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영

에필로그





갑자기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러 준호는 쿨룩쿨룩 마른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눈을 떠보니 아직 창문에 매달린 어둠도 채 가시지 않았는데 방안에는 할아버지의 지독한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할아버지는 어스레한 방 가운데 우두커니 일어나 앉아 독초를 태우며 어둠이 조금씩 증발하는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일요일이어서 늦게까지 잘 생각이었는데……
“할아버지, 왜 더 주무시지 않고 벌써 일어나셨어요?”
할아버지의 얼굴은 삼단같이 뿜어내는 담배연기에 묻혀 윤곽만 희미하게 보였다. 할아버지의 표정은 그대로 연기 속으로 숨어버리기라도 할 듯싶다.
“잠이 와야 자지.”
“시장하시죠? 어제 한 끼도 들지 않았습니다.”
“……”
대답이 없으신 걸 보니 정말 시장기가 드는 모양이다.
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형광등을 켰다.
“중국집에 자장면이라도 시킬까요? 아니면 치킨이라도.”
좋다 궂다 태도표시가 없다. 사양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하룻밤을 자고나니 가슴속에 불붙던 분노도 좀 가라앉은 걸까? 아니면 눈 깜짝할 사이에 할머니와 아들을 잃고 나더니 모든 걸 체념한 걸까? 탈진하고 절망하고……
준호는 전화를 걸어 치킨을 배달시켰다.
“너 남원 산곡리라는 곳에 가 보았냐?”
최덕구는 느닷없이 고향화제를 꺼냈다.
“시간이 없어서 아직 못 가봤어요.”
“할민?”
“할머니도요.”
“네 아비는?”
“아버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가보지 않았을 겁니다.”
왜 갑자기 고향이 생각난 걸까? 혹시?!……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소리가 유난히 요란스럽게 울렸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 지은이가 그의 방에 전화를 가설해주었다. 전화벨소리에 잠을 깬 듯 옆방에서 으응, 하는 지은의 잠꼬대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미안하네. 이른 아침부터 부산을 떨어서. 나 유리 둘째 할아버질세.”
“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다른 게 아니고. 자네 할아버지한테 여쭐 말씀이 있어서.”
“무슨 일인지 어서 말씀해보십시오.”
“나랑 같이 산곡리 고향마을엘 다녀오실 의향이 없으시냐고 여쭤보게. 오늘 중으로 다녀오려면 일찍 출발해야겠기에. 워낙 오늘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였네만…… 자네 할아버지가 고향에 다녀오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며칠 뒤로 날짜를 미루려고 하네.”
“알겠습니다. 일단 할아버지께 여쭤보겠습니다.”
“그럼 부탁하네.”
“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정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노인들의 생각이 이처럼 일치할 수 있을까? 그분들은 과거의 끈질긴 유혹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고 그래서 부단한 확인과 추억이 필요한 것 같다.
“할아버지. 한종철 할아버지께서 할아버지더러 함께 고향에 다녀오시잡니다.”
“내가 왜 그 사람들과 함께 고향엘 다녀와. 미쳤냐!”
“그러지 마시고 함께 다녀오세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가도 난 그 사람들과는 같이 안 간다.”
“식사 왔습니다.”
배달이 도착했다.
할아버지는 손자더러 먹어보란 말도 없이 잠간 사이에 치킨 한 마리를 게 눈 감추듯 뼈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죄다 드셨다. 아직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식성이 왕성하고 그만큼 치아도 튼튼했다.
그 사이 날이 밝았다. 그러나 하늘은 찌뿌드드하게 흐려있었다. 당금이라도 뭔가 떨어질 것 같다.
할아버지는 식사를 끝내고 담배를 붙여 물고서야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침묵의 뚜껑을 연다.
“너 종수 손녀와의 일은 어떻게 되었냐?”
“네?!”
느닷없는 질문에 준호는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께서도 벌써 그 사실을 알고 계셨어요?”
