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불타는 반도

6장 사랑과 증오


1

비가 내렸다.
소슬한 냉기까지 듬뿍 업고서 내렸다.
가을이라선지 시들하고 권태롭다. 그래도 옷 속으로 스며들어 살갗을 적시기에는 족했다. 밤인데다 가을바람까지 가세하여 축축하게 젖은 몸은 싸늘했다. 삼라만상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묻혀 한치 앞을 가려보기도 힘들었다.
부역자들은 말없이 작업을 진행했다. 지게에 흙과 돌을 지어 나르는 사람, 통나무를 어깨에 메어 나르는 사람, 망치질을 하는 사람……
덕구는 비 내리는 어둠 속을 총망히 오가며 부역자들을 감독했다. 길이 미끄러워 다니기가 불편했지만 그만 나타나면 일꾼들은 담배를 피우거나 꾀를 부리다가도 벌떡 일어나 일손을 잡았다.
“좀 빨리빨리들 움직이시오. 날이 밝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합니다.”
아직 큰소리는 못 쳐도 나지막한 말은 할 수 있었다. 죄다 영화의 정성어린 치료와 지극한 간호덕분이었다. 며칠 지나면 원대복귀도 가능할 것 같았다.
폭격에 나무다리가 끊어져 길 건너편에는 탄약, 휘발유, 포탄 등 군수품을 만재한 트럭들과 탱크들이 길이 막힌 채 발이 꽁꽁 묶여있었다. 날이 밝으면 미군의 공중폭격이 또 시작될 것임으로 밤사이에 교량을 복구하여 트럭들과 탱크들을 통과시키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 시켜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굶주린 부역자들이 기진맥진하여 허우적거리는 바람에 도저히 복구 작업이 진척되지 않았다. 하긴 마을사람들 중 젊은이들은 국군을 따라 피난했거나 입대하고 의용군에 징집되다보니 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장년, 노약자, 부녀자들이었다.
“대대장 동지, 요로코롬 꾸물럭대다간 날 볽기 아래 대리를 곤치기가 에레울 것 같어라우.”
인민위원장 덕재가 사촌동생이지만 이 마을의 최고 실권자인 덕구에게 다가와 우려를 토로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날 밝기 전에 다리를 수리해야 하오. 부역자들을 좀 더 다그치시오.”
걸음을 옮겨 다리 쪽으로 걸어가려던 덕구는 갑자기 발작하는 현기증 때문에 걸음을 멈췄다. 한동안 눈을 감고 진정한 다음에야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목과 팔의 상처로 빗물이 스며들며 근질거렸다.
“안 돼요. 아직 상처가 완쾌되지도 않았는데요. 게다가 식사까지 제대로 못해 몸이 형편없이 허약해요.”
간호사 영화가 부역현장에 나가는 걸 극력 만류했지만 덕구는 고집을 쓰고 나왔다. 어쩐지 요즘 돌아가는 형세가 심상치 않아 병원에 처박혀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파죽지세로 남진하던 인민군의 진격은 유엔군의 낙동강방어선에서 저지된 채 공방전, 소모전만 거듭할 뿐 효과적인 진전이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늘어나는 건 부상병뿐이었다. 게다가 제공권을 장악한 유엔군의 공중폭격 때문에 후방보급로가 차단되어 전선에서는 탄약과 식량이 없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굶어죽을 최악의 상황이었다.
“개새끼들! 우리도 비행기만 있다면 네놈들을 진작 남해바다에 처넣었을 거다!”
덕구는 이를 갈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폭격에 파괴된 도로와 교량을 빨리 수축하여 지체되고 있는 군수품차량들을 전선으로 보내줘야 한다. 국도는 미군의 집중폭격으로 복구할 여지조차 없이 파괴되어 차량들은 지방도로 운행을 선택했지만 미 공군은 어떻게 낌새를 챘는지 그 통로마저 차단해버린 것이다.
“대대장 동지.”
느닷없이 어둠 속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보니 어둠 속에 간호사 영화가 서있었다.
“왜 나왔어?”
“병원으로 모셔가려고요.”
“안 돼. 여기 일이 급해. 날 밝기 전에 파괴된 다리와 도로를 수리하지 못하면 저 많은 차량과 군수품들이 미군의 폭격에 콩가루가 나고 말 거라고. 돌아가.”
덕구는 그냥 언덕을 털썩털썩 걸어 내려갔다.
“상처에 빗물이 스며들면 또 곪을 거예요. 겨우 아물려고 하는데……”
“됐다는데도 그러네!”
버럭 언성을 높였으나 덕구는 속으로는 영화의 진심이 고맙게 느껴졌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아닌가. 이 밤중에 정말 상처가 비에 젖어 곪을까봐 걱정되어 부역현장까지 찾아 나선 것일까? 그녀의 진실한 속내를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의사의 본분이고 직업윤리라고 하는데 그것이 과연 원수에 대한 복수보다 더 중요하단 말인가.
향란이가 잔등에 커다란 돌을 업고 덕구의 앞으로 지나갔다.
“얘. 넌 애는 어쩌고 나온 거니?”
“집에요.”
“몇 살인데 집에 혼자 있냐.”
“인젠 습관이 되었어요.”
향란은 부랴부랴 오빠의 앞을 지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4살짜리 어린애가 밤중에 집에 혼자 있다는 일이.
