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연변대학교수

    [서울=동북아신문]영화 “황해”는 너무 어둡다. 마음 어딘가 찜찜하고 개운하지가 않다. 첫째, 우리 조선족의 삶이 너무 스산하게 그려졌다. 연길 시가지나 시교의 모습들은 삶에 찌들고 가난이 덕지덕지 묻어나고 지저분하다. 그리고 조선족은 무지막지하게 거칠고 용감하다. 마치 순화되지 않은 야성 그 대로다. 경찰의 층층의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는 주인공 구남이,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며 종횡무진하는 면가, 그리고 거침없이 치정에 빠지는 구남이 아내... 이 모든 것은 돈, 돈, 돈 때문이다.

  여기에는 분명 한국인의 시각이 녹아들어 있다. 바꾸어 말하면 한국인의 ‘집단적 상상’에 의한 ‘타자’화된 우리 조선족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가난한 조선족 대 잘 사는 한국인, 더러운 조선족 대 깨끗한 한국인, 거친 조선족 대 세련된 한국인... 이런 비교급부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시각을 좀 달리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는 상업성이 강해 주로 흥행을 노린다. 시장경제의 관객소비에 기초한 이윤 추구에 있는 것이다. 때문에 “황해”에 나타난 초라한 조선족이미지 부각은 굳이 우리 조선족이 미워서가 아니라 한국 관객들의 우월의식이나 엽기심리, 노스텔지아를 자극하는 안티로 작용한다. 일종 한국의 대중심리에 영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로부터 “황해”는 성공적인 관객몰이를 할 수 있었다고 본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황해”는 대중문화의 흐름을 탄 통속영화일 다름이다.

  우리는 문학예술작품을 보는 시각을 좀 바꿀 필요가 있다. 이때까지 우리는 문학예술작품에 대해 한국의 흥행이나 재미 위주보다는 너무 가치나 의의를 따져왔다. 우리는 꼭 전형성을 따지고 굳이 사상교육을 받으려 했다. 문학작품의 심미나 오락 작용보다는 교육작용에 집착해왔다고 할 수 있다. “황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볼 때 “황해”에서 조선족이미지는 전형성을 기하지 못했다. 연길에 사는 내가 볼 때도 영 말이 아닌 것 같다.

      현재 연길은 작은 도시이나마 그만하면 깔끔하고 활력이 넘친다. 그 주변도 새 농촌건설로 면모를 일신했다. 그리고 청부살인에 건 6만원도 그리 큰 돈이 아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황해”는 어제의 연길 및 그 주변 이미지에는 맞을지 몰라도 오늘의 연길 및 그 주변 이미지하고는 너무도 다르다. “황해”는 연길 및 그 주변의 뒤안길이나 어두운 곳만을 찾아 짜깁기한 듯한 감을 준다. 그것은 한국인들의 조선족에 대한 막연한 ‘집단적 상상’을 연길 및 그 주변에 투영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것은 중국식 논의에 따른 사실주의의 본질적인 전형화반영보다는 자연주의의 지엽적인 반영에 머물고 말았다. 그러나 문학이 꼭 전형화반영만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현실의 비주류나 비본질 및 개연성도 얼마든지 취급할 수 있다 할 때 “황해”는 진실성을 확보하고 있다. 우리 조선족에게는 분명 아직 살기 어렵고 거칠고 더러운 초라한 면이 있다.

  문학예술은 자연주의적인 사진기식 반영이 아니다. 어쩌면 사실주의적인 있는 그대로의 본질적 진실도 아니다. 그것은 현실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의 긴가민가의 묘한 줄다리기다. 이 점에서 “황해”는 그럴듯하다. 그러면서 “황해”는 거기에 알심을 넣어 현대인간들의 보편적인 욕망서사로 나아갔던 것이다. 우리도 이제는 좀 홀가분하게 문학예술을 접할 필요가 있다. 보다 많이 문학예술의 예술성에 치우쳐 감상하자는 것이다. 예술성은 심미나 재미를 추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황해”를 보자. 캐릭터, 주인공의 성격부각이 상당히 성공적이라 본다. 아직 인간의 순진무구함을 잃지 않은 구남이, 그에게는 아직 사람을 죽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렇게 독하지도 못하다. 그리고 사랑에도 연연한다. 그러나 빚에 쫓기고 사랑의 끈에 의해 그는 한국행을 한다. 그리고 한국에 가서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긴다. 그는 우리의 동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면가와 김태원, 그들은 사회독버섯-악마의 화신. 그들은 철저히 돈, 치정에 놀아난다. 최저한의 인간의 의리나 정도 없다. 그래서 사람도 서슴없이 죽인다. 그런데 그들의 표현형태는 정반대다. 면가가 거침없이 직설적으로 나아간다면, 김태원은 하느님의 간판을 건 허위적인 모습을 보인다. “황해”는 일단 이 세 주인공의 캐릭터로 성공한다. 그리고 “황해”는 이런 주인공들 사이 얽히고 설킨 관계로부터 전개되는 얽음새가 미궁 그 자체다. 금욕에 치정에, 중첩되는 청부살인… “황해”의 얽음새 전개는 추리소설의 묘미가 있다. 한참 미궁을 헤매다가 끝에 가서水露石出,柳暗花明. 그리고 “황해”는 액션스릴리러 장르답게 말보다는 행동이 넘쳐난다.

  한마디로 “황해”는 우리에게 볼거리-눈요기를 만끽하도록 한다. “황해”는 적어도 예술성이 뛰어난다. 문학예술은 예술성으로 승부한다. 이렇게 놓고 볼 때 한 편의 영화를 이런 예술성에 치우쳐 감성하는 것도 진정 문학예술의 본령에 가닿는 것임에 틀림없다.

  둘째, “황해”는 욕망서사. 등장인물들이 모두 욕망에 놀아난다. 돈에, 치정에… 끝없는 욕망에 놀아나는 주인공들, 결국 욕망의 팽창에 서로 부딪치고 죽이고, 이것은 조선족이나 한국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고 어쩌면 우리 현대인간들의 전반 자화상. 그래서 “황해”의 욕망서사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와 닿는 욕망의 현대서사가 된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 ‘황해’는 상징성을 띤다. ‘황해’는 욕망의 바다. 돈에, 치정에 놀아나는 인간 욕망의 바다이다. 인간은 결국 이 욕망의 바다에 빠져 죽는다. “황해”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지 않던가. 구남이도 죽고 면가도 죽고 김태원도 죽고… 구남이는 결국 황해의 고기배 위에서 죽게 되고 그 아내의 골회함과 더불어 황해에 내쳐진다. 황해는 더럽다. 생이 넘치는 푸른 바다가 아니라 오염된 죽음의 누른 바다다. 사실 “황해”는 바로 죽음의 욕망에 의한 우리 인간들의 오염을 귀뜸하고 있어 좋다. 그래서 “황해”를 단지 자극이 넘치는 액션스릴리러로만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묵직함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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