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영

7장 혈육과 사랑


전쟁이란 무엇일까?
준호는 컴퓨터에 마주앉아 깊은 사색의 바다에서 방황했다. 인류는 과연 전쟁이라는 잔인한 수단을 통하여 인권과 자유, 평등과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가? 그 반대로 전쟁은 인권이나 자유 그리고 평등을 파괴하는 건 아닐까? 전쟁의 사전적 의미는 《병력에 의한 국가 상호간 또는 국가와 교전단체간의 투쟁》이라고 풀이되고 있다. 클라우제비치는 《전쟁은 우리의 적대자로 하여금 우리의 뜻을 완벽하게 이행하도록 강요하는 폭력행위》라고 말했다. 즉 전쟁은 정치적 수단이고 정치적 행위의 연장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도 한계가 있는 듯싶다. 정치란 국가가 존재하면서부터 산생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전쟁은 아직 국가가 등장하지 않았던 원시씨족사회에서도 존재했다. 이 두 가지 부동한 전쟁의 개념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표현을 하자면 전쟁은 강제적인 폭력행위에 의한 이득 획득과 소유권의 재분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전쟁도발자에게는 인권과 자유와 소유를 보장해주지만 전쟁피해자에게는 이와는 전혀 상반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피해자의 이익과 자유, 권리, 소유는 철저히 박탈당한다.

그런데 국가가 형성되면서부터 전쟁은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계급의 이익을 대변한 이념이 그 목적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역사가 흐르면서 시초엔 단순한 계급 이익만을 대변하던 이념이 국가적, 민족적, 문화적 영향 속에서 복잡한 분화를 거치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하나의 민족이나 하나의 국가는 하나의 이념체계를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부동한 여러 개의 이념집단으로 분리될 수도 있다. 그 원인은 계급적 배경, 문화적 배경, 신앙적 배경 등 여러 가지 사회적인 인소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인간의 최초의 전쟁은 동물의 그것과 별 다른 차이가 없었을 것만은 분명하다. 동물의 전쟁은 (전쟁이라는 표현을 잠시 대용한다면) 먹이를 얻기 위한 전쟁, 영역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수컷들의 짝짓기 전쟁, 서열을 결정짓기 위한 전쟁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먹이획득전쟁과 영역보존전쟁은 이족간의 전쟁이고 짝짓기 전쟁과 서열전쟁은 동족전쟁이다. 그런데 이족간의 전쟁은 개체 대 개체, 가족 대 가족, 가족 대 개체 등 여러 가지 양상을 띠고 있지만 동족전쟁은 어디까지나 개체 대 개체전쟁이다.

동물의 대결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전쟁이라 할 수 없다. 사전적 의미의『병력』, 『국가』라는 요소가 배제된, 육체적 대결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아니라 싸움에 불과할 따름이다. 인간의 전쟁도 처음엔 먹이를 위한, 영역을 지키기 위한 단순한 동물적 싸움이었다. 그러나 국가가 등장하면서 인간의 전쟁은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되었으며 영토확장전쟁(식민지전쟁), 이념전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권력과 이념은 동족을 분열시켰으며 그것은 다시 동족상잔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거듭했다. 자유와 평등은 국가의 존재로 발생한 계급과 권력과 이념 때문에 깨어졌다. 그렇게 깨어진 자유와 평등은 전쟁이라는 폭력적 수단을 통해 승자에게만 국한되는 부분적 복구가 가능했지만 패자는 박탈당하고 말았다. 혈연을 바탕으로 한 문화적, 종족적, 민족적, 국가적 공동체는 이념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신앙적, 계급적 집단으로 재구성되면서 전쟁의 주기는 갈수록 짧아졌다.

그런데 왜 수많은 동물 중 유독 인간만이 국가와 계급과 이념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까? 이러한 것들이 없었다면 동족상잔의 비극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혈연을 중히 여겼던 씨족사회와 이념을 중요시하는 현대사회 중 과연 어느 쪽을 월등하다고 해야 하는가. 국가와 계급과 이념은 분산되었던 동물적 인간의 힘을 무궁무진할 만큼 거대하게 집결시켰다. 혈연을 구심점으로 연대한 종족집단은 그 앞에서 맥없이 전복되며 갈수록 입지를 상실하고 있다. 혈연을 무시한, 이데올로기에 의한 인간사회의 재구성이 과연 가능할까? 그러한 패러다임이 비극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혈연의식은, 혈연을 중시하는 사회는 적어도 윤리와 인간애는 존재했었다. 그러나 이념의식은, 이데올로기를 중시하는 공동체는 신념과 진리만 존재한다. 인간이 윤리와 인간애로 살아야 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신념과 진리를 추구하는 삶이 정당한가?

