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연변대학 교수

[서울=동북아신문]현대는 소비시대란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사실 이 소비시대는 욕망시대의 부산물에 다름 아니다. 욕망,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어야 한다. 욕망이 없을 때 인간은 죽은 인생. 그렇다하여 굳이 욕망시대라 할 정도로 인간이 맘모스적인 욕망을 부리거나 그 욕망의 적나라한 표현을 하는 것은 적어도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소비시대가 문제되듯이 욕망시대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위가 제일 큰 동물하면 단연 인간. 인간은 못 먹는 것이 없다. 땅속에 나고 생기는 물건에서부터 땅위의 오곡백과, 기어 다니는 벌레, 뛰어다니는 동물, 그리고 하늘에 날아다니는 것에까지 인간은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廣東식 먹기는 그 전형적인 한 보기. 식욕의 팽창은 먹이사슬결단, 생태환경파괴까지 불러온다.

지금 세월은 참 민주적이고 개방적이다. 표현자유, 드러내기 자유를 만끽하는 시대. 자기의 욕망에 솔직한 시대. 그래 억압적인 우울증이나 정신병자는 적은 편. 너무 자유롭고 솔직하다보니 좀 상스럽고 천박한 감을 주기도 한다.

상호(본고에서 말하는 상호는 특정 상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특히 밝히는 바이다)를 좀 보도록 하자.

‘愛得’(백화점 이름), 서비스업체로 얻기 좋아한다는 상호를 가졌을 때 좀 어불성설이고 웃기는 얘기다. 물론 이윤창출을 목적으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얻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없겠지만. ‘놀부집’, 놀부, 누구냐? 놀고먹기 좋아하는 ‘흥부전’의 놀부가 아니냐? 그는 형제정의도 모르는 욕심쟁이 폐륜아. 상호가 그 폐륜아집이라 할 때 이미지가 너무 흐려진다. 놀고먹기 좋아하는 욕심쟁이 폐륜아집에 너무 성큼 발을 디뎌놓겠는가 말이다. 그런 집에 발을 들여놓았다가는 내가 놀부가 될지도 모를 일.近墨者黑이 아니더냐. ‘玩吧,酒吧’, 술 마시면 자연적으로 놀고 싶어진다. 그럴진대 굳이 선정적으로 ‘玩吧’했을 때 주춤해지고 무엇해진다. 잘 하던 짓거리도 멍석 펴놓으며 놀아보라 하면 안 놀지 않은가. 그리고 술 마시고 노는 술집이라 할 때 어떤 야한 난잡한 감도 없지 않아 준다. 이런 천민자본주의의 천박한 냄새가 풍기는 상호에 비해 요새 TV에서 심심찮게 보게 되는 ‘舍得’상표 술 광고가 멋있다. ‘舍得’, 버려야 얻는다는 얘기 같은데 변증법적인 묘미와 깊이가 있다. 그래서 며칠 전 설이랍시고 비싸기는 하지만 ‘舍得’ 술 한 병을 사 마셔보았다.

이런 상호나 상표만의 얘기가 아니고 슬로건에도 욕망은 묻어난다. 작년 설날 저녁 동아시아 4강 축구경기에 2등자리를 두고 항상 ‘앙숙’인 한국과 일본이 붙으면서 고맙게도 명절의 좋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그런데 운동장 주변의 한 프랑카트에 이런 슬로건이 내붙었다. ‘rush러시(중간에 축구공 차는 동작을 한 사람의 아이콘) cash캐시’, 뭐 밀치고 닥치며 공을 잘 차 이겨서 돈을 챙기라는 말 같다. 역시 좀 거칠고 천박하다. 그런데 이런 슬로건 때문인지 그날 한국이 이겼다. 돈욕망을 자극하는 슬로건은 주술적인 마력이 있는가보다. 그래 돈을 얼마나 챙겼는지...

지금은 경제시대라 돈이 하느님이다. 그래 사업을 하는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배 속의 아이도 손을 내밀고 돈~돈~ 한단다. 그러나 너무 돈, 돈 할 때는 어쩐지 밉다. 설날 아침, 손군들이 와서 절을 한다. 나도 어느새 할아버지가 되었다~ 기분이 흐뭇해진다. 참 귀엽다, 기특하다. 그런데 절 한다 꿇어 엎드린 허리를 펴기도 전에 ‘할아버지, 돈, 세배 돈!’하며 손을 내밀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똑 바로 쳐다볼 때는 정말 구린내가 물씬 난다. 젖내가 날 네놈한데銅臭의 구린내가 나다니. 어허, 다음 순간 등골이 서늘해나기도 한다. 어린이는 돈을 몰라야 하는데... 노신선생의 ‘어린 아이를 구하라!’의 말이 가슴에 와 딱 맺히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는 내 학생들도 이런銅臭의 구린내를 풍길 때는 머리가 아찔해나며 질색이다. 아르바이트랍시고 나는 학생들을 잘 부려먹는다. 그런데 그 아르바이트비용이 참 문제다. 물론 돈으로 계산해줄 때도 있지만 맛있는 술 한 잔, 밥 한 끼 사주는 것으로 떼우기도 한다. 스승과 제자 간에 옴니암니 1전2전 따지기보다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으로 아기자기하게 술 한 잔, 밥 한 끼 같이 하며 정담을 나누는 것이 더 좋지 않냐 말이다. 그런데 이 술 한 잔, 밥 한 끼보다는 고 1전2전으로 정확히 계산되는 돈을 좋아하는 학생이 있다. 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아르바이트비용을 청구할 때는 정말 정나미가 싹 떨어진다. 학생은 돈과 거리가 먼 것이 좋은데...

