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영

9장 평화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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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넘도록 「6.25참전자 실록」 집필에 몰두했던 준호는 새벽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은 남 교수의 현대문학강의가 있어 대학원으로 나가야겠기에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 했다. 남 교수의 강의는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잠이 막 들었는데 갑자기 지은이가 사는 옆방에서 왁작 떠드는 소리가 나 준호는 눈을 떴다.
“전화도 없이 이른 아침에 웬일이야?”
“집구석에 앉아 있자니 열 받아 견딜 수가 있어야지.”
지은의 짜증 섞인 질문에 대답하는 목소리의 임자는 그녀의 어머니 아산 댁이었다. 아산 댁이 이른 아침에 왜 상경한걸까?
준호는 피곤한 나머지 흐릿한 의문을 접고는 아직도 무겁게 매달려있는 졸음을 청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옆 자리에서 들려 또다시 수면을 방해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깨어난 할머니가 두 눈을 멀뚱멀뚤 뜬 채 천장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초점을 잃은 노인의 눈길은 허망했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할머닌 대답 대신 살그머니 두 눈을 감아버린다. 어린 거미가 서투른 거미줄을 쳐놓은 듯 할머니의 얼굴에 얼기설기 그어진 주름살은 밝아오는 창밖의 외광에 진한 뉘앙스를 나타내며 그 곬이 더 깊어 보였다. 하나하나의 주름살마다에 얼마나 많은 한과 정이 고여 있을까? 할머닌 이제 무겁게 적치된 가슴속의 정한을 이기지 못해 쓰러지고 말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갈마들자 노인이 측은해졌다. 아들을 앞세운 엄마의 마음은 아들의 죽음과 함께 죽어버렸을 것이다. 아버진 자신 혼자만 죽은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를 죽였고 그리고 어느 만큼은 준호마저 죽인 것이다. 아버지는 당신의 죽음에 대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생명은 단순한 개인의 소유물만은 아니라는 걸 아버지는 깨달았어야 했다. 한 사람의 생명은 여러 사람의 생명과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를 왜 몰랐을까? 적어도 생명을 준 부모에게 책임을 져야 하고 생명을 계승한 자식에게 책임을 져야 했다. 실제로 생명은 자신의 것이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서 선물 받은 것이다.
“하매 누구한테서 소식 들었어?”
“어따 가시나가. 엄니가 시골구석에 박혀 있으니께 멍춘 줄 안디야. 엄니도 귀때기가 있고 눙깔이 있는 겨. 깅께 귀신은 쇡일 수 있어도 엄닌 몬 쇡이는 겨. 하매 두 달도 넘었다며?”
아산 댁의 목청은 어찌나 쨍쨍한지 귀청을 꿰뚫고 뇌 속까지 파고들어 쇠 조박을 긁듯 박박 허볐다. 졸음은 고드름처럼 치덕치덕 매달렸지만 극심한 두통만 발작할 뿐 도저히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준호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뭐가 두 달이 넘었다는 거지? 공연히 지은의 대답에 신경이 쓰였다.
“그것 땜에 새벽차 타고 서울로 달려왔어? 전화로도 얼마든지 할 말을 갖고,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를 하라고 했잖아.”
“이 가시나야! 넌 몰러 멀 몰러. 서울로 올라온 김에 오늘 당장 엄니와 같이 산부인과로 가야 하는 겨.”
산부인과라는 말이 결정적 힌트를 주며 어떤 윤곽을 가진 확실한 추측을 가지도록 했다.
지은이가 임신을 한 건가?
산부인과라는 명칭과 이어지는 추측은 자연스럽게 임신이었다. 그러나 임신이라는 말은 어쩐지 지은이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거쳐 갔다고 했다. 그런데도 임신 같은 일 때문에 그녀가 근심하거나 우려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임신이라니? 사실 요즘 준호는 할머니의 느닷없는 한국행, 아버지의 죽음 등 충격적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는 바람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게다가 유리와의 실연 때문에 가슴앓이까지 해야 했기에 지은이에 대한 관심도가 이전보다 훨씬 떨어든 게 사실이다.
“엄닌 무슨 일이나 엄니 맘대로 처리하려고 드는 게 탈이야. 당사자는 난데 말이야.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했잖아. 이렇게 불쑥 뛰어들어 다짜고짜 병원으로 가자고하면 어떡해.”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잖여. 화근은 말이 난 김에 없애버려야 혀는 겨. 시간이 흐를수록 지우기도 힘들 겨.”
