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13장 재만조선이주민의 사회단체

만주에로의 조선인이주는 그 시간이 백여 년을 넘나들었고 이주민 숫자가 수백만의 규모를 이룩하였지만 자신에게 속하는 사회생활을 이룩하지 못하였으며 통일적인 범조선이주민의 단체를 묶지 못하였다. 이는 조선이주민이 만주개발에 바친 비할 바 없이 큰 공헌에 비하여볼 때 일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망국노의 신세로 빈주먹만을 거머쥐고 이주라 하기보다 살길을 찾아 헤매던 그 처지에서 우선 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 생활의 기본바탕을 닦아야 했고 중국관리 측, 일본 측에서 오는 박해와 탄압을 이겨내야 했으며 나아가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반일투쟁을 해야 함을 감안했을 때 재만조선이주민의 사회생활은 그때까지도 친척이나 씨족의 부락범위를 크게 넘지 못하였고 또 당시의 교통이 극히 불편하여 범만조선이주민의 통일적 단체의 출현은 너무나도 어려운 기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해당사료에 따라 만주에 조선이주민의 민족단체가 50여 개나 있다는 데 비하여 볼 때 그 어느 단체도 후세에 남길 그럴만한 업적을 쌓지 못한 것은 우리 민족의 모종 열근성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유감이 있다.
재만조선이주민의 사회단체 중 일제 또는 조선총독부에서 부추기는 조선인민회 등 친일단체가 큰 규모를 형성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조선광복과 독립과는 어긋나는 반동조직인 것이다.


3.1. 제1절 친일단체

3.1.1. 1. 조선인민회

1913년 11월 안동에서 첫 조선인민회가 세워진 뒤를 이어 1916년, 1917년에 훈춘, 용정, 투도구, 연길 등 일본영사관 소재 지역에 육속 세워졌으며 1918년 8월에 할빈, 1919년에 봉천, 무순, 길림, 신경 등 지역에 설치되었다.
1921년 후에는 그 조직이 확충되어 만주사변 전후에는 만주에 34개 조선인민회가 생기여 일본당국의 보조기관으로 작용했다.
1934년 그 수는 99개로서 회원은 10만 명을 넘었으며 일제 보조금이 하달된 곳이 85개 민회, 총금액은 14만 원에 달하여 재류조선이주민의 복리추진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교육, 위생, 권업, 기타 사회사업에 출자했다.
1935년 5월 말에 이르러 재만조선인민회는 150개로 늘어났다.

3.1.2. 2. 기타 단체

만주사변 후 각 농촌에 세워진 농무계가 조선인민회를 제외하고는 주목되는 사회단체이다. 1934년 6월 총수는 500여 개, 계원 수는 1만 8000여 명을 넘긴 것으로 보인다. 부락민의 상호상조, 토착정신의 함양을 목적하고 계원의 경제생활의 향상을 위하여 생산품의 공동판매, 생활필수품의 공동구입 및 농자금융의 조절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외에 청년회, 노동조합, 농상무조합, 친목회, 부인회, 친교회, 구락부, 상조회, 상업조합, 산업조합, 협조회, 수양단, 체육회, 종교단, 자위단, 상민회, 용진단 등이 있으며 이 단체 모두가 일본제국주의의 국책에 비위를 맞추는 친일조직이다.
지역별로 적어보면
▪봉천 여러 단체로는 학교조합, 청년회, 노동조합과 농무계가 있었다. 그 수는 147개나 되나 봉천학교조합을 제외하고는 뛰어난 활약이 없었다.
▪통화 흥경과 통화에 청년단이 있었고 유사시에는 경비에 임하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농무계가 7개 있으며 계원은 230명이다. 본부는 서울에 두었다.
▪해룡 해류농상무조합과 농무계 둘이 있었다. 계원은 2100여 명에 달했다.
▪안동 안동 부속지역에 노동조합과 조선이주민친목회, 청년회, 신문사 기자단, 기독교청년회, 면력청년회, 하숙옥조합, 대동구락부 등 12개가 있으나 활동자금부족으로 큰 움직임을 보이지 못했다.
▪금주 조선이주민단체로는 금주조선인 상조회뿐이다.
▪길림 길림시 내에는 동영회와 협조회 둘뿐이다.
▪돈화 교하산업조합은 1931년 11월에 조직되었고 돈화산업조합은 사업의 불황으로 사무를 민회에 넘기였다.
▪신경 동 지방 각 지역에 농무계 외 신경, 공주령, 사평가에 조선청년회가 있었다.
▪할빈 농무계 53개, 협조회 1개가 있었다.

