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글 김군욱]

[서울=동북아신문]지난 겨울방학휴가에 서울을 다녀오면서 서울에 있는 형님의 안내로 경복궁을 유람하는 기회를 갖게되었다.

서울은 조선왕조 600여년력사의 도성으로서 유람할수 있는 많고많은 전통문화유적가운데서 왕궁은 규모가 제일 크고 보존이 가장 완벽한 문화유산이다.

올해 서울의 겨울은 몇 십 년만에 처음으로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겨울이였건만 이날따라 날씨는 퍼그나 쾌청하고 맑은 날이였다. 게다가 형님의 친구 황씨가 동행하여 기분은 더 상쾌하고 심정은 기쁘기만하였다.

일행은 세종거리를 거쳐 광화문으로 경복궁에 들어섰다. 관람권은 매인당 성인은 3천한화, 소년아동은 1천5백한화인데 10인이상의 단체관람권은 성인은 2천4백한화 소년아동은 1천2백한화였다. 그리고 종합관람권도 있는데 종합관람권은 매인당 1만한화로서 여기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과 종묘를 모두 관람할수 있는데 단체관광팀일 경우 팀의 요구에 따라 시간대에 맞추어 가이드가 한국어, 영어, 일어와 한어로 안내를 하는 서비스도 첨부되어 있었다. 우리일행은 3명인데다가 정해진 코스에 따라 기계적으로 유람하는 단체코스가 부자연스러워 자유로 유람할수 있는 코스를 선택하였다.

서울에 있는 조선왕조시대의 왕궁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다섯개가 있는데 그중 경복궁은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1호왕궁이다. 경복궁은 태조 리성계가 조선왕조를 건립한후 국가의 기틀을 튼실히 하기 위하여 제일 처음으로 건설한 왕궁으로서 력사가 가장 유구하고 규모도 방대하고 구조도 엄밀하고도 완벽하다.

경복궁은 북악산, 인왕산, 락산과 남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성곽안의 평원지구에 건설되여 있는데 중앙으로 청계천이 흘러지나 풍수 또한 뛰여난 곳이다. 경복궁은 광화문,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등 남북으로 된 중추선을 중심으로 기타 전각들이 좌우대칭으로 주밀하게 배렬되여 있다.


광화문(光化門)정문으로 들어서서 흥례문을 지나면 곧 보이는 전각이 근정전(勤政殿)이다. 근정전은 정전(正殿)으로서 국왕이 문무백관들과 조회하고 사신을 접견하고 책봉, 혼인 등 중요한 나라대사를 진행하는 중요한 장소이다. 정전광장중앙에는 국왕의 어명을 전하는 도로를 중심으로 그 좌우량옆에는 신하들이 통행하는 도로가 있으며 도로좌우량켠에는 대신들이 자신의 직위순위에 따라 설 품위석이 가지런히 배렬되여 있다. 이는 한 측면으로 조선시대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엄격한 신분제도를 보여준다.

근정전을 지나 북악산을 향해 남쪽으로 에돌아가면 사정전이다. 사정전(思政殿)은 편전(便殿)으로서 국왕이 평시에 국사를 처리하는 곳이다. 사정(思政)이란 “깊이 사색하고 고려하여 국사를 처리”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사정전은 세종재위시기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사들과 학문을 토론한곳이며 세종대왕이 집현전을 궁내에 설치하여 인재를 배양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기구로 하였다. 세종대왕의 이러한 조치가 있음으로 하여 우리의 한글이 창제되지 않았겠는가? 세종대왕은 조선왕조에서 가장 현명하고 치적과 업적도 많이 이루어내 군주이다.

강녕전(康典殿)은 국왕이 기거하고 있는 침전으로서 사정전 바로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국왕은 강녕전에서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는데 가끔씩 대신들과 한담도 하는 곳이기도 하다.
경복궁후원과 많은 원림가운데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경회루와 향원정이다. 경회루는 아주 큰 루각으로서 련못중심의 인공섬에 건설되였는데 일반적으로 국왕이 사절들을 접대하거나 또는 대신들과 규모가 비교적 큰 연회를 거행하는 곳이다. 또한 경회루는 어린 단종이 권력타툼에 혈안이 된 자신의 삼촌인 수양대군(세조)에게 눈물을 머금고 국새를 넘겨주었던 곳이기도 하다.

우리일행은 경복궁의 많은 전각과 후원을 둘러보면서 주요한 전각들이 광화문을 마주하여 남북방향을 축으로 기타 전각들이 좌우로 대칭되게 균형적으로 분포된 궁전으로부터 조선왕조가 “례의”와 “도덕”을 숭상하고 사치를 경계하는 정신을 엿볼수 있었다. 또한 유구한 력사의 전통적인 향기와 대자연의 아름다움도 한껏 느끼게 되였다.

흥분된 심경으로 관람을 하면서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을 나오니 한국의 권력중심지인 청와대 입구에 이르게 되여 청와대입구의 보초병과 청와대원경을 바라보느라니 그 느낌 또한 별로였다.

경복궁(景福宮)의 글뜻은 “만년의 휘황과 복을 누리는 궁전”으로서 “천자의 뜻에 따라 백성들을 다스리고 자손만대가 길이길이 태평을 누리”려는 조선왕조의 강렬한 념원과 리상이 포함되여 있다.

경복궁은 태조때부터 건설되여 세종재위시기에 궁전의 기본체계를 확립하였다가 16세기 명종과 선종재위시기 화재와 임진왜란으로 회손되여 270여년동안이나 줄곧 페허로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19세기 고종재위시의 수건과 화재로, 20세기 민족수난시기의 파손과 수건, 그리고 “6.25”사변이후 한국정부차원에서의 대대적인 수건으로 하여 경복궁은 비로서 오늘날의 모습을 되찾게 되였다.

이외에도 경복궁에는 교태전, 자경전, 태원전, 건청군, 동궁, 아미산, 집옥재 등 전각과 후원, 부속건물과 원림들 그리고 국립고궁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이 수건되여 있었으나 친구와의 약속시간으로 더 일일이 돌아보지 못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광화문을 나서는데 면바로 성문을 지키는 파수군들의 교대의식이 있었다. 광화문에는 조선시대의 장수복을 입고 성문을 지키는 파수군들이 있는데 매일 시간마다 옛방식대로 교대의식을 거행하는 행사를 진행할뿐만아니라 성문을 지키는 장수들과 유람객들의 기념촬영도 허락되여 있어 더 많은 유람객들의 발목을 사로잡고 있었다.

새로 수건된 경복궁이 참신한 모습으로 더 많은 국내외의 유람객들이 선호하고 즐겨찾는 유람지로 거듭나는 미래를 그려보면서 귀로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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