“네 아비가 전화로 알려주더라. 그만뒀냐?”
“할아버지께 진작 말씀드렸어야 하는 건데. 죄송합니다.”
“진옥의 일 때문에 아직도 할아빌 원망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래 걔하곤 결혼할 작정이냐?”
“그게 저…… 그러니까……”
“할아비한테는 말하기 싫다 그거지.”
“그게 아니라요.”
“물론 할아빈 네 아비 편이다. 차라리 진옥이 쪽이 훨씬 났지. 종수손녀와 좋아할 줄 알았다면 그 때 진옥이와의 혼사를 허락했을 걸 하는 후회까지 드는구나. 네 아비도 후회하더라. 그러나 지금은 너를 집에서 끼고 살던 때와는 또 다르지 않냐. 멀리 이국땅에 있으니 감시할 수도 없고. 게다가 할미와 아비까지 없으니 할아비 혼자서 뭘 어떻게 하겠냐. 반대한다고 해서 말을 들을 네가 아닐 거고.”
“할아버지 사실 저도 생각중입니다.”
“더구나 이젠 네 친 할아비도 아니지 않느냐. 네 할아빈 종수란 놈이라잖냐.”
최덕구는 한껏 들이마시던 담배연기에 사레가 들리며 기침을 쿨룩거렸다.
“할아버지, 할아버진 영원히 저의 할아버집니다……”
“네 할미 말이 정말이라면…… 쿨룩쿨룩…… 너희들은 남매간인데 그래도 괜찮겠냐.…… 쿨룩쿨룩…… 걔 할아비도 반대한다면서?”
“네.”
“그래 너희들이 남매간이란 사실을 안 지금은 어쩌더냐?”
“아직은…… 도리어 유리 씨가……”
준호는 뒷말을 삼켜버렸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최덕구도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비행기표는 알아봤냐?”
최덕구는 더 이상 자신이 간섭할 일이 아니라는 듯 이 즈음에서 화제를 슬쩍 비틀어버렸다. 평소 불같던 성미가 하루 사이에 딴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당신께서 권위를 행사할 범위라고 확신하고 당당하게 군림하던 영역을 포기하는 그런 느낌을 강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 당신의 여력으로는 그 영역의 구석구석까지 미치기에는 부족감을 느낀 건지도 모른다.
“모레까지는 대한항공도 아시아나항공도 항공권이 매진됐답니다. 빨라야 3일 후에야 예약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제가 고향으로 모시고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오늘은 그만둬라. 좀더 생각해보자꾸나.”
할아버지는 산곡리를 다녀오는데도 어떤 극심한 심적 갈등을 겪을 만큼 아직도 과거 속에 집착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최덕구와 한종수는 과거의 영원한 포로였다.
띠리리루룽, 띠리리루룽.
오늘은 웬일인지 아침부터 전화가 부산스럽다. 이번엔 휴대폰이 요란스레 울린다.
“여보시오. 최준호 맞슴까?”
수화기 안으로 달려온 목소리는 뜻밖에도 연변말씨인지라 준호는 어리둥절해졌다. 전혀 생소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렇습니다만 전화주신 분은 누구시죠?”
“예, 저느예 중국 연변에서 왔슴다. 진옥이라구 암까?”
“진옥이라구요? 네 압니다만 무슨 소식이라도……”
“죽었슴다.”
“네? 죽다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전달할 것도 쪼꼼 있구 해서 그러는데 오늘 바까테서 만날 수 없슴까. 전 공일날 밲에 쉬는 날이 없기에……”
“네네. 그러지요. 거기가 어딥니까? 신대방역에서 내려…… 알겠습니다. 제가 곧 그리로 갈게요.”
준호는 대충 얼굴을 씻고는 옷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급히 다녀올 곳이 있어서 잠간 나가봐야겠습니다. 금방 돌아올게요.”
“진옥이가 어떻게 됐다는 거니?”
