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산서당 출판] '조선족 3세들의 서울 이야기' 발취 1

 

[서울=동북아신문] 중국동포 뉴스를 보면 ‘코리안 드림’이 자주 등장한다. 대부분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돈 벌러 온 사람들의 얘기다. 그들의 고통, 슬픔을 담은 많은 글들은 한국 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폭로하고 있다. 즉 그들이 얼마나 한국의 주류 사회와 격리되고 있으며, ‘코리안 드림’은 결국 그들만의 ‘꿈’으로 끝난다는 얘기다. 같은 동포로서 그들의 처지에 대한 ‘동정’과 안타까움은 어쩔 수가 없다. 당연히 오늘도 코리안 드림은 진행형이다. 2010년까지 한국에 체류하는 44만여 명의 동포들이 코리안 드림을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엄동설한에도 작은 쪽방에서 난방비를 줄이려고 전기담요를 이용하면서 비용을 최소화하고 있다. 연세가 50, 60이 넘었고 고된 노동에 몸은 성한 곳이 없지만,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하다 중국의 고향으로 돌아가자마자 한국에서 곪은 병으로 세상 뜨셨다는 ‘코리안 공포’에 전율하고 있다.

 ‘코리안 드림’은 한.중 수교 20년 동안 주류를 이루었고 부단히 반복되고 있다. 이는 한국의 경제 발전을 위한 저렴한 노동력의 점진적 유입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단순 반복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족의 운명을 걸고 코리안 드림을 실현하려고 온 동포들에게 이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의 창출과 새로운 운명의 탄생일지도 모른다.

나는 코리안 드림을 이뤄 온 부모 세대에 이어 ‘어게인 코리안 드림’(again korea dream)을 이뤄 갈 2세대인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내가 한국에 온 지도 벌써 7년이 넘었다. 나와 나의 아내는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대학에 교수로 취직하여 성공한 엘리트 부부로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기도 한다. 나의 아들 또한 한국에서 출생하여 한국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 또한 남다르다. 하지만 이 글은 중국동포들의 입장과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므로, 일부 입장 차이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미리 양해를 구한다.

나는 대한민국의 한 동포로서 모국 사회가 더 건전하고 밝아지기를 바라며, 주변 국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고 싶은 사회적 이상을 가지고 있다. 또한 ‘우리’라는 ‘동포’의 외연을 넓혀 상호 포용하며 상생의 길을 가는 더욱 존경받는 한민족 공동체를 꿈꾼다. 그런 고민은 나의 글 전반에 관통될 것이다. 내가 ‘어게인’이란 용어를 쓰는 것은 부모 세대의 지속이라는 뜻이며, 부모 세대의 동포들과 단절할 수 없는 유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세대의 꿈은 단순한 불운과 고통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상상하고 실천하는 ‘뉴’(new) 코리안 드림이다. 

2003년 9월 27일 내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나는 주변에서 한국 생활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의 큰외삼촌은 한국에서 일하면서 병을 얻고 중국에 돌아간 지 몇 개월 안 되어 세상을 떠났지만, 나의 삼촌 내외는 한국에서 몇 년 동안 일하여 코리안 드림을 실현하였다. 그들은 한국에서 6, 7년을 일하면서 수천만 원을 저금하여 중국에서 집도 사고 아들 결혼시킬 수 있는 돈을 마련하였으니,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죽지 않고 큰 병이 없으면 본전이라는 말도 있다. 막내삼촌도 서울에 와서 일한 지 몇 달 안 돼 고공에서 추락하여 다리를 다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보상금으로 몇 백만 원 받고 몇 개월 간 무료 치료를 받기는 했지만, 평생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걸어야 했고, 비 오는 날에는 그 시큼한 아픔을 견뎌야 했다.

이런 사례는 주변에 비일비재하다. 이렇게 힘들게 생명을 무릅쓰고 돈을 벌지만, 중국에 체류하는 2세 자녀들 중에는 코리안 드림의 뒷면에 숨은 ‘코리안 공포와 위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르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이는 이미 중국동포 사회의 일상이 되어 있다. 한국에서 ‘노동’으로 돈만 벌 수 있다면, 위험, 심지어 죽음까지 각오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국에 들어온다.