“아무튼 당장은 싫어. 난 아직 생각도 정리되지 않았단 말이야.”
“정리고 뭐고 안 뒤야. 엄니 말 대로 혀.”
“엄니.”
“글쎄 안 된당껴.”
“저 어머님, 제 생각엔……”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명철이가 모녀간에 벌이는 실랑이 틈바구니에 조심조심 끼어들었다. 그도 당사자임은 분명하건만 모녀 사이에서 주도권을 잃은 채 변두리에서 빙빙 에돌고 있었다. 스스로도 자신을 이방인 취급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 때문에 자식에 대한 당연한 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존재는 남자친구이거나 태아의 아빠라기보다는 이 사회의 시선에는 하나의 탈북자에 불과하다는 걸 그 자신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간만에 용기를 내어 허두는 뗐지만 정작 할 말은 삼켜버린 것이다.
임신문제를 놓고 세 사람 사이에 의견 불일치가 존재하는 모양이다.
준호는 잠을 설친 바엔 아예 조깅이나 하려고 추리닝을 입고 방을 나섰다. 마침 조반을 지으러 나오던 지은이와 로비에서 마주쳤다.
“벌써 운동 나가?”
“잠이 안 와. 어머님께서 오셨어?”
“알잖아. 울 엄마 유난스러운 거.”
“무슨 일인데?”
“참, 나 임신한 거 오빠한테 말하지 않았지?”
“너 임신했어?”
“자꾸 속이 메슥거리기에 며칠 전에 산부인과에 가 검진해보니 임신이래. 엄만 당장 지우라고 독촉하구……”
“그래서 어쩔 건데?”
“오빠도 방안으로 들어와 봐. 우리 아예 가족회의를 열고 다수가결로 결정하는 게 좋겠다.”
지은은 준호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끌었다. 그녀는 준호를 가족으로 여기고 있었다.
“어머님 오셨어요?”
준호는 이불속에 다리를 들이민 채 로비 쪽을 기웃거리던 아산 댁에게 인사를 건넸다. 새벽차를 타고 오느라 추웠던지 머리엔 스카프를 두르고 어깨에는 세타까지 걸친 차림이었다. 시골 사람들의 옷차림은 도시주민들보다 봄과 여름엔 반 계절 뒤지고 가을과 겨울엔 반 계절 앞서간다. 그래서 옷차림을 보고서도 도시에 들어온 시골사람은 금방 표가 난다.
아산 댁은 딸에 대한 사랑을 자식의 선택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자신의 경륜과 경험을 명분으로 절대적 지배에서 표현하려고 했다. 부모의 사랑은 관심과 감독이지 이해와 방임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그녀의 양부모에게서 배운 부모 되는 방법이었다. 자식은 반드시 부모의 절대적 권위의 울타리 안에서 용납하는 만큼, 허락하는 만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활신조였다.
“저 가시나가 글쎄 뱃속의 애를 지워버리라는데 이 엄니 말을 듣지 않는구먼유. 그녁이 쪼매 설득혀보그랴. 엄니 말은 안 들어도 그녁의 말은 잘 듣는다면서유. 어뗘?”
아산 댁은 준호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부산스레 선수를 쳐 지원을 요청한다.
준호는 아산 댁과 지은이에게 결정권은 명철에게도 있다는 걸 상기시켜 주려고 방구석에 조마조마한 표정을 짓고 앉아있는 명철에게 시선을 던졌다.
“명철 씨의 생각이 궁금하군요.”
명철은 뜻밖의 호명에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지은이와 아산 댁의 험악한 표정을 확인하고는 혀끝까지 굴러 나온 말을 도로 삼키며 태도표시를 망설였다.
“나야 뭐 말하나 마나……”
“지은이가 임신을 했다면 복중태아는 명철 씨의 핏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명철 씨에게도 태아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지요. 망설이지 말고 생각을 말해 보세요. 다른 사람들의 선택에 참고가 될 겁니다.”
“명철 씨야 당연히 낳는 게 소원이지요. 그렇지만……”
“지은아, 넌 좀 가만있어.”
준호는 한사코 명철의 발언권을 보장해주었다.