“글쎄 무슨 사고가 생긴 듯한데 아직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최덕구는 총총히 방에서 나가는 손자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오빠, 아침부터 웬 전화가 그리 많아? 사람 자지도 못하게.”
지은은 잠옷 바람에 길게 하품을 하며 미닫이를 열고 로비를 내다본다.
“할아버질 부탁해.”
“어딜 가는데?”
“갔다 와서 말해줄게.”
“오빠, 나 말이지. 애를 낳기로 결심했어. 들었지?”
등 뒤에 그녀의 목소리를 비끄러맨 채 쿵쿵쿵! 3층 계단을 단숨에 달려 내려왔다. 마음이 조급해 지하철까지 걸어갈 만큼의 시간도 지루하게 느껴져 택시를 잡았다. 하늘은 금방 허물어지기라도 할 듯이 잔뜩 흐려있었다. 낙엽이 떨어지며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기 시작한 플라타너스가로수들은 얼룩덜룩 보기조차 흉하다.
약속지점인 신대방전철역 앞에서 자그마한 체구에 머리카락이 더부룩하고 얼굴이 가무잡잡한 30대 중반의 사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의를 지키느라 그런대로 양복정장차림을 하고 나왔지만 동대문시장에서 구입한 사구려 상품인데다 고역으로 비틀어지고 구겨지고 균형이 깨어진 몸에 입혀져 볼품이라곤 없이 꾀죄죄했다. 공사장에서 힘든 노동에 혹사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준호는 부근의 커피숍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사내는 소주나 한잔하자며 그를 대폿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진옥이 오빠가 된대메? 내 이름은 순길이라이. 내보다 나이가 어리재이요. 반말으 해두 괜채이치?”
“네. 그런데 진옥인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닌지요?”
“정말 죽었따이까나 그런다. 왜 이 동새 말으 믿재이능가.”
마주앉자마자 말을 놓더니 술 한 잔 뱃속에 들어가고는 금방 동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준호는 그런데 신경 쓸 경황이 없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 좀 소상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이거 보라이까. 이걸 봐사 믿겠능가 원. 이게 진옥이 그 아줌마가 죽기 전에 나한테 주멘서 오빠한테 전해주라던 거라이.”
순길이가 준호의 손에 넘겨준 유물은 자그마한 붉은 케이스를 씌운 전화번호수첩과 고등학교시절에 찍은 그의 사진 한 장이었다.
“콧구멍만한 고깃배저장실에 서른 명도 넘는 터우두(밀입국) 패들이 꽉 박아 앉아 있었따이까나. 통로구멍까지 개새끼들이 꽁꽁 틀어막아서 저장실 안은 새카만데 빗물이 새서 바닥에는 발목때기까장 물이 잠겼댔소. 그 물 우에는 똥오줌에 똥수깨메. 괘일껍대기메 포장지메 썩은 바다괴기찌스레기메 베라벨 오물들이 둥둥 떠댕겠따이. 그딴건 다 견딜만 했소. 그런데 해경을 피해 댕기다 보이까 바다에서 일주일동아이나 배회했재이캐쏘. 심이 칵 맥헤서 기절해 대배지는 사람들이 까뜩했따이까. 그래도 뱃놈들은 해경에 발각될까봐서리 아이 덴다메 통로를 기어나 열어주지 않더라이 글쎄. 그 바람에 세 사람이나 심이 매케 죽었따이까나. 진옥 아줌마도 그 중에 한 사람이지. <이 개새끼들아! 사람이 죽는다! 문 좀 열어라!>하구 내따가 소래기르 쳇는데두 짐승보다 못한 놈들은 들은체두 아이하재이케소. 눈으 펀들펀들 뜨고 사람이 뒈지는 거 그야르 구게할 시&#48178;에 벨 따른 쉬가 없드라이. 진옥아줌마는 임조이 가까븐거 알았는지 품속에서 이것들으 내한테 꺼내주메 오빠한테 꼭 전해달라고 신신당부르 합더구마.. 그 안에 이름이랑 전화번호랑, 핵꼬주소랑 다 적헤 있다메. 꼭 전해달라구 신신당부하고 숨을 거뒀따이. 내가 보기에는 이렇게 비들비들 한거가태두 강다이 있는 사람이란데. 거이 다 정시느 잃구 대배저서 똥물 속에서 매대기르치는데 내만은 끝내 정시느 잃어버리지 않았따이까나. 밤이 되이까나 선원 몇 사람이 저장실로 내레오더이 죽은 사람들을 갑판 위로 질질 끌고 나가더구마. 어찌자구 그래냐구 따지이까나 막무가내드라이. 먹지두 못하고 녹을 대루 녹은 사람들은 그놈들하구 달게들 맥도 없었단데. 그놈들은 심이 끄너진 사람들으 갑판으로 끌어내다간 몽땅 바닷물에 처넣어 버렸소. 짐승보다 못한 놈들이재이요.”