준호는 사유의 고갈과 피로를 느끼며 컴퓨터에서 눈길을 떼고 담배 한 가치를 뽑아 물었다. 그러나 구들 위에 누워계시는 할머니를 보고는 살그머니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벌써 며칠째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몸져누우셨다. 바깥출입도 일체 거절했다. 다행히도 지은의 극진한 보살핌 때문에 준호는 그런대로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준호는 이미 계획보다 연기된 「6.25참전자실록」집필을 다그쳐야만 했다. 그는 담배를 피우면서 발길이 가는 대로 몸을 실어 놓았다. 기억은 발걸음을 옮실 때마다 준호의 머릿속에 유리와 진옥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려주었다. 밀입국을 시도했다는 진옥은 왜 아직도 연락이 없을까? 유리 씨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우리 이제 만나지 말아요!” 하며 흐느끼던 그녀의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허빈다.
발걸음이 그를 실어다 준 곳은 뜻밖에도 지하철역이었다.
내가 왜 여길 왔지? 어딜 가려고?
중얼거리면서도, 어딜 가야 한다는 행선지마저 없으면서도 발길은 짓궂게 그의 몸뚱이를 싣고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어딜 가는 거냐고?
발길은 대답이 없다.
전동차가 도착했고 준호는 승객들 속에 끼어 열차에 승차했다. 그 모든 노정들은 구태여 의식을 가동하지 않고도 발길 스스로 자동적으로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길이었다. 눈을 감고서라도 찾아갈 수 있었다. 합정에서 6호선, 불광역에서 3호선을 갈아타면 닿을 수 있는 그 곳, 사실 몇 번 다녀갔을 뿐인데 그토록 익숙해져 있었다.
정발산역에서 내렸다.
내가 왜 여길 온 거야? 유리 씨가 다신 만나지 말자고 했잖아. 이제부터의 만남은 불륜의 연장일 뿐이라고 했잖아.
그러나 생각은 생각대로이고 발길은 발길대로 총망해지기 시작했다. 익숙한 거리들과 골목들을 에돌아 어느덧 유리네 집 앞까지 당도했다. 눈 익은 정원수들과 붉은 벽돌건물이 오늘 따라 눈물겹게 느껴진다. 당금이라도 유리 씨가 “준호 씨!” 하고 이름을 부르며 문 밖으로 걸어 나올 것만 같았다.

준호는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유리의 전화번호가 입력된 단축번호인 1번 버튼을 눌렀다. 뚜웃, 뚜웃, 금방 신호가 떨어진다. 그는 흠칫 놀라 휴대폰을 꺼버렸다. 다신 만나지 말자고 했는데…… 결례가 아닐까? 실수는 아닐까?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되지는 않을까? 천만가지의 우려가 의식의 계곡에서 소용돌이쳤다.
발길을 돌려 주택구역을 빠져나왔다. 지하철역으로 돌아와 육교 위에 올라섰다. 유리가 발목이 삐어 그의 품에 안겼던 계단에서 발길을 멈췄다. 그 수줍게 불타오르던 얼굴, 봄바람에도 사르르 녹아내릴 것만 같던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그런 그녀와 평생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난 헤어질 수 없어! 그녀를 헤어져서는 하루도 살 수 없어!
정발산의 활엽수들은 벌써 건조한 가을바람에 노란 색을 띠기 시작했다. 가로수 잎들도 수분이 증발하며 마른 잎사귀들이 와스스 설렜다. 이따금 손을 잡거나 팔을 낀 연인들이 준호의 옆을 스쳐 지나며 행복하게 미소 짓는다.
준호는 다시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1번을 눌렀다. 뚜웃, 뚜웃, 신호음이 울렸다.
“네에.”
뜻밖에도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와 준호는 잠시 머뭇거렸다.
“말씀하십시오. 유리 휴대폰입니다.”
“저…… 죄송하지만 유리 씨를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유리요. 네, 잠시만요. 얘, 유리야 전화 받아라.”
잠시 동안이 흐르더니 이어 그 귀에 익은 목소리가 무슨 그윽한 향기처럼 수화기 안에서 안개처럼 흘러나왔다.
“네에. 전화 바꿨습니다.”
갑자기 콧등이 시큰해지며 적당한 말을 고를 수가 없었다. 인제 다시는 듣지 못할 것 같던 목소리여서 그랬다.
“여보세요.”
안개마냥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갈라진 슬픔 때문에 더구나 기운이 빠져 가늘었다.
“유리 씨!”