“내 생각엔…… 지은 씨의 말처럼 복중태아를 지우는 걸 반대합니다. 우리 민족 모두가 통일을 염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우리의 태아는 남북화합의 결실이고 통일의 자그마한 상징일 수도 있고…… 자그마한 통일을 우리의 결합과 결실을 통해 이룩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명철은 말하는 중에도 자주 지은이와 아산 댁의 눈치를 살폈지만 준호의 진지한 표정에서 신심을 얻고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조금은 엉뚱한 비약이긴 했지만 듣기 싫지는 않은 이유였다.
“같은 생각입니다.”
“안 뒤여. 그건 안 뒤여!”
준호의 찬동에 아산 댁이 버럭 언성을 높이며 두 팔을 허공중에 대고 휙휙 저어댔다.
“네 할배가 알면 빨갱이와 자본주의가 결합혔다고 죽기내기로 반대할 겨.”
“엄마, 명철 씬 이미 북쪽사회를 포기하고 대한민국을 선택한 사람이야. 서로 다른 이념의 결합이 아니잖아. 그리고 할아버지도 우린 이미 남남간이니 간섭하지 않을 거라고 했어.”
준호는 만일 지은의 할아버지가 이 자리에 계신다면 변함없이 명철이를 가리켜 󰡐양심과 신념을 팔아먹은 비열한 배신자󰡑로 비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인지 달빛정책인지가 몇 해나 갈 것 같텨. 정권이 바뀌면 남북 관계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 얼어붙을지도 모르는 겨. 그때면 너희들은 물론이고 아기에게도 불행이 떨어질게 분명혀. 그러니 애초에 지워 버리는 게 후환을 없애는 제일 좋은 방법인 겨.”
아산 댁은 자신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지은이 생각은 어때?”
준호는 이번엔 지은에게 눈길을 주었다.
“갈등을 느껴. 낳고 싶기도 하고 지우고 싶기도 하고.”
“출산의 이유는?”
“복중태아는 사랑하는 남자와의 사이에서 생긴 첫 생명이잖아. 사랑의 결실이니까. 그래서 그 결실의 의미를 분만으로 영원하고 싶어. 완전히 나만 믿고 세상에 태어나길 꿈꾸고 있는 생명이, 나 자신의 연장이라는 사실에 고맙고 소중하게 느껴져. 그것은 또 나 자신의 선택과 자유의사에 대한 확신이기도 한거잖아.”
“유산의 이유는?”
“우선 공부에 방해가 돼. 애를 낳으려면 학업을 중단하고 휴학해야잖아. 다음으로 경제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집도 없고 돈도 없는데 애를 낳아서 어떻게 기를 건데. 그리고 도덕적인 문제도 있어. 난 아직 결혼 전이잖아. 아가씨이고 학생이란 말이야.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망설임이라는 단어조차 모르는 지은이가 오늘 따라 뭔가를 주저하는 모습이 도리어 이상하다.
“그게 뭔데?”
“복중태아의 아빠가……”
“됐어.”
준호는 많은 경우에 지은의 솔직한 성격에 당혹하거나 민망함을 느끼곤 했다. 지금도 그랬다. 복중태아의 아빠가 명철인지 아니면 또 다른 어느 남자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불안함을 그녀가 털어놓으려 한다는 걸 눈치 챘을 때 준호는 명철이를 대신하여 손에 식은땀을 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따버리라는 거 아녀. 그 애만 낳기만 하면 평생 네 혹 덩이리가 될 거구먼.”
아산 댁은 한 조목 잡았다고 놓칠세라 말 꼬리에 쐐기를 박는다.
“임신은 임신일 뿐이야. 그 많은 정치적, 경제적, 도덕적인 해석보다는 그저 평범한 한 남자와 여자의 사랑의 결실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어. 그렇지 않습니까? 어머님, 명철 씨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본능적인 사랑과 임신, 분만마저도 정치적으로 계산된다면 인간의 삶은 정말 불행해지고 말 거야. 물론 도덕적 문제, 경제적 문제, 개인의 전도문제도 당연히 고려되어야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신 전의 일이라고 생각해. 분만마저 어려운 임신이었다면 시도부터 하지 말았어야지. 인간은 모든 문제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게 탈이야.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회의하는 삶보다는 현실을 대담하게 긍정하고 수용하는 삶이 훨씬 더 인간적일 수도 있잖아. 그것이 단지 복중태아의 생명 하나만을 위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의미와 가치는 결코 적지는 않을 테니까.”
준호는 자신의 어설픈 견해가 지은이에게 또 아산 댁과 명철에게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될지 그것이 궁금했다.
