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대 우상렬 교수

[서울=동북아신문]이 세상에 새빨간 거짓말 세 가지가 있단다. 바로 늙은이가 빨리 죽겠다는 말이고, 처녀가 시집가지 않겠다는 말이고 장사꾼이 돈을 못 벌었다는 말이란다. 그렇다. 生老病死,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의 운명. 백년도 못 사는 인생, 그러니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오래 살기다. 장수,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쌓이는 것이 장수콤플렉스. 이것은 우리 누구도 이 장수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 되겠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한 5백년 살자는데 웬 성화요…’로 나타나며 汉族들에게는 好死不如懒活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젊어서의 요절을 더 없는 불행으로 여긴다. 그리고 이것의 반대급부로 天寿를 누린 丧을 好丧이라고 한다. 그런 만큼 우리는 장수를 분명 복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역설적으로 나타날 때는 우리에게는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십일홍에…’이며 汉族들에게는 ‘今朝有酒今朝醉’이다.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에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차지한 듯한 기고만장에 이 장수콤플렉스를 잠간 잊고 지낼 수 있다. 그러나 老, 나이가 들고 病, 병까지 겹치면 우리는 버쩍 정신이 들면서 건강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자연스럽게 장수콤플렉스가 솟아난다. 그러면서 장수노인, 장수촌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로부터 섭생법에 신경을 쓰게 된다. 缺啥补啥, 이 세상 좋다는 보약을 다 갖다 쓰며 불로장생을 꿈꾼다. 허울 좋은 불로초라는 이름도 이렇게 생겨났다. 최초로 전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발로 이 허황한 불로초에 미혹되어 300명의 동남동녀를 삼신산에 불로초 켜러 봉래 쪽으로 파견한다. 신선사상도 이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童顔鶴髮, 흰 수염을 훨훨 날리되 영원히 죽지 않고 자유자재의 경지에 노니는 것, 이것이 바로 신선이다. 세속세계의 우리는 신선과 놀 주제가 못 된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법. 적어도 신선과 우리는 타임밍과 공간이 맞지 않다. 신선세계에서의 하루는 적어도 인간세상의 몇 백 년이 된다. 신선세계에 잠간 들렀다오니 인간세상은 어느새 몰라보게 변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신선세계는 다시 찾아갈 수 없는 신비의 세계. 도연명의『桃花原記』에서 도화원을 아무리 다시 찾아가려고 해도 그것은 헛수고다. 이것은 인간이 신선이 될 수 없다는 메시지다. 인간의 장수콤플렉스의 발산도 한풀 꺾이는 순간. 이로부터 인간은 더 없는 비극적인 허전함과 쓸쓸함에 잠기게 된다. 그래서 기술적인 양생법을 구사한 도교의 장생법이 우리의 장수콤플렉스를 얼마간 카타르시스다. 항상 역설적으로 말하기 좋아하는 도교는 장생의 비결로 清心寡欲을 말한다. 마음을 항상 깨끗이 가지고 물욕을 적게 가지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仁者寿나 과식불여불식하는 도덕담이나 의학담으로 나타난다. 이로부터 清心寡欲의 도적인 삶의 경지가 펼쳐지기도 한다. 사실 도적인 이 삶의 경지만이 아니고 우리는 황제『素女經』의 소남소녀의 기를 받기 위한 동남동녀동품, 더 나아가 아예 죽음을 초탈한 경지에서 노닐려고 炼丹服丹하기, 젊은 사람의 피를 갈아대어 返老还童하기, 실로 해괴망칙한 별라별 장수콤플렉스의 짓거리에 놀아나기도 한다. 일대의 영웅 한무제는 신선도술에 놀아나 아침 이슬을 받아먹기도 하고 수은을 먹기도 하며 오히려 저승길을 재촉하기도 했다. 우리는 이 장수콤플렉스에 놀아나 오히려 즐길 인생도 못 즐기는 역설을 빚기도 한다. 그래 남녀 간의 화끈한 짝짜쿵 사랑도 자제하며 무슨 接而不入 식으로 하라지 않나. 사랑이 앞에 있어도 감질남만 나는 그런 사랑밖에 못하는 역설이 아니냐. 그래서 입으로 침 겔겔 흘리고 아래로 똥오줌 질질 갈기면서 여하튼 오래 사는 것, 개돼지처럼 살아도 오래 살기만 하면 장땅이라는 맹목성과 무지막지함의 好死不如懒活, 하루를 살아도 사람 같이 사는 것을 거부하는 역설이 빚어지기도 한다.

인간은 장수콤플렉스를 발산해야 한다. 콤플렉스의 발산은 시원한 것. 실제로 심신건강에 좋다. 그러나 인간의 장수콤플렉스는 일단 인생의 무상과 허무라는 인간 본연의 실존에 부딪치게 된다. 인간은 살다보면 장수는커녕 내일 일도 대중하기 힘든 변화무상, 그리고 好人命不长의 허무, 그렇게 양생을 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꼴깍 죽고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막 산 사람이 백년 장수하는 인생의 역설에 우리는 그만 두 손을 들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결론적으로 人命在天이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홀가분하고 편하다. 다음 우리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육체적 한계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돌이 아니고 쇠가 아니고 고기덩이로 만들어진 이상 인간의 육체는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고안해낸 것이 육체적 연장-각종 미라의 출현은 이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대체 육체가 생겨난다. 이른바 비석이요, 동상이요, 화강암기념비요하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노래 ‘천년 바위’도 바로 이런 것이다. 백년도 못 사는 인생일진대 ‘차라리 죽어서 천년바위 되어…’ 길가에 서서 이 세상 오가는 사람들을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비석이요, 동상이요, 화강암기념비요 해도 언젠가는 스러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의 장수콤플렉스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종교적인 이 세상에서 저 세상 가 살기가 고안된다. 그리고 육체를 정신으로 승화시킨 이름 남기기가 고양된다. 雁过留声,人过留名하는 식이다. 이른바 영웅되어 千古留芳하지 못할 바에는 臭名昭著,遗臭万年이라도 하자는 식. 2007-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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