“대대장 동지.”
돌아간 줄로만 알았던 영화가 그냥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머땜시 돌아가란디 기연이 따라오며 귀찮게 굴어. 얼어 죽을!”
덕구는 군에 입대한 뒤부터 몸에 푹 배어 버린 전라도사투리를 퇴치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아직도 급할 때면 자기도 모르게 이따금 말 중간에 불쑥불쑥 굴러 나오곤 했다.
“전 환자를 돌봐야 할 책임이 있는 간호사예요. 대대장 동지는 지금 환자이기에 제 말을 들어야 해요.”
“지끔은 전시야. 내 상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전선에서 싸우는 수많은 전우들의 목숨이 더 중요해. 우리가 승리하자면 그들을 살려야 한다고. 알았어. 명령이니 어서……”
덕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하늘에서 드르릉, 드르릉, 하는 폭격기의 요란한 동음이 들려왔다. 그 소리가 어찌나 요란하고 웅글진지 하늘땅을 진동했다.
“모두들 일자리에서 떠나 대피하라!”
덕구는 손나팔을 만들어 입에 대고 외쳤다. 목살이 찢기는지 모진 통증이 발작했다.
쉬이익, 쉬이익!
하늘공중에서 폭탄이 투하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여기저기서 꽈르릉, 하는 폭음과 함께 시뻘건 불기둥이 치솟았다. 충천하는 화광 속에서 부역자들이 황급히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여인들의 날카로운 비명소리도 들렸다.
옆에서 불현듯 뜨거운 불 바람이 확 일며 폭풍마냥 덕구를 향해 덮쳐들더니 이어 꽈르릉! 하는 요란한 폭음이 터졌다. 땅이 진동하며 전신이 푸르르 떨렸고 그와 동시에 청각이 기능을 상실하며 멍해졌다. 덕구는 놀란 나머지 어리둥절해 서있는 영화를 본능적으로 와락 껴안고 부근의 웅덩이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뜨겁게 가열된 흙 부스러기들이 무덤처럼 그들의 몸을 파묻어버려 숨이 막혔다. 흙더미를 털고 일어났으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솟구치는 불기둥들과 화광, 기총소사에 불꽃을 튕기며 부서지는 돌멩이들이 언뜻언뜻 보였을 뿐이다.
덕구의 몸 밑에는, 바로 덕구의 얼굴 밑에는 영화의 공포에 질린 얼굴이 놀란 눈길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해 보였다. 그녀의 놀란 가슴을 무엇으로라도 위안하고 달래주고 싶었다. 그러나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영화는 그 조그마한 입술을 토끼처럼 호물거리며 뭐라고 종알거리고 있었지만 귀가 멍하여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덕구는 갑자기 호물거리는 그 입술을 갖고 싶었다. 폭격에 땅이 진동하며 몸이 드르릉, 드르릉, 떨렸지만 그것은 공포보다는 흥분을 자극했다. 덕구는 입을 벌려 그녀의 입술을 한입에 덥석 삼켜버렸다. 잘 익은 앵두 같았다. 모래가 씹혔지만 꿀처럼 달콤하기도 했다. 영화의 육신은 폭격 때문인지 세차게 경련하고 있었다. 입맞춤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한바탕 폭탄을 퍼부은 폭격기들은 포탄이 바닥났는지 잠시 후 남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개새끼들!”
덕구는 하늘에 대고 욕설을 퍼붓다가는 땅바닥에 가래침을 뱉어내곤 했다.
영화는 먼지를 털고 땅바닥에서 일어났지만 말이 없었다.
“다리가 또 폭파됐어. 간나새끼들이!”
웅덩이에서 나오니 누군가 투덜거리며 강가로 달려갔다.
“백 번을 폭파해 보라지. 우리도 백 번을 수리할 거야.”
걸음을 옮기려던 덕구는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 남을 느꼈다. 발밑의 땅이 파도 위에 떠 있는 쪽배처럼 흔들거렸다. 덕구는 선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자신을 부축하는 영화의 손길을 마지막으로 의식하고는 질척거리는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덕구가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벌써 야전병원의 침상에 누워 있었다.
“교량복구는 어떻게 됐어?”
창문으로 햇빛이 흘러드는 걸 보고 덕구는 발이 묶여 있던 군수품 차량들이 걱정되었다.
“다 남쪽으로 이동하여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고 들었어요.”
“그래. 고마워.”
덕구는 영화의 손을 덥석 거머쥐었다.
“아이참, 저한테 고마울 게 뭐가 있어요.”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현장에 나가 봐야겠어. 또 놈들의 폭격이 시작될 텐데 미리 나무랑 돌이랑 준비해 둬야 할 게 아니야.”
덕구는 침대에서 일어나 허리에 혁대와 권총을 찼다.
“안 돼요. 절대로 안 돼요. 대대장 동지는 지금 몸이 형편없이 허약해요. 상처보다도 원기를 회복하는 게 급선무예요. 단 며칠만이라도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약을 써야 원대복귀도 가능할 거구요. 이렇게 무리하게 구시다간……”
영화가 무작정 그의 팔소매를 잡아끌었다.
“제기랄, 그럼 나더러 집구석에 들어앉아 몸 보양이나 하라는 말이야!”
“정 이러시면 간호사의 말을 듣지 않는 환자라고 원장동지께 보고할 거예요.”