아산 댁은 그가 한 말의 뜻이 무엇인지도 이해 못하고 나름대로 요리하여 자신의 주장에 양념을 뿌린다.
“그렇고 말고. 문제를 너무 복잡허게 보는 것두 탈이구 말구. 그녁이 말 한 번 잘혔구먼유. 그러니께 복잡허게 요아조아 따질 것 없이 고마 확 엄니같이 산부인과로 가는 겨.”
“싫어. 난 오빠 말대로 할 거야.”
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로비로 나왔다. 조깅은 이미 늦어졌음으로 그냥 대학원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오빠가 뭐랬는데? 너더러 애를 지우지 말라고 했능 겨?”
“엄닌 모르면 가만있어. 오빠, 아무데서나 식사 해. 할머닌 모셔 내오면 되잖아.”
“생각 없어. 그냥 갈게.”
실은 할머니가 며칠째 우유만 마시고 끼니를 거르시어 준호도 덩달아 입맛을 잃고 말았다. 저러다가 몸져누우시기라도 하면 어쩔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빨리 할아버지 곁으로 돌아 가주셨으면 싶어도 가라고 축객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노인들은 노여움이 많아 자칫 할머니가 귀찮아서 쫓아내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어서였다.
“할머닌 내가 알아서 식사를 대접할 테니까 걱정말구 다녀와. 난 엄마 땜에 오늘도 또 학교 땡치게 생겼어.”
준호가 방으로 돌아와 보니 할머니는 아직도 이불 속에 누운 채 땅이 꺼져라 한숨만 풀풀 몰아쉬고 있었다.
“할머니, 전 학교 다녀와야겠어요. 손자가 없더라도 식사 좀 드세요. 옆방 지은이가 식사를 내올 거예요.”
“할미 걱정은 말고 어서 네 일이나 봐라.”
한마디 하고는 또 입에 빗장을 지른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준호는 혹시나 싶어 대학도서관으로 향했다. 정원수들은 물론이고 관악산 중턱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단풍의 불길이 캠퍼스 뒤쪽 산자락까지 내려오며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대학기숙사를 떠나 아버지가 살던 사글세방으로 옮겨 갈 때는 백화가 만발한 봄날이었었다. 캠퍼스 안에 온통 꽃향기가 들어차 바다처럼 출렁거렸고 그 속을 헤엄쳐 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실거렸다. 꽃향기에 취한 사람들은 마치도 꿈속의 동산을 거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단풍은 비록 향기는 없어도 역시 꽃향기 못지않게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매력이 듬뿍하다. 꽃이 사람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든다면 단풍은 사람을 사색과 그리움에 잠기게 한다.
무르익은 가을 풍경 때문인지 오늘따라 유리 씨가 못 견디게 그리워진다. 그러나 유리는 도서관에 없었다. 그녀는 이젠 이 도서관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출 것이다. 유리가 자리를 비운 도서관은 무덤 속 같았다. 정적과 공허와 어둠뿐이었다. 연구실에서도 그녀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밀입국을 시도했다는 진옥의 소식마저 감감하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데도 유리 씨의 모습은 가슴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린 채 좀처럼 사라질 줄 모른다.
밖으로 나온 준호는 휴대폰을 꺼내어 유리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단념했다. 혼자서 슬픔을 달래느라 폭음하고 길바닥에 토하던 그녀의 처량한 모습이 기억의 수면에 떠올랐던 것이다.
내가 전화를 걸수록 그녀의 마음은 더 아플 거야. 이제 내 존재는 그녀에게 아픔과 고통 외에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신호음이 울렸다.
준호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어 메시지를 확인해보았다.

오빠. 전 토요일 항공 티켓를 예약했어요. 곧 엘레이로 떠날 거예요. 부디 안녕히 계셔요. 공항엔 나오지 마세요. 어쩌면 이 문자메시지가 오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일지도 모르겠어요.

유리 씨!
가슴이 뭉클하고 목이 꽉 메었다. 나와 유리 씨는 과연 이렇게 영영 갈라져야 한단 말인가? 눈앞에 뽀얀 물안개가 드리우며 시야가 흐려졌다. 이어 구슬 같은 눈물방울이 두 볼로 쭈르륵 굴러 떨어졌다.
유리 씨!