“……”
이번에는 상대방에서 대답을 비웠다.
“유리 씨, 나 좀 만나요.”
여전히 침묵뿐이다.
“할 말이 있습니다. 나오실 때까지 호수공원 월파정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오빠!”

오빠라는 호칭이 얼음조각처럼 가슴에 섬뜩하게 박혀든다. 유리는 호칭의 강조를 통해 두 사람의 관계에 변화가 발생했음을 상기시키는 듯싶었다. 그러나 준호의 입장으로서는 이미 주사위를 던진 셈이니 다시 거둬들일 수도 없었다.
“미안해요. 아시잖아요. 두 분 할아버지들께서 미국에서 오셨어요.”
“나오실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준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어버렸다. 무례한, 교양 없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그녀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너무나 간절했다. 그녀의 동정심이나 미련에 기대야 하는 자신이 초라하기도 했지만 그녀와 갈라져 있어야 하는 아픔보다는 약과였다.
준호는 육교를 내려가 광장을 가로 질러 나갔다. 이상하게도 그는 유리가 꼭 나올 거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다만 그녀가 동생의 입장에서 나올 것인가 아니면 연인의 입장에서 나올 것인가 그것이 궁금할 뿐이었다. 동생의 입장에서도 그렇고 연인의 입장에서도 그렇고 유리는 나와야만 할 처지이다.
물론 준호는 그녀가 연인의 입장에서 나와 주기를 바랐다. 비록 사촌동생이라는 사실이 확인되긴 했지만 그 때문에 어찌 그 동안의 사랑을 하루아침에 포기할 수 있는가? 설령 정리할 수밖에 없는 관계라 할지라도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혈육을 선택하려면 사랑을 버려야 한다. 사랑을 선택하면 그들은 혈연을 버려야 한다. 그런데 준호는 그 둘 중 어느 하나도 버리기가 힘들었다. 천륜을 어길 수도 없고 사랑을 배반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사랑은 그들 자신의 선택이었지만 혈연관계는 그들이 원하지 않은, 외부로부터 강요된 것이었다. 유리 씨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녀도 필경 이 때문에 심리적 갈등을 겪고 있을 것이다.
준호는 보도를 따라 호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꽤나 시간이 흘렀지만 유리를 만나기로 약속한 월파정엔 아직 그녀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 준호는 월파정으로 올라가 타원형 벤치에 앉았다. 담배를 세 대나 태웠지만 유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준호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도로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전화로 확인한다는 건 곧 그녀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었다. 그녀에게 불신의 불명예스러운 책임 같은 걸 뒤집어씌우고 싶지 않았다. 밤이 되던 새벽이 되던 여기서 그녀가 스스로 나타나주기를 기다리리라 작심했다.
해는 이미 지고 서천에는 피를 토해놓은 듯 빨간 저녁노을이 불타고 있었다. 노을은 맑은 호수물속에 자맥질하며 수면을 붉게 물들였다. 단풍이 들기 시작한 공원수들은 덩달아 노을 빛에 타오르며 온통 붉은색으로 단장되었다. 자연은 의식 같은 것이 없어도 평화롭기만 하다. 아름답기만 하다. 거기 비하면 인간은 지독하고 추악하다.
시름없이 턱을 괸 채 황홀하고 수려한 자연경관에 도취되었던 준호는 저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다.
“준호 씨!”

목소리는 낮았지만 준호는 그녀의 첫마디 부름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몸은 자고 있었지만 의식은 한시도 그녀의 존재를 잊은 적이 없었다. 커피색 스커트와 정장 재킷을 단정하게 입은, 생머리를 길게 등 뒤에 늘어뜨린 유리는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이었지만 월파정을 적시며 흥건히 흘러드는 붉은 노을빛의 각광으로 눈이 부시도록 미색이 완연했다. 수줍고 아련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빈틈없는 옷단장……
“나올 줄 알았습니다.”
“오늘이 어쩌면 연인으로 보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과거의 선택이 일시적 감정의 충동이 아니라 이지적이고 순수한 것이었음을, 오늘의 확인을 통해 종지부를 찍고 싶었어요.”
“왜 꼭 종지부여야만 합니까. 반점이거나 생략부호일 수도 있잖아요.”
“종지부이건 반점이건 그것의 선택권이 우리한테 없다는 게 불행이에요. 우리는 어쩌면 주어진 환경이나 배경의 꼭두각시에 불과한지도 몰라요. 우리의 출생이 원한 것이 아니며 그래서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우리의 운명도 우리 의지의 소유물이 아닌지도 모르구요.”