“이런 제길. 속 터져 죽겠네. 누구 염장 지를 작정인가. 그럼 도대체 날더러 어떡하라는 거야?”
소리를 버럭 지르자 목의 상처가 아파나며 덕구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오늘은 병원에 가만히 누워 휴식을 해야 돼요. 전 지리산에 들어가 구기자열매를 따오겠어요.”
“그건 따다 뭘 하려고?”
“구기자는 양생의 선약이라잖아요. 2천 년 전부터 중국 약방서에 실린 전통약이예요. 허약한 신체를 보하고 기운을 돋우는데 으뜸 약재지요. 대대장 동지는 목의 상처 때문에 식사를 제대로 못해 신체가 너무 허약해졌거든요.”
그녀의 햇빛같이 따사로운, 깨끗한 진심이 또다시 고드름처럼 차고 날카로운 덕구의 가슴에 스며들며 봄눈처럼 스르르 녹아내렸다.
“그럼 나도 함께 가지.”
“안 돼요. 산을 오르내리는데 얼마나 힘든데요.”
“싫으면 그만 둬. 난 마을에 내려갈 거야.”
“좋아요. 그럼 대대장 동지는 그저 따라만 다니시는 거예요.”
“그래. 간호사동무의 명령을 들을 팅께 걱정 마.”
산을 오르는데 덕구 때문에 스무 번도 넘게 쉬어야 했다. 땀이 철철 흐르고 가끔 정신이 가물거리기도 했다.
마침 구기자 숲을 쉽게 찾았다. 무성한 덩굴 숲에 붉은 구기자열매가 탐스럽게 열려 있었다.
“이게 원기를 돋우는데 그렇게 좋단 말이지?”
지리산줄기는 파도처럼 기복을 이룬 절묘한 산악들과 숲이 울창한 계곡과 능선들로 수려한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렇다니까요. 다치지 말아요. 가시에 찔려요. 구기자나무는 전체가 약재예요. 열매는 구기자라 하고 잎은 구기옆이라 하고 근피는 지골피라고 하지요. 구기자열매로 달인 구기차는 신체가 허약한 사람에게 아주 좋고 정력을 회복하고 허리를 튼튼해지게 해요. 또 구기자나물은 삶은 순과 잎을 무친 것인데 강장제로 유명해요.”
전문가답게 영화는 끝없이 수다를 떨었다.
“나도 따볼까? 가만히 앉아 있자니까 무료하구만.”
덕구는 바위 위로 올라가 열매를 따기 시작했다.
“가만 계시라니까 그러시네요. 기운도 없으시면서.”
“아무리 기운이 없다 해도 여자보다 못할까봐. 내가 이래 보여도 호랑이……”
윗 덩굴에 달린 구기자를 쳐다보던 덕구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끼고 주저앉으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는 몸의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그대로 바위 아래의 골짜기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대대장 동지.”
영화는 놀란 소리를 지르며 바위를 에돌아 비탈로 달려 내려갔다. 덕구의 얼굴에서는 가시덤불에 긁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대대장 동지?”
영화가 계곡으로 흐르는 샘물을 떠다가 입 안에 흘려 넣어주고 얼굴에 뿌려주어서야 덕구는 정신을 차렸다.
“내가 저 바윗돌에서 굴러 떨어진 거야?”
“그건 아시네요. 그러게 제가 뭐랬어요. 가만히 앉아계시라는데도 고집부리시더니.”
어린애처럼 토라지는 모습이 더구나 예뻤다.
덕구는 그제야 자신이 영화의 무릎을 베고 그녀의 품에 상체가 안겨있음을 발견했다. 따스하면서도 탄력 있는 그녀의 육신이 피부로 와 닿으며 덕구는 꿈틀거리는 정욕을 강하게 느꼈다. 저도 모르게 전신이 떨렸다.
“영화!”
“네에∼ 좀 괜찮으세요?”
“영화!”
“왜 그러세요? 듣고 있잖아요.”
덕구의 불이 활활 타오르는 눈길을 보자 영화는 그만 겁이 더럭 난 모양인지 다급히 그의 상체를 무릎 위에서 내려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덕구는 어느새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으스러지게 그러안았다.
“왜 이러세요? 대대장 동지!”
“나 죽어! 죽겠다고. 날 좀 살려줘. 한번만.”
“무슨 말씀이세요? 이걸 놓아요.”
“난 놓지 못해.”
“안 돼요. 이러시면 안 돼요. 전 아직 처녀예요.”
영화는 단호하게 덕구를 떼쳐버렸다.
“빌어먹을 년! 말 안 들으면 죽여 버릴 거야. 죽기 싫으면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해.”
그녀에게 가슴을 떠밀려 가시덩굴 위에 나뒹굴었던 덕구는 홧김에 벌떡 일어서더니 허리춤의 권총을 쑥 뽑아들었다.
“시키는 대로 할 테냐 죽고 싶으냐?”
“대대장 동지.”
영화의 얼굴이 금시 새파랗게 질리며 사색이 되었다.
“죽기 싫으면 잠자코 있어.”
덕구는 미친 사람처럼 전신을 화들화들 떨며 역시 육신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영화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손이 떨려 저고리 단추가 벗겨지지 않자 그냥 와락 잡아당겼다. 단추가 뿔뿔이 떨어져나갔다. 치마끈도 끝내 풀지 못하고 무작정 다리 아래로 끄집어 내렸다. 순식간에 그의 눈앞에는 우유 같이 말쑥하고 박속 같이 하얀, 눈부시고 싱싱하고 물기가 함초롬한 나신이 드러났다.