자꾸만 그녀의 이름을 입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몇 명의 학생들이 커피를 뽑으려고 그의 옆을 지나갔다. 준호는 얼른 얼굴에 흥건하게 번진 눈물을 훔치고 자신의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기억의 화면에서 지워보려고 안간힘을 쓰며 머리를 책 속에 틀어박고 끙끙거렸다. 그러나 결국 그는 유리의 모습을 기억의 화면에서 끄지 못하고 테이블에 엎드린 채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황홀한 진주보석과 수정유리의 샹들리에로 장식된 웨딩홀이다.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유리가 선녀처럼 우아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풍성하게 거느린 채 아버지 한철수의 팔을 끼고 웨딩홀로 들어선다. 순간 경쾌한 웨딩마치곡이 연주되고 열광적인 박수소리가 터져 나오고 금빛, 은빛으로 반짝이는 꽃 보라가 공중에 날린다. 유리는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얼굴에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준호는 꽃단장을 한 예식장 앞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그런데 갑자기 웨딩홀의 찬란한 샹들리에 불빛이 꺼지며 예식장이 어두컴컴해지더니 순식간에 숭엄한 교회당으로 변한다. 피아노반주에 맞추어 신도들은 찬송가를 부른다. 준호가 어찌된 영문인지를 몰라 사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어느새 유리가 앞으로 다가와 그의 손을 잡는다. 두 사람은 나란히 목사 앞에 선다.
“신랑 최준호 씨는 신부 한유리 씨를 아내로 맞이하여 영원히 사랑할 수 있습니까?”
준호는 예하고 대답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목사는 어느새 법관으로 변해있고 교회당도 엄숙한 법정으로 탈바꿈해 버린다.
“피고들은 왜 법정의 피고석에 서게 되었는지 아는가?”
준호가 다시 고개를 쳐들고 보니 법관은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 본적 있는 2500년 전의 노나라의 군자인 공자님이다. 검은 법관제복을 입고 등받이가 높직한 판사석에 앉아있는 공자님의 모습이 조금은 우스꽝스러워 준호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는다.
그런데 나랑 유리랑 무엇 때문에 피고석에 섰을까?
“피고 최준호는 한유리와 어떤 관계인가?”
법관 공자는 제복 가슴에 길게 드리운 턱수염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엄하게 물었다.
“연인입니다.……”
“아닙니다.”
방청석에서 누군가 벌떡 일어서며 큰 소리로 부정한다. 고개를 돌려보니 유리의 할아버지 한종수 노인이다.
“저들은 남매간입니다. 천륜을 어긴 죄인이니 용서하면 안 됩니다.”
“피고들은 대답해보라. 증인의 말이 사실인가?”
“저희들은 전혀 몰랐던 사실입니다. 모르고 한 일도,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유발된 일도 범죄가 됩니까?”
“동기와 원인도 홀시할 수 없겠지만 법은 결과와 사실을 더 중시한다.”
“역사를 되돌려놓으면 되지 않습니까?”
“무슨 힘으로?”
“역사를 다시 시작하면 되지 않습니까? 지금부터 말입니다.”
“법은 미래에 대해 판결 짓는 게 아니다. 법적 판단은 오로지 과거와 현재에 준할 뿐이다.”
“그럼 법은 과거의 가치만 승인하고 현재의 가치는 부정합니까? 현실은 과거의 부속물이고 노예입니까? 현재를 지배하는 과거의 저 무소불위의 권위는 무슨 명분으로 정당화됩니까? 혈통은 과거의 사건이고 사랑은 현실입니다. 둘 중 어느 쪽에 책임져야 합니까? 과거에 충실하면 현실을 배신하게 될 것이고 현실에 충실하면 과거를 배신하게 되니 말입니다.”
“사랑은 과거일 수도 있고 현실일 수도 있고 미래일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그러나 혈연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혈통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무엇 때문에 동족상잔의 전쟁은 범죄가 되지 않으며 부모형제간에 이념과 이데올로기 때문에 원수가 되는 건 범죄가 되지 않는 겁니까?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이 어찌 혈통 앞에서 충실할 수 있겠습니까.”
“그 입 닥쳐라! 법정경찰들은 뭘 하는가? 어서 저 죄인들을 끌어내가라!”
권력에 대항하는, 오만방자한 죄인의 행위에 노발대발한 공자는 마구 삿대질을 해댄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법정경찰들이 우르르 달려들더니 준호와 유리를 각각 반대방향으로 끌고 나간다.
