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만강기슭에 '전설'은 살아있다

[연변 조선족 83만명 한국인 1만명 중, 조, 러'황금삼각주'로 부상]
[로무송출 지역경제에 '효자' 역할 조선족 인구류실로 '부작용' 속출]

"연변을 모르고 조선족을 론할수 없다" 이는 중국조선족사회에서 차지하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비중을 여실하게 평가하는 말이다. 중국, 조선, 러시아의 접경 지이며 동북아 '황금삼각주'라고 불리는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설립 50여년간 우리 민족의 정치, 교육, 문화, 체육 등 제반분야의 중심지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개혁개방의 물결을 따라 해외와 연해도시로 진출하는 조선족들이 대거 늘면서 조선족 최대의 거주지이던 연변도 인구류실에 따른 여러 가지 '부작용'을 겪고 있지만 중한수교와 더불어 한국인들이 찾아들고 국경무역이나 거주를 목적으로 한 흑룡강, 길림의 기타 지역 조선족들이 류입되면서 줄곧 중국 최대의 한겨레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 2004년 말 기준으로 연변의 조선족 호적인구는 82만481명, 총인구의 37.7%를 차지하여 전해보다 0.2포인트 감소했다. 한국인은 약 1만명 가량 상주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사업이나 취직 목적이 아닌 생계형 이민자가 다수인 것으로 밝혀졌다.

연변경제도 부침을 거듭하면서 꾸준하게 성장하고 있으며 10만명의 조선족해외로무일군들이 지역경제에 활력소를 불어넣고 있다. 또한 최근년간 중조, 중러 국경무역이 점차 활성화되고 두만강지역개발이 탄력을 받고 있는 등 요인을 감안하면 동북아경제요충지로 부상하는 것도 멀지만은 않아 보인다.

한겨레사회 발전과정 장백산정기를 받아 안고 두만강의 품에 안긴 연변은 조선반도와 최대의 국경선을 가지고 린접해 있어 우리 민족과 특수한 인연을 맺고 있다. 19세기 초, 조선반도 북부지역에 해마다 재해가 들어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던 조선인농민들이 각종 금령에도 불구하고 월경하여 연변지역에 와서 밭을 일구고 개발하기 시작, 1869년 전례 없는 큰 자연재해가 나타나 또 수많은 조선인들이 고향을 등지고 연변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다.

