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불타는 반도

장혜영

4장 뜨거운 여름


2



한종수는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라디오방송을 통해서 청취했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국군의 총 반격으로 적은 퇴각중입니다. 우리 국군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할 것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사람을 흥분시키는 승전소식은 이튿날인 26일에도 계속 방송되었다.
“우리 옹진지구의 국군이 해주시를 점령하였습니다.”
그러나 27일 오전 6시 뉴스에서는 느닷없이 국민의 흥분을 깨트리는 수원천도소식이 방송되었다. 뒤이어 28일에는 서울함락비보와 국군패전소식이 연달아 날아들었다. 며칠이 지나자 북쪽으로부터 피난민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평택, 오산, 대전에서 미군이 인민군에게 패퇴했다는 놀라운 소문까지 파다했다.
한종수는 그때까지도 지서를 떠나지 않고 있었지만 지방정부 관료들이나 군인, 지방 유지들이 모두 피난을 떠나가는걸 보자 몰래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래서 가문의 어른이시자 마을 이장인 큰할아버지께 은근히 속내를 타진해 보았다.
“할아버지, 모두들 피난을 가고 있습니다. 즈그들은 우짤 겁니까?”
“나라가 망하는데 가긴 어딜 간단 말이냐. 여긴 내 땅이야. 난 죄 지은 일이 없으니 도망칠 필요가 없다. 늙은 것이 살면 얼마나 살겠다고 개처럼 도망을 다녀. 난 상관 말고 너희들이나 떠나거라.”
손자를 잃은 후 한상진은 면부 중풍까지 지나가 온종일 걷잡을 수 없이 오른 볼 근육이 씰룩거렸다.
“아직 빨갱이들이 역까장 오자면 멀었응께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유엔군을 거느리고 북괴군의 침공을 막고 있응께 그라게 쉽게 밀고 내려오든 못하겠디요. 쬐깨 형세를 지켜보다가 적절한 시기에 피난가도 늦든 않을 겁니다. 사실 북괴군이 역까장 밀고 내려오면 대한민국은 끝장이 난거나 마찬가디 아니겠습니까.”
“구례 화엄사엘 좀 다녀와야겠다. 대한민국을 보호해 주십사 영험하신 부처님께 불공이나 드리고 싶구나.”
“할아버지. 오늘은 지가 모시겠습니다.”
평소 같으면 마을사람 중 젊은이를 뽑아 이장을 수레에 모시고 다녀오라 했을 테지만 요즘은 뒤숭숭한 전란 중이라 신변안전보장을 위해 종수가 직접 나섰다.
7월에 접어든 날씨는 아침부터 폭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산과 들은 시루속의 떡처럼 푹푹 익어나갔다. 종수는 수레 위에 볏짚과 이불을 펴고 그 위에 햇빛을 가릴 차일까지 친 다음 큰할아버지를 모시고 길을 떠났다. 동네 사람들이 길에 나와 이장과 지서장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들 속에는 지리산공비인, 죽은 덕수의 형 덕재와 그의 사촌 여동생 향란이도 있었다. 향란은 아기를 업고 덕재의 등 뒤에 숨어서 동구 밖으로 사라지는 종수네를 지켜보았다. 요즘 인민군이 남진하자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공비가족들과 바닥 빨갱이들의 분위기를 한종수는 진작 낌새챘지만 형세가 어떻게 번질지 몰라 잠자코 거동만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마을의 살림집 벽이나 국민학교 벽에 이상한 구호가 나붙기도 하고 끼리끼리 한 집에 모여 숙덕공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들은 간혹 거리에서 종수와 마주쳐도 평소처럼 비굴하게 허리를 굽실거리며 아첨을 하지도 않았다. 거만하게 고개를 뻣뻣하게 쳐들고 거들먹거리며 노골적으로 비난의 눈길을 던지기까지 했다.
네놈들이 아무리 그래 보았자 그게 며칠이나 갈 것 같으냐. 실컷 거들먹거려봐라. 대가를 치를 날이 꼭 올 테니 두고 보자!
요즘은 평소 종수의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개처럼 굽실거리던 덕재란 놈마저 간덩이가 부었는지 그를 만나면 비아냥거리기까지 한다.
“지서장님학꼬 이장님학꼬는 피난얼 안가능가라우? 넘들언 피난간닥꼬 야단법석인디.”
“우리가 머땜시 피난가. 산곡리 주인은 우린디 누가 무서워서.”
“듣작할랑께 인민군대는 남진함시로 경찰이나 이장부텀 죽인닥허던디.”
그놈 덕재는 지리산 공비인 동생이 그의 손에 잡혀죽은 일로 가슴에 한을 품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향란이마저 요즘은 부쩍 마을을 쏘다니며 부산떨고 있다. 너희들 세상이 온 줄로 착각하지만 어림도 없다. 우리 뒤엔 유엔군이 있다.