순길의 장황한 상황보고는 사건자체의 진술보다는 자신의 똑똑함에 대한 언급에 치중했지만 준호는 그 속에서도 그때의 처참한 상황을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볼 수 있었다. 불쌍하게 죽은 것만 해도 억울한데 죽어서도 묻힐 한 뙈기의 땅조차 차례지지 않고 수장되어 물고기 밥이 되다니?! 수첩의 맨 앞에 적힌 그녀의 익숙한 글자들을 보며 준호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최준호 오빠.
휴대폰 번호 : 011-9909-27××
주소 : 서울 S대학교 인문대학원

눈물이 앞을 가려 글줄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 속에는 죽는 순간까지도 이 준호가 으뜸가는 존재였다.
“죄송합니다.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준호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 없어 그냥 밖으로 뛰쳐나왔다.
진옥아, 내가 널 죽였어. 널 죽인 죄인은 오빠야!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려 두 볼을 적셨다.
잔뜩 흐렸던 하늘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진눈깨비가 풀풀 날리고 있었다. 행인들은 엄습하는 한기를 막아보려고 코트 깃을 잔뜩 올린 채 총총히 그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아아, 어쩌다가 진옥이가 낯 설은 서해바다의 고기밥이 되였단 말인가! 서해바다! 그렇다. 진옥이 귀신이 되어 방황하고 있을 서해바다로 가보자. 가서 그녀의 원혼이라도 위로해주자.
준호는 지하철입구로 내려가 2호선을 탔다. 신도림에서 인천행을 갈아탔다. 그녀가 수장된 곳은 군산 앞바다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리로 달려갈 수도 없었다. 같은 서해인 인천 앞바다에라도 가서 그녀의 원혼이 떠다니고 있을 황해를 바라보아야만 그녀에게는 물론이고 준호자신에게도 위안이 될 것 같았다.
인천역에 내려 45번 노선버스를 갈아타고 곧추 월미도로 달렸다. 바다로 나가야 했다.
월미도문화의 거리에도 진눈깨비가 풀풀 흩날리고 있었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탁 트인 바다를 마주하고 시원하게 뻗은 해변 관광도로는 즐비하게 늘어선 횟집, 카페, 모텔, 놀이동산들과 희락에 들뜬 관광객들로 흥성거렸다.
준호는 두부(頭部)조각상을 지나 쇠 난간을 설치한 바닷가로 다가갔다. 파도가 누런 모래톱을 핥으며 기슭으로 치달아 오르다간 검푸른 방파제를 때리며 산산이 부서지곤 했다. 세상을 향한 진옥의 몸부림처럼 느껴져 준호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검푸른 바닷물은 진옥의 불 꺼진 가슴처럼 푸르죽죽하고 침울해 보였다. 방파제를 때리며 부서진 물방울들은 마치도 뭔가를 피타게 호소하는 진옥의 모습처럼 보였다.
“오빠. 왜 인제야 왔어요? 전 죽었어요. 다신 살아나지 못해요. 다신 진옥일 보지 못할 거예요.”