“출생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운명만은 분명 우리의 의지의 소유물일 겁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둘째 할아버지께서 저랑 같이 음악회에 가신다고 데리고 나왔어요.”
“둘째 할아버지는요?”
“서울로 친구 만나러 가셨어요. 집으로 들어갈 땐 전화로 연락하여 함께 귀가하기로 약속했어요.”
“둘째 할아버님은 정말 개명하신 분입니다. 우리 사이의 관계도 알고 계십니까?”
“네. 할아버지께 죄다 말씀드렸어요.”
“그래서요. 그 분의 태도는 어떻던가요?”
유리는 눈길을 호숫가에 떨어트린 채 대답을 삭제한다.
“묻지 말까요?”
“네.”
“그러죠. 그런데 그 분이 바로 한종철이라는 분이시죠?”
“네.”
“이해할 듯도 싶군요.”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을 안은 채 검푸른 호수만 내려다보았다. 몇 쌍의 연인들이 다리 위로 유유히 거닐며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참, 음악회 관람권이 있는데 구경하실 생각이 없으세요? 할아버지께서 티켓을 저한테 양보하셨거든요.”
“저야 감사하죠.”
두 사람은 공원을 나와 택시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공연장소인 세종문화회관까지 이르는 동안 지루하고도 메마른 침묵이 흘렀다.

국외에서 맹활약을 하다가 이름을 떨치고 귀국한 젊은 여류 바이올린니스트의 연주회였다. 그런데 그녀의 바이올린연주는 처음부터 두 사람을 슬픔에 잠기게 했고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했다. 유리는 흐르는 눈물 때문에 고개마저 쳐들지 못했다. 주위 사람들의 눈길이 가끔 그들에게 집중되어 두 사람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준호 씨, 우리 그만 밖에 나가요.”
가까스로 울음을 참고 있던 유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전환도 할 겸 밖에 나가서 술이나 한 잔 합시다.”
공연장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명동회관근처의 지하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클래식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분위기는 은은한 운치가 감돌았다. 칵테일 두 잔과 과일안주 한 접시를 청했다. 호수공원에서 달고 온 침묵은 세종문화회관을 통해 여기 레스토랑에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두 사람 다 입을 열기 두려워했다. 혈육과 사랑이라는, 전혀 조화될 수 없고 공존할 수 없는, 해결책이 없는 화제가 생각만 해도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젠가는 꼭 한 번은 거쳐 가야 할 화제였다. 오늘이 아니면 아니, 바로 오늘 그 화제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다면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우린 기어이 갈라져야 합니까? 왜죠?”
결국은 그 숨 막히는 침묵의 살인적인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준호가 먼저 견고하게 봉폐된 화제의 문을 노크했다.
“갈라진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기존의 연인관계를 정리하고 남매관계로 새롭게 만난다고도 말 할 수 있잖아요. 이성 간에 사랑이 있는 것처럼 남매간에도 사랑이 있고요.”
유리의 눈시울에 맺힌 이슬이 희미한 조명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유리 씬 운명의 강요와 위협에 무릎을 꿇을 작정입니까? 운명 앞에서 타협할 생각입니까. 무엇 때문에 도전은 못할망정 도망이라도 쳐야겠다는 생각은 못하십니까?”
준호는 술 때문인지 흥분했다.
“저한테 이성은 준호 씨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예요. 인생이 정말 불교의 윤회설처럼 내세가 있다면 우리 다음 생에 만나서 사랑해요.”
그녀는 어느새 말끝을 눈물에 헹군다. 고개를 숙인 유리의 두 눈에서 투명한 구슬 같은 눈물 몇 방울이 식탁 위에 떨어졌다. 그녀는 얼른 휴지를 뽑아 눈가를 훔쳤다.
“만일 우리가 남매간임을 수락한다면 그런 정조나 수절을 지킬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타의에 의해 강요된 혈연관계가 자의에 의해 선택된 연인관계보다 우선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그것이 억울할 따름입니다.”
“우린 동물이 아니고 인간인 만큼 인간의 도리를 지켜야 되잖아요.”
“유리 씬 언제나 인간보다 동물세계를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가는 순수한 세계로 긍정하지 않았습니까. 모든 죄악의 근원인 인간의 탐욕을 저주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학술적인 해석일 뿐이지요. 현실적으로는 저도 인간의 한 구성원일 따름이에요.”
“하지만 인간이 주장하는 진리가, 살아가는 방법이 가장 유일하고 정확한 것이라는 담보도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설명할 뿐 진리자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수도 있지요. 우리가 동물이 살아가는 방식을 유치하다고 비난할 근거가 뭡니까? 사람들은 일부 동물들이 새끼를 잡아먹고 근친상간을 한다고 비웃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습니까.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륜은 그치지 않고 있으며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올바른 방법입니까?”