“준호 씨!‘
그들 사이에는 갑자기 일망무제한 바다가 가로놓였고 그 바다 위에 뜬 쪽배에 유리가 앉아 그를 애타게 부른다. 쪽배는 산악같이 솟구쳐 오르는 세찬 파도를 타고 가랑잎처럼 정처 없이 배회한다.
우리 사이에 바다가 언제 나타났지?
“유리 씨, 유리 씨, 날 버리고 가지 말아요!”
“오빠, 오빠!”
갑자기 유리는 준호 씨라는 호칭 대신 오빠라고 부른다.
“난 유리 씨의 오빠가 아닙니다. 난 오빠가 아니라고요. 유리 씨를 사랑하는 최준홉니다.”

준호는 정처 없이 해안을 방황하며 몸부림치고 울부짖다가 가까스로 잠에서 깨어났다. 전신이 식은땀에 흠씬 젖어있었다. 불길한 예감을 던져주는 악몽이다.
그러나 실은 그를 잠에서 깨운 것은 휴대폰 벨소리였다. 테이블 위에 방치된 휴대폰이 단조로운 멜로디를 연주하고 있었다. 무슨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자그마한 신호등에 파란 불이 들어와 깜빡깜빡 명멸하며 벨소리가 울릴 때마다 기체를 파르르 떨곤 했다. 그는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얼른 휴대폰을 들고 연구실에서 빠져나왔다.
“오빠, 나야 지은이.”
“무슨 일인데? 나 지금 학기말논문 리포터 자료수집 중이거든. 급한 일이 아니면 나중에 다시……”
“급한 일이야. 전화 끊지 마.”
“그러니까 무슨 일이냐고?”
할머니의 모습이 언뜻 예감의 그늘에 걸려 의식의 수면으로 떠올랐다.
“할머니가?!……”
그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할머니가 어떻게 되셨다는 거야?”
예감의 적중은 불안으로 확산되며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내가 엄마와 함께 시장 다녀온 사이에……”
그녀가 비워두는 공간에 우려의 짙은 안개가 꽉 들어찼다.
“도대체 어떻게 됐다는 거야?”
“돌아가셨어!”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니? 할머니가 돌아가시다니!”
긴장으로 팽팽해지던 신경 줄이 경악의 충격에 기타 줄처럼 뭉텅 동강났다.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시고……”
“그럼 자결하셨단 말이니?!”
“그래. 엄마가 올라오지 않았어도 밖에 나가지 않는 건데…… 다 엄마 탓이야!”
“알았어. 금방 갈게.”
준호는 통화를 끊고 허둥지둥 연구실로 달려 들어갔다. 테이블 위의 자료들을 대충 정리하여 가방에 챙긴 뒤 총총히 건물을 빠져나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다니? 게다가 아버지처럼 자결로.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사실 아버지가 자살한 뒤로 할머니의 언행은 정상이 아니었다. 무슨 불상사라도 저지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의식을 추적한 지가 오랬다. 그러나 아들의 뒤를 이어 자결을 선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더러운 죽음으로 부모에게 불효를 저지른 망할 놈이라고 아들을 질책하던 할머니였다. 그런데 당신까지 그 길을 선택하실 줄이야!
옛 서방님인 한종수를 만나고 싶었을 텐데. 어느 날인가 손자더러 󰡒할미가 네 할아버지 좀 만나게 해줘󰡓하고 청탁을 넣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돌아가신 오늘까지도 한종수의 이름자 한마디도 입 밖에 발설하지 않았다. 중국에 계시는, 할머니의 한국행으로 분노하시고 당황하시고 궁금해 하실 할아버지께 아버지의 사망부고를 전하려는 손자를 막으시기까지 하던 할머니였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을까? 당신 스스로에 대한 원망과 저주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들에 대한 미안함, 할아버지에 대한 죄책감, 한종수에 대한 원망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을까?
택시는 거리에 풀풀 날아 내리기 시작한 싱싱한 플라타너스가랑잎들을 무심하게 깔아뭉개며 전속으로 달렸다. 환경미화원들은 거리에 무두기 쌓이는 가랑잎들을 청소하느라 바빠졌다. 시민들은 낙엽이 펼치는 가을정취에 흠뻑 도취해 있는데 환경미화원아저씨들의 얼굴에는 구름이 둥둥 떠다닌다.
이 비보를 한종수에게 알려야 하는가?
결단이 서지 않는다.