쏴아-철썩! 쏴아-철썩!
파도소리는 그렇게 하소연하는 것 같았다.
“그래 내가 너무 늦었어. 진작 널 찾아왔어야 하는 건데. 미안해.”
준호는 검붉은 바위들을 씻으며 눈물을 흘리는 파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도 모르게 두 줄기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난간 아래로 굴러 떨어져 바닷물에 합류되었다. 하늘공중에서 너풀거리던 진눈깨비도 파도 위에 떨어지며 녹아내린다.
이제는 물방울이 된 여자!
진옥이가 너무너무 가엽고 불쌍해진다.
멀리서 하얀 윤선의 힘찬 뱃고동소리가 들려왔다. 굴뚝으로 검은 연기를 토해내며 훨훨 춤사위를 펼치는 갈매기 떼를 거느린 여객선 한 척이 연안여객선터미널을 향해 서서히 입항하고 있었다. 내가 진작 도와주었더라면 진옥이도 저런 여객선을 타고 당당하게 입국할 수 있었을 텐테……
멀리 서쪽 지평선으로 숲이 우거진 작약도며 영종도며 구읍선착장 마을이며 그리고 영종대교가 어렴풋이 보였다. 바다 위에는 몇 척의 관광선과 여객선이 유유히 떠있다.
흐릿하게 보이는 영종도는 준호의 머릿속에 불현듯 하나의 생각을 떠올려주었다.
영종도국제공항!
그렇다. 오늘이 바로 유리 씨가 미국으로 떠나는 날이다. 워낙 토요일항공권을 예매했었지만 웬일인지 일요일로 연기했다는 문자메시지를 받아보았던 기억을 건져냈다. 지금쯤 유리 씨는 공항에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준호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도로 주저앉았다. 난 유리 씨를 무슨 명분으로 어떤 자격으로 만나야 하는가? 연인으로 아니면 오빠로? 그것이 준호를 망설이게 했다. 그러나 준호는 잠시 후 다시 벤치에서 일어났다.
안 돼! 유리까지 진옥의 운명을 되풀이하게 할 수는 없어. 우린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어.
준호는 일산의 어느 여관방에서 있었던 감격의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그래. 우린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야. 불륜의 강을 건넜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준호는 갑자기 조급해졌다. 그는 허둥지둥 부근의 자그마한 연안 여객선터미널로 달려갔다. 천원을 주고 승선티켓 한 장을 끊어가지고는 허름한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객선이 도착하는 몇 분 동안의 시간이 지루하고 답답했다. 차량도 선착하고 여객도 싣느라 또 몇 분 걸려야 했다.
드디어 갑판 위에 선 준호의 땀 흐르는 얼굴을 식히며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죽어서 바다의 혼이 된 진옥의 넋이 짜디짠 해풍이 되어 그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또다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진옥에게 빚진 사랑까지 유리 씨에게 주리라.
여객선은 15분 뒤에 영종도구읍 선착장에 도착했다. 준호가 택시를 잡아타고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유리가 예약한 여객기는 이륙할 한 뒤였다. 준호는 유리가 탑승했을, 천상으로 기수를 향하고 힘차게 비상하는 여객기를 실망어린 눈길로 쳐다보았다.
“유리 씨. 우리 이로써 정말 영이별을 하는 겁니까? 정말 날 버리고 미국으로 떠나는 겁니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피가 터지도록.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여객기는 어느덧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모든 것은 쓰라린 과거로 되어버렸다. 시커멓게 흐린 하늘에는 차가운 진눈깨비만 풀풀 날리고 있었다. 태양도 사라지고 햇빛도 사라지고 세상은 온통 암흑 속에 잠겨버렸다. 아무런 희망도 그 어떤 가능성도 없었다. 남은 것은 절망과 슬픔뿐이었다. 진옥은 죽어서 고기밥이 되고 유리는 그의 곁을 떠나갔다. 진눈깨비만 풀풀 흩날리는 침울한 세계에 그만 홀로 버려졌다. 아버지도 떠나가셨고 할머니도 떠나가셨다. 할아버지도 조만간 그를 버리고 떠나가실 것이다.