“그래서 인간은 도덕과 법이 있잖아요.”
“도덕과 법도 이념과 전쟁 앞에서 무력하긴 마찬가집니다. 어쩌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이념은 만 악의 근원이 될지도 모릅니다.”
화제가 이상하게 빗나갔다. 아마 준호가 6.25 전쟁에 대한 생각을 하다보니 그쪽으로 기울어진 것 같다. 교정의 필요를 느꼈지만 공연히 흥분했던 자신이 무안하여 준호는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해 그가 유도한 화제가 본의와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니었다. 6.25가 이념의 전쟁이었다면 그 전쟁 때문에 그와 유리의 사랑은 뜻하지 않게 윤리의 심판대에 피고로 출석하게 된 것이 아닌가.
“준호 씨도 이제부턴 학위논문과 「6.25참전자 실록」집필에 전념하세요. 전 유학 가서 공부를 좀 더 해야겠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화제는 점차 식어가기 시작했다. 준호의 할머니에 대해서도 유리의 할아버지에 대해서도 진옥의 밀입국 시도와 그 남편의 난폭한 통화에 대해서도 준호 부친의 자결에 대해서도 화제는 간간히 오갔지만 대체로 간단한 문답형식으로 건조하게 토막 나곤 했다. 사실 자신의 운명이 기로에 선 그들은 다른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 관심을 돌릴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다만 그것으로 어색하게 구멍 나는 분위기를 누덕누덕 깁기 위해서 필요했을 따름이다.
띠리리룽, 띠리리룽,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휴대폰을 꺼냈으나 전화가 걸려온 것은 유리의 휴대폰이었다.
“네에. 할아버지. 벌써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네요. 명동에 있어요. 아니, 오지 마세요. 전 그냥 지하철을 타고 가겠어요.”
유리는 통화를 끊으며 고개를 쳐들었다.
“할아버지께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시네요. 그럼 오늘은 이만……”
준호는 더 이상 아무 할 말도 없었다. 그녀가 만나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할 말은 다 했고 누구도 누굴 설득시킬 수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진옥이를 이어 유리까지 잃다니?!그녀를 떠나보내는 준호의 마음은 폐부까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부디……”
울음이 왈칵 쏟아져 나와 유리는 뒷말을 슬픔의 호수에 빠뜨리고는 그냥 지하철역을 향해 토닥토닥 달려가 버렸다. 고개를 숙인 채 뒤도 돌아보지 못했다. 준호가 지하철역까지 뒤쫓아 갔으나 전동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이미 승차한 뒤였다. 이로서 그녀와는 영영 이별이구나.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에 준호는 홀연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나 전동차문이 드르륵, 닫치려는 순간 유리는 갑자기 몸을 홱 돌이키더니 재빨리 문틈을 비집고 플랫폼으로 뛰쳐나왔다. 곧장 준호에게로 달려오더니 그의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준호 씨!”
그녀의 돌연한 행동에 가슴 찡한 감동으로 목이 꽉 메며 준호는 한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눈동자에 안개가 피어오르며 시야를 뽀얗게 가렸다.
“준호 씨 때문에 행복했어요. 그것만으로도 전 만족해요.”
“저도 행복했습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그렇게 굳게 포옹한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언제 미국으로 떠납니까? 공항으로 나가겠습니다.”
“싫어요. 나오지 마세요. 더 이상 절 비참하게 만들지 말아주세요.”
“그럼 미국에 가면 전화라도……”
“……”
그녀는 대답을 비운 채 다시 그와 갈라져 전동차에 승차했다.
이번에는 준호가 돌아섰다. 전동차를 등지고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는 그의 두 눈에 이슬이 그들먹이 고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물결만 출렁거렸다. 그는 무슨 정신에 몸을 돌이켜 발차 직전의 열차에 올라탔는지 모른다. 그녀가 탄 열차에서 네 번째 문인가를 지나서 갑자기 전동차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문이 다시 열렸다가 닫혔다.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손수건을 꺼내어 연신 눈물을 닦아야 했다.
건너편 열차 저쪽에 보이는 유리도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왜 나는 그녀와 죽어도 남매로는 될 수 없다고, 사랑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호소하지 못했던가. 무엇 때문에 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의 그늘에서 내 사랑의 꽃을 시들도록 방관해야 하는가. 그분들의 그늘에서 탈피하는 것이 무엇 때문에 불효가 되고 불륜이 된단 말인가.
