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불타는 반도

장혜영


5장 불행한 사람들


2

갑작스레 벌어졌던 소동은 저녁 무렵쯤에야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구급치료를 받고 의식이 회복된 한종수는 유리가 모시고 일산으로 귀환했고 곱단은 준호를 따라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정작 분란을 일으킨 장본인들은 입을 다물고 침묵했지만 그 때문에 멍이 든 사람은 준호와 유리였다.
준호는 하룻밤을 꼬박 뜬눈으로 새우고는 이튿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오늘 좀 만나요?”
만나서 뭔가 대책을 강구해야 될 것 같아서였다.
“전 미국에 유학 가기로 결정했어요.”
유리가 던져오는 느닷없는 카드에 준호는 아연실색했다.
“유학이라니요? 느닷없이.”
“지난밤 부모님과 통화했어요. 내일 미국 사시는 작은할아버지 두 분께서 서울로 나오세요. 그 분들이 미국으로 돌아가실 때 함께 떠나기로 했어요.”
“나랑 한마디 상의도 없이 혼자 결단을 내린 겁니까. 유리 씨의 마음속에 차지하고 있던 나의 존재가 갑자기 비중이 줄어드는 것 같아 당혹스럽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부르시네요. 그럼 이만 끊어요.”
준호는 그저 망연자실할 뿐 사랑이 직면한 위기 앞에서 속수무책인 자신의 무능을 어이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어찌 증오의 씨앗이 사랑으로 꽃필 수 있으며 그것이 다시 저주 속에서 시들어버릴 수 있을까 싶었다. 인간은 어찌하여 과거의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가. 미래가 과거의 타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어찌하여 인간은 미래의 과거인 현실을 미래를 묶어두는 쇠고랑으로 만드는가? 과연 5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흘러간 그 전쟁의 후유증이 우리 세대에게까지 미칠 수 있단 말인가.
수많은 의문들이 비온 뒤의 죽순처럼 의식의 언덕을 뚫고 올라왔다.
“준호야. 준비 다됐냐? 어서 네 아비한테로 떠나자.”
할머니가 독촉해서야 준호는 오늘 아버지를 면회하러 외국인 수용소로 가기로 사전 예약을 했던 사실을 상기했다.
“할머니, 아버지하고는 제발 어제 발생한 일을 말씀하지 마세요.”
신신당부했다. 아버지에게는 그 소식이 치명적인 충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30년 당 경력을 가지신 분, 평생 지주, 자본가와 반동분자 그리고 자본주의 세상을 반대하며 살아오신 아버지- 그 인생 때문에 자부심을 느끼고 그래서 자신의 인생이 가치 있다고 확신하시던 아버지에게 지주의 아들이며 큰아버지를 살해한 원수이며 친일주구, 악질경찰인 한종수가 생부라는 사실을 밝힌다면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할머니의 말 한마디로 눈 깜짝할 사이에 연인관계로부터 남매관계로 변했을 때 느꼈던 준호와 유리의 그 허탈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니, 아버지는 허탈과 절망을 넘어 자신이 지주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스스로를 저주하고 분노할지도 모른다. 그런 분노와 저주는 아버지에게서 이성을 묵살하고 그분을 망동으로 내몰 수도 있다. 그래서 할머니더러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만은 비밀에 붙여둘 것을 간청했다. 그 길만이 아버지를 절망에서 구해주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아도 아버지는 지금 모진 심리적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다.
“그렇게는 못한다. 내가 죽기 전에 아범에게 제 아빌 찾아 줘야 해. 제 아비한테 맡기고 인젠 나도 시름 놓고 눈을 감아야지 않겠니. 옛날에는 길이 막혀 그랬다지만 지금은 길도 트이고 호적도 올릴 수 있다는데 좋은 제 아빌 한국에 두고 왜 중국에서 살겠냐. 생부가 여기 있으니 그쪽으로 호적을 올리면 중국에 쫓겨 가지 않고 한국에서 그냥 살 수 있을 거다.”
“그것도 좋지만 좀 더 기다렸다가 기회를 봐서 알려드리는 게 어때요?”
“좀 더 기다리다니? 이 할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이다. 내일이라도 껌벅 숨이 넘어가면 끝이란 말이다. 늙으면 다 그런 거 아니니. 내가 살아서 그 애가 제 아빌 찾아 잘사는 걸 봐야 죽어도 눈을 감고 죽을 거다.”
