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식 수필가

[서울=동북아신문]전에 중국에서는 농촌학교마다에 민영교원들이 있었다. 농촌교육의 중임을 떠메고 학교 발전을 위해 땀동이를 쏟아온 민영교원들이였다.

나 역시 30년 교원생애에서 장장 14년을 민영교원으로 일해왔었다. 그러면서도 담임교원으로, 교도주임으로 열심히 일해왔고 나중에는 시골학교의 교장직까지 맡기도 했었다. 그러다 후에 정식교원으로 신분이 변해서야 현성중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전에 농촌학교의 민영교원대우는 정식교원에 비해 너무나 낮았다. 분명히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정식교원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로임을 받았고 그나마 외상놀음으로 년말이 돼야 받을수 있었다. 그런 로임마저 일년씩 미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민영교원은 허울뿐이고 가정생활이 대부분 어려웠다. 따라서 민영교원 안해들의 고생도 만만치 않았다.

안해가 나에게 시집온 것은 1980년이였다. 그래도 민영교원에게 시집간다고 큰 희망을 품었었지만 정작 차례지는 것은 고생뿐이였다. 민영교원에게 시집온 보람으로 "사모님"으로 불리기는 해도 남들이 모르는 가난으로 시달려야 했다.

내가 금방 결혼했을 때만 해도 촌에서는 민영교원의 로임으로 일년에 280위안을 지불했다. 하루 로임을 1위안으로 셈했지만 방학기간은 셈에 넣지 않았기때문이였다. 그래도 안해는 적은 로임을 탓하지 않고 부지런히 생산대로동에 종사했고 갖은 힘을 다해 가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아이가 태여나고 호도거리 책임제가 실행되면서 우리가정은 곤경에 빠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속한 생산대에서는 민영교원가정에 책임전도 주지않았기때문이였다. 하도 억울해 안해가 촌지도부를 찾아 시비를 했지만 촌간부들은 우에 그런 정책이 있고 구체 실행권은 생산대에 있다며 모르쇠를 댔다. 까짓 허울뿐인 교원직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워낙 즐기는 일이라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우리가정에는 식량전으로 겨우 서무논이 차례졌다. 실로 일년 량식을 해결하기도 어려운 면적이였다. 대신 로임을 올려준다고 했는데 일년에 겨우 360위안이였다. 설상가상으로 애가 병자랑을 하루건너 하는지라 병원출입이 잦았다. 손에 쥔 돈은 없고 돈 쓸 일은 많고 그래서 안해가 택한 것이 삯일이였다.

봄철이면 안해는 집에 모내기가 끝나기 바쁘게 한족농가를 찾아다니며 삯모내기를 했다. 여름이면 하루에 5-6위안씩 받으며 논김을 맷고 가을이면 삯가을을 하고 겨울이면 타작을 했다. 이런 삯일은 그런대로 현금을 벌수 있어 바쁜 목을 에울 수 있었다.

그러나 안해가 아무리 손발이 터지도록 일해도 가정살림은 펴일줄 몰랐다. 결혼때 쓰고 살던 초가집이 낡을만큼 낡은지라 집터값 5백위안을 받고 이사를 했는데 결국 천2백위안이란 빚만 걸머지게 됐다. 고리대를 맡은지라 일년 리자만 해도 내 로임으로 메우기 어려웠다. 결국 우리는 이사 한번으로 꼬박 5년간 빚에 시달려야 했다.

집을 산후 안해는 더욱 악착스레 삯일을 했다. 나도 시간이 되는대로 안해뒤를 따라다니며 일을 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체면같은걸 고려할 여지가 없었다. 후에 책임포전을 조절하면서 우리도 남과 같이 책임포전을 타고 내 로임도 한달에 70위안으로 올랐지만 역시 살림이 펴이지 않았다. 촌경제가 변변치 못해 년말이 돼도 내 로임을 타지 못했던것이다. 그래서 안해의 삯일은 끝이 없었다.