인간의 욕망을 논할 진대 돈도 돈이겠지만 성도 매우 강렬한 것이다. 우리 시대는 확실히 개방되었다.性感, 섹시, 섹스... 뒤안길에 숨겨져 있던 성적 담론들이 어느새 공중담론으로 부상하였다.性感, 섹시는 현대여성의 아름다움의 불가결의 요소로 되었고 섹스도 거추장스러운 아이낳이보다는 순수한 의미에서 암컷수컷의 니 좋고 내 좋은 성희가 되었다. 성적 욕망의 거침없는 분출, 시원해서 좋기는 좋겠다. 그런데 애짤잘하거나 애모쁨이 없어 좀 동식물적인 수준이다. 화사하게 핀 꽃이 자기 성기를 활짝 드러냄이나 발정기의 동물들이 흘레 하나만을 바라고 흑흑 거리듯이. 성적 개방에는 우리 대학생들이 뒤지지 않는 것 같다.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하면 둘둘, 끼리끼리 앉은 남녀 커풀들이 머리를 수굿하고 밀애를 속삭이기에 바쁘다. ‘오늘 강의 이상 끝!’하기 바쁘게 학생들이 교실문 좁다하게 비집고 나간다. 나가는 순간 둘이둘이 좋아하는 남녀 커풀들이 남에게 빼앗길새라 서로 손을 잡아 쥐거나 허리를 감아 안고 나란히 걸어 나간다. 이것이 우리 학교 여름 계절학기 강의 및 하학 모습. 이뿐이랴, 요새 대학생들은 그 좋은 기숙사조건도 마다하고 커플끼리 아예 나가 집을 잡고 새살림을 한다. 돈에 좀 쪼들리는 놈들은 한 아파트에 넷 대 쌍 한 칸씩 나누어 든다. 내 집 맞은 켠에 이런 몇 쌍이 들어 있다. 이들은 연애고 결혼이고 무어고 속도전에 짬뽕식 일사천리로 해제끼는 것 같다. 이들은 자기네 학교 선생인 나를 보아도 한 점 부끄럼없이 당당하고 떳떳하다. 이를 때면 오히려 내가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나며 알은체 인사를 한다. 사실 당당하고 떳떳할밖에. 둘이 좋아서 하는 짓에, 국가 법적으로도 대학생혼인을 허용하는 바에야!

나는 요새 대학생애들이 은근히 부러워나기도 한다. 내 대학교 때 잘 난 계집애들 눈 한 번 똑 바로 뜨고 쳐다보지 못했고 손 한 번 쥐어보지 못한 신세를 생각하면 내가 가련해나기도 했다. 내가 요새 대학생들을 좀 피탈하며 까다롭게 구는 것은 나의 무언중 질투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桑田碧海,海枯石烂, 그렇게信誓旦旦이도령, 춘향 같이 놀던 요새 대학생들이 그렇게 쉽게 하루아침에 빠이빠이를 주어댈 때는 나는 그만 아연실색해지고 만다. 그들은 워낙 연애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결혼까지도 재미, 장난으로 하고反掌如云의 홀가분한 것으로 하는 듯하다. 아니, 속도전에 짬뽕식 일사천리는 쉽게 신물이 나고 빨리 끝나는 법. 그래 나는 그들이 부러워나다가도 그들이 불쌍해났다.

‘육예’고 어쩌고 그것은 봉건냄새가 나니 차치하고라도 우리의 연애는 그렇게 쉽게 홀가분하게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 버리’기 때문. 사랑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기에도 목청이 떨려나고 입안이 말라난다. 그 애짤잘함과 애모쁨이여! 어쩌다 손을 한 번 쥐게 되면 짜릿짜릿 온 몸은 감전된 듯. 키스는 어질어질 아찔해서 못하고. 그러나 달구며 달래며 기다린다-절대절명의 그 순간을. 결국洞房花燭夜까지 골인-아, 신비하고 황홀한 그 밤이여. 동굴은 오픈되어 있다. 꽃은 피어있다. 그런데 좀 어둡다. 손으로 더듬기. 오, 어딘가에서 꽃의 애모쁨 소리는 나는데. 그럼 그렇겠지. 그 애모쁨 소리에 맞춰 샘물은 찰찰 흐르고... 작대기로 찍어보니 그 맛 감미롭기 짝이 없으라! 사랑, 연애, 혼인, 우리는 한 수의 시고 한 폭의 그림이다. 그런데 니들은 뭐냐? 이것도 저것도 아닌 짬뽕에 조루, 음위라 욕망시대의 슬픔, 비극이여!

행복의 기본 원리의 하나는 욕망이 쉽게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옛날 소차를 타고 세월아, 네월아 석 3년을 걸려 친구 집에 도착했다. 이 아니 반가울소냐, 온다, 온다하는 네가 이제야 오너냐? 한 3년 놀다 가라!孔子님이 말한 ‘有朋自遠來不亦樂乎!’란 바로 이런 경지다. 현시대, 비행기, 아니 우주비행선이 날아다니는 시대. 비행기를 타고 옛날 석 3년 걸리던 거리를 씨잉 날아 3시간 만에 친구를 만났다고 하자. 반갑기는 하겠지만 너무 쉽게 자주 만나는 친구, 그렇고 그렇지 뭐. 한 3시간 만 놀다 가라. 그리고 맥 빠진 소리로 다음에 또 와라. 그렇다고 다음에 또 갔다고 하자. 그러면 그 친구 속으로 조용히 되뇌이는 말이, 짜식, 진짜 또 올게 뭐라, 멍텅구리 같은 짜식, 그말 그대로 곧이 듣기는... 인간은 쉽게 이루어지는 욕망에知足者常樂할 줄 모르고 싸가지 없이 이 욕망, 저 욕망으로 옮겨 다니다가 결국 다람쥐 채 바퀴 돌 듯 쉽게 욕망의 노예가 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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