준호는 달리는 택시 안에서 중국에 전화를 걸었다. 제일 먼저 알려야 할 사람은 할아버지 최덕구였다. 할아버지는 집에서 할머니의 소식만을 고대한 듯 신호음이 떨어지기 바쁘게 전화를 받았다.
“누구시오?”
“네. 저예요. 할아버지. 준홉니다.”
“응, 준호냐?”
“할아버지.”
불러 놓긴 했지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할아버지에게는 분명 커다란 정신적 충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충격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효과적인 전달방식은 없을까? 그렇다고 요금이 엄청 비싼 국제전화를 걸어놓고 언제까지고 침묵을 지킬 수도 없었다.
“이 놈아, 먼 일인지 냉큼 말하지 못허겄냐! 할아비 속을 썩이지 말고.”
할아버지는 머뭇거리고 망설이는 손자의 행동에서 불길한 조짐을 눈치 챈 듯 워낙 얼마 되지 않던 인내성마저 뿔뿔이 내던지고 성급한 본성을 드러냈다.
“할아버지, 절대 마음을 크게 가지셔야 돼요.”
“글쎄 말을 해야 마음을 크게 가지던 작게 가지던 할 게 아니냐. 왜, 할망구헌티 무슨 변이라도 생겼더냐? 그러잖아도 지난 밤 꿈자리가 어수선해 걱정하던 찬데……”
부부끼리는 느낌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이를테면 텔레파시 같은 거.
“네.”
“무슨 변, 앓아눕기라도 한 거냐?”
할아버지의 걱정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그 이상은 할아버지로서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 저……”
“할아비 걱정 말고 어서 말해봐. 그도 아니면 숨이 끊어지기라도 한 거니?”
그것은 진심이 아니라 당신을 버리고 한종수를 찾아간 할머니에 대한 불만과 원망이었다. 준호에게는 이 기회를 빌릴 수밖에 다른 수가 없었다.
“네.”
“뭐라고?”
“돌아가셨어요.”
“……”
할아버지는 경악의 공간에 기다란 침묵을 포장했다.
“할아버지?!”
“무슨 일루?”
“상세한 건 서울에 오시면 말씀드릴 테니 일단 한국으로 나오세요. 할아버지한텐 여권이 있으시잖아요. 비자도 이미 할머니랑 같이 내려왔으니 항공권만 구입하시면 되겠네요. 비행기표가 있으면 내일이라도 당장 서울로 나오세요.”
“도대체 무슨 일로 죽은 거니? 그 놈을 만나 보았더냐?”
그 놈이란 한종수다. 그처럼 복잡한 사연을 국제전화로 말할 수는 없었다. 할아버진 아직 당신 아들의 사망소식도 모르고 계신다.
“나오시면 다 알게 될 겁니다. 오늘 중으로 공항에 전화를 하여 내일 항공권이 있는지 확인해보세요. 늦어도 2~3일 안에는 나오셔야 합니다. 그럼 일이 많아서 이만 끊을게요.”
지은이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어떡해?”
택시에서 내리는 준호의 손을 잡고 눈물부터 흘린다.
“아빠가 돌아가신 슬픔도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다 내 탓이야. 제대로 돌봐드리지 못했어.”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나 좀 도와줘. 어서 의사를 불러줘.”
“경찰도 불렀어. 독극물복용사망이 확실한 것 같대.”
“동방항공회사에 전화 좀 해주라. 중국□□□에서 서울 오는, 내일이나 모레의 항공권을 예약할 수 있는지 알아봐. 인터넷에 접속하면 전화번호가 뜰 거야. 할아버지를 모셔 와야 할 거 아냐. 될수록 가장 빠른 걸로 예약해야 돼.”
“알았어.”
지은은 준호가 적어주는 그의 할아버지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받아들더니 어디론가 쏜살같이 사라졌다.
3층 빌라건물은 초상난 집답지 않게 울음소리 한마디 없이 괴괴했다. 하긴 준호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도 아산 댁과 명철은 준호를 보자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느라 애쓴다. 의사들은 하나 둘 빠져나갔고 강력반 경찰들만 남아서 그의 신분을 확인하고 몇 가지 질문을 했다.
할머니는 방구석에 눕혀져 있었고 몸 위에는 백포가 덮여 있었다. 준호는 백포를 젖히고 숨이 끊어진 할머니의 모습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꾸만 무거운 피로만 거머리처럼 치덕치덕 달라붙었다. 눈앞이 캄캄해났다. 할아버지가 도착하기 전에는 시신을 화장하면 안 되었다. 그리고 한종수에게도 알려야 된다는 생각을 했다. 짧은 시간이었고 먼 옛날의 과거이긴 했지만 그들은 분명 부부간이었다.