그들은 그렇게 번 돈에 대해 ‘떳떳하다’는 도덕적 감정을 넣어서 표현하고 있다. 즉 ‘훔친 돈’이 아니라 피와 땀을 들여 번 돈이기에 그 돈 자체에는 모든 ‘도덕’과 ‘이념’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려받은 유산 ‘반짝반짝 빛나는’이란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이 드라마에서 가난과 빚, 그리고 아버지의 도박 때문에 대학에 못 간 ‘황금란’이 출생의 비밀을 알고 부잣집 친부모한테 찾아간다. 우리 집도 20년 전에 중국에서 한화로 천만 원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중국 과 한국의 환율을 비교하면 황금란의 아버지가 진 빚 6억 이상과 맞먹는다. 즉 우리 집은 농촌 시골의 초가집이어서 집을 팔아도 진 빚의 10분의 1도 갚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나를 대학까지 공부시킨 것을 보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 몇 번이나 빚을 독촉하는 채권자들이 집에 찾아왔다. 이 가운데에는 친척도 있었는데, 얼마나 야박하게 대했는지 부모님께서 눈물을 흘리는 것도 여러 번 보았다.

그래도 부모님은 열심히 농사일을 하시면서 자식들의 도시락에 계란, 고기를 넣어 주셨고, 좋은 옷, 좋은 신발을 사 주시면서 자식들의 자존심을 지켜 주려고 하셨다. 이런 부모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지금 부모님은 자식을 넘어 손자한테 모든 애정을 쏟고 있다. 우리 집은 한국에서 보기 드문 3세대가 함께 사는 5인 가족이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갈 때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자를 데리고 가는데, 주변의 많은 한국 부모들이 이를 보고 부러워하고 있다. 우리 집은 비록 나와 아내가 교수가 되고 계층적 지위는 상승하였지만, 여전히 전통적 가족의식과 마을 공동체의식이 살아 숨 쉬고 있는 집안이라는 것이 무척 흐뭇하다.

▲ 일본 교토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부경대학교 예동근 조교수
내가 다닌 초등학교도 여전히 시골 학교이다. 당시 전체 학교의 학생 수가 80명이 넘지 않았고, 12명 교사 중 절반 이상이 중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민반(民辦) 교원이었다. 민반 교원은 정부에서 봉급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세금을 거두어 봉급을 주는데, 대부분이 마을 사람들이다. 마을 교사들은 농사가 바쁜 시기에는 잠시 수업을 중지하고 농사일을 하면서 강의를 할 수 있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내가 공부하던 시기에는 경제가 낙후한 지역에서는 이런 관행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후에 알았는데, 내가 속한 현(한국의 군에 해당)은 전국적으로 빈곤 지역에 속해 있었다.하지만 나는 초등학교 스승들한테서 제일 좋은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 분들은 마을의 공동체의식을 고스란히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우리는 학교의 밭에서 일하면서 ‘노동’을 배웠고, 함께 산과 마을에서 놀고, 친구들 집에서 함께 숙제를 하였다. 별빛이 총총한 저녁, 이야기꾼 할아버지들의 구수한 얘기를 들을 수 있는 동네……. 그리고 무서운 꿈에 이부자리에 오줌을 싸고 나서 키짝(황해도 방언으로 키를 말함) 쓰고 소금 얻으러 가던 중에 들은 이웃집 아주머니들의 웃음소리가 여전히 귀에 울린다. 이런 얘기는 마치 한국의 1950, 60년대 얘기를 하는 것 같고, 지금의 30대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감히 어려서 시골에서 경험한 것들이 교육의 진수라고 얘기 하고 싶다. 나는 어려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도 여전히 시골 학교이다. 당시 전체 학교의 학생 수가 80명이 넘지 않았고, 12명 교사 중 절반 이상이 중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민반(民辦) 교원이었다. 민반 교원은 정부에서 봉급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세금을 거두어 봉급을 주는데, 대부분이 마을 사람들이다. 마을 교사들은 농사가 바쁜 시기에는 잠시 수업을 중지하고 농사일을 하면서 강의를 할 수 있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내가 공부하던 시기에는 경제가 낙후한 지역에서는 이런 관행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후에 알았는데, 내가 속한 현(한국의 군에 해당)은 전국적으로 빈곤 지역에 속해 있었다.하지만 나는 초등학교 스승들한테서 제일 좋은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 분들은 마을의 공동체의식을 고스란히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우리는 학교의 밭에서 일하면서 ‘노동’을 배웠고, 함께 산과 마을에서 놀고, 친구들 집에서 함께 숙제를 하였다. 별빛이 총총한 저녁, 이야기꾼 할아버지들의 구수한 얘기를 들을 수 있는 동네……. 그리고 무서운 꿈에 이부자리에 오줌을 싸고 나서 키짝(황해도 방언으로 키를 말함) 쓰고 소금 얻으러 가던 중에 들은 이웃집 아주머니들의 웃음소리가 여전히 귀에 울린다. 이런 얘기는 마치 한국의 1950, 60년대 얘기를 하는 것 같고, 지금의 30대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감히 어려서 시골에서 경험한 것들이 교육의 진수라고 얘기 하고 싶다. 나는 어려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지금 중국에서도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 중국의 대학 교육은 시장화로 흘러갔고, 등록금은 열 배 이상 올랐다. 나는 대학, 대학원까지 등록금을 면제받았고, 매달 대학으로부터 생활보조금과 장학금을 받았으며 기숙사비도 거의 무료로 학교에 다녔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사회주의 중국’에 큰 빚을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생들은 별로 국가에 감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더는 국가 돈이 아니라 부모님의 돈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학교를 ‘사회주의 대학’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성적은 우수하나 대학에 가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사회와 빈곤에 대한 불만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고, 사회적 갈등은 신속하게 확산되고 있다. 나처럼 가난한 농촌에서 자란 아이들은 교육을 통한 신분 상승의 길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심히 우려되는 일이다.