유리는 준호가 열차에 오른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따금 눈물을 닦으며 어둠이 달라붙은 차창 밖만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을 뿐 주위엔 시선 하나 팔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어떤 것에도 유혹되지 않고 앞만 주시하고 살아온 곧은 여자였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주위의 눈길에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정발산역에 내린 유리는 집으로 향하지 않고 발길을 돌려 육교로 올라갔다. 준호의 품에 처음 안겼던 계단 위에 주저앉아 머리를 두 다리 사이에 묻고 어깨를 들먹였다.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준호의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유리는 잠시 뒤 육교를 건너 광장입구로 진입했다. 육교 밑에는 전날 준호와 함께 소주를 마셨던 포장마차가 있었다. 그녀는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준호도 안으로 들어가 그녀와 등을 진 채 구석에 자리 잡았다.
유리는 소주 한 병과 안주를 시켰다. 준호도 그녀가 하는 대로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그녀는 잠간 사이에 소주 한 병을 말끔히 비웠다. 준호도 따라 마시기가 힘들 만큼 들기만 하면 잔을 말끔히 비웠다. 그렇게 술을 과음, 폭음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지은이처럼 언행이 흐트러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일어나서 밖으로 나갈 때 걸음걸이가 약간 휘청거리긴 했지만 땅바닥을 쓸지는 않았다.
포장마차에서 밖으로 나온 유리는 잠간 방향감각을 잃은 듯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러나 결국 그녀가 택한 방향은 집 쪽으로 이어진 육교가 아니라 호수공원으로 이어진 광장 쪽이었다. 그녀는 지금 준호와 즐겼던 사랑의 흔적을 기억으로 더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광장을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그녀는 갑자기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토하기 시작했다. 재간도 없는 폭주 때문에 속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킨 모양이다.
준호는 그녀에게로 달려가 부축해주려다가 걸음을 멈췄다. 여기까지 미행해온 자신의 꾀죄죄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고 또 그녀더러 무너진 모습을 그에게 보이게 함으로써 유리 씨를 민망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준호에게 저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레스토랑에서도 술을 자제했을 것이다. 사람은 가까운 사이일수록 약하고 구겨지고 못난 모습을 보이기가 싫은 법이다.
“아니 무슨 여자가 밤중에 혼자 술 마시고 이게 무슨 꼴이야! 어서 일어나 집으로 가세요.”
순경 두 사람이 나타나더니 그녀를 부축해 세웠다.
“좀 적당히 마실 거죠. 이렇게 녹초가 될 때까지 마시다니요. 집이 어딥니까?”
“저쪽 육교 넘어요.”
“택시 잡아드릴까요?”
“네.”
“이렇게 취하셔도 댁의 어르신들은 꾸중하시지 않나보죠?”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힘들다고 자포자기해서야 됩니까.”
순경들은 그녀를 택시에 승석시키고는 군례를 붙였다.
유리는 택시 뒷좌석에 맥없이 쓰러졌다. 마침 순경들이 신경을 써서 여자 운전기사를 찾아주어 준호는 시름이 놓이긴 했지만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택시를 바라보며 마음 한 구석이 아렸다.
발길을 돌려 지하철입구로 내려가려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렸다. 열차에 올라탔지만 자꾸만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고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를 억제할 수 없었다. 그냥 어디고 엎드려 한바탕 통곡하고 몸부림치고 울부짖고 싶었다.
그렇게 조용하게만 살아왔던 준호였다. 말도 별로 없이 희로애락도 별로 느끼지 못하고 학술연구에만 매달려 숨을 죽이고 살아온 그였다. 오늘처럼 가슴 아픈 고통을 느끼고 애정에 목말라 흥분하고 격동하고 고통스러워 보기는 난생처음이었다. 이런 비극으로 이어질 행복이었다면 애당초 찾아오지나 말 것이지. 아니면 이왕 찾아온 바엔 행복으로만 끝날 것이지.
준호는 할아버지를 원망했다 할아버지를, 인젠 최덕구가 아닌 한종수를 원망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또 누굴 원망해야 한단 말인가.
준호는 열차가 어느 역인가에 정차하자 그냥 아무 데고 내렸다. 입구로 나와 역 부근의 어느 포장마차로 찾아들어갔다. 무슨 역인지도 몰랐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오늘에야 깨달았다. 그저 술이 있고 안주만 있으면 되었다. 앉아서 울 자리만 있으면 되었다. 술도 마실 줄 모르면서, 가슴속의 슬픔을 지워버리려고 눈물을 흘리면서 폭음하던 유리의 모습을 떠올리며 잔을 들었다. 얼마나 가슴이 아팠으면……
지금도 울고 있을 유리를 생각하며 술을 마셨다. 그녀의 말처럼 오늘이 그들이 연인으로 만날 수 있었던 마지막 날인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일부터, 유리가 없는 내일부터는 준호에겐 의미를 상실한 날들의 연장이 될 뿐이다. 그건 한낱 단순한 시간의 흐름에 불과할 따름이며 그 시간의 흐름 앞에서 준호의 슬픔과 통한만 늘어날 것이다.