산곡리에서 구례군 화엄사로 가자면 노고단을 넘어야 했다. 녹음이 우거진 숲 속으로 산길이 뚫려 햇빛의 직사광이 가린지라 평지보다는 훨씬 서늘했다. 뭇 새들이 이름 모를 수백 종의 우거진 나무숲 속에서 우짖는 소리를 들으니 세상에 전쟁 같은 것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평화롭기만 했다. 산속은 간혹 산토끼나 꿩덫을 놓는 사람들이나 산나물, 버섯, 약초를 캐는 사람들이 보일 뿐 한적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지리산엔 공비들이 활동해 다니기가 위험했지만 지금은 공비도 거의 소멸되어 위험수위도 그만큼 낮아졌다. 노고단을 넘어 동남쪽 계곡인 피아골은 공비들의 소굴이어서 한종수도 몇 번 경찰부대를 따라 토벌을 나왔었다. 그런데 이제 겨우 지리산공비를 소탕했는데 이번엔 북괴가 남침하다니?! 북괴군 속에 혹시 최덕구도 있을까? 그놈도 만주 땅에서 북한으로 귀국했을 수도 있음이야.
별일 없이 점심 무렵에는 화엄사에 도착했다. 할아버지를 절간 안으로 모신 뒤 그분께서 불공을 드리는 동안 한종수는 일주문 밖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개울로 내려가 준비해온 도시락을 꺼내어 점심식사를 했다.
북괴군이 유엔군의 참전으로 격퇴당할 것이라는 기대를 아니, 확신을 가지려고 했지만 웬 일인지 자꾸만 마음이 불안해졌다. 전 세계에 백전백승의 위용을 뽐내던 미 제24사단이 대전에서 인민군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한종수는 가슴이 다 서늘해졌다. 북괴군이, 기껏해야 덕구 같은 소작농들이나 머슴들의 오합지졸에 불과할 것이라고 경시했던 북괴군이 2차 대전에서 무적을 자랑하던 세계 최강국 미군과 싸워 이길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지금 전세로 봐선 어쩌면 북괴군의 승리로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위기와 우려가 갈마들었다. 오늘 집에 돌아가면 내일 당장 식구들 중 부녀자들과 애들만이라도 먼저 부산 쪽으로 피난을 시켜야겠어.
할아버지가 불공을 마치고 지리산을 넘어 산곡리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웠다. 이맘때면 어둠 속에 묻혀 고요와 정적이 흐르고 있을 마을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부산스러운 느낌이 들어 한종수는 언덕 위에 수레를 멈춰 세웠다. 마을의 개들이 요란스레 짖어댔고 이따금 고함소리도 들려왔다. 횃불 같은 걸 손에 거머쥔 사람들의 무리가 골목길을 배회하는 모습도 언뜻거렸다.
“할아버지, 마슬에 먼 일이 생긴갑서라우. 머땜시로 저라고 소란스럽답디여?”
“글세 말이다. 암래도 예사로운 일 같지는 않으니 내가 먼저 마을로 내려가 보마. 넌 여기서 기다려라.”
이장 한상진은 불편한 몸을 가까스로 움직여 수레 위에서 일어났다.
“할아버진 기양 달구지 우에 앙거지기이다. 지가 내려가 보고 올랑기여.”
“그건 안 돼. 만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할아빈 늙었으니 어쩌지 못할 것이지만 넌 아직 젊고 또 빨갱이들이 보기만 하면 가차 없이 잡아 죽이는 경찰관 신분이 아니냐. 두말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라면 달구지락도 기양 몰고 내려 가이다.”
“그럴까.”
한상진은 다시 수레에 올라앉아 고삐를 손에 잡더니 이랴 하고 소를 몰고 마을로 들어갔다.
잠시 뒤 갑자기 한상진의 기와집 대문 밖에 한 떼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법석 떠들어댔다. 횃불이 대낮처럼 밝아 먼 곳에서도 사람들의 대체적 윤곽을 알아볼 만했다. 낯선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총을 들고 수레를 빙 에워싸고 있었다. 그 뒤에는 무슨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동네 사람들이 둘러서있었다.
“당신들은 인민의 군대라면서 왜 죄 없는 양민을 잡아가려는 거요?”
큰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어찌나 높은지 언덕 위에까지 생생히 바람을 타고 실려 왔다. 조카더러 마을에 인민군이 들어왔으니 어서 피신하라고 암시해주느라 일부러 목청을 높인 것이 분명하다.
아니, 오늘 아침까지도 없던 인민군이 하루 사이에 마을로 들어오다니! 한종수는 깜짝 놀랐다.
“조카 놈과 함께 화엄사에 댕게 왔당걸 다 알고 있는디. 어이 숭겼는디 바른 대로 말혀이다.”
종수는 그 목소리의 임자가 덕재임을 금방 알아 맞혔다.
아니, 저놈이 벌써 빨갱이 편이 되어 개질을 해! 내 이놈을 그저!
“난 모른다고 하지 않나. 구례읍에 볼일이 있다고 하기에 절에서 갈라져 난 혼자 수레를 몰고 왔네.”