흥분이 극도에 달한 덕구는 황소처럼 거칠게 숨을 헐떡거렸다. 무얼 시작하기도 전에 땀부터 철철 흘러내린다. 영화는 두 눈을 감은 채 질겁하여 가는 소리로 오열하고 있었다. 덕구는 독수리가 병아리를 덮치듯 그녀의 백옥 같은 나신에 매달리며 밑에 깔고 누웠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그 짓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그건 육욕일 뿐 하신에 필요한 기운이 투입되지 않았다. 조급해 할수록 땀만 물처럼 흐를 뿐 하신은 마른 대추알처럼 쪼그라들고 후줄근해지는 것이었다.
“제기랄. 오늘은 어찌된 일이지?”
영화는 덕구가 주춤거리는 틈을 타 얼른 일어나 옷을 집어 입었다.
“보세요. 몸이 얼마나 허약해지셨으면……”
덕구는 욕망을 포기했다. 그늘 밑에 누워 영화가 구기자열매를 다 딸 때까지 오래간만에 한 잠 늘어지게 잤다.
“인젠 그만 내려가요.”
영화가 흔들어 깨워서야 일어났다.
그녀를 마주 대하기가 쑥스러워졌다. 남자로서의 망신을 당했다는 수치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덕구는 성격적으로 사과 같은 건 할줄 몰랐다. 저만큼 앞장서서 산을 성큼성큼 걸어 내려왔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덕구는 다시는 그녀에게 치근거리지 않았다. 그녀만 나타나면 공연히 화를 벌컥 내며 자리를 피하곤 했다. 그러나 영화는 조금도 다른 내색을 내지 않고 예전처럼 지극정성으로 그를 치료하고 간호해주었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날 이렇듯 잘 대해 주는 걸까?
전세는 날이 갈수록 인민군에게 불리해졌다. 상처가 완쾌되고 영화의 정성어린 간호로 원기도 엔간히 회복되어 원대복귀의 날이 다가오자 덕구는 뭔가가 조급해졌다. 고향으로 왔지만 한종수를 찾지 못한 일 때문이었다. 혹여 인민군이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복수의 숙원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덕구는 벌써 오랫동안 동생 향란이를 주시해왔다. 아무리 봐도 향란의 행동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덕재를 통해 향란이가 절에 감금된 종철에게 음식이나 의복을 남몰래 밀어 넣어 준다는 정보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집에다가 4살짜리 어린애를 두고 밤이고 낮이고 밖에 나와서 돌아다니는 일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집에서 애를 봐주는 사람이 없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애를 봐주는 사람이 반드시 한종수일 거라는 확증 같은 것도 없었다. 전혀 엉뚱한 사람일 수도 있고 또 향란의 말처럼 어린애가 혼자 집에 있는데 습관이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더구나 그녀는 여맹위원장이고 노동당원이 아닌가. 어찌 적을 집에다 숨겨 둘 수 있으랴.
그런데도 예감은 이상했다. 집에서 애를 봐주지만 그 정체를 오빠에게까지 숨겨야만 하는 사람이라면 그럴 만한 특별사정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어느 날 덕구는 경상자 몇 명과 덕재 그리고 마을의 민청원들을 거느리고 동생 몰래 향란의 집을 급습했다.
그때 집 안에 있던 종수는 어린애가 잠들자 답답한 나머지 마침 뒷산으로 산책을 나갔기에 봉변을 면할 수 있었다. 그는 덕구와 덕재가 한 무리의 군인들과 민청원들을 거느리고 향란의 집으로 몰려오는걸 보자 재빨리 숲 속에 몸을 은폐하고 숨을 죽였다.
덕구는 집 안팎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의심되는 단서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덕구는 추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고 있는 영호를 깨워 알사탕을 주며 달랬다.
“얘야. 너랑 함께 있던 아저씨는 누구지? 어디 갔니?”
“어떤 아저씬데 어디 간지는 몰라요.”
영호는 먹물을 먹은 아비, 어미를 닮아선지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똑똑했다.
“우리가 아저씨에 대해 물었다는 걸 절대 그 아저씨에게 말하지 말 거라. 알았니?”
“네.”
덕구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조용히 사람들을 이끌고 향란의 집에서 나왔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향란은 이 소식을 듣자 얼굴이 금시 흙빛으로 변했다.
“큰일 났어요! 오빠가 무슨 눈치를 챈 게 틀림없어요. 그러니 무슨 불상사가 생기기 전에 어서 우리 집에서 떠나가요.”
향란은 한시라도 급히 혹을 떼어버리고 싶었다. 그것으로 종수가 자기를 살려준 은혜도 청산하고 영호도 위험에서 구출하고 싶었다. 모든 은원恩怨을 청산하고 당당하게 그와 적이 되어 싸우고 싶었다. 그에게 당한 수모와 능욕과 치욕의 대가를 받아내고 싶었다. 그를 이 집에서 쫓아내기 전에는 손발이 꽁꽁 묶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가 질식할 것만 같았다. 어린애를 그에게 인질로 남겨두고 밖으로 나오면 영호가 걱정되어 진종일 제 정신이 아니었다. 공화국을 위해, 인민군을 위해 여맹위원장 사업을 하는 그녀를, 더구나 노동당원이고 진짜 빨갱이인 그녀를 종수는 언제라도 죽여 버릴 위험은 존재하고 있었다.