바다 같은 슬픔 앞에서 술은 더 이상 술 같지가 않았다. 마시고 마셔도 취하질 않았다. 마시다가는 울고 울다가는 마시고 했다. 사람들은 알코올의 도움으로 고통이나 슬픔 같은 걸 마비시키려고 하지만 실은 알코올은 흡수되는 양 만큼 고통과 슬픔의 크기를 팽창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래도 알코올은 묻어둔 슬픔을, 아픔을 밖으로 분출해버리도록 한다.
유리 씨. 제발 날 버리고 가지 말아요. 유리 씨도 날 사랑하고 있잖습니까.
띠리리루룽, 띠리리루룽, 호주머니 속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준호에게는 그 어떤 것도 귀찮았다. 술이 있고 머릿속에 유리 씨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띠리리루룽, 띠리리루룽, 그러나 벨소리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태세로 짓궂게 재 발송된다.
“누구지?”
준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오빠, 왜 전활 안 받아? 사람 미치게.”
지은이다.
“술 마시고 있었어.”
“누구랑?”
“혼자.”
“오빠 취했어? 거기 어딘데?”
“몰라.”
“어딘지도 모르고 술 마시러 들어갔어? 아버지가 사망하셨다고 그렇게 비통해만 하구 자포자기하면 어떡해. 어딘지 말해봐.”
“그건 알아서 뭘 하는데 술만 있으면 되잖아.”
“오빠 정말 취했구나. 거기가 어딘지 어서 말해봐. 내가 데리러 갈게.”
“글쎄? 여기가 어디지? 나도 모른다니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손님 둬 서너 사람이 허술한 비닐천막 안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을 뿐 간판 같은 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주인아줌마가 손을 내밀었다.
“인줘유. 제가 가리켜 드릴게유. 이봐유. 여긴 말이쥬 구파발인데유 xx포장마차구먼유. 손님이 많이 취하신 것 같으니께유 어여 와서 모셔가유.”
아줌마는 다시 휴대폰을 준호에게 넘겨주고는 무슨 안주인지를 손으로 주물럭주물럭 버무리기 시작했다.
“오빠, 내가 갈 때까지 꼼짝 말고 거기 있어.”
통화가 중단되었다.
지은인 준호가 아버지의 자살로 슬픔과 비통 속에 잠겨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러나 준호는 오늘 온종일 아버지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전쟁에 대해서 생각했고 진옥의 밀입국에 대해 생각했고 유리와의 실연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요즘은 아버지보다는 할머니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했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완전히 벙어리로 변해버린 듯싶었다. 옛 남편인 한종수를 만나겠다는 간청 같은 것도 더 이상 넣지 않았다. 무슨 깊은 고민에 빠진 채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의 시간만을 보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사랑하셨다. 그런데 왜 50여 년 동안이나 한종수를 마음속 깊숙이 담고 있었을까? 정말 아들에게 생부를 찾아주려고 했을 뿐일까?
할머니는 당신의 아들이 한종수의 피를 이어받은 혈육이라는 사실 외엔 아무것도 모르신다. 50년 세월이, 각자가 살고 있던 사회 환경이 혈육을 원수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할머니의 식견으로는 이해하지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할머니의 상식과 경륜으로는 혈육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이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인식이 산산조각이 난 오늘 할머니의 정신적 충격은 거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50년의 인생만을 가지고서도 부모자식이라는 혈연적 관계만을 가지고서도 뜻대로 될 수 없는 일이란 걸 깨달았을 때 할머니는 절망했을 것이다. 세상엔 피보다 더 귀중한 무언가가 또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는 건 피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라고 50년 동안 굳게 확신하고 살아온 할머니의 인생 신조가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의미한다. 부자간의 상봉을 이어주는 길만이 아내로서 엄마로서 해야 할 천직이라고 생각했던 할머니였다. 그러나 정작 그 당사자인 아들과 남편이 바란 건 그것이 아니었으니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할머니가 심대한 정신적 충격을 받고 경악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준호는 소주를 여섯 병째 비우고는 식탁 위에 엎드려 인사불성이 되었다. 택시를 타고 부랴부랴 달려온 지은이가 구파발에 도착하여 그를 부축해 택시에 태우는 줄도 몰랐다.