“거짓말 말아요. 할아버지를 모시고 간 사람이 이장을 홀로 보냈다고 해서 누가 곧이들어요. 어서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이 목소리는 분명 향란이다. 이 연놈들이 자기들 세상이 왔다고 멋대로 날쳐대는구나! 한종수는 저도 모르게 발을 구르며 이를 부드득부드득 갈았다. 네놈들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두고 보자. 네놈들이 날 잡으려 한다고 무서워 36계 줄행랑을 놓을 내가 아니다. 네놈들의 코밑에서 네놈들이 하는 행위를 하나하나 지켜보고 그 죄 값을 받아내고야 말 것이다.
한종수는 마을 외곽의 외진 곳에 있는 향란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몸을 은신하기에 그 보다 더 이상적인 곳은 없었다. 향란은 아직도 종수 동생 종철이를 기다리며 어린애를 데리고 홀로 살고 있었다.
향란이네 집은 불이 꺼져 있었다. 그년은 아직도 큰할아버지네 집에 몰려들어 조카의 행방을 꼬치꼬치 캐묻고 있을 것이다. 향란이네 집은 종수의 계책에 말려들어 죽은, 지리산 공비인 그녀의 사촌오빠 덕수가 수리해 준 집이었다. 울타리도 팔뚝만큼 굵은 나무들로 견고하게 둘러막았고 대문도 제법 단단하게 만들어 세웠다. 대문 고리엔 자물쇠 대신 나무꼬챙이 하나가 꽂혀 있을 뿐이었다. 나무꼬챙이를 뽑아 던지고 대문을 열었다.
빠드득.
문돌쩌귀 갈리는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처음으로 들어와 보는 집이었다. 등잔불을 밝혔다. 방은 모두 4간이다. 주방, 사랑채, 안방 그리고 헛간이다. 살림살이라고는 낡은 장롱 하나와 이불 두 채, 바느질광주리와 다듬잇돌, 단지 몇 개와 솥, 그릇 몇 개가 전부였다. 붉은 흙벽의 말코지에 걸린 옷들은 누더기 베옷 몇 견지뿐이다. 옷 위로 살진 이 몇 마리가 꼼지락꼼지락 기어 다니는걸 보고 한종수는 몸서리를 쳤다. 땀 냄새가 역하게 풍겼다. 멍석을 깐 구들은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흙이 드러나 있었다.
“거지들이 뭘 어쩐다고 나서서!”
한종수는 궁색하고 남루한 방 안을 둘러보며 흥하고 콧방귀를 꾸었다. 저도 모르게 옆구리에 찬 권총을 손으로 으스러지게 거머쥐었다. 손아귀가 벌도록 잡히는 총자루에서 담력과 용기가 전류처럼 온 몸에 흘러들었다.
향란은 새벽녘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자리에 드러눕더니 숙면에 골아 떨어졌다.
밤새 싸다녔으니까 피곤할밖에 없겠지.
안방에 숨어 있던 한종수는 살그머니 부엌방으로 나와 혼곤히 잠이 든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지게문으로 흘러들어온 달빛아래 희미하게 드러난 그녀의 잠든 모습은 너무나 순진하고 예뻐 보였다. 속옷만 걸친 건강하고 싱싱한 몸매는 눈부시게 하얗고 탄력 있어 보였다. 종수는 저도 모르게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는 어떤 욕구를 느꼈지만 그녀의 몸을 향해 뻗어가던 팔에 제동을 걸었다. 섣불리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지금은 그런데 신경을 쓸 경황이 없었다. 할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해야 했고 어제 하루 동안 마을에서 벌어진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대처할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그녀를 손 안에 넣는 건 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종철이와 길이 달라 거래를 끊었다고 하지만 필경은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닌가. 동생이 좋아하는 여자의 몸에 손을 댄다는 것이 양심에 거리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좀 더 두고 보자.
종수는 잠시 두 눈을 감고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켰다. 뜨거운 가슴을 냉각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둥둥 울리던 가슴의 북소리가 멈추기를 기다리며 흐트러진 정신을 수습하고 가다듬었다.
“이봐, 향란이. 눈 떠봐.”
향란은 으응, 하고 입을 한 번 다시더니 피곤한 모양인지 벽 쪽으로 돌아눕더니 다시 코를 골았다. 그녀의 하신을 가렸던 이불이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지며 둥실한 둔부가 드러났다. 풍만하면서도 부드러운 곡선이 육감적이었지만 종수는 의식적으로 눈길을 외면했다.
“싸게 일어나 보랑께. 들었어?”
종수는 갑자기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화가 나기도 했다. 어쩌면 이장을 잡아들이고도, 그렇게 나쁜 짓을 하고도 이렇듯 태평스럽게 잠을 잘 수 있을까 싶었다. 만일 지난밤 그도 큰할아버지와 함께 마을로 들어왔더라면 똑같은 봉변을 당했을 것이다. 덕재와 향란이에게 수모와 능욕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었다.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덥석 거머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어여 눈 뜨고 일어나들 못혀! 얼어 죽을 년 같으니!”