간도의 친일사회단체는 아래와 같다.
▪용정조선인민회 1911년 5월 9일, 용정촌 시가지에 큰 화재가 발생해 조선이주민 피해자가 400가구가 되었다. 이달 하순에 조선이주민을 보호한다는 구실하에 구제회를 용정일본총영사관 내에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조선인민회창립의 기원으로 되었다. 하지만 배일의 조선이주민은 입회를 거절하였으며 당시의 도윤 도빈은 잡거구의 조선이주민은 중국국민과 같은 처지이므로 조선이주민이 동회 회원이 됨은 불가하다는 항의가 있어 따라서 간도조선인민회의 명칭을 편의상 간도용정촌조선인민회라 개칭하였다.
▪조선인거류민회 1917년 8월 31일, 용정촌에서 조선인거류민회 발회식을 거행하였다. 입회자는 용정촌 상부지 내에 530가구, 상부지 외에 40가구로 총 570가구였다. 용정상부지거류자 중 입회하지 않은 세대는 60가구이다. 본 회의 강령은 일본제국의 신위, 위생장려, 생산발전, 호구장성, 교육보급, 일중친선 등이었다.
▪국자가향도회 국자가조선이주민 사이의 일종 조합으로 공동묘지의 관리, 장의 및 매장 등의 일을 목적하고 있으며 국자가 일본영사분관 보조금 100원과 유지인사의 기부금에 의해 설립되었다.
▪배초구조선인민회 배초구에 친목회라는 조직이 있었으나 1915년 10월 일본영사관 배초구출장소의 강권으로 친목회를 조선인민회로 개칭하였다. 1917년 8월 회원은 130여 명 이고 회비는 일인당 5전, 당시 동회의 자산은 90여 원이다.
▪간도협조회 일본관동군 헌병사령부 연길헌병대의 외곽조직으로서 1934년 9월에 설립되었고 1936년 12월에 만주제국협화회에 합병되었다. 협조회는 ‘대동아공영권을 목표로 하고 동아시아 제 민족의 대동과 단결을 공고화할 것이며 엄숙한 비판적 수단으로 일체 외래사상을 더욱 철저히 심사하여 완미한 아시아주의의 정신을 반영함으로써 위만주국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한다’고 선언하였다.
▪ 간도협조회 본부에는 고문(박두영, 최윤주,장원준), 회장(김동환), 부회장(손지환)을 두고 ‘본부특별공작대’와 ‘협조의용자위단’을 내왔다. 간도협조회는 중공당의 당, 정, 군 간부를 체포하고 반일군중을 귀순시키는 별동대이며 항일근거지역에 특무를 파견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혁명대오를 이간하고 간부를 모해한 특무조직이며 항일근거지를 토벌하는 데 결사대로 끼어든 충실한 앞잡이였다.
▪훈춘상조회 1933년 1월 1일에 설립되었다. 회장은 김정 씨이고 고문은 헌병대 대장이 겸했다. 본부 사무소는 훈춘서대문 밖에 자리잡았다. 그 후 훈춘특무기관 두목, 영사분관 주임, 훈춘일본경찰서 서장, 훈춘조선이주민 민회장, 협화회 사무처 처장 등이 상조회 고문으로 되었다. 훈춘상조회는 헌병대의 직접 조종하에 일본침략군의 대‘토벌’에 긴밀히 배합하였으며 평시에는 치안관계자료를 수집하고 지하사업자를 설복하여 귀순시키며 귀순수속자의 일시적 접대사무 같은 일도 하였다. 1934년 7월 훈춘정의단에 개편되었다.
▪훈춘정의단 1934년 7월, 훈춘상조회를 훈춘정의단으로 개조직하였다. 단부는 훈춘진 양조공장 부근이었고 단장은 김기룡(김제동), 부단장은 박두남였다. 단부 아래에는 본부, 총부, 선전, 훈련 4개 부를 두었다. 이도구, 대북성, 대서남차, 동흥진에 무장분견대를 두었다. 정의단은 훈춘 일본영사분관과 일본헌병대의 조종 밑에 투항권고활동을 크게 벌였으며 황국신민화를 고취하고 집단부락을 만들어 항일무장을 탄압하고 일본특무의 내탐자로 활약하였다.
▪훈춘정신대 1941년 10월경에 훈춘정신대(挺身队)가 조직되었다. 연길특무기관에서 바바란 일본군 대위가 훈춘으로 와서 한간, 주구, 반역자, 불한당 58명을 끌어 모아 마적달의 류수하자와 이도구, 춘화의 난가당자(兰家堂子)에 각각 훈춘정신대를 내왔다. 일단 일소전쟁이 폭발되면 소련 경내에 파견되어 여러 파괴활동과 정탐활동을 진행할 간첩, 특무를 양성하는 특무조직이었다. 구소련이 일본에 전쟁포고를 내리고 일제가 무조건투항하자 정신대도 징벌을 면치 못하였다.
▪광명회 일본인 히다까가 일본총영사관, 연길도윤공서, 연길경무청의 허가를 거쳐 1925년 6월 22일에 광명회를 세웠다. 그 취지는 이른바 신조, 목적, 사업 세 개 면으로 나누었다. 광명회는 반일의지를 마비시키고 계급성을 떠난 인도주의를 부르짖는 친일단체이다.
▪보민회 1920년 최정규, 이인수 등이 구 일진회의 잔당을 긁어모아 이룬 친일단체이다. 그해 7월부터 시천교 교도들이 보민회에 많이 끼어들었다. 보민회는 조선총독부 간도주재원 히다까 헤이지로, 간도주재 무관인 사이또 대좌 등의 지휘하에 조선독립운동을 탄압한 친일첩보단체이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간도에는 수양, 체육, 종교, 산업, 금융, 축산 관련의 단체가 각 지역에서 조직되었으나 뚜렷한 것은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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