“할아버지께 먼저 말씀드려야 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요?”
손자라는, 낮은 서열로는 할머니를 설득시킬 방도가 없음을 알고 준호는 할아버지의 권위에 기대보려고 했다.
“네 할아버지가 기분 나빠하신다는 것도 다 알고 있다. 화가 나셔서 이 할미와 갈라지자고 윽박지를지도 모르지. 그래도 할미는 그 애한테 제 아빌 찾아 줘야겠다. 네 할아버지에게는 마누라구실을 다 했으니 쫓겨나도 원이 없다만 네 아비에겐 아직 엄마 구실을 다 못했어. 그게 늘 속에 걸린다.”
할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자 준호는 설득을 단념했다. 고집이 아니라 거의 숙원이었다. 할머니는 그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아마 눈을 감으시지 못할 것이다.
외국인 수용소 면회실은 좁은 공간에 테이블과 걸상 몇 개를 놓은 자그마한 방이었다.
“어머닌 여길 뭘 하러 나오셨어요? 어머니도 돈에 눈이 어두워 70고령에 가정부일이라도 해서 돈을 벌려고 나오셨나요? 아들이 받은 수모도 모자라서 늙은 어머니까지 개놈들에게 수모를 당하실려구요?”
아들의 첫마디 인사라는 것이 이처럼 거칠기 그지없었다.
“네 눈에는 이 어미가 노망이 들어 보이냐?”
“노망이 아니고 뭡니까. 노인이 할 일도 없는데 돈 팔고 한국에 나오셨으니 말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나오셨다면 몰라도. 먹고 살기가 어려운 형편에 외국관광을 오셨다고 해도 노망이라 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이놈아. 이 어민 네 아빌 찾아주려고 왔다.”
“네?!”
최영식은 엄마가 느닷없이 내던지는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반문했다. 그는 할머니 옆에 앉아 있는 아들 준호에게 묻는 눈길을 던져왔다. 그러나 준호는 얼굴을 돌려 아버지의 시선을 피했다.
“네 아빌 찾아주려고 왔다고.”
“내 아버지라니요?! 아버진 중국에 계시잖아요. 이번에 어머니와 함께 오시지 않았다면서요?”
“그 양반은 네 아버지가 아니란다. 네 생부는 따로 계셔.”
“어머니, 지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까! 정말 노망 드신 게 아니에요?”
“노망이 들긴. 멀쩡하다. 이 어미 말을 똑바로 들어라. 네 아빈 최덕구가 아니라 한국에 살고 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전 난생처음 듣는 소립니다. 여태 그런 말씀 없으시다가 이제 와서 갑자기……”
“어미 혼자만 알고 있던 사실이야. 너를 길러준 아비 최덕구도 모르고 너를 낳아준 아비 한종수도 몰라……”
“네? 방금 누구시라고요! 한종수요?!”
최영식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래.”
노인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다. 앉은 자리에서 앉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큰아버지를 죽인 그 원수 말입니까? 왜놈 앞잡이질을 하던 그 악질 순사 말이지요.”
“그래 바로 그 분이시다. 지주 한상권의 아들이지. 그 분이 바로 네 친아버지란다.”
최영식은 핏덩이라도 왈칵 토해낼 듯한 표정으로 한식경이나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있었다. 목구멍에 불덩이라도 막힌 모양인지 숨을 죽인 채 얼굴빛이 새카맣게 죽어버렸다. 이어 얼굴이 백지장 같이 창백해지며 당금이라도 졸도할 것만 같아 준호는 다급히 아버지의 어깨를 흔들었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숨이 막히세요?”
말은 못하고 고개만 연신 끄덕인다.
준호는 주먹으로 아버지의 등을 두드렸다. 연거푸 몇 번을 두드려서야 드디어 아버지는 꿋꿋하게 굳어버린 상체에서 기운을 빼며 어깨를 풀썩 떨어트렸다.
“거짓말입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나에겐 그런 더러운 아비가 없습니다. 내 몸에 그런 더러운 피가 흐르다니! 되지도 않을 소립니다.”
“그래 네 몸엔 분명 그 분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러니 인젠 네 아비를 찾아가거라. 이 안에 갇혀 있지 말구, 아비더러 구해달라고 해. 한국에 호적을 올리고 여기서 살란 말이다.”