고함소리에 먼저 잠에서 깨어난 것은 향란이가 아니라 그녀의 아들 영호였다. 영호가 잠자리에서 부스럭부스럭 일어나 낯선 불청객을 발견하고 바스러질 듯 울음을 터트리자 그제야 향란은 귀찮은 듯 투덜거리며 부스스 눈을 떴다.
“왜 그래 갑자기…… 어디 아파?”
향란은 옆에 종수가 앉아 있는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우는 아들 만 토닥거리며 달랜다.
“눈 뜨고 똑떼이 보랑께. 느그들이 잡을락혀던 한종수가 여그 있당께.”
한종수는 이런 단도직입적인 방식을 싫어하는 성미였다. 모든 문제를 부드럽고 완곡하게 처리하기를 즐기는 그였다. 그런데 오늘만은 예외였다. 난 그래도 동생 얼굴을 봐서, 큰할아버지의 말씀을 받들어 널 벌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해주었는데 고맙다는 인사는 못할망정 날 잡아서 인민군에 넘기려고 해! 그런 배신감이 종수를 분노하게 했다.
그제야 방 안에 들어와 앉아 있는 한종수를 발견한 향란은 혼비백산하여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어느새 종수의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치들 마. 날 북괴군에 일러발칠락꼬 했잖여. 어이 지금이락또 일러바쳐 보랑께.”
“지서장님.”
소리쳐도 소용없게 된 상황임을 파악한 향란은 스스로 몸부림을 멈췄다. 그리고는 서둘러 옷을 집어 몸에 걸쳤다.
“빨갱이들이 언자 마슬에 들어왔능겨?”
“어제 오후에요.”
“우리 할아버지는 어떡했제?”
“저도 몰라요. 인민군이 데리고 갔어요.”
“내 아내와 아들은?”
“마님은 잡아갔지만 도련님은 아직 나이가 어리다고 이장마님과 함께 집에 남겨두었어요.”
아들이 무사하다니 우선 시름이 놓였다.
“넌 진즉 죽에버릴 시도 있는 빨갱이가족이었어. 공산비적인 덕수를 집따 숭겨 둔 통비죄 만으로두 목을 자를 시 있었단 말이야. 근디 큰할아버지께서 둥숭의 핏줄을 낳아준 여자락꼬, 살라주락꼬 혀서 살려 주었는디 그 은혜는 모르고 이장님과 날 잡아 들일락꼬 날뛰고 다녀? 이 즘생보담 못헌 년!”
종수는 불이 번쩍 튕기게 향란의 따귀를 후려쳤다. 그러자 깜짝 놀란 영호가 엄마 품에 와락 안겨들며 또다시 울음을 왈칵 터트렸다. 향란은 어린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운 모양 손으로 그 애의 입을 틀어막았다.
“잘 알아서 해보랑께. 난 도망가들 않아. 느그 년의 집에 숭켜서 느그 빨갱이들이 무슨 지꺼릴 하나 몬타 지켜볼 팅께. 해이나 날 인민군에 고발해도 존께 맘 핀 대루 혀. 그땐 다시는 영호를 보들 못한다는 것만 명심하면 돼. 오늘부텀 영호는 자나 깨나 나와 함께 살아야 되는 겨.”
“제발 우리 영호만은 다치지 말아줘요.”
“알먼 됐당께. 느그들이 밲에 나가서 하는 일은 상관하들 않을 팅께 느그 맘 핀한 대루 하듸 다만 나를 느그집따 숭겨주면 돼.”
한종수는 향란에게서 마을에 주둔한 인민군이 한 개 분대병력이라는 것과 교사들과 지방유지, 경찰가족, 이장 등을 색출하여 감금했다는 정보를 알아냈다. 인민군은 곧 전선으로 떠나갈 것이라고 했다.
그 뒤로 한종수는 정말 약속대로 그녀의 바깥일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았다. 다만 저녁마다 귀가하면 바깥상황을 소상하게 보고한 다음에야 잠을 재웠다.
향란은 영호가 종수와 함께 있었음으로 그가 자기 집에 숨어 있다는 말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덕재와 인민군의 추천을 받고 여맹위원장이 된 뒤 몇 번이나 결심을 내리고 인민위원회를 찾아갔지만 끝내는 실토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고민과 갈등 속에서 지냈다. 밖에 나가면 여맹위원장이고 집에 들어오면 종수의 끄나풀이 된 격이다.
