<서연이는 엄마가 둘이어서 좋겠다.>> 천진난만한 나연이의 부러움에 젖은 목소리다.
<<이모도 엄마가 둘이거든>>
선희도 고개를 갸우뚱하고 자랑이 철철 넘치는듯한 웃음을 달고 애들 앞에서 응석같이 제법 천연덕스러워 진다.
<<진짜야?>>하고 승우가 놀랍다는 듯 두 눈을 반짝인다.
<<그럼~이모의 두 엄마 이름을 알려줄까?>>
<<응. 뭐야? >>애들은 신기함을 기대하듯이 말똥말똥 선희를 쳐다본다.
<<낳은 엄마의 이름은 한국이고 키워준 엄마의 이름은 중국이란다.>>
애들이 알아듣지 못한 말은 분명 어른들은 알아 들었나 보다. .
<<지난번 로마세계수영선수권대회 때에 우리나라 박태환선수와 중국의 장린선수의 경기에서 장린선수가 뒤지려고 하면 안타까워하면서 응원할 때 우린 이모가 미웠어요. 그러다가 박태환선수가 뒤지려 하니 다시 안타까워 주먹을 불끈 쥐고 이겨라고 응원할 때엔 놀랍더라고요. 그래서 이모에게 도대체 누구 편이냐고 물었죠. 두 사람의 편이 모두라고 하니 그럴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인젠 이해가 되네요.>>
선희의 눈가엔 이슬이 반짝인다. 두 사람 같이 이길 수 없고 같이 질 수도 없는 것 같은 현실 속의 불가사의는 오직 감정 속에서만 존재한다.
오늘은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한 이 애들도 크면 이 말의 뜻을 잘 알 거라고 선희는 종교처럼 믿는다. 선희가 심혈을 기울려 애지중지 키워준 서연이가 이모를 엄마보다 더 따르는 것을 보면서 수진이는 중국에 대한 선희의 감정을 이젠 제법 이해를 잘 해 준다. 그리고 선희 앞에서 스스럼없이 내뱉던 중국에 대한 아니꼬운 인상이나 모호한 견해 같은 말도 수진이의 입에서 언제부터인가 사라졌다.

* * *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돈을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엄마를 찾아 높은 산을 힘겹게 기여 오른 타박녀 선희는 돈이라는 중개의 배를 타고 정에 겨운 슬픈 강을 건너 이해와 포용의 대지에 이르렀다. 타박녀는 더는 타박녀가 아닌 식구로 되였다.
올 가을, 선희의 재 입국을 앞두고 수진이는 남편과 같이 아이들을 데리고 선희의 고향으로 관광을 왔다. 두 가족의 만남은 오래 헤어져 있던 혈육의 상봉 못지 않게 뜨거운 정으로 화끈했다. 수진이 내외의 도움으로 재회의 기쁨 속에서 선희부부는 한국의 식구들과 더불어 새 생활의 한국 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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