“싫어요. 안 됩니다. 그놈은 내 아비가 아니에요. 난 그놈의 아들이 아니라고요. 엄만 노망이 들어 망령을 부리고 있는 겁니다.”
영식은 마구 울부짖고 마구 몸부림치고 마구 테이블을 두드리면서 포효했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자 복도에서 대기하고 섰던 경비병들이 다급히 면회실로 달려 들어왔다. 실성 한 듯 날뛰는 영식에게 일제히 달려들어 팔다리를 움켜잡고 밖으로 끌고나갔다.
“똑똑히 알거라 네 아빈 한종수라는 걸.”
할머니는 끌려 나가는 아들의 등 뒤에 다시 한 번 자신의 말이 노망이나 망령이 아닌 사실임을 밝혔다.
“그 개자식이! 그 더러운 놈이 내 아버지라니요! 안 돼. 싫어요. 싫다고요!”
끌려 나가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준호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할머니의 한마디 말에 아버지의 인생은 전면 부정되고 뒤집어지게 된 것이다. 이제 아버지가 평생 반대하고 투쟁했던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신을 낳아 준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최영식은 하루아침에 천륜을 어긴 불효자가 되었다. 신념을 지키느냐 천륜을 따르느냐 하는 문제가 그에게 제기되었다. 아버지의 가치관은 드디어 수술대에 오른 것이다. 아버지는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할머니는 밖으로 나오다가 한 경찰의 손목을 잡고 신신당부했다.
“우리 아들놈을 좀 잘 돌봐주세요. 걔 아버지가 한국에 살고 있어요. 그러니 곧 와서 걜 데려 갈 거예요.”
“할머니. 전 경비병입니다. 그런 말씀은 소장님을 찾아뵙고 직접 여쭤보세요.”
“소장이 어디 있습니까?”
“할머니, 그만 돌아갑시다. 아버질 보내고 안 보내고는 출입국관리소에서 결정하는 것이지 소장이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분하고 말씀드려도 소용없어요.”
“아니 걜 좀 보살펴달라고……”
“통일적 관리를 하는데 특혜라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어서 갑시다.”
준호는 간신히 노인을 설득해 가지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준호는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전화벨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뜻밖에도 전화를 걸어온 곳은 외국인수용소였다.
“최준호 선생님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미안합니다만 불행한 소식을 전해드려야겠습니다.”
“불행한 소식이라니요?”
아버지의 초췌한 모습이 불쑥 상상의 스크린에 걸린다.
아버지한테 혹시 무슨 변고라도 생긴 걸까?
“최영식 씨께서 지난밤 자결했습니다.”
“네? 자결이라니요!”
“화장실에서 목을 졸라 질식사했습니다.”
준호는 억이 막혀 잠시 말이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고뇌 속에서 방황할 것이라는 예측은 했지만 자결까지 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아버지는 혈육과 신념 중 어느 한 가지도 버릴 수 없었기에 어느 한 가지도 선택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심리갈등 앞에서, 선택 앞에서 비굴하게도 도망을 친 것이다.
“오늘 중으로 오셔서 시신을 확인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할머니에게 이 비보를 전갈해 줄 일이 은근히 걱정되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자지 않고 있었던지 부스스 이불 속에서 일어나 앉았다. 통화내용에서 무슨 불길한 낌새라도 눈치 챈 듯 잠기 묻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범한테 무슨 일이 생겼냐?”
“할머니……”
“잘못 됐냐?”
“네.”
“어떻게?”
“목을 매어……”
“저런 못난 놈, 못난 녀석! 구질구질하게!”
할머니는 놀랍게도 다시 이불 속에 몸을 디밀더니 자리에 조용히 누워버렸다. 경악하지도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한숨 한 토막, 넋두리 한마디 없다는 일이 도리어 준호가 보기에는 이상했다. 아들이 죽었는데 엄마로서 울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도 비상식적이어서 이해하기조차 어려웠다. 웬일인지 할머니의 그런 침묵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방 안에 숨 막히도록 들어찬, 멍들고 얼룩진 분위기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준호는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태양이 떠오르려고 동쪽하늘은 노을을 활짝 펼치며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루 일과를 시작한 시민들의 총망한 발걸음에 거리가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준호는 폐부 깊숙이 엄습하는, 바늘 끝 같은 한기를 느끼고 양복 깃을 추켜세웠다. 그제야 준호는 아들인 자신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들이 죽었다는데 울지 않는 엄마가 이상하듯이 아버지가 타계했다는데 아들이 울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와 아버지 사이에 진옥의 존재가 가로막혀서라면 할머니와 아버지 사이에는 누가 막아서고 있을까? 할머니가 아들에게 아버지를 찾아주려는 건 엄마로서의 책임을 다 하기 위해서일 뿐이고 한종수에 대한 원망은 원망대로 해소되지 않고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는 것인가.