삯일을 하던가운데서도 가장 잊지 못할 것은 아마를 뽑던 일이였다. 여름방학도 다가는 어느날 아침이였다. 아침을 먹고 나서 대문앞에 나와 서있는데 마침 한골목에 사는 한족친구가 자기 안해를 데리고 어디로 바삐 가는것이였다. 어딜 그리 바삐 가냐고 물었더니 요즘 동네서 10여리 떨어진 농장에 아마 뽑으러 다닌다는것이였다. 여직 아마 뽑는것을 보지 못한 나는 호기심이 동해 일은 힘드냐 일당은 얼마나 주냐며 꼬치꼬치 캐여물었다. 그러자 그는 하루에 6~7위안 벌이는 쉽게 한다면서 일이 좀 어지럽지만 대신 힘은 안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직 방학인데 집에서 놀면 뭘하냐고 같이 가자고 권장했다.

안해가 련며칠 앓고 있어 여기저기서 돈을 꾸어대던 나인지라 얼싸 좋다고 따라나섰다. 그런데 아마뽑는 일이 그렇게 힘들 줄이야! 쨍쨍 내리쬐는 8월의 땡볕아래서 아마를 뽑노라면 목구멍에서 겨불내가 나고 땀이 동이로 쏟아지는가 하면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써야 했다. 첫날이라 멋모르고 장갑도 안가지고 간 나는 맨손으로 아마를 뽑았는데 저녁때쯤 되여보니 여기저기 온 손바닥에 물집이 생겼다. 게다가 경험이 없는탓으로 자꾸 흙이 딸려 올라와 그놈의 흙을 떨어버리는데도 숱한 품을 허비했다.

그날 나는 종일 힘들게 일해 겨우 4.5위안을 벌었다. 그날 너무도 혼난 나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허나 정작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자 새 힘이 솟구치면서 또 떠나려고 서둘렀다 . 필경 평소의 하루수입보다 많은 돈, 그것도 현금이니 말이다. 밤새 나의 신음소리를 들은 안해가 말려나섰지만 나는 한사코 나섰다. 대신 전날의 교훈을 살려 나이론실로 뜬 장갑과 오이, 물같은것을 넉넉히 준비해가지고 떠났다. 사전에 만단의 준비가 있은데다 경험이 있어 이튿날은 전날보다 일찍 일을 끝내고도7위안을 벌 수 있었다. .평소 이틀 로임보다 많았다.

여기서 재미를 본 나는 사흩날에도 또 나서는데 아직 몸이 완쾌되지 않은 안해도 따라나섰다. 내가 하루이틀만 집에서 좀 더 쉬면서 몸을 춰세우라고 아무리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할수 없이 나는 그날 안해를 데리고 아마뽑으러 갔는데 처녀때부터 일이 몸에 배인 안해라 아마뽑기도 나보다 퍽 나았다. 그날 우리는 20위안을 벌었다.

그후에도 우리는 매일 2~3십위안씩 벌며 함께 닷새를 더 다녔으며 내가 개학해 출근하러 다닌 후에도 안해는 이웃들과 동반해 열흘을 더 다녔다. 이렇게 우리는 그해 여름에 아마뽑기로 근 4백 위안을 벌었다 .그 돈은 나의 몇달 로임을 당했다. 그것도 현금을 손에 쥐였으니 우리로서는 큰 수확이였다.

이렇게 시작된 아마뽑기삯일은 3년간 지속됐다. 그러나 대가가 없는것이 아니였다. 그해 여름방학에 우리 부부는 삯일을 나가면서 애를 집에 두고 갔다. 그런데 점심때가 좀 지나자 갑자기 날씨가 변하면서 번개가 치고 벼락이 울면서 광풍폭우가 쏟아졌다. 그날 혼자 집에서 점심을 먹고 혼곤히 잠들었던 아이는 천둥소리에 놀라 깨여나서는 너무 놀라고 겁이 나서 부들부들 떨면서 울었는데 뢰성벽력에 이웃들도 애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비가 끊기 바쁘게 우리는 애가 걱정돼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애는 방구석에 옹크리고 앉아 부들부들 떨며 흐느끼고 있었다. 아이의 몸은 열이 나 불덩이가 되여 있었다. 얼마나 놀라고 혼났으면 이 정도로 되었으랴 싶어 안해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뚝뚝 떨구며 소리내여 울었다. 나도 가슴이 찢어지는듯 했다.