특히 재중동포들이 집거하는 지역은 베이징, 상하이 등 수도권 지역과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설사 다른 통로로 대도시에 진출한다 해도 최근 10년 사이에 가격이 10배나 뛴 토지와 주택은 농촌에서 수도로 올라온 젊은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는다. 즉 현지에서 사는 시민이 아니라, 마치 한국, 일본에 이주한 국제 이주노동자와 비슷하게 ‘2등 시민’ 혹은 중국식의 호칭으로 ‘농민공’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최근 10년 사이에 모든 비용이 10배 이상 올라갔지만, 임금, 특히 저소득층의 임금은 3배 이하로 오른 것이 현실이다. 국가와 시장으로부터 받는 이런 불이익은 부모 세대부터, 아니 할아버지 세대부터 시작해 적어도 50년 이상은 지속되어 왔다. 이 때문에 바로 중국에서 ‘농민, 농촌, 농업’에는 항상 중국 정부에서 특별 지시가 내려오지만, 아직도 수억의 중국 농민과 그의 자녀들이 피와 땀으로 원시적 자본을 저축하여 국민경제의 기반을 마련하고 있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 후손들이 대도시 진출이란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것일 뿐이다.그래도 재외동포에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바로 옆에 한반도란 모국의 영토가 있고, 국경을 넘어 대도시로 진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역사적.지역적.언어적 자원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남겨 놓은 일본어, 한민족으로서 고스란히 지켜 온 모국어, 사회주의 시기에 물려받은 러시아어와 지연적 관계를 충분히 활용하여 국제적 이주를 시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고 도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선 한 가족이 가면 친척들이 따라서 가고, 어느 정도 정착할만한 돈이 마련되면 이웃 사람들도 함께 따라서 가 가족, 친척, 마을 사람으로 집단적 출국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것도 국가가 내린 “정부가 돕지 못하니, 스스로 잘 살아 보세”란 시험지에 답을 쓰는 수험생의 경쟁 같기도 하다.