종수는 종수대로 그녀가 여맹위원장이 되어 바닥빨갱이들을 휘동해가지고 나쁜 짓을 하는 데는 분개했지만 그녀가 인민군을 위해 헌신할수록 자신을 은폐하는 데는 더욱 유리하다는 타산에서 불문에 붙여두었다. 그녀의 죄 값은 언젠가는 치르게 될 것이다. 다만 지금은 생존을 유지하고 깊숙이 은신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그러나 종수는 날이 갈수록 한가지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외진 오두막의 안방 깊숙이 어린 조카애와 함께 처박혀 있는 고독과 답답함도 그런 대로 견뎌낼 수 있었지만 적치되는 성욕만은 해결할 방법이 없어 몸부림쳤다. 밤에 잠들었다가는 느닷없는 급습을 당할 위험도 있었음으로 낮에만 자고 밤에는 뜬 눈으로 지새우곤 했다. 두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잠자는 향란의 옆에서 기나긴 밤을 보내자니 꿈틀거리는 욕정을 억제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래도 동생인데, 동생과 좋아하는 여잔데 어찌 불륜을…… 하는 도덕적 자책으로 솟구치는 음욕을 가까스로 견제하고는 있었지만 하루하루 그 방선은 물먹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종수는 가슴 속에 쌓인 고독과 정욕을 달래보려고 향란을 시켜 술을 구해오도록 했다. 그날은 향란이도 무슨 슬픈 일이 있는지 함께 술 한 잔 하자는 그의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술 몇 잔을 마시더니 느닷없이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뜽금없이 머시냐? 빨갱이헌티도 눈물이 있당께 흐뻑 요상한겨.”
“자꾸만 빨갱이, 빨갱이 그러지 말아요. 제가 뭐 시형 될 사람이 고와서 집에다 숨겨두고 있는 줄 아세요. 다 종철 씨 얼굴을 봐서 그런 거라고요.”
“지비도 날 시형, 시형 부르들 마. 내 둥숭이 앙그라 영호땜시제.”
“전 지금 인민 앞에 죄를 짓고 있어요. 공화국과 인민정권을 기만하고 있는 거라고요. 제발 우리 집에서 나가 주세요. 고발하지 않을 테니 제발.”
“그것 땜시로 울었능가라우?”
“종철 씨가…… 흑흑!”
향란은 갑자기 목을 놓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소리내들 마. 종철여석이 맬겁시 어찌됐다능겨? 싸게 말해보랑께.”
“오늘 대전에서 피난을 왔는데…… 아버지가 지주이고 큰할아버지가 이장이고 형님은 경찰이라는 신분 때문에 체포되어 뒷산 절간에 갇혔어요.”
“머라꼬? 빨갱이들 좋닥꼬 부모성지까장 내비 두고 탈가현 넘이 빨갱이들 손에 체포되닥꼬? 시상에 빌 우스운 일도 다 있능겨!”
종수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말아요. 이게 다 아주버님과 그쪽 아버지의 죄 때문이에요. 그 분에겐 죄가 없어요. 억울해요.”
향란은 슬픔을 달래려고 술을 과음한 탓에 울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술에 취해 잠이 든, 반항능력을 상실한 향란을 보자 종수의 가슴 속에서 참고 있던 정욕이 또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즘엔 그도 술에 얼큰히 취했던지라 동생에 대한 미안함이나 윤리적 죄책감 같은 것도 별로 작용하지 못했다. 우선은 성적인 굶주림부터 달래고 싶었다. 그 다음의 일은 그 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
종수는 그녀의 저고리고름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향란은 죽은 듯이 잠이 들어 맹수가 자신의 육신을 향해 덮쳐들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박속같이 하얀 가슴이 드러나자 종수는 갑자기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숨결이 거칠어졌다. 옷을 벗기는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어쩌면 종철의 손길이 한두 번 더듬고 지나갔을 뿐 처녀의 몸매 그대로를 고스란히 간직해온 청신하고 탄력 있고 싱싱한 나신이 눈앞에 그 완전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순간 종수는 심장도 멎고 숨결도 막히는 듯한 경이와 흥분으로 전신을 무섭게 경련했다. 그리고는 아찔하게 무너지는 정신을 휘몰고 그녀에게로 육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옥으로 잘 쪼아낸 듯 눈부시고 봉긋한 젖무덤을 와락 움켜잡았다. 혀끝을 빳빳하게 융기된 불그레한 젖꼭지에 가져다 댔다. 향란의 나신은 활활 타오르는 숯덩이 같았다. 그녀의 육신도 잠결이긴 하지만 격렬하게 달아오르며 경련하기 시작했다. 애절한 신음소리가 그녀의 잇새로 가늘게 새어나왔다. 종수는 그녀의 육신을 부둥켜안고 온몸을 불사신처럼 채찍질하며 땅속 깊숙이 파고들어갔다.……
그녀는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야 뒤늦게 깨어났다. 유린당한 몸뚱이를 벽 구석에 옹크린 채 흐느꼈고 종수는 벌거벗은 채 담배를 뻐끔거렸다.
“비열해요! 무치해요! 종철 씨를 봐서라도 어찌 저한테 이런 능욕과 치욕을 줄 수 있어요. 짐승보다 못해요.”
종수는 그녀의 넋두리에 한마디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자신도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동생이다. 천한 소작농의 딸이고 인민군치하에서 여맹위원장을 지내는 빨갱이이다. 그런데도 그 짓은 신기하게도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그 흥분 역시 다른 여자들과 조금도 다름없었다.