택시가 자취방에 거의 도착해서야 그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유리는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마음이 허전해지며 자옥한 연기가 쫙 깔렸다. 세상 전부를 상실한 듯, 홀로 무인도에 떨어진 듯 외롭고 쓸쓸했다. 입술이 쩍쩍 갈라터지고 혓바닥에 소금이 돋았다. 가슴속에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번개가 치고 눈물의 홍수가 넘쳐흘러 슬픔의 깊은 계곡으로 소용돌이쳤다.
저도 모르게 눈시울에 뜨거운 액체가 그들먹이 고였다. 창밖의 거리가 유리에 맺힌 이슬에 굴절되며 피카소의 그림처럼 이상한 기하학적 도형으로 변형되었다. 택시 안의 그 숨 막히고 비좁은 공간이 나무 한 그루 없는 광야처럼 황폐하고 공허해보였다.
“오빠, 인제야 깨어났어? 무슨 술을 그렇게 정신없이 마셨어?”
가슴 아픈 사연을 친동생 같은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가 없었다. 연인 사이가 남매 사이로 변했다는 그 엄청난 비극을 말하려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민망했다.
“돌아가신 분은 돌아가셨더라도 산사람은 살아야 되잖아. 그냥 이러면 정말 오빨 미워할 거야.”
지은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했다.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그녀의 진심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어쩌면 준호는 진옥이 뿐 아니라 지은이에게도 정의 부채를 걸머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직도 준호를 사랑하고 있었다. 준호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선택까지 말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건 명철이가 아니라 아직도 준호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종일 준호에 대한 생각과 관심과 근심으로 꽉 차있었다. 어디 가서 뭘 하는가를 시시각각 확인하고서야 안심하는 그녀였다.
“걱정 마. 다신 이런 일이 없을 거야. 명철 씨는?”
“집에서 자고 있어. 이걸 먹어. 정신이 날거야.”
집에서 가지고 온 모양 보온병에 담은 꿀물을 내민다.
“고마워.”
“동생이라면서……”
“그래. 지은인 내 친동생이야!”
여동생은 지은이 하나로서 족했다. 그런데 이젠 유리까지 여동생이 되었고 진옥이까지 여동생이 되었다.

“너 또 그놈하구 만난 거지? 그놈하구 술 마신 거지?”
유리가 택시운전기사의 부축을 받고 방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한종수가 추상같이 호령했다. 그러나 종철이 얼른 한종수를 막아서며 손녀를 부축해 2층의 침실로 인도했다.
“그 젊은이를 만난 거냐?”
종철은 목소리를 낮추어 가만히 물었다.
“네.”
“그래 그 사람이 뭐라더냐? 그만두자고 하던?”
“아니요.”
“그랬을 테지.”
“네?”
“어쩌면 피를 나눴다는 사실만으로 형제, 자매가 될 수 있다는 논리는 오늘 날의 사회에서는 무리일지도 몰라. 6.25라는 특수 환경이 있었고 또 5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의 격조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았던 사회적 요소도 영향이 없다고는 부인 못하겠지. 형수님의 증언이 아니었다면 너희들의 사랑은 절대로 비극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거 아니니.”
“할아버지.”
“물론 혈육도 중요하겠지만 사랑은 더 위대한 거야. 혈육 간에도 사랑이 없다면 남보다 못한 거지. 난 너희들이 남매간의 애정이라는 수치심 때문에 아름답게 가꿔온 사랑을 포기하는 걸 차마 볼 수 없구나. 잘 생각해 보거라. 물리적으로는 이별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정신적으로는 절대로 이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고통도 그만큼 클 것이기 때문이야. 큰할아버지가 강경론이라면 난 신중론이야.”
“그렇지만 전 웬일인지 사람들의 눈과 입이 두려워요.”
“사람은 남의 눈이 두렵다고 자신의 감정까지 배반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사람은 후회가 없고 그 사람은 아름다울 거다. 너희들의 사랑이 진심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무엇이 부끄러우냐? 너희들의 몸에 흐르고 있는 피는 그 원천은 같아도 이미 서로 다른 길을 흘러왔고 색깔도 다르다는걸 알아야 한다. 우선 국적이 다르고 성이 다르고 받은 교양과 가치관도 다르잖니. 후회하는 사람은 선택 앞에서 무능한 사람이란다. 한 번 잘못 선택하면 평생 후회로도 만회할 수 없지.”
“할아버지. 전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죽어버리고 싶어요.”
유리의 두 볼을 타고 또다시 눈물이 쭈르륵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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