눈물을 흘리고 슬퍼해야 한다고 자신을 강박해보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마음은 냉담해졌다. 어제가 지나가고 오늘이 되었다고 해서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과연 아버지의 죽음은 세월과 일상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한 것일까. 그 때문에 눈물도 슬픔도 유발하지 못하는 것일까.
집 안으로 들어가니 지은이와 명철이가 준호의 방문 앞에 서있었다. 방 안에서는 할머니의 거친 통곡소리가 들려나오고 있었다.
“이 못난 놈아! 죽긴 왜 죽어! 애빌 찾았는데 왜 죽는가 말이다. 잘살고 발전했다는 한국에서 아버지와 같이 행복하게 살 거지. 뭐가 무서워서 죽었어. 어미, 아빌 퍼렇게 살려두고 불효막심하게 자살을 하다니. 이 망할 놈아!”
준호는 지은이와 명철을 데리고 지은의 방으로 들어갔다.
“실컷 우시도록 내버려 둬.”
“오빠, 아버님이 자결하신 거야?”
“응.”
“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할 말이 없었다. 아들에게 보여주지 말았어야 할 모습을 보여준 아버지가 미웠다.
“오빤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도 눈물이 안 나오나 봐.”
“글쎄. 반드시 눈물을 흘려야만 부자간이 되는 걸까.”
“눈물이 없는 부자간도 이상하잖아.”
“아버진 평소 눈물을 싫어하셨어. 그리고 나도 아버지의 저승길을 눈물로 적시고 싶잖아. 저승길까지 눈물로 괴롭고 힘들게 할 필요는 없잖아.”
“구실이야. 오빠 진옥이와의 실련 때문에 아직도 아버질 미워하는 거지?”
“내가 아버지의 과거의 과실마저 수용 못하는 밴댕이소가지로 보여?”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지 뭐. 수용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수용할 기회를 주지 않은 거구. 그지?”
“몰라, 난 지금 아무 생각도 없어.”
실은 준호는 지금 유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보다도 할머니의 슬픔보다도 유리와 갈라져야 한다는 슬픔이 더 컸다. 아버지는 진옥을 빼앗아갔고 진옥은 그의 가슴 속에서 떠나가며 아버지까지 데리고 갔다. 이제 다행스럽게도 그 빈자리에 유리를 받아들였는데 그녀마저 누군가가 데려가려고 한다.
할머니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려서 집을 나섰다. 지은이와 명철이도 한사코 따라 나섰다.
할머니는 택시에 오르자 또다시 낙루하며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준호는 말리지 않았다. 대신 지은이가 할머니의 손을 잡고 위안의 말을 거듭했다.
“인명은 재천이라잖아요. 죽고 사는 건 하늘에 달렸대요. 갈 사람이 간 거라고 생각하세요.”
“하필이면 걔가 왜 갈 사람이냐. 여태껏 제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다가 이제야 찾았는데. 아직 아비 얼굴을 보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잘살 수 있는 길이 열렸는데……”
“어쩌면 아버님께서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하루아침에 바꾸기가 싫었던가 봐요.”
“그러니까 바보등신이라지. 잘살아 보겠다고 한국에 나온 게 아니냐. 일하지 않고도 잘 살게 되었는데 죽은 놈이 바보 아니고 뭐니. 제 아비 덕을 보며 한 번 잘살아 볼 거지.”
“사람은 어떤 땐 자기 자신이라고 해도 맘대로 할 수 없는 거예요.”
준호는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 속에는 내가 좌지우지할 수 없는 다른 내가 있다. 나는 나이면서도 나가 아니다. 그래서 자신을 지배할 수 없다. 아버지뿐이 아니었다. 준호도 유리도 한종수도 다 그럴 것이다.