“영호가 내 손에 있는 한, 그놈들은 날 어쩌들 못할 꺼야. 함번 왔다갔응께 너만 입 다물고 비밀을 지키먼 더 이상 시끄러운 일도 없을 거란 말이야. 넌 덕구란 놈의 누동숭이고 또 빨갱이 노동당원이자 여맹위원장잉께 의심을 하들 않을끼고.”
영호는 덕구의 당부대로 종수를 찾았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심지어는 엄마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도 늘 밖에 나가 놀지도 못하게 집 안에 가두어 두는 낯선 아저씨가 싫었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나갔다. 비가 억수로 퍼붓는 어느 날이었다. 요즘 들어 부상병들이 부쩍 늘어났고 부대를 이탈하는 장병들의 숫자가 날마다 불어났다. 유엔군이 반격을 개시할 거라는 뒤숭숭한 소문도 심심찮게 들렸다.
덕구는 이제 인민군의 패퇴가 불가피한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그러자 한종수에 대한 원한이 더욱 더 사무쳤다. 이번에 후퇴하면 언제 다시 남쪽으로 내려올지 기약이 없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동생의 집을 기습하기로 작정했다. 그밖에 달리 종수를 찾을 만한 선택이 없었다. 그 지독한 놈이 향란이와 동생 종철이와의 연인관계를 악용하거나 어린애를 인질로 향란의 집에 숨어 있을 가능성도 아주 없지 않았던 것이다.
“형님은 민청원들을 데리고 우선 향란이네 집을 포위하시오. 우리가 집을 기습할 때 놈이 도망치지 못하게 말이오.”
덕구는 덕재에게 분부하여 민청원들을 향란이네 집주위에 매복시킨 다음 군인들을 데리고 정면기습을 시도했다.
대문은 안으로 걸려 있었다. 인민군전사 한명이 울바자를 뛰어넘어 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갑자기 총소리가 울렸다. 비가 세차게 쏟아져 총소리는 가늘었다. 이어 총소리에 놀란 영호의 바스러질 듯한 울음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왔다.
“집 안에 숨어 있는 놈은 들으라. 넌 포위되었다. 총을 버리고 투항하라! 반항하면 죽여 버릴 테다!”
옆에 있는 전사를 시켜 투항을 유도했다. 거세찬 빗줄기는 전사의 외침소리를 토막 내어 땅바닥에 던지면서 콩가루 냈다.
진퇴양난의 상황을 파악한 듯 안에서도 정체를 밝히며 밖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내 손엔 어린애가 있응께 어여 물러들 가라. 물러가들 않으먼 얼라를 죽여비릴팅께!”
그랬다. 그 목소리의 임자는 분명 한종수였다. 벌써 그와 갈라진지 5년이 되었지만 덕구는 그 목소리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숨어있는 작자가 종수임을 확인하자 덕구는 치솟는 분노로 치가 떨렸다.
“네 이놈, 종수 놈이 분명하지? 난 덕구다. 내 네놈이 여기 숨어있을 줄을 알았다.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총을 던지고 공손히 투항해라.”
“그랴 덕구 이자식! 어디 용기가 있으먼 들어와 보그라이. 느그 조카 놈이 죽는 꼴을 보고 쟆거던.”
“그 애가 머땜시 내 조카냐. 네 조카지. 네 조카를 느그 손으로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네 맘핀대로 하그라.”
정말 그랬다. 지주 놈의 피가 흐르는 영호가 왜 내 조카냐 말이다. 그놈들의 종자 아닌가. 죽이던 살리던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는 애다.
뜰 안으로 뛰어 들어간 인민군 전사가 안에서 대문빗장을 열어주었다. 덕구는 대원들을 거느리고 뜰 안으로 돌입해 들어갔다.
탕탕!
방 안에서 권총 사격 소리가 연이어 울려나왔다. 발사될 때마다 총구에서 시뻘건 불줄기가 뿜겨 나왔다. 어둠 속에서 화광이 선명하게 보였다.
한 전사가 총탄을 맞고 빗물이 고인 마당에 털썩 넘어졌다.
“엎드렷!”
덕구는 고함을 지르며 질척거리는 땅바닥에 넙죽 배를 붙이고 엎드렸다.
“포복 전진할 것!”
십여 명의 사람들이 마루 쪽을 향해 진창 위를 기어가기 시작했다.
총소리가 울리자 외곽에서 집을 포위하고 있던 민청원들도 울바자를 뛰어넘어 들어왔다.
“오빠! 총 쏘지 마. 영호가 안에 있어.”
어느새 달려온 향란이가 정신없이 총탄이 휭휭 날아다니는 뜰 안으로 허겁지겁 달려 들어오며 외쳤다. 이때 총탄이 떨어진 모양 철컥하고 빈 방아쇠당기는 소리가 울리더니 방 안의 총소리가 잠잠해졌다.
“탄알도 떨어졌으니 어서 투항하라!”
그러나 지게문이 벌컥 열리더니 어둠 속에 종수가 불쑥 나타났다. 그는 품에 영호를 안은 채 총알받이로 삼고 포위를 돌파하려고 시도했다.