‘못사는 사람’은 열등생으로 낙인이 찍히는 경쟁에서 그들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개인 스스로도 잘살 수 있어!” 하며 국가 중심의 가부장주의에 대해 탈출하고 반항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국가의 간섭에서 벗어나 ‘개인 탄생’ 시대를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세대는 개인주의의 출현과 함께 나타난 세대이며, 지역적 경쟁과 새로운 민족적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민족과 마을에 제한된 공동체의식을 물려받았다고 볼 수도 있다.또 하나의 유산은 불굴의 투지로 도전하는 정신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시작된 생존경쟁이기도 하며, 국가적 차원의 경제적 보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믿을 것은 가족밖에 없기 때문에 가족주의가 더 발전하게 됐다.

나는 또 개인적으로 볼 때 제일 큰 장점은 바로 ‘압축적인 시대적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선진국이나 어느 정도 발전한 국가의 같은 세대들이 전혀 경험하지 못한 좋은 경쟁 자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과 비교해서 말하면 한국의 1960년대에서 현재까지를 직접 경험하였다는 것이다. 위에서 얘기한 나의 소싯적 경험은 한국의 동년배들은 전혀 경험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또한 중국의 수도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면서 체험한 경험, 서울에서 6년 넘게 생활하면서, 그리고 한국의 1960년대에 해당되는 시골에서 중소 도시, 서울, 외국 도시를 두루두루 경험하면서 넓힌 식견은 가장 소중한 교육적 자원이라고 생각한다. 시대적 도전 거창하게 보이지만 나는 그런 ‘시대적 도전’이란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1999년 나는 달랑 이불 짐 하나 들고 베이징에 가서 지하 2층에서 대학원 입시 준비를 하였다. 요즘 유행어로 말하면 ‘생쥐족’과 ‘고시족’에 속한 것이다. 내가 대학원 다닐 때만 해도 베이징에는 전국에서 몰려드는 대학원 입시 지망생들로 베이징 아파트 지하방이 모자라는 보기 드문 광경이 벌어졌다. 대학원의 입시 경쟁 또한 본과생들 못지않게 치열하였다. 나같이 시골 대학에서 온 입시생들은 베이징이란 도시 생활에 대한 갈망, 그리고 인생 역전의 마지막 티켓일지도 모르는 시험 경쟁에 목숨을 걸고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매일 아침마다 학교 식당에서 죽 한 그릇, 만두 두 개로 끼니를 때우고 따뜻한 물을 담은 보온병을 들고, 밤 12시 넘게까지 공부했다. 특히 중국에만 존재하는 대학원 통일 시험에서 정치와 외국어는 필수 관문이었다. 전국의 평균 성적이 40~50점을 넘지 못하게 만든 어려운 시험은 베이징에 있는 대학원에 입학 하려면 평균 60~80점을 넘겨야 했다.

나처럼 시골에서 올라온 학생들은 베이징의 대학생들과 달리 체계적으로 입시 강의를 들을 수 없고 입시 정보 또한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입시 전문 업체에서 초빙한 모 명문대 교수의 시험 전 특강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특강비도 엄청 비싸고 오래 전부터 예약해야 했는데, 강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칠세라 귀를 쫑긋하고 들었다. 대형 강의실에는 자리가 모자라 쥐가 피해 갈만한 틈새도 없을 정도로 수험생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정말 하나의 ‘광기’이기도 하겠지만,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짐작하게 하였다. 모두들 나처럼 이것이 인생 역전의 마지막 기회라는 각오로 모든 것을 걸고 기적을 기대하는 광신도 같았다. 외부에서 보면 장엄한 종교 행사보다 더 장엄하고 진지할지도 모른다(나는 아직 종교가 없다).