전화를 걸었다.
“유리 씨!”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유리의 싱그러운 체취와 향기로운 숨결소리가 느껴졌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다. 그녀는 말 한마디 듣지 않고도 벌써 전화를 넣은 사람이 준호임을 아는 듯싶었다. 그녀의 휴대폰에 입력된 단축버튼 1번은 다름 아닌 준호였다.
“오늘은 우리 일 때문에 전화를 드린 게 아닙니다. 할머니가 오늘 사망하셨다는 부고를 유리 씨 할아버지께 전하려고……”
“네? 할머님께서 돌아가시다니요! 어쩌다가?”
그제야 유리는 침묵을 깬다.
“독극물을 복용하시고……”
“……”
“알릴까말까 망설이다가 전화를 드렸습니다. 할아버지께 부고를 전하고 말고는 유리 씨 판단에 맡깁니다.”
“말씀드려야죠. 사랑은 없었다지만 추억과 한은 있었을 거 아니에요. 할아버님께서도 할머니를 만나신 후 말씀은 없으셨지만 받으신 충격은 크신 것 같아요.”
“그럼 부탁합니다.……”
“문자는 확인하셨죠?”
“네. 그럼 오늘은 이만 끊겠습니다. 일이 많아서.”
통화를 중단했지만 그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조각상처럼 굳어있었다. 유리의 부드러운 목소리의 여운을 한 방울도 분실함이 없이 말끔히 흡수하여 가슴 깊숙이 심어두고 싶었다. 그녀의 음성과 형상과 향기는 이젠 그가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활력소가 돼버린 것이다.
할머니의 시신을 발인할 때가지 좁은 단칸방에 방치해 둘 수는 없었다.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할아버지가 서울에 도착하려면 이틀은 걸릴 것이었다. 명철이와 아산 댁도 서울바닥에 인맥이 없기는 준호와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고 인맥을 찾아 지도교수나 면식 있는 학자 분들께 청탁을 넣을 만큼 떳떳한 일도 못되었다. 아버지에 이은 할머니의 자결! 남부끄러운 가문의 망신이었다. 어떻게 장례를 치러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일보러 나간 지은이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초상난 집에서 인터넷을 뒤지기도 그렇고 하니까 아예 거리로 나간 모양이다. 어쩌면 워낙 머리 회전이 빠른 지은이라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태평로에 있는 동방항공사 서울 대리점으로 직접 찾아갔는지도 모른다. 거기 가면 확인도 금방 될 것이고 항공권예약도 빠를 테니까 말이다.
띠리리루룽, 띠리리루룽.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에 준호는 흠칫 놀랐다. 인제는 전화벨소리가 두려워진다.
“오빠.”
“유리 씨!”
“저의 둘째 할아버지께서 할머니의 시신을 장례식장에 옮기고 빈소를 마련해주시겠대요. 잘 아시는 분이 장례식장을 경영하고 있대요.”
“둘째 할아버지께서요?”
고마움에 앞서 할아버지가 동의하실지 그것이 우려되어 잠시 망설여졌다.
“비용만 지불하면 되니까 누구도 알지 못할 거예요.”
유리는 어느새 준호의 우려를 간파하고 해소시켜주었다. 사실 아버지 일 때문에 준호의 수중에는 단돈 한 푼 없었다. 끼니거리를 살 돈마저 떨어져 지은의 신세를 진지가 벌써 며칠 되었다. 그래서 할머니의 상사는 그 슬픔만큼 경제적 고민도 컸었다. 할아버지가 나오신다곤 하지만 무슨 돈이 있으랴. 지은이도 목돈을 빌려줄 만큼 경제사정이 넉넉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남 교수나 안면 있는 학자들에게 손을 내밀 수도 없는 딱한 처지였다. 체면을 무릅쓰고 유리 둘째 할아버지의 제의를 호의로 수락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고맙습니다.”
“그럼 장례식장에 금방 연락을 드릴게요. 식장에서 영구차를 보낼 거예요.”
“유리 씨도 오실 거죠?”
“미안해요. 할머니의 뜻하지 않은 불행에 저도 놀랐어요. 그렇지만……”
통화가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준호는 가슴 찢기는 고통을 참느라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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