아버지의 시신은 그때까지도 사건현장에 방치되어 있었다. 방금 시체 확인이 끝난 모양인지 법의와 형사들이 화장실에서 우르르 쓸어나갔다. 유가족이 나타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기자들이 삽시에 몰려들어 카메라플래시를 눈이 부시도록 번쩍거렸다.
“왜들 이러세요. 우리를 찍어서 뭘 하려는 거예요?”
지은이가 기자들이 들이대는 카메라렌즈를 손바닥으로 막으며 화를 냈다. 준호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런데는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수굿한 채 기자들 속을 뚫고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아버지는 주검이 된 채 타일을 깐 화장실바닥에 백포를 덮고 누워있었다. 무슨 동물의 주검처럼 그 격렬하던 몸짓이 영원히 굳어져버렸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나 목청을 높여 소리를 지르고 얼굴을 붉힐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버진 그런 기대와는 달리 인젠 하나의 바윗돌로 변해버린 것이 분명했다.
“이놈아, 이 불효막심한 놈아! 애빌 찾았는데 죽긴 왜 죽어! 제 아빌 한번 보지도 못하고.”
할머니는 아들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오열했다.
준호는 자식에게, 어머니에게 이처럼 나쁜 모습을 보여준 아버지를 원망했다. 죽음이 아니라도 한종수와의 인연을 거부할 수 있지 않았는가. 어쩌면 아버지는 생부에 대한 거부보다는 당신의 혈관 속에서 꿈틀거리는 《더러운 피》를 죽음으로 거부했던 건지도 모른다. 아버지에게는 분명 피보다 더 귀중한 것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것의 순결을 목숨을 바쳐 지켜낸 것이다. 그렇다고 생각하니 아버지의 죽음도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름대로의 신조를, 그 방법이 가장 적당한 것이었던가는 둘째 치고라도 지켜냈다는 사실에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죽음이 아니고서는 지켜낼 수 없을 만큼 아버지의 신조는 붕괴직전에 이르렀고, 뿌리 채 흔들리는 신조를 지켜 내기엔 이미 당신께서는 기진맥진하여 역부족이었음을 가슴 아프도록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죽음의 의미는 단순한 생명의 포기만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어떤 존재의 영원을 보장하는 하나의 유효한 수단일 수도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신조를 지키기 위해 생명이라는 인간의 마지막 카드를 서슴없이 내던진 것이다.
무언가에 충실한 사람은 순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만큼에만 국한될 수도 있다. 아버지는 인생에 충실한 사람이면서도 너무 한계적 생존공간을 살았던 건 아닐까? 아버지의 인생의 시점과 종점은 우회도 이탈도 없는 직선궤도였다. 아버지가 의식한 건 그 궤도를 달리는 주체인 자신의 인생보다는 자신의 인생이 달리는 그 궤도였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에게 주어진 그 궤도 말고는 자신의 일생을 어떠한 다른 궤도에도 길 갈이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제야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아버지라는 인생의 열차는 이제 궤도 위에서 영원히 멈춰 서서 세월의 비바람에 녹 쓸고 부식하여 한줌의 흙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왔다. 아들로서가 아니라 인생을 함께 한 인간으로서 아버지의 비참한 종말이 측은해졌다. 그러나 준호의 눈물은 너무나 때늦은 눈물이었다. 사실 그것은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그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눈물에 불과했다.
시신을 화장터로 옮겼다.
“얘야. 전화를 걸어서 그분을 오시라고 해야지.”
맥을 버린 채 벤치에 눈을 감고 앉아있던 할머니가 한마디 했다.
“그분이라니요?”
대상이 얼핏 떠오르지 않았다.
“한종수 말이다. 영식이가 죽었다고.”
준호는 밖으로 나왔다. 웬일인지 유리와는 전화통화라도 단 둘이 하고 싶다. 사랑은 이기적이고 소유욕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뭔가를 자기만의 소유임을 확인할 때 비로소 행복을 느끼는 걸까. 그러나 끝없이 팽창되어 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소유욕은 결코 사랑은 아닐 것이다.
“할아버지께 저의 아버지가 지난밤 돌아가셨다고 전해주세요.”
“네, 돌아가시다니요?”
“자결하셨습니다.”
수화기 안에서는 교류성만 찌르륵, 흐른다.
“할머니께선 유리 씨 할아버지께서 화장터로 나와 주셨으면 합니다.”
역시 수화기에는 있어야 할 그녀의 목소리가 비어있다.
“듣고 계신 겁니까?”