1881년 연변지역에 정착한 조선인은 이미 1만여명에 달했다. 러일전쟁을 전후해 조선반도의 파산된 농민과 망국노가 되려 하지 않는 피난민들이 대량으로 연변으로 이주, 해당자료에 따르면 1911년 연변에는 조선인 인구가 12만6천명에 달해 한족인구 3만5천여명의 3배이상을 차지했다. 그후 독립운동과 살길을 찾아오는 조선인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면서 연변지역의 조선인 인구는 1945년에 이르러 70여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중 일부는 조선반도로 귀국하고 일부는 흑룡강이나 길림지역으로 이주하였는데 1949년 새 중국이 탄생되던 시기 연변의 조선인 인구는 52만9천여명에 달해 총인구의 63.8%를 점했다. 1952년 9월3일, 정무원(현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성립되였고 1955년12월에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명, 현재 연길, 돈화, 훈춘, 화룡, 도문, 룡정 6개 시와 왕청, 안도 2개현을 관할하고 있다.1993년말, 연변의 조선족은 85만4천여명으로 전국 조선족총수의 43%를 차지하였고 연변총인구의 39.9%를 차지하였다. 1996년부터 연변의 조선족인구는 마이너스성장을 기록하고 있는데 2004년말 조선족인구는 82만481명(호적인구)으로서 총인구의 37.7%를 차지했다. 현재 연변의 조선족들은 대부분 연길, 룡정, 도문, 화룡시에 분포되어 있는데 조선족인구비례를 보면 연길59%,룡정은 67%, 도문 58%, 화룡 60%를 점하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이후 한국인들이 향항이나 일본을 통해 연변을 고찰하거나 관광하기 시작했다. 1992년 중한수교후 갑을방직(현 대경방직)이 한국투자 1호기업으로 연변에 정착하면서 한국의 의류, 방직 등 노동집약형 제조업체와 각종 서비스업체가 진출하고 장백산관광이나 학업을 위해 연변을 찾는 한국인들이 점차 많아졌다. 연변한국상회(회장 도경주)에 따르면 2000년 이후부터는 자녀교육에 지장이 없고 생활상 불편이 적은 연변을 찾아 생계를 유지하려는 한국인들이 대폭 늘면서 연변의 한국인수는 1만명가량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한국과 연변의 인적, 물적 교류는 매우 활발한데 매주 연길-인천을 오가는 왕복항공편이 일당 2편에 달하며 훈춘-자르비노-속초를 잇는 동춘항운과 훈춘-라진-부산을 잇는 동룡항운(화물선)이 운행하고 있다. 민족간부진과 교육문화인프라 연변은 력대로 중국의 고위급 조선족간부를 배출하는 수송기지로서 방대한 민족간부진을 구축하고 있다. 연변은 조선족자치주라는 특성상 민족간부를 양성하고 선발하고 등용하는 일련의 기제가 형성되여 산재지역에 비해 민족간부대오가 상대적으로 안정되었지만 최근년간 민족간부의 단층현상이 출현하며 조선족간부비례가 '락하산'을 타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창건 당시 조선족간부의 비례는 60%가량에 이르렀으며 문화대혁명시기 대폭 하락했다가 1980년대부터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1993년말 연변의 조선족간부의 비례는 간부 총수의 49%를 점해 인구비례 39.9%보다 10포인트가량 높았으나 2004년말 조선족간부의 비례는 인구비례 37.7%를 밑돌았다. 해당전문가들은 이를 정계를 떠나 상업에 종사하는 조선족사회 풍조, 조선족간부의 종합소질저하, 정부의 중시부족 등 원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주정부 김진길주장, 주인대 장룡준주임, 주인대 한창진부주임, 주법원 정성철원장, 주정협 오병권부주석)등 10여명의 부청급이상 조선족간부가 요직에 올라있다. 교육을 중시하는 우리민족 전통미덕의 체현으로 연변에는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교에 이르는 완비한 교육인프라가 갖추어져있다. 연변1중과 같은 조선족명문고중, 소학교와 유치원교사를 양성하는 연변제1사범학교, 민족인재를 양성하는 연변대학이 있어 전반 교육수준이 전국에서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국가 '211공정'중점건설대학이며 민족인재양성의 요람인 연변대학(교장 김병민)은 1949년 4월에 설립되어 50여년간 민족인재를 3만여명 배출했다.

현재 14개학원, 67개 본과 전업이 개설되고 교수 127명, 부교수 320명이며 대학본과생이 1만2687명, 석사연구생이 1231명, 박사연구생이 76명에 달하고 있다. 연변대학은 5개의 박사학위 수여권, 52개의 석사학위 수여권을 획득하고 민족연구원, 동북아연구원, 백두산 천연자원보호 및 개발연구원 등 8개의 대학직속연구기관을 가지고 있다. 최근 산하의 학원들이 모두 흩어져 있어 교육과 관리에 불리한 점을 타개하기 위해 교육부와 성 해당부문의 지지를 얻어 캠퍼스 확장공사를 추진하고 있다.

연변은 '가무의 고향'이란 이름에 걸맞게 민족문화예술이 발달하여 많은 조선족예술일군들이 활약하고 있다. 1948년에 건립된 연변가무단은 조선족의 가장 큰 예술공연단체로서 국내외 대형공연을 수십 차례 조직하여 중국조선족의 위상을 널리 알렸다. 이외에도 연변연극단, 연길시예술단 등 문화예술단체들이 자체의 풍격을 유지하면서 민족문화예술을 꽃피우고 있다. 연변에는 중국어와 조선어로 방송하는 연변 TV방송국, 연변인민방송국 등과 '연변일보','중국조선족소년보','동북조선족과학기술보'등 언론매체가 한겨레사회의 '정신식량'을 공급하고 있다. 이외 전국 조선족학교들에 교재를 제공하는 연변교육출판사, 연변인민출판사 등이 우리 글도서를 편찬하고 있다.