준호는 하늘에 비끄러맸던 눈길을 풀어냈다. 그리고 몸을 돌이켰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야 할 일만 남은 것이다. 택시를 타고, 기다려주는 사람도 없는 무의미한 공간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런데……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준호의 눈결에 공항대기실에서 나오는 낯익은 모습이 얼핏 스쳤다.
혹시?!
확인 차 스쳐 지난 시선을 다시 그쪽으로 회전시키는 순간 준호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상식적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공항대기실에서 바퀴가 달린 여행용 백을 끌고나오는 아가씨는 분명 유리 씨였다. 티끌 하나 낄 틈도 없이 완벽하고 단정하고 깔끔한 옷차림, 비둘기 한 마리가 훨훨 나는 듯 부드럽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거느린 수줍고 온화한 모습, 안개같이 가볍고 조용한 걸음걸이……
여객기는 이미 이륙했는데……
준호는 한식경이나 그렇게 멍하니 굳어진 채 유리를 바다보고만 있었다.
그녀가 준호를 향해 수줍게 미소를 지었을 때에야 그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유리 씨!”
다가가서 덥석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녀를 와락 품에 껴안았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준호 씨!”
이제 준호는 청력까지 의심된다.
방금 뭐라고 했지? 오빠가 아니고 준호 씨라고 한 것 같은데.
그의 의심을 확인이라도 하듯 다시 한 번 준호 씨라는 호칭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준호 씨. 전 준호 씰 두고 떠날 수가 없었어요. 전 자신의 감정을 배신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미국행을 포기했어요. 너무나 먼 길을 걸어온 것 같아요. 사막과 설산과 초지를 지나온 느낌이에요. 준호 씨!”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덧 물기가 축축해지며 울먹거린다.
“고맙습니다. 유리 씨!”
준호는 오늘따라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불륜은 우리 탓이 아니에요. 세월 탓이에요. 세월더러 책임지라고 해요.”
“유리 씨. 우린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진눈깨비가 그들의 머리 위에서 펄펄 날렸다.
그들은 택시를 타고 인천공항을 떠나 서울로 출발했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어느 교회당 앞에 이르러 택시에서 내렸다. 서로 마주보았으나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란히 성당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날은 그냥 흐려있고 진눈깨비는 아까보다 더 굵어졌다.
“언제면 날이 개일까요?”
“오라지 않아 개일 겁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은 어쩌면 죄다 사막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우리가 도착할 곳은 반드시 오아시스일 거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사막에서도 생명을 키우는 오아시스이기 때문이지요.”
“전 오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의 앞길엔 아직도 헤쳐 나가야 할 사회적&#8228;윤리적&#8228;이념적 난관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후회는 그것을 이겨나갈 용기와 지력이 있을 때에만 인연이 없어질 겁니다.”
“전 이미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어요. 어떠한 난관도 사랑을 향한 저의 확고한 신념을 가로막진 못할 거예요. 우리는 우리의 사랑으로 대결과 한의 벽을 허물어요.”
“유리 씨. 사랑합니다!”
“사랑해요!”
교회당의 문이 열리고 축복의 종소리가 땡땡 울렸다.
“오빠. 축하해요!”
어디선가 진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옥의 축복이 교회당의 종소리로 울리는 건 아닐까 하고 준호는 엉뚱한 생각을 건졌다.
준호는 유리 씨의 자그마한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는 십자가를 향해 걸어 나갔다.
하나님은 드디어 그들을 당신의 영역에 받아들인 것이다. 사랑의 천당으로.
두 사람의 눈에서 감동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한 걸음이 그렇게도 힘들었단 말인가?
이 한 걸음이 그렇게도 의미가 깊었단 말인가?
그것은 사랑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전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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