“네.”
“전달해주실 거죠?”
“네.”
그녀의 목소리엔 벌써 물기가 흥건하다.
“그 선택밖에 없었을까요?”
“그분이 살아오신 과거와 경륜의 강력한 관성 때문에 아버지로서는 인생의 핸들을 꺾어 좌회전이나 우회전을 한다는 게 전혀 불가능했던 겁니다.”
“그렇지만 생명의 시작은 피가 아니겠어요. 생명을 포기한다고 부정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객관적인 공인보다는 스스로의 확인이 더 필요했을 수도 있잖습니까.”
두 사람은 잠시 화제를 침묵 속에 묻었다. 어쩌면 둘 사이에 펼쳐진 화제의 들판이 황무지가 되고 쑥밭이 될까봐 두려워진다.
“유리 씨도 할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오시죠?”
오늘따라 유리는 대답 대신 빈번히 침묵을 대용한다.
“만나고 싶습니다. 할 말도 있고.”
“우리 만나지 말아요. 이제부터 우리의 만남은 불행이고 고통일 뿐이에요. 슬프고 아프고 절망과 수치를 느끼는 것쯤은 저도 참을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의 만남이 불륜의 연장이 된다는 사실이 두려워요. 할아버지가 막지 않아도 전 만날 용기를 상실했어요. 지금부터 전 준호 씰…… 준호 씰……”
울음을 물고 말끝을 적신다.
“준호 씰…… 오빠라고 불러야겠지요. 오빠!”
드디어 흑흑! 흐느끼는 소리가 수화기 속에서 울렸다.
준호도 가슴이 뭉클해났다. 콧등이 시큰해났다. 오빠라니?! 그 말은 바늘같이 아프게 폐부를 찔렀고 쇠몽둥이처럼 머리를 강타했다.
“유리 씨!”
목이 메어 말이 나가지 않았다. 말마디들이 목구멍 속에 달라붙은 채 잉걸불처럼 이글이글 불탔다. 사랑하던 여인이 하루아침에 누이동생으로 변하다니! 아, 누굴 원망하며 누굴 저주한단 말인가. 부모를 원망하랴, 시대를 저주하랴. 기구한 운명을 탓하랴. 인생은 영원히 풀 수 없는 공식일 뿐이었던가. 운명의 짓궂은 낙서였단 말인가. 미궁으로 통하는 터널이었던가.
“할아버지께선 아마 안 가실 거예요. 말씀드리나마나죠. 그날부터 오늘까지 한 끼 식사도 하지 않으셨고 말씀 한마디 없으셨어요. 충격이 너무 크셨나 봐요.”
“그래도 마지막 길인데……”
“말씀은 드려보겠어요. 참, 오늘 미국에서 두 분 작은할아버지께서 서울에 도착하세요. 공항으로 마중 나가야 해요.”
“유리 씨, 정말 저랑 만나주지 않을 겁니까?”
눈시울에 그들먹이 고여 햇빛을 반사하며 황홀한 광환을 펼치던 이슬이 두 볼을 적시며 쭈르륵 굴러 떨어졌다. 마음의 깊은 계곡에서 눈발이 펄펄 날린다. 가슴이 소금을 뿌린 듯이 아렸다.
“죄송해요!”
“유리 씨!”
불러놓고는 말을 삼켰다. 부모는 사과의 살 같은 것입니다. 사과의 살이 없었다면 씨앗은 보존될 수 없고 익을 수도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씨앗이 스스로 보호막을 형성한 다음엔 살은 아무 쓸모도 없게 되지요. 짐승의 먹이로 될 뿐입니다. 그렇게 살을 짐승에게 먹히고 나서도 씨앗은 남고 땅에 떨어져 새로운 과일나무의 원천으로 됩니다.
그런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이 그와 유리의 경우와 뭔가 어울리는 의미를 가지고 있을 듯 하면서도 분명하게 연결시킬 수 없어 말을 포기하고 말았다.
“할아버지를 대신해 고인의 명복을 빌어요.”
더 이상 그녀를 전화에 붙잡아둘 구실이 없었다. 유리에게는 그녀에게만 속한 삶이 있었다는 걸 새삼스럽게 확인하며 준호의 마음은 서글퍼졌다.