한국인 자녀의 교육을 전담하는 연변한국국제학교(교장 김성련)는 1998년 2월 중국에서 최초로 공식 인가를 받아 설립한 한국국제학교로서 현재 54명의 교직원에 203명의 학생을 가지고 있다. 체육관, 컴퓨터실, 화학실, 음악실 등에 모두 일류의 시설을 갖추었으며 우수한 교원대오를 확보해 기본교육과정 외에도 외국어교육, 예, 체능교육, 정보화 및 특기교육을 강화하고 있어 현지 한국인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연변과학기술대학 사회교육원(원장 배효열)은 국제화시대 무한경쟁을 대비한 평생교육리념을 앞세워 직장인이나 대학생을 상대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정보수집능력, 지식가공능력, 학습능력, 량심과 정직성유지능력을 키워주고 있다.

현재 한국어, 중국어, 영어, 컴퓨터, 녀성교육 등 5개과정을 개설해 직장인들과 대학생들의 학습욕구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김치세미나, 된장세미나 등을 개최해 전통문화를 전파하고 있으며 조선족 IT기술양성반 등도 조직해 민족전문인재양성에도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조선족인구유실로 '몸살' 최근년간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조선족인구의 대량유실과 마이너스성장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1955년 연변의 조선족인구는 총인구의 67%를 차지하고 1993년에는 39.9%를 차지했으며 2004년에는 82만481명으로 37.7%를 차지해 전해보다 0.2포인트 감소했다. 이는 단지 호적인구에 의한 산출일 뿐 실제 연변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60만명 가량인 것으로 보고 있어 실제 인구비례가 20%대에 불과하다. 연변조선족자치주 교육국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2004년말 연변의 조선족유치원생은 8565명, 소학생은 2만3651명, 중학생은 2만2600명에 달해 학생총수의 16%미만에 달해 인구비례에도 못 미치는 수치였다.

요해에 따르면 연변의 조선족중 약10만명이 한국, 일본, 러시아, 미국등 해외에 진출했으며 10여만명이 북경, 상해, 청도, 심천 등 연해도시들에 진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아직도 흑룡강이나 료녕 같은 조선족산재지역보다 제반 여건이 우월하기는 하지만 이로 인한 '부작용'도 속출하고 있다. 현재 일각에서는 인구비례가 계속적인 하강선을 긋는 상황에서 조선족자치주란 명칭을 유지하기도 어렵지 않는가 하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중국어와 조선어를 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어 언어소통에 장애가 없는 조선족인력을 보고 연변에 진출했던 한국의 로동집약형 제조업체들은 극심한 인력난과 고 임금 난에 시달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연변한국상회 로광국사무국장에 따르면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 제조업체의 연변진출이 거의 공백인 상태이며 기존의 업체들도 일부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고 있다. 조선족간부단층현상이 심각해지고 적령기 조선족녀성의 류실로 인한 조선족총각 혼인 난 현상이 가중되며 학생원천고갈로 조선족학교가 폐교되고 70%를 넘어서는 편부모현상으로 자녀교육에 허점이 출현하며 사회적인 도덕적 기강이 무너지는 등 페단이 일고 있다.

한 조선족전문가는 상기의 현상이 근대화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장기적인 '도미노'현상으로 이어진다면 조선족사회에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단적인 례로 연변 조선족녀성 섭외결혼을 들 수 있다. 조사에 따르면 1993년부터 2001년까지 매년 평균 1700명의 조선족녀성들이 섭외결혼을 했는데 그중 90%이상은 한국으로 갔다.2001년에는 최고로 2900명에 달했으며 2002년부터 2004년까지도 매년 2000명을 웃도는 것으로 나타나 10여년 사이 연변의 조선족여성 섭외결혼 수는 최저로 2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중 상당수가 위장결혼이라는 사실은 향후 수많은 사회적인 문제를 남겨두고 있다.