어찌, 어찌 빨갱이와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단 말인가! 이놈의 짓은 원수나 적과도 가능하단 말인가? 그는 원수의 여동생과 성관계를 맺어 가문의 피를 더럽힌 종철을 저주하고 경멸했었다. 그런데 나마저도……
종수는 옷을 걸치고 밖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조각달이 지친 듯 구름 속에서 느릿느릿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인민군에게 잡혀 절간에 갇힌 큰할아버지와 아내와 두 누이동생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다. 큰할머니와 함께 지낸다는, 이제 겨우 두 살 난 아들 병식이가 보고 싶어진다. 그 녀석만은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
그날 일이 있은 뒤로 두 사람 사이에는 그런 일이 빈번히 벌어졌다. 종수도 더 이상 죄책감 같은 데 시달리지 않고 일상처럼 예사롭게 접근했고 향란도 거절은 하고 울기도 했지만 악을 쓰지는 않았다. 그녀는 종종 먹을 것이 생기면 보퉁이에 싸서 여맹위원장이라는 권세를 이용하여 절간에 수감된 종철에게 가만히 들여보내 주군 했지만 밤이면 종수의 품에 안겨 정사를 즐겼고 흥분의 신음소리를 갈아내곤 했다.
“이제 더 이상 저한테 바랄 게 뭔데요? 숨겨달라고 해서 숨겨주었고 고발하지 말라고 해서 비밀을 지켜주었고 마지막엔 정조까지 능욕했잖아요. 아직도 만족되지 않는 것이 있어서 그냥 우리 집에 남아있는 건가요? 전 당신의 제수이자 동시에 반동분자들과 싸우는 인민정부의 여맹위원장이며 그래서 우리는 서로 적이라는 걸 잊지 말아요. 한 이불 속에서 잠을 잤다고 하여 우리들의 관계가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어느 날 향란은 이불 속의 정사가 끝나자 종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항의를 들이댔다.
“아직은 떠날 때가 되들 않았어. 북괴군이 퇴로를 차단하고 있응께 국군이 있는 곳으로다 넘어갈 수 없단 말이디. 그녁헌티 더 바랄게 있어서 남아있는 건 아닌 겨. 갈 때 되면 갈팅께 걱정 마. 그라고 우리 사이가 징하게 애매하고도 우수운 사이락카는 건 나도 알지라. 한 이불 속에서 속살을 부비고 잠시로도 냉중엔 결국 우리는 웬수로 적수로 남게 되것제. 은진가는 울또 승패를 결정하는 전쟁터에 나서게 될 끼다. 그때까장은 이 애매모호한 관계를 기양 유지혀야 겄디. 그 이유는 아조 간단현겨. 나도 살아사 학꼬 그녁도 살아사기 땜시로제. 나도 향란이를 죽음에서 함번 구해 주었응께 그녁도 날 함번 구해 준 것 뿐이야. 두 번 다시 용서는 없능겨.”
그로부터 며칠 뒤 향란의 집에 갑자기 덕구가 나타났다.
종수는 그날 속이 답답하던 차 마침 영호가 잠든 틈을 타 뜰 안에 나와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앞 골목에서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오자 안방으로 들어가 얼른 몸을 숨겼다. 뜻밖에 그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그토록 복수를 벼르던 최덕구였다. 찢어진 지게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던 종수는 혹시나 사람을 잘못 보았나 싶어서 몇 번이고 손등으로 두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했지만 그 사람은 틀림없이 소작농 최복만의 아들 최덕구였다. 첩실 곱단이를 빼앗아 아내로 삼고 아버지를 은파강물에 처넣어 죽인 원수 최덕구였다. 비록 낯선 인민군 장교복을 입고 옆구리에 권총을 차고 나타났지만 키가 훌쩍 크고 여윈 그의 모습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이 있다면 이전보다 키가 더 크고 비쩍 말랐다는 것뿐이었다. 뜀박질하듯 어깨를 우쭐우쭐 솟구치며 성큼성큼 걷는 걸음걸이도 그대로였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저놈을 여기서 만나다니?!
종수는 권총을 손에 들고 최덕구의 가슴팍을 겨누었다. 치가 떨렸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이놈아!
그러나 그는 방아쇠를 건 손가락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자리에서 권총을 발사하여 덕구를 죽일 수도 있었다. 아니 덕구 뿐만 아니라 그를 따라온 몇 명의 인민군을 더 살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덕구는 비록 목에 붕대를 감고 팔을 어깨에 메고 있지만 향란이와 덕재를 비롯한 수십 명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권총 한 자루로 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모한 도전은 결국 나중에 그마저 그들의 총에 격살되거나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그럴 수는 없었다. 덕구 놈하고 생명을 맞바꾼다면 그것은 복수가 될 수 없다. 도리어 큰할아버지나 처자, 친척들에게까지 누를 끼칠 수도 있다.
쌍년! 기어이 오빠까지 끌고 나 잡으러 왔구나!
