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규의 ‘라면을 먹으며’ / 박명호

돌아앉아 라면을 먹습니다
밖에 비 쏟아지고 천둥 우를우르를 치는 밤
문득 허기가 졌나 봅니다
문득 식욕이 돋아났나 봅니다
세상일과는 아주 무관하게
여백처럼 앉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등 뒤에서 폭우는 더 거세게 나오고
그것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돌아앉아 후루룩후룩 라면을 먹습니다
식어가며 몸집 부푸는 욕망이 마음에 들어
국물까지 들이키니 기어이 눈물납니다
나를 그립게 두지 않으려고
이 밤, 내 안의 서러운 구석구석마다
뜨거움 휘휘 풀어놓습니다

때때로 밤늦은 시간 갑자기 뭔가가 먹고 싶어집니다. 이곳 저곳 기웃거리다가 십중팔구는 라면을 끓어 먹습니다. 곧 배가 불러옵니다. 그러나 포만감은 이내 사라지고 가슴 한 쪽이 아려옵니다. 먹고 싶었던 것이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때때로 뭔가가 먹고 싶은 것일까. 박윤규는 세상일과 아주 무관하다고 애써 강조를 하지만 기실 그 강조는 세상일과 그만큼 관계가 있다는 것일지 모른다. 식어가면서도 몸집을 부푸는 라면처럼 나이 들어가면서도 오히려 부푸는 욕망을 서글퍼합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욕망마저 식어간다면 더 서글픔이 아닐까.


아,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아니 무엇을 먹고 싶어한다. 깊은 밤이면, 밖에 우루루 우루루 천둥치면서 비오는 밤이면 무엇인가 먹고 싶다. 결코 라면으로 그 허기를 메울 수는 없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다. 더구나 본능에 대해서 그 어떤 구속도 반발을 한다. 하지만 관습이나 도덕, 또는 관습이나 도덕으로 포장한 문화에 의해서 그 본능적 자유는 억압되고 세뇌되어진다. 그래서 세상일과 아주 무관하게 순백의 시간을 아니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한다. 그것은 본능에 대한 갈증이라 할 수 있다. 본능이란 평상시에 억눌러 있다가 어떤 계기가 되면 불쑥불쑥 살아난다. 그것이 때때로 늦은 밤 홀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 허기로 덮쳐오기도 한다. 우리는 단순한 허기로 알고 배를 채우지만(그래서 그 포만감으로 자위해 보지만) 근원적 해결책은 아니다. 마치 등 뒤에서 커다란 허깨비가 덮치는 것 같은... 모든 것이 증발해 버린((여백처럼) 빈껍데기 같은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더욱 소리를 내며 라면을 먹는다. 그것이 서러운 것이다. 그것이 40대 후반의 나이다.

옛날에 한 젊은이가 아름다운 요정과 결혼을 했다. 그녀는 하나의 조건을 내걸었다. “화가 나더라도 절대 저를 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젊은이는 물론 그 조건을 흔쾌히 승낙하고 결혼했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날 집에서 키우던 말이 하도 말을 듣지 않는 바람에 남편이 화가 나서 고삐를 집어 던졌는데 그만 아내가 맞고 말았다. 요정이던 아내는 순간 사라져 버렸다. 이 불쌍한 사내는 인내심이 부족한 탓에 아내를 잃고 아이들은 어머니를 잃고 말았다.

마법은 젊음의 이상을 상징한다. 그 이상의 뒷 편에는 완전한 사회, 완전한 지위, 완전한 사랑과 같은 완벽성에 대한 이미지가 숨어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이제 어쩔 수 없이 생활인이 되면서 꿈은 하나 둘 깨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젊은 날에 가졌던 본능적 욕구나 이상은 무의식 속으로 숨어 버린다. 진정한 성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그러한 환상을 버리는 것인지 모른다. 40대에 들면 그 과정의 혼란을 겪는다. 그러다 그 다음에 만나는 것이 빈둥지와 같은 허기다.


그 허기란 것이 지금껏 억눌러 있던 본능이 아닐까. 죽을 때까지 이세를 생산해야 하는 사랑이라는 고상한 이름의 본능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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