한겨레사회 경제실태 연변은 동북경제권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동북아의 '황금삼각주'로 국경무역이 발달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상무국에 따르면 올 1-10월까지 연변의 대외무역액은 5억6956만달러로 작년 동기 대비 25%성장, 수출액은 3억9216만달러로 작년 동기 대비 33.4%성장했으며 년말까지 대외무역액을 6억8천만달러로 예상하고 있다. 조선의 함경북도, 량강도와 인접해 도문,삼합, 권하 등 8개의 대조선통상구를 가지고 있는 연변은 대외무역에서 대조선무역이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04년 1-9월 통계자료에 따르면 대조선무역액은 1억9661만달러로 전해에 비해 29.6%성장, 올해는 2억5천만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수출입품목으로는 철, 석탄, 곡물, 해산물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훈춘-자르비노-속초를 잇는 동춘항운과 훈춘-라진-부산을 잇는 동룡항운을 통한 대한국무역도 점차 늘어 무역액이 1억 여 달러에 달하고 있다. 주로 연변의 한국기업 원자재와 농산물, 방직 품, 목재, 해산물이 수출입품목이다. 현재 연변에 투자한 외자기업은 500여개, 한국기업은 150여개에 달하며 실제 외자이용액은 누계로 5억 여 달러, 올 1-10월까지 실제외자리용액은 483억달러에 달하고 있다. 대표적인 한국기업들로는 대경방직, 쌍방울, 이건산업, LG창호, 광명특종유리 등이 있다. 연변에 산업공동화현상이 출현하고 있는 상황에서 로무송출이 지역경제에 '효자'역할을 하며 소비경제를 부추기고 있다. 2004년에는 해외로무수입이 7억4천만달러, 올1-10월까지 해외로무수입은 7억2845만달러로 작년 동기 대비 28.7%성장, 년말까지 8억5천만달러를 예상하고 있는데 이는 연변 전반 재정수입의 약 3배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외화의 류입으로 소비경제가 발달했는데 올1-10월 사회소비품매출총액은 81.2억원으로 작년 동기 대비 18.2%성장, 년말이면 100억원 대관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한다. 조선족업체는 연변지역에 약 1천여개가 가동중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부동산개발, 무역, 서비스업체가 위주이다. 김길춘리사장이 이끄는 백두산실업유한회사, 김창익회장이 이끄는 신원그룹, 강철회장이 이끄는 원항그룹, 리동철동사장이 이끄는 애득그룹 등 억대이상에 달하는 기업은 근 10개, 천만원이상 달하는 기업은 40여개에 달한다. 국가의 동북로후공업기지 진흥 우대정책과 서부대개발 우대정책을 동시에 향수하고 있지만 실제 조작에 있어서 다른 지역에 비해 구체적인 우대정책이 없어 국내외 기업들이 연변투자를 기피하는 상황에서 연변자치주정부에서는 투자환경을 개선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또한 러시아, 조선의 광산자원 등에 대한 개발투자와 대러, 대조선 수출에 주력해 연변기업의 활로를 모색, 산업공동화 현상의 확산을 막고 있다.

울고 웃는 연변축구, 축구경제 재기하나?

한동안 구단 매각 설로 연변 나아가서 전국의 조선족 축구 팬들의 마음을 졸이던 연변축구가 11월22일 구락부경영문제가 낙착됨에 따라 한 단락을 매듭지었다. 전문 축구경영인 출신의 정붕휘가 임기 4년의 연변축구구락부 총경리로 초빙되고 위탁경영방식으로 연변축구팀을 운영하게 되었다. 소식에 따르면 정붕휘는 료녕 호로도시 굉운그룹의 경제후원으로 연변의 1선과 2선 축구팀을 운영하게 된다. 2006년 갑급리그에서 '연변'이란 두 글자를 볼 수 있어서 불행 중 다행이다. 현재 갑급팀 가운데서 정부의 힘으로 운영하는 축구구락부는 유일하게 연변팀, 연변현지에서 축구팀을 운영할 만한 기업이 없는 상황에서 차선책으로 모색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11월19일, 특별취재팀이 주체육국을 방문 할 당시 심룡철부국장과 축구관리센터 리동철주임은 정부의 립장을 명확히 밝혔다."시장화는 중국축구의 발전방향이며 연변축구의 발전방향이다. 현재 연변축구팀을 운영할만한 현지기업이 없는 상황에서 외부력량을 빌어 축구팀을 운영해야 하지만 어떤 난관이 닥쳐도 타지 기업에 구단전체를 매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갑급리그에서 '연변'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로부터 연변 상하가 일심동체가 되어 축구팀을 살리기 위해 쏟는 노력을 보아낼 수 있었다. 2000년12월 갑A리그에서 탈락한 연변팀을 절강록성축구구락부에 매각하던 당시 연길 공항에서 수천명의 축구팬들이 울음바다를 만들던 상황은 재현되지 않을 것이다. 연변축구는 중국 조선족의 자랑이었고 희망이었다.