어쨌든 이 사회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현장을 직접 느껴 본 경험은 내게 매우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대학원 입학후 대학원 기숙사로 이사 가기 전 한동안은 여전히 지하 2층에서 생활하였다. 그때 한 방에 4명이 함께 살았는데, 몽고족 2명과 후난성의 인구 300만이 넘는 중등 도시의 TV 방송국에서 온 친구와 함께 지냈다. 몽고족 친구들은 내몽고민족사범대학의 교사들이었다. 그들은 베이징에 1년 정도 연수받으러 왔고, 후난성 친구는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러 왔다. 우리는 매우 친하게 지냈다. 우리는 매주 두 번씩 베이징의 명문대학에서 하는 특강을 듣고 와서 열띤 토론을 벌였는데, 민족문제, 지역자치, 사회통합, 사회정의, 미디어의 역할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얼굴을 붉히며 논쟁하기도 했다. 서로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국가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 자기의 논리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방학에는 버스를 세 번 넘게 바꾸어 타면서 한 시간 반 동안 이동하여 한 사립박물관의 통역 알바를 하고, 저녁에는 공부를 하였다. 시골에는 비할 수도 없이 좋은 대도시의 문화적 환경에 매료 되어 마음껏 문화적 갈증을 풀기도 했다. 그 무렵 베이징의 재중 동포 대학생들을 모아 대학생 단체를 만들었고, 처음으로 인터넷 사이트를 구축하여 대학생들의 교류를 활성화시켰다. 그때 이 일을 하면서 뜻을 같이했던 친구들은 지금도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지인들로 남아 있다. 그 당시 정치.사회적 환경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루어 낸 일이기도 하여 감회가 더욱 남다르다.

나는 중국의 변화 속에서 우리 세대는 좋은 시대를 만나 좋은 경험을 한 행운아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몸에는 시대적 도전 정신이 깃들어 있다. 나는 이 세대를 70후(後) 세대라고 정의하고 싶다. 중국에서 1950년대, 60년대 출생자들은 문화대혁명을 겪었는데, 이들은 ‘잃어버린 세대’라고 불린다. 하지만 70후 세대는 문혁의 종결과 함께 세계를 향해 문호를 개방하고 경제발전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지는 시대에 태어났다. 이들은 경제적 부의 증가, 비교적 안정된 정치 환경에서 균형 잡힌 감각을 가지고 시대를 고민할 수 있었다. 즉 50년대, 60년대 초의 세대들이 마오쩌뚱(毛澤東)의 세대라면, 70후 세대는 덩샤오핑(鄧小平)의 세대라고 할 수 있다.

 현재 70후 세대는 점차 중국 사회의 중견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이 사회를 10~20년 이끌어 갈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 이 세대는 공동체 경험을 토대로 개인의 자유와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함과 동시에, 중국 문화대혁명의 종결과 함께 태어났기 때문에 실용주의가 중요한 인생철학으로 배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치열한 생존경쟁을 경험하였기에 냉철한 현실주의, 도전정신과 함께 근면한 노력파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 시기에는 인재를 필요로 했고, 대학을 졸업한 것 자체만으로도 사회적 인재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80후 세대와 90후 세대에게는 그런 기회가 사라졌다. 단순한 예를 들면 2000년에 본격적으로 실시된 대학생 확대 모집으로 대학생 수가 2배, 4배나 불어났다. 또 80후, 90후 세대는 1자녀 정책이 엄격히 실시된 독신 자녀 세대로 대학 교육의 기회는 훨씬 많이 늘어났지만,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드는 사회.경제적 배경에서 실업자로 추락하였다. 이들은 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이 늦어지고 부모에 대한 의존이 더 커지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개인주의와 가족주의라는 상충되는 현상이 80후 세대, 90후 세대에게 더 집약적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 개혁의 성과물은 균형적으로 배분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층의 이익을 수호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중국의 주택, 교육, 의료 등 모든 분야가 젊은 세대일수록 더 불리하게 되어 있고, 낙후한 지역 출신자는 지역적 불평등을 받게 되며, 중국어를 능란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소수민족일수록 일자리 찾기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민족차별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항상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 세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질문을 하면서 살아왔다. 나도 70후 세대로서 점차 기득권을 갖게 됨에 따라 보수화로 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그렇다면 80후, 90후 세대는 도전하지 않는 세대들인가? 그들은 사리사욕하고 개인주의가 지나치다는 일부 언론의 비판에 우리 세대도 부끄러워해야 하고 책임질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국가개혁에서 경쟁기회 구조의 양극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즉 글로벌 경제 환경에서 훨씬 더 좋은 일자리가 창출되었는가 하면, 전반적인 일자리 축소로 실업의 위기를 겪는 ‘일자리 양극화’로 인해 ‘가난한 2세대’와 ‘부유한 2세대’로 세대 내 양극화가 나타나면서 사회적 갈등은 갈수록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88만 원 세대와 재벌 3세, 일본에서 니트족의 출현처럼 동아시아 전반에서 유럽 선진국들이 겪은 ‘청년실업’과 ‘사회적 혼란’이 발생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국가와 사회는 젊은이들이게 도전의 기회를 주고, 일정한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기회구조가 형성되어 젊은이들이 도전정신으로 사회를 보다 정의롭고 풍요롭게 바꾸어 가는 데 앞장서야 사회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모든 젊은이들을 익사시키고 있으며, ‘창의성’을 강조하지만 이런 창의성은 이익 창출을 위한 시장 중심의 실용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깊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창의성은 경험과 지식의 축적이 상호 결합하여 재창출되는 과정에서 생긴다. 지식 축적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열정과 도전에서 나오는 인생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도전은 참으로 중요하다.