“총을 쏘면 얼라가 죽을 줄 알어. 얼라가!”
종수는 목 갈린 소리로 외치며 포위망을 뚫고 나가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아!”
영호는 울면서 엄마를 찾았고 향란은 애타게 아들을 불렀다.
“총을 쏘지 말아요! 쏘지 말아요! 영호야!”
그러나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영호의 울부짖음은 뚝 그쳐버렸다. 어린애가 죽자 종수는 영호를 땅바닥에 내버리고 홀몸으로 포위망을 뚫어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대기하고 있던 인민군 전사들이 일시에 덮쳐드는 바람에 꼼짝달싹 못하고 생포되고 말았다. 향란은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더니 마루 위에 쓰러진 아들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오열했다.
“영호야. 눈떠 봐. 죽지 말고 눈떠 보라니까! 영호야.”
한종수는 팔을 결박당한 채 인민위원회사무실로 끌려갔다.
덕구와 종수 두 사람은 한식경이나 서로를 노려보았다. 뼈만 앙상한데 거죽만 붙은 허약하고 수척한 덕구는 비에 온몸이 젖기까지 하여 초라하고 남루했다. 게다가 목과 팔에 붕대까지 감아 비참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눈길과 표정은 승자의 당당함이 역력하여 지어는 거만하고 방자해보이기까지 했다.
대신 암팡지고 단단한 한종수는 신체는 튼튼하나 패자의 수치와 처량함이 엿보였다.
“남쪽으로 도망쳤으니 살아났다고 생각했을 테지. 내 손에 죽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을 거 아냐!”
“그랴. 원통스럽다. 내가 네놈을 잡아 아버지와 아내의 원수를 갚을락꼬 혔는디 어짜다 봉께 이 꼴이 되었구나. 그라지만 느그놈들이 패망할 날도 오라들 않다는 걸 명심하그라.”
“누가 누구의 원수를 갚는다는 거냐. 먼저 사람을 죽인 건 누군데. 바로 네놈이 아니냐. 왜놈의 개질을 하면서 일제를 반대해 싸우는 반일투사를 도와준 형님을 고문하여 잔인하게 죽인 놈이. 곱단이를 강제로 끌고 가 유린한 놈도 네놈이고.”
덕구는 앞에 놓은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그놈은 반일투사가 앙그라 공산당 빨갱이었어. 느그놈들 맹키로 똑같은. 난 그때나 지끔이나 반공투사란 말이다.”
“이 악질반동새끼가!”
덕구는 옆에 선 병사의 어깨에서 자동총을 왈칵 벗겨내어 안전장치를 절커덕 풀었다.
“그랴. 찰코 죽여비리라. 그라지만 느그놈이 죽을 날도 오라지 않을 끼다.”
종수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가슴을 불쑥 내밀어 총부리 앞에 들이댔다.
“오빠, 제발 그만해요.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말아요. 인민군대는 포로를 죽이지 않는다면서요.”
어느새 나타났는지 향란이가 눈물범벅이 된 채 덕구와 종수의 사이에 막아섰다.
“비켜! 이놈은 포로가 아니야. 투항하지 않았단 말이야. 악질반동새끼고 악질경찰 놈이고…… 이따위 새끼는 인민재판도 필요 없어. 즉결처분할 수 있단 말이야.”
“그래도 종철 씨의 형님이구, 옛날부터 한동네에서 살던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또……”
향란은 미우나 고우나 한 달 가까이 한종수와 살을 섞으며 살았던 일이 상기되었지만 그 말은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미운정도 정인 것만은 틀림없는 모양이다. 밤이 되면 그가 그녀를 능욕할 때는 죽이고 싶도록 미웠는데 정작 오빠가 그를 죽이려 하니 막아 나서게 되니 말이다. 하룻밤의 정사로 만리장성을 쌓는다더니. 어쩌면 그녀의 뱃속엔 이미 한종수의 씨앗이 자라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동생의 얼굴을 봐서 제발 총살만은 면하게 해줘요. 오빠.”
“저리 비켜. 쌍년!”
덕구는 옷자락에 매달리는 향란의 가슴을 사정없이 발길로 내질렀다. 그러나 총은 내리고 병사한테 던져준다.
“우릴 따라 월북하면 몰라도 그 전엔 살려줄 수 없어.”
“월북. 흥. 꿈 깨라! 내 손으로 널 잡아 도륙내들 못한 게 한인디 느그들 따라 북으로가. 찰코 죽고 말디.”
종수는 덕구의 얼굴을 향해 침을 내뱉었다.
“이 종간나새끼가 정말! 좋다. 네 소원이 죽는 거라면 소원을 꺼줄 게.”
“귀신이 되어서락도 네놈을 죽이고 내 꼭 아버지 원수를 갚고사 말 거야!”
“이 새끼를 끌어내다가 절간에 가둬라!”
덕구의 말이 떨어지자 옆에서 대령하고 있던 덕재가 기다렸다는 듯 종수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는 비가 그치지 않고 쭈룩쭈룩, 쏟아지고 있었다.
인민군 병사 한 명이 빗발 속을 뚫고 헐레벌떡 인민위원회사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동무, 무슨 일인데 이렇게 허둥지둥하는 거요?”