향란의 가슴에 총구를 겨누며 종수는 이를 갈았다. 어디 날 잡으려고 왔다만 봐라. 네년은 물론이고 네 아들놈과 오빠까지 죽여 버리고 말 테다. 속으로 벼르며 그들의 일거일동을 자세히 주시했다. 다행이도 덕구는 구들에 올라와 앉지도 않고 그대로 돌아나갔다. 대문 밖으로 사라지는 덕구의 등 뒤를 쏘아보며 종수는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두 눈을 빤히 뜨고 저놈을 살려 보내다니? 원통하다, 원통해!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오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듣고 향란이가 오빠를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가 종수에게 인민군이 들어오니 어서 숨으라고 암시하느라 일부러 목청을 높여 말을 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아무렴. 엄마로 생겨 제 자식을 죽음에로 내던질 여자는 없을 것이다. 혁명이 아무리 중하다 한들 자식에 비하랴! 참자. 이젠 덕구 놈이 인민군에 입대해 남한 땅에 내려온 사실이 확실해졌으니 언제라도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날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어떻게 해서라도 국군과 유엔군이 인민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반격을 개시하는 날까지 참고 견뎌내야 한다. 그때면 최덕구 네놈은 물론이고 향란이도 덕재도 내 손에서 살아남지는 못할 것이다. 그날인즉 네놈들의 제삿날인 줄 알거라.
향란은 밤이 깊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아까 전 속이 떨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 어디 숨어 있었던 거예요?”
“머땜세 그건 물어? 덕구 놈을 델꼬 와서 날 잡아갈락캤제?”
“솔직히 그러고도 싶었지만 당신 손에 우리 영호의 목숨이 달려 있기에……”
“그걸 알면 됐어.”
“전 오빠나 영호를 총으로 쏠까봐 가슴이 떨려……”
“덕구 놈과 바꾸기엔 내 목숨이 너머 귀중해. 그따위 놈캉은 내 목숨얼 맞바꾸들 않어.”
종수는 손을 저어 잠든 영호의 얼굴에 매달린 파리를 쫓으며 태연스럽게 웃었다.
“어여 옷 벗어. 오널언 나도 놀랐당께.”
종수는 향란의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이 난리에도 그런 생각이 나요?”
“놀란 가심얼 달래야 할기 아니야.”
“당신은 정말 웃음 속에 칼을 품은 사람이에요.”
“그래도 독사 보담언 났제라.”
두 사람은 옷을 벗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알몸뚱이가 머루넝쿨처럼 서로 칭칭 얽혀들었다.
“정말 당신을 죽이고 싶어요.”
“누가 기회를 줘사 말이제. 다리나 쬐깨 더 벌려라. 오널언 가심이 더 풍만혀 보이는디. 한 통 묵어보랴?”
씨물씨물 웃으며 젖꼭지를 입 안에 물고 쪽쪽 빤다.
“아이, 간지러워요. 개처럼 빨기는……”
뜰 안에서 매미 우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귀청이 다 얼얼해졌다. 동백나무숲이 밤바람에 와스스 설레는 소리가 서늘했다. 구름 속을 자맥질하던 반달이 빠끔히 얼굴을 내밀 때마다 방 안에도 희미한 달빛이 껌벅 들어왔다간 금방 사라지며 어둠 속에 잠기군 했다.
“머땜시로 그 잘난 오랍씨허구 함번 종철일 살려달락꼬 해볼 것이제. 장교가 됐담시로.”
벌써 벌겋게 달아오른 종수는 향란의 몸뚱이 위에 기신기신 기어오르며 능청을 떨었다.
“그러잖아도 간청을 드려보았어요.”
“그래서 구해 주것대?”
“욕만 먹었어요.”
“쩌런. 그래서야 쓰나. 빨갱이가 되겠닥꼬 자청헌 사람인디……”
“저리 비켜요. 누굴 골리는 거예요.”
향란은 배 위에 누워 그 짓을 하려고 서둘러대는 종수의 몸뚱이를 아래로 떠밀어냈다. 종수는 나뭇단처럼 거적을 깐 구들 위에 쿵 나떨어졌다.
“오널언 머땜시 이랴. 오랍씨도 만났 겄다 기쁠 틴디 흥이 다 깨지는 겨.”
종수는 단념하고 일어나 앉아 담배를 붙여 물었다.
“그놈 뒤어지들 않고 부상만 당혔데.”
향란은 벽 쪽으로 돌아누워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허긴 폴세 뒤어져서는 안 되제. 그놈은 꼭 내 손으로 죽여사 쓰는 겨……”
“누가 누구 손에 죽는가는 두고 봐야 할 거 아니에요.”
향란은 발칵 화를 내며 이불을 쭈르륵, 끌고 방 저쪽 구석으로 옮겨갔다.
“보나마나제. 참, 그놈이 종철이와 만나서 먼 말얼 주고받았는디 그게 궁금하구나.”
“몰라요!”
“틀림없이 지주아들이요 지서장의 동숭이라는 죄를 덮어씌웠을 틴디. 그게 이른바 공산당의 반동분자 숙청방법이 아닌 겨. 게다가 대전으로 피난까장 내려 왔당께 그 점도 걸렸을 거고.”
향란은 아예 대답을 포기했다.