지금은 대학에서 국제화지수가 높게 평가됨에 따라 교환학생, 취업 프로그램 등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이는 개인이 일정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는 모험이 없는 비교적 안전한 ‘적응’이지, ‘도전’이 아니다. 또 이것은 취업용 발상일 뿐, 오히려 진정한 ‘창의력’을 말살할 수도 있다. 이런 교육 시스템에서 ‘창의력’이 고갈된 젊은이들이 40대의 중견 세대에 들어설 때 어떻게 국가와 사회의 핵심 아젠다를 설정 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겠는가. 젊은이들에게 진정으로 국가와 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함께 해결함으로써 공동체의식에 기초한 문명화의 교육 환경은 갈 수록 축소되고 있다. 주택의 양극화, 소득의 양극화로 젊은 층들이 여유로운 시간과 유연한 사고를 갖기에는 너무나 벅찬 사회적 환경이 되고 있다.

중국의 대학과 대학원의 교육 시스템은 한국과 비교할 때 보잘 것없이 낙후했고 교수들의 봉급도 매우 낮았지만, 그 시기에 그 사람들은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지금 건물을 포함한 각종 허브 환경은 이제 한국을 넘어설 정도로 잘 되어 있는 대학 이 많고, 교수들의 봉급도 높아졌다. 하지만 교수들의 사회에 대한, 그리고 학생들의 미래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자본주의가 진화될수록 대학은 공장으로 변모 되고 있고, 학생은 제품으로 변하고 있다. 우리는 시간에 따라 조금씩 성숙되는 ‘자연성 창조’를 갖는 데는 너무나 많은 비용이 든다고 생각하고 포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프로그램에 의해 만들어진 ‘숙성 적응’이 ‘창조’로 둔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시 대학 설립의 취지와 본질에 대해 문할 필요가 있다.한국이 나에게 준 선물 나는 여러 번 이런 질문에 답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 얻은 제 일 큰 성취는 무엇인가? 이제는 모 국립대학에 취직해 비교적 안정적인 직장과 사회적 신분을 보장받은 것은 눈에 띄는 실용 적인 성취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7년 넘은 한국의 경험에서 나같이 인문사회과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고의 자율성’을 획득한 것이다. 한국에서 나는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고 동료들과 자유롭게 학술적으로 교류할 수 있게 됐다. 어쩌면 이것은 학문의 기본 이지만, 나는 이 학문의 기본적 토대도 한국의 민주화가 가져다준 성과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정말로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지금의 대학생들은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자유로워진 것은 불과 30년이 되지 못하지만, 많은 대학생들 중에서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나보다 더 깊이 느끼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고의 자율성’, 조금 더 넓게 확대하면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고 있으며, 이것이 학문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기에, 나의 학문 분야에 대해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한국에서 받은 제일 큰 선물이 ‘사고의 자율성’에 기초한 ‘독립적 사고능력’이다. 여기서 조금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조금 더 자유롭고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또한 박사과정을 거쳐 조금 더 치밀하고 논리적인 사고와 독립의 능력이 향상됐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독립적으로 학문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는 평생 나를 즐겁게 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와 신분을 가질 때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다. 하지만 나는 한국의 경험을 통해 빨리 성장하였다는 측면에서 매우 큰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제 사고와 생활의 영역에서 중.한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분석할 수 있는 독특한 시각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좋은 자산이 됐다. 이런 성취를 이루는 데는 한국에서의 두 가지 특별한 경험이 토대가 되었다. 하나는 한국의 재중동포들이 집거하는 가리봉동에서의 사회활동이며, 다른 하나는 안산에서의 연구 경험이다.