아이를 안고 병원에 가니 의사는 그저 많이 놀라서 그렇다면서 주사를 맞고 나면 일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진정제를 한대 놓고 점적주사도 놔줬다. 얼마 안지나 열도 내리고 애의 정서도 회복되었다. 점적주사를 맞던 애가 갑자기 "팔보죽"이 먹고 싶다고 했다. 그말에 우리 부부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생기를 찾은 애로 마음속 긴장이 활 풀렸던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안해는 아마뽑으러 갈 때는 물론이고 논에 일하러 갈 때도 애를 꼭 믿음직한 이웃에 맡기지 않으면 데리고 다녔다.

책임포전을 새로 조절한후 우리에게 차례진 책임포전은 8 무 가량 되였는데 학교에서 농망가를 할 때를 내놓고는 농사일을 안해가 도맡다싶이 하였다. 나는 그저 새벽에 논물이나 보러 다닐뿐이였다. 그래도 그는 언제 한번 제가 고생한다고 불평을 털어놓는 법이 없었다. 또 응당 그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나는 마땅히 교육사업에 열성을 쏟아야 하는 교원이였다. 민영교원의 안해로 있는 14년간 안해는 말그대로 궂은일 마른일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정식교원의 안해들은 물론 농민안해들보다도 더 험하고 많은 일을 하였다. 그래서 내 마음은 많이도 아팠다.

안해는 현성에 이사왔어도 처음 몇해는 계속 삯일을 했다. 비록 내가 정식교원으로 되였고 현성조선족중학교에서 사업하지만 로임은 여전히 농촌에 가 타야 했는데 그때 향진에서는 재정난으로 일년에 겨우 한두달로임을 주나마나하는 때라 그 로임을 가지고는 살아가기가 여전히 힘들었다. 게다가 안해는 직업이 없고 우리가 이사온후 촌에서는 책임포전을 회수해버렸다. 우리 학교에는 나같은 처지에 있는 교원이 몇분 있었는데 안해는 사모님들과 한데 어울려 삯일을 찾아하군 하였다.

오늘에 와서 돌이켜보면 옛말과 같은 그제날의 이야기다. 후에 출장길에 어디를 가다가 아마밭을 보거나 논에서 모를 꽂거나 가을하는 녀인들을 보면 옛일이 새록새록 눈앞에 떠오르며 감개가 무량하다. 때론 그곳에서 일하는 안해의 모습이 환영으로 나타난다.

그때 나와 함께 한학교에서 사업하던 민영교원들중 지금까지 교직에 남아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너무도 낮은 그 대우에 하나둘 중도에 다 하차해버렸다, 어떤 이들은 연해도시로 나가 취직했고 어떤 이들은 한국에 나와있고 어떤 이들은 장사를 하고 있는데 다들 괜찮게 나아가고 있다. 우둔한 놈 곰 잡는다고 나 혼자 꿈쩍않고 교직에 눌러있었는데 그러다나니 자연히 가정살림은 확 펴이지 못하고 그때문에 안해도 고생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나의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필경 이 사업은 나의 적성에 맞고 내가 좋아하는 사업이기때문이다. 다만 안해와 자식에게 미안할뿐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나를 원망하는것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내 가정, 내 식구들이 더욱 사랑스럽다.

지금 나는 이미 리직을 하고 안해와 함께 한국에 나와있는데 안해는 지금도 편히 쉬는 날이 없이 여전히 음식점에서 어깨뼈가 빠지도록 힘들게 일하고있다.그래서 내가슴은 항상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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