“그럼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한종수가 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할머니는 아무 말도 없었다. 욕도 하지 않았고 원망도 하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묵묵히, 덤덤히 아들의 유골함을 받아들였고 고인의 아들인 준호에게 넘겨주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할아버지의 고향인 남원으로 내려가 섬진강에 유골을 뿌리겠다고 했지만 손자가 반대하자 금방 입을 다물었다.
“중국으로 돌려보냅시다. 아버지의 뜻도 그러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님이 계시고 할아버지께서 계시는 강촌마을의 은파강에 뿌려드립시다. 그래야 아버지의 영혼도 안식하실 겁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남원으로 내려가 보았자 말이 고향이지 친척들은 죄다 6.25때 돌아가셨을 거 아냐. 혹시 족보를 뒤져보면 살아남은 친척들이 생존해 있을지도 모르지만 촌수가 먼 친척은 반가와 하지 않을 거고 촌수가 가까운 친척들은 50년 만에 나타난 가난한 친척들을 부담스러워할 테지. 제 아들도 모른다고 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할머니의 표정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듯 했다.
유골함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며 준호는 이런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과 그 인생이 추구해온 가치를 배신할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피는 생리적 현상일 뿐이다. 신념의 동질성이야말로 진정한 연대성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종수의 경우에도 다를 바 없었다. 두 분은 너무나 닮아있었다. 그리고 또 두 분은 혈육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인정하고 있었다. 혈육은 다만 동물적 생식기능에 의한 번식의 결과일 따름이다. 그러나 신념은 동물성을 초월한 인간적 기능의 산물이며 진리를 표현하고 있는 만큼 혈육보다 더 큰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 만큼 신념을 위해서라면 가히 혈육도 무시하고 동족상잔의 전쟁마저도 불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준호와 유리는 신념보다는 사랑과 평화에 더 큰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 유리는 혈육의 중요성까지 인정하면서 천륜을 어기지 않으려고 자신의 욕망과 행복마저 포기하려고 한다. 혈육은 뭐고 천륜은 뭔데?
집에까지 무사히 도착한 할머니가 갑자기 계단을 올라가시다가 폴싹 주저앉더니 그대로 졸도했다. 다급히 등에 업고 인근의 병원으로 옮기려 했으나 도중에서 의식을 차린 할머니가 병원 가기를 강력히 거부했다.
“할미 괜찮으니 어서 집으로 가자. 조금만 누워서 휴식하면 되니까.”
병원에서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은이가 이불을 펴드리고 베개까지 받쳐주었다.
“피곤해서 좀 눈을 붙일 테니 너희들은 나가서 너희들 볼일이나 보거라.”
준호와 지은이는 할머니한테 내몰려 지은의 방으로 옮겨왔다.
“오빠, 술 한잔할래?”
“그래.”
“너무 힘들어 보인다.”
“솔직히 힘들어.”
“집착하지 말구 잊어버려. 그러다가 병나겠다.”
“할머닌 괜찮으실까? 자식 잃은 슬픔을 이겨낼 만 하실지 모르겠다.”
“내가 보건대 할머닌 강하신 분이셔. 꼭 이겨내실 거야.”
금방 술상에 마주앉아 잔을 들었는데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또 무슨 전화지? 이젠 나까지 겁이 나.”
지은은 들었던 술잔을 상 위에 내려놓으며 근심어린 눈길로 준호를 바라보았다.
“SK국제데이콤입니다. 이 전화는 고객께서 요금을 부담하시는 전화입니다. 먼저 상대방의 음성을 확인하십시오.”
안내메시지가 끝나자 이어 전혀 낯선 남자의 거친 목소리가 수화기를 찢을 듯 요란하게 울렸다.
“최준호요? 난 성길이오.”
통화가 갑자기 뚝 끊어졌다.
다시 여직원의 안내음성이 들렸다.
“통화를 원하시면 1번을 누르시고 원하지 않으시면 2번을 누르십시오.”
준호는 잠시 망설였다. 낯선 사람의 전화를 받아야 되나 받지 말아야 되나 결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은 궁금증에 떠밀려 1번을 눌렀다. 혹시 할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전화를 건 사람인지도 모른다.
“난 말이요. 진옥이 남편 되는 사람이오. 진옥이라고 알지? 왜 이전에 그쪽 하고도 좋아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강촌마을에 살던 진옥이 있잖우.”