병사는 덕구의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대대장 동지, 후퇴랍니다. 우리 군대가 미군의 공격에 밀려 전략적 후퇴를 시작했답니다.”
“뭐라고? 후퇴라니!”
덕구는 걸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정작 그것이 현실로 다가서자 그는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그러고 멍청하게 서있을 시간이 없었다. 후퇴라면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서둘러야 했다.
“속히 야전병원에 알려 부상병들을 북쪽으로 옮기도록 하시오. 인민위원회 간부들에게도 알려 후퇴하도록 조치를 취하고. 어서!”
덕재도 소문을 들은 모양인지 허둥지둥 사무실로 돌아왔다.
“절간에 가둔 놈들은 어떻게 할까라우?”
“죄악이 많은 놈들은 처단해야겠지.”
“아예 생매장해 비리이다. 놈들에게 탄알도 아깝잖여유.”
“뭐라고? 생매장을?”
“대대장 동지는 모른 척 하이다. 본바닥 사램들찌리의 일잉께 즈그들이 알아서 헐 팅께. 오늘 밤 안으로 깐딱 모르게 해치워사 쓰겄소. 우물꾸물하다간 시기를 놓칠 시도 있응께 미군이 폴쌔 함양까장 올라왔다는디……”
“그래 인민위원회에서 알아서 하시오. 우리 인민군대는 현장만 보호해 줄 팅께.”
덕구의 머릿속에는 갑자기 영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다급히 인민위원회 사무실에서 나와 국민학교 쪽으로 달려갔다. 비가 어찌나 억수로 쏟아지는지 걸음을 옮기기조차 힘들었다.
그녀는 야전병원에 있었다.
“영화, 나랑 같이 북으로 가자!”
다짜고짜 그녀의 팔을 부여잡고 강요했다.
“전 못가요.”
“머땜시로?”
“여기는 제 고향이잖아요.”
“고향이 먼 상관인디?”
“엄마와 형제 그리고 친척들도 다 여기 있잖아요.”
“널 묶어서 끌고라도 갈 거야.”
“그런다고 제 마음까지는 끌고 가지는 못할 거예요. 마음이 죽은 빈 껍질만 끌고 가서 뭘 하시려고요.”
“뭐라고?”
덕구는 몸을 흠칫 떨었다. 그녀의 말이 가슴을 찌르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희망은 희박해 보였지만 한 번 더 설득해보기로 했다.
“북에 가서 의사노릇하면 될 거 아냐.”
“전 지주의 딸이에요. 경찰의 여동생이고.”
덕구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그녀를 북으로 데려가려 했던 건 미련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녀의 진심과 정성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것이 그녀에게는 불행으로 된다니 강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긴 북에서 지주와 경찰은 타도대상일 뿐이니 그녀를 의사로 받아들여 줄지도 의문이다.
“그래 그럼. 인민군이 다시 내려올 때까지 날 기다릴 수는 있겠지?”
“그게 가능할까요?”
“가능하구 말구. 인민군은 꼭 다시 돌아올 거야. 이건 일시적, 전략적 후퇴일 뿐이라고. 긍께 꼭 그때까지 기다려줘. 그리고 지금 당장 여길 떠나. 무슨 봉변이 닥칠지 모릉께.”
덕구는 무작정 그녀의 등을 떠밀어 밖으로 내보냈다. 덕재나 향란이가 그녀를 잡으러 올지도 모른다는 우려감이 그를 조급하게 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지주의 딸이며 악질경찰의 동생을 도와주다니. 덕구는 빗줄기를 뚫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를 문 밖에서 오래도록 배웅해주었다. 그녀가 떠나 간지 얼마 안 되어 비에 젖어 옷이 물행주가 된 덕재가 다급히 국민학교로 달려왔다.
“구덩이를 다 팠시. 반동분자들도 끌어내 왔구. 근대 종수 놈의 둘째 여동숭 영화 가이나가 빠졌구먼. 필시 이 병원에 있을 틴디……”
“없수다.”
“없다니?”
“벌써 어디론가 도망쳤나보오.”
“머락꼬? 동숭매가 앙기, 대대장 동지가 여그 있었을 거 앙기가?”
“나도 금방 들어왔는데 와보니 벌써 없어졌구만.”
“쩌런 쩌런, 그 가이날 놓치다니…… 암튼 인젠 시간이 없응께 사형장으로 나가 보시. 오늘 밤 안으로다 적들이 밀고 올라올른디도 모릉께. 폴쌔 포성이 들리잖여.”
우렛소리인지 포성인지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멀리 어둠 속의 어디선가에서 꽈르릉꽈르릉, 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가봅시다.”
두 사람은 학교를 나와 비 내리는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사형장으로 정한 계곡에 이르자 팔과 다리를 결박당한 수십 명의 사람들이 구덩이 앞에 줄느런히 시립해있었다. 폭우가 쏟아져 그들의 옷은 죄다 물자루가 되어 있었다. 덕구는 그들앞으로 다가가 하나하나 얼굴들을 확인했다. 산곡리마을 이장인 한상진과 그 마누라, 종수와 그 마누라 그리고 종철과 고모네 식구들…… 낯익은 사람도 있고 낯선 사람들도 있었다.
“덕구 이놈! 느그들 북괴군들이 이라게 지독할 줄은 몰랐다. 느그들 눈깔에는 늙은이도 여인네들도 안 보이냐. 늙은이들과 여인네들헌티 먼 죄가 있닥꼬 생매장 헐락꼬 미처날뛰냐?”