가리봉동의 사회활동 경험은 실천의 중요성을 알게 하고 공동체의식을 좀 더 향상시켜 주었다. 나는 2003년 9월 27일 서울에 도착했는데, 도착한 그 다음날 한국에서 국적포기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N목사를 찾아갔다. 이는 워낙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라, 자칫하면 재중동포 사회를 분열시킬 위험도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에 체류하는 재중동포들은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었는데, 이 운동은 한국에서 체류할 수 있도록 하는 최후의 저항적 수단일 수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시점에 재중동포 문제는 인권대 주권의 대결구도로 가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특히 N목사의 인권적 민족 접근과 조선족 공산당 간부를 대표하는 엘리트 계층의 주권적 민족 접근의 대결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중대한 문제를 한국에 박사 공부를 하러 온 일개 유학생이 해결하려고 나선다는 것이 참 어이없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때 한국에 체류하는 재중동포들은 대부분 노동이주로 불법체류 상태가 많아 그들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내가 나서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결과적으로 해결은 하지 못했지만,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장은 마련하였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몇 차례 N목사를 찾아가 중국의 여러 가지 상황을 설명하면서 소통하려고 노력하였고, 또 한국 시민단체 지도자의 시각에서 재중동포 문제를 고민하는 시각도 알게 됐다. 이 사건으로 N목사 중심의 그 단체에 몸담고 있던 중간층 리더들이 신속히 이탈하면서 별도로 작은 동포 관련 시민단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나는 2003년 11월 24일 40여 명의 재한 조선족 유학생들과 함께 재한조선족유학생네트워크를 출범시켰고, 재한 조선족 동포의 법적 지위 보장과 재한 조선족 동포의 이미지 향상을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그때에는 지금 생각해도 정의롭고 충실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동포들을 위한 위문공연, 화합과 공존을 위한 거리 만들기 등 여러 가지 이벤트를 만들면서 지역사회의 화해와 공존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나는 이런 활동을 조직하면서 마치 한국의 1970년대 도시빈민 운동가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들이 판자촌에 가서 한 빈민운동은 나한테 많은 도움을 주었고, 한국 사회를 좀 더 깊게 이해하게 하였다. 나는 마치 한국의 1970년대에 체류하는 느낌을 받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70년대 빈민운동, 80년대 민주화운동 시대 한국 젊은 청년들의 위대한 실천을 어느 정도 몸으로 느낄 수 있었고, 그 시대의 학자들과 얘기도 잘 통하였다.

정말 밤을 새면서 오랫동안 얘기할 수 있는 학자들을 만나면서 참 양심 있고 훌륭한 지식인들이 많구나, 이것이 오늘도 대한민국이 밝은 미래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이구나 생각하기도 하였다.