1965년 조선족을 위주로 하여 이루어진 연변축구팀은 길림성을 대표하여 전국갑급련맹경기에서 우승을 따내는 영광을 지녔으며 소년 팀, 청년 팀, 성년 팀 할 것 없이 전국축구계를 주름잡았다.

연변은 50여년간 '하프발동기'고종훈, '마라도너'리홍군 등과 같은 50여명의 우수한 조선족선수들을 각급 국가팀에 수송하여 중국축구의 발전에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1994년부터 중국 프로축구가 시작되여서도 연변축구팀은 줄곧'강팀킬러'라는 미명을 달고 다녔으며 1997년 한국 최은택감독의 인솔하에 갑 A리그 4등이란 우수한 성적도 거두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자금난으로 훌륭한 외적선수를 유치하지 못하고 자체선수만으로 고전하던 연변축구팀은 2000년 갑A리그 탈락의 비운을 맞이했으며 운영 난으로 1선팀을 절강록성에 매각했다. 하지만 이들은 맥을 놓지 않고 2팀을 설립해 연변축구재기에 전력투구, 4년간의 악전고투 끝에 2004년 갑급리그 문턱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연변축구팀은 올해 극심한 경제 난 속에서도 고훈감독의 인솔하에 갑급리그 8등이란 성적을 따냈다. 그동안 연변축구에 대한 조선족들의 사랑은 도처에서 그칠 줄 몰랐다. 광주에서, 북경에서, 청도에서 조선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목청껏 응원을 하고 성금을 지원하며 자신의 마음을 전달했다.

연변축구는 연변의 축구만이 아니라 200만 한겨레 사회의 축구로 자리 매김 했다. 연변축구팀의 부활은 단순히 체육 문화적인 차원을 넘어 경제와 직결되었다. 1994년부터 2000년까지 연길시인민체육장에서 도심에 이르는 도로 연선에는 100여개의 맥주점들이 들어서 홈장경기때마다 초만원을 이루었고 연길시의 식당들도 축구팀과 희로애락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 당시 경기장 주변에서 맥주점을 경영하던 곽씨에 따르면 1997년에 이곳에 작은 식당을 운영, 당 해에 투자를 다 회수하고 그 자리에 큰 식당을 신축하여 높은 수입을 올렸는데 겨울철은 영업하지 않아도 되었다.

한 맥주도매상에 따르면 홈장경기때마다 경기장 주변식당들에 만여 개의 맥주를 공급했다고 한다. 그리고 택시기사들의 순 수입도 500원 이상에 달했고 돗자리, 광천수, 아이스크림, 해바라기 등 로점상들이 축구 때문에 생계를 유지하였다. 연길시인민체육장도 일년에 입장료 수입이 500만원에 달했다. 그러나 2000년이후 부터는 입장료수입이 전무한 상황에서 경기장보수공사가 지체되고 식당이 부도나고 실업자가 속출하고 택시기사들의 수입도 격감하는 쓴맛을 봐야 했다.

올해 연변축구팀이 갑급리그에 출전한 후 홈장경기관중이 평균 1만5천명에 달해 슈퍼리그와 갑급리그를 포함한 전국축구리그에서 앞자리를 차지하는 등 상황이 점차 개선되고 있지만 '후유증'은 시일이 걸려야 했다.

재원이 락착되고 한겨레사회의 뜨거운 성원을 받고 있는 만큼 연변축구팀이 분발하여 짧은 시일 내에 슈퍼리그에 진출하고 '백두호랑이'의 위용을 과시하며 연변축구의 '전설'을 계속 이어 나가길 간절히 기대한다. 두만강기슭에 '전설'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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