종수가 덕구를 보자 늑대처럼 으르렁거렸다.
“이 새끼. 입을 닥치지 못해! 이건 우리 인민군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야. 그라고 이 늙다리는 이승만 괴뢰정부의 주구란 말이야!”
덕재가 덕구의 등 뒤에서 달려오더니 구둣발로 종수의 엉덩이를 내질렀다. 종수는 진창 속에 풀썩 꼬꾸라졌다. 그러나 다시 기어 일어나며 분노하여 외친다.
“개보다 못한 놈! 죽이려면 나 하나만 죽여라! 노인들과 부녀자들은 풀어주란 말이다!”
이장 한상진은 추위에 육신을 화들화들 떨고 있을 뿐 한마디 말도 못했다. 종철이 겨드랑이를 부축해주어서야 간신히 버티고 서있었다.
“오빠, 종철 씨 만은 제발 살려줘요. 이 동생의 마지막 소원이에요. 종철 씬 아무 죄도 없잖아요.”
향란은 또다시 덕구의 팔소매에 매달리며 간청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놈하고 물어봐. 우릴 따라 월북할 생각이 있나. 생각이 있다면 살려 줄 수도 있어.”
“종철 씨. 어서 대답해요. 월북하겠다고.”
향란은 이번엔 종철이한테로 다가가 팔에 매달렸다.
종철은 고개를 푹 떨어트린 채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는 어깨를 들먹이며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사형을 집행하라!”
드디어 덕재가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총을 들고 둘러서 있던 민청원들이 사형수들의 등을 총개머리로 떠밀어 구덩이 속에 처넣었다.
“잠간만!”
그때 갑자기 종철이 부르짖었다.
“난 당신네를 따라 월북할게요.”
“그게 정말인가?”
“정말입니다.”
“그럼 좋다. 너만은 이쪽으로 나와.”
종철이만을 따로 사람들 속에서 끌어냈다.
총망하게 판 것이어선지 구덩이는 그리 깊지 않았다. 벌써 밑바닥에는 빗물이 가득 차 있었다. 나머지는 그 속에 무작정 등을 떠밀고 발길로 차 넣었다. 일제히 삽을 주어들고 구덩이 속에 흙을 떠 얹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울음소리, 욕지거리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구덩이가 점차 흙과 돌로 메워지면서 아우성소리도 낮아지기 시작했다.
종수는 구덩이 오른쪽 귀퉁이에 떨어져 들어갔다. 사지가 결박당하여 몸부림을 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머리 위에 젖은 흙이 쏟아지자 그는 인젠 꼼짝 못하고 죽었구나 하는 생각을 건지며 모든 것을 체념하고 두 눈을 감아버렸다. 이대로 죽다니! 너무너무 원통했다. 덕구 이놈! 어디 두고 보거라. 내가 죽어서 귀신이 되어서라도 네놈을 잡아 죽이고야 말 것이다. 그는 이가 부러지도록 으드득으드득, 갈았다.
향란은 어둠 속에서 삽을 들고 오빠 몰래 흙이 아닌 나뭇가지나 가랑잎 돌멩이 따위들만을 골라서 구덩이 속에 던졌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으니 흙이 씻겨 내리면 혹 숨길이 트여 살아날 가망도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웬일인지 종수를 살려주고 싶었다.
매장을 끝내자 일행은 부랴부랴 그 자리를 떠났다.
덕구는 그 밤으로 산곡리를 떠나 후퇴 길에 오르기로 결정했다. 구태여 적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종수를 죽였으니 그가 할 일은 죄다 끝난 셈이었다.

한편 뜻밖에도 덕구의 선심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영화는 그 길로 큰할아버지인 이장네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집 안은 텅텅 비고 세 살 난 종수의 아들 철수만 혼자 방바닥에 누워 울고 있었다. 영화는 철수를 등에 업고 허둥지둥 마을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마을 밖 계곡에서 큰할아버지랑 오빠랑 생매장당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녀는 멀리 숲 속에 은신하여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가 덕구네 일행이 사라지자 허둥지둥 구덩이 쪽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버리고 간 삽을 주어들고 헐레벌떡 흙을 파냈다. 폭우에 흙이 씻기고 나뭇가지와 풀 검불이 드러난, 삽질하기 쉬운 곳부터 파기 시작했다.
하늘이 도왔는지 맨 처음으로 구덩이 속에서 파낸 사람은 다름 아닌 오빠 종수였다. 종수는 나뭇가지와 풀 검불에 뭍힌 덕분에 다행히도 산소공급이 완전히 차단되지 않아 그때까지도 숨이 붙어 있었다. 입으로 인공호흡을 시키자 얼마 뒤 그는 다시 소생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미 모두 질식사했다.
“내 이 원수를 반드시 갚고야 말 팅께 두고 봐라.”
종수는 이를 갈면서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우리 잠시 산 속에 숨어 있어야겠다. 미군이 올라올 때까지.”
종수는 여동생을 데리고 마을 뒤의 산 속으로 피신했다.
“그래도 이 여석이 살았응께 천만다행이구나. 하늘이 도와주신 거야.”
그는 영화의 등에 업힌 아들 철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렸다.
폭우는 그칠 줄 모르고 쏟아졌다. 하늘이 통째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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