두서도 없는 말을 한참이나 횡설수설 떠벌이는 바람에 준호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첫 인상이 수다스럽고 경망하고 거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진옥의 남편이라는 말이 그의 호기심을 끌었다. 진옥의 남편이라? 그가 왜 나한테 전화를 걸었을까?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지? 진옥의 남편이라면 도박이나 하고 술 마시고 아내에게 폭력이나 휘두르는 그 망나니를 의미할 것이다. 진옥이 그 사내의 학대에 견디다 못해 울면서 준호더러 구해달라고 간청하던 바로 그 사람일 것이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쪽 전화번호를 몰라서 진옥이년의 전화번호수첩에서 겨우 찾아냈소.”
“용건이 뭡니까?”
“글쎄 진옥이년이 나 몰래 한국으로 도망쳤따이까. 며칠 전에 대련에서 배를 타고 한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소. 개쌍년이 날 버리고 도망쳐. 제깐년이 도망치면 어딜 도망쳐! 일본, 미국으로 도망쳐보라지. 이 어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나!”
사내는 미친개처럼 으르렁거리며 전화기에 대고 입에 담지 못할 거친 독설을 마구 퍼부었다. 입이 어찌나 더러운지 듣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였다. 밑바닥에서 시궁창에 빠진 돼지처럼 되는 대로 굴러다니는 사람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어쩌다가 진옥이가 저런 하류지배하고 만났을까? 다 내 탓이야. 내가 버리니까 자포자기에 빠져 자신을 버린 거지.
“도대체 저한테 하실 말씀이 뭡니까?”
“그년이 한국에 도착했는지 알아보려고 전활 한 거요.”
“전 처음 듣는 소립니다.”
“아무튼 떠났다니 요즘 도착할 거요. 도착하면 그쪽부터 찾을 테니 꼭 나한테 알려주오. 듣자니 그 쌍년이 그쪽한테도 한국수속 해달라고 부탁했다면서. 내 다 알고 있따이까. 먹물 먹으문 먹은 값을 해야재이요. 이번에도 당신이 그년에게 사주 한 게 아니요?”
“근거도 없이 마구 죄 없는 사람에게 누명을 덮어씌워도 되는 겁니까?”
“근거는 없소만 아무튼 년이고 놈이고 모두들 똑똑히들 놀라구! 이 어른의 눈에 거슬렸다간 뼈도 추리지 못할 거니까.”
“할 말이 끝났으면 이만 끊어도 되겠지요?”
“아무튼 그년이 도착하면 꼭 나한테 알려주오. 618××××으로 전화하면 되오. 개쌍년 내 손에 잡히기만 해봐라!”
“미안하지만 전 일이 있어 이만 끊겠습니다.”
더럽고 악취 풍기는 똥 벼락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그 구린내가 푹푹 풍기고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망나니, 하류지배와 여태껏 살았을 진옥이가 측은해졌다. 그 악마의 소굴에서 뛰쳐나왔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는 악마의 소굴에서 뛰쳐나오긴 했지만 이번엔 목숨을 건 모험의 구렁텅이에 뛰어들었다니 불안하기도 했다. 밀입국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죽음까지 각오해야 한다는 사실은 여러 사람들에게서 들어 준호도 알고 있었다. 더구나 남자도 아닌 여자가 말이다. 얼마나 견디기 어려웠으면 밀입국까지 시도했을까? 진작 그녀의 간청을 들어주지 못한 자신이 다시 한 번 미워졌다.
난 그녀를 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구원요청마저 거절한 나쁜 놈이야!
진옥이한테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무사하게 한국에 도착하여 돈도 벌고 맘씨 착한 남자도 만나 남은 인생이나마 편안하게 보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그녀에 대한 이런 바람은 어쩌면 그녀에게 지은 양심의 빚과 자신의 죄를, 그녀의 행운으로 무마하거나 면제받으려는 이기적 목적이 잠재한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준호는 이 순간 진심으로 진옥의 불행에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참회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순간이 아니라 한국수속을 부탁해온 진옥의 첫 번째 전화를 받았던 그때부터였다.
“누구 전화야?”
지은은 다시 술잔을 들며 의문을 던진다.
“아니야. 그냥 모르는 사람이야.”
“그런데 오빠 얼굴이 왜 그렇게 어두워. 나쁜 소식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 술이나 마시자. 기분 나쁜 전화니까 말하고 싶잖아.”
준호도 단모금에 술잔을 비웠다.
지은은 이상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빈 잔에 술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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