“지끔은 인민위원회나 민청, 여맹에서 먼 일을 허는디? 잡아들일 반동들은 몬타 잡아디렜겄다 말이제. 듣장께 이민들을 동원혀 폭격에 파괴된 교량이나 도로를 수리헌담시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놈들이제. 그게 어이 인력으로 될 일이락꼬 비행기학꼬 대포학꼬 맞서 보겠당건가. 보급로가 끊어졨응께 탄약이나 식량공급이 차단되었을 팅께 멀 묵음시로 싸운닥카냐? 그라니 북괴군은 망허게 운명이 결정되어 있는 거야.”
“그까짓 비행기, 대포 같은 거 우리 인민은 두려워하지 않아요.”
승패를 결정하는 문제 앞에서는 양보할 수 없는지 향란은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정면으로 도전했다.
“백 번, 천 번 파괴해 보라지요. 우리는 백 번, 천 번을 수리할 거예요. 온 나라가 전선원호사업에 총동원되었어요.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힘 있는 사람은 힘을 내고 일심협력하여 반드시 미제와 그 추종국가의 침략군을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할 거예요. 벌써 우리 산곡리의 많은 청장년들도 자원하여 의용군에 나갔어요. 주민들도 자원하여 부역에 나서고 있어요.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거예요.”
향란은 격동되어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었다.
“너머 흥분하들 마. 부상병이 늘어나서 국민학교에 몬타 수용하들 못헐 정도람서. 내 누 영화까장 간호사로 동원혔딱꼬 그랬잖여. 덕구란 놈도 목에 붕대를 감고 팔에 붕대를 감고 부상당혔구. 멀 설명해? 북괴군이 우리 국군과 유엔군카 싸움에서 패배하고 있다는 걸 증명 하잖여. 오라잖아 북괴군은 패전할끼라.”
종수는 히죽거리며 여유 있게 입술을 오므렸다가 벌렸다 하면서 공중에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장난질을 한다.
향란은 그의 능청스러운 모습에 더욱 화가 버럭 났다.
“정의의 전쟁은 반드시 승리해요! 인민군대의 편에는 공화국이 있고 인민이 있기에 반드시 승리해요.”
“정의가 머신디? 인민이 머신디? 침략전쟁도 정의락꼬 헐시 있는겨. 몇 안 되는 빨갱이분자를 인민이락꼬 헐 시 있는 겨. 침략자는 도새 패하게 돼있는 겨.”
“누가 침략잔데요? 전쟁을 먼저 도발한 건 이승만 괴뢰정부예요. 공화국과 인민군대는 반격을 했을 뿐이에요. 한줌도 안 되는 놈들은 빨갱이가 아니라 지주, 자본가이고 친일파, 친미파 등 민족반역자들이지요.”
“됐어! 무산시리 떠들들 마. 오널언 느그학꼬 입씨름 허고 쟆들 않여. 그만 말하꼬 이리와. 찰코 겁나게 자자.”
종수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향란이한테로 엉금엉금 다가왔다.
“싫어요. 제가 뭐 기생인가요. 첩년인가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요.”
“일래 함께 자고는 뜬금없이 먼 트집이제.”
“차라리 절 죽여요. 영호까지……”
발버둥질을 쳤지만 종수는 막무가내로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죽는 것도 때가 있는 겨. 인명은 재천이락꼬 허는 말도 있잖여. 너나 덕구도 죽을 날이 정해져 있응께 그때 가서 내가 죽여 줄 팅께 걱정허들 마.”
향란은 울었고 종수는 웃었다. 다시 육박해 들어오는 종수에게 등을 돌리려 했지만 그의 완력을 이길 수가 없었다. 결국은 기진맥진하여 저항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가 하는 대로 몸뚱이를 내맡길 수밖에 없다는 설움에 향란은 그에게 유린을 당하면서도 울기만 했다.
“누가 이기나 우리 두고 봐요.”
“그랴. 존 생각이다, 도새 두고 볼 시밲에 없응께.”
종수는 일을 끝내자 울고 있는 그녀를 버려둔 채 일어나 마당으로 나왔다.
“난 기어이 당신을 가만 두지 않을 거예요.”
방 안에서 들려오는 향란의 넋두리를 들으며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는 속으로 이 어려운 시기에 자신을 숨겨주고 고독을 풀어준 향란이를 혹여 용서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건져냈던 것이다.
그는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시커멓게 흐렸다. 달은 아예 구름 속에 묻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천지간의 만물은 어둠 속에 잠긴 채 그 황홀한 모습을 감쪽같이 감추고 있었다.
눈길을 감아 들이고 다시 멀리 산언덕에 있는 국민학교 쪽에 풀어 보냈다. 어둠만 자옥할 뿐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저기에는 분명 덕구가 있을 것이며 인민군 부상병들이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부상병들이 어찌나 많은지 국민학교도 모자란다고 한다.
덕구 이놈, 네놈의 끝장도 오라지 않았다!
종수는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버지와 아내와 곱단의 원수를 갚을 때가 멀지 않았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방 안에서는 향란의 울음소리가 그냥 들려오고 그를 원망하고 저주하는 넋두리가 그치지 않았지만 그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소낙비를 퍼부을 듯싶은, 시커멓게 흐린 하늘만 이윽히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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