 지금 대학생 세대들은 간접적으로 이런 경험을 공유하고는 있지만, 얼마나 자발적인 힘으로 재생할 수 있는 창조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약간 걱정이 되는 부분도 있다. 바로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형성된 교육체제의 시장화, 공리화가 너무 빨리 확산되고 있으며, 대학생의 대량생산, 대량실업 시스템에서 그들의 창조적 기회구조가 박탈되고 축소됨으로 인해 사고의 폭과 마음의 여유는 한없이 움츠러들고 멍들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세대 간 타협과 연대, 공동체의식의 증가, 혁신을 상상하는 창조자라는 주체로 자리매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에 대해 너무 잔혹하게 가해 행위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80후, 90후 세대들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 수 있는 좋은 여건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 적인 제도적 환경, 경제적 성장이 뒷받침되는 사회복지, 지식 축적의 속도와 양도 상당하여, 많은 개발도상국가의 젊은 세대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좋은 물질적 조건과 여유 있는 환경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창조적 파괴’의 기반을 마련한 것은 바로 물질적 조건이 극히 열악한 조건에서 성장한 1970년대 말, 1980년대의 대학생들이란 점을 볼 때 진정한 혁신의 주체는 국가의 경제적 부, 양호한 제도적 환경과 꼭 정비례해서 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리봉동의 경험이 부모 세대와의 연대를 넓히면서 약소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실천적 경험이었다면, 원곡동의 경험은 국제연대의 고민을 실천으로 옮기게 하였다. 경기도 안산시 원곡 동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 집중촌에 가지 않았다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원곡동에 있는 동포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같은 처지에서 일하는 동남아 외국인 노동자들의 처우는 동포들보다 더 열악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처음으로 피부색이 다르고 국적이 다른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몸으로 겪으면서 연대를 모색하기 시작하였고, 인권문제를 보다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의 닛케진 사례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일본까지 가 현지 조사를 하면서 대안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다행히 이런 노력은 학술적 연구로 지속되게 되었고, 특히 거주권을 중심으로 생활 영역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논리를 만들게 했다. 또한 본격적으로 안산의 외국인 노동자를 연구하면서 다양한 실천 활동에 참여해 한국의 노동문제, 인권문제, 민족관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하게 되었고, 차후 다문화사회의 도래와 함께 사회 통합의 대안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이것은 마이 너리티의 한 분야로 어떻게 소수자의 권익을 보장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었으며,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제도화에 대한 새로운 도전으로 연결시키면서 한국 민주주의가 어디까지 왔는가를 자주 질문하게 하였다. 한국에서 수많은 경험을 했지만 특히 이 두 경험을 사례로 드는 것은, 이는 한국의 자부심과 연결되는 민주주의, 그리고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대한 절차를 고찰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어느 정도 한국의 미래에 대해 예측할 수 있는 부분으로서 내게 매우 중요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나는 나름대로 함께 코리아의 미래를 꿈꾸는 데 참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으로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한국에 사는 소외된 재외동포들과 함께 한국의 미래를 꿈꾸고 있는가? 다행히 내 주변에는 이런 훌륭한 한국동포들이 많다. 나는 이들과 함께 ‘새로운 한국의 미래’를 기획하면서 재한동포들의 권익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을 찾고자 한다. 또한 ‘재중동포를 넘어 세계동포’로 확산하면서 다국적.다인종 사회로 진행되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 문제에 접근하면서 더 밝은 한국 사회의 꿈을 꾸고 있다.

민주주의도 어느 정도 완성돼 가고 경제성장도 아시아의 기적을 이룬 한국의 경험이 마이너리티의 불평등 문제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을 때, 이는 중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나는 한국의 경험을 기반으로 중국의 농민공 문제와 그 자녀들의 교육문제를 더 심도 있게 연구하고 해결 방안을 찾고자 한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한국 사회의 양극화도 매우 심각하다. 비록 아직 뾰족한 해결책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민사회 영역에서 부단히 개발되고 제공되는 아젠다와 이를 받아들이는 정부의 노력으로 가능성이 보이기도 한다. 나는 이런 불꽃들을 열심히 모아 보다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새로운 복지국가를 꿈꾸는, 새로운 녹색성장을 꿈꾸는 자들과 함께 ‘코리안 미래’를 고민하고자 한다.

다시 정리하면 우리의 부모 세대들은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가족과 자식을 위해 ‘코리안 드림’을 실천하였다면, 우리는 부모들의 피와 땀으로 한국 사회 진입의 티켓을 갖고 ‘신(新)코리안 드림’을 꿈꾸고 있다.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보다 넓은 공동체의식을 확산시키면서 종족주의를 넘어 공동체 연대를 형성한 우리들의 몸에 배인 경험을 잘 발굴하면, 보다 큰 꿈을 꾸는 시대가 열릴 것이라 굳게 믿는다.

편견과 차별의 소리를 내는 ‘드림’(dream)이 아니라 모두가 어 울려 함께 즐거운 소리를 만드는 ‘드림즈’(dreams)를 향하여….

펴낸곳 : 백산서당, 283페이지, 14,000원, 문의 02) 2268-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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