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서연

 [서울=동북아신문]아버지가 우리 곁을 떠난지도 어언간 5년이 되여옵니다. 이 5년동안 나는 한시도 아버지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그 강인함, 그 정열, 그 끈기, 문학에 대한 그 애착, 우리 자식들에게 보여준 성실하고, 락관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자세 이 모든 것은 영원한 정신적 유산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오래오래 남아있을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일생을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이 살아오신 분이셨습니다.” 이런 아버지한테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처럼 훌륭하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평생을 강직하게 살아오신 아버지의 성품에 아버지의 인격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지금 이 시각도 페암진단을 받고도 그렇듯 태연해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오르면서 가슴이 뭉클해옵니다.

어느날 아버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페암진단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를 보낸지 3년이 채 안되여서였습니다. 아버지가 페암진단을 받은것이 마치 우리 딸자식들이 아버지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것 같아 며칠동안 내내 가슴을 쥐여뜯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셔서 수술 받기 전날에야 우리들이 알았으니 지금도 그런 아버지를   떠올리면 너무도 원망스럽습니다. 아버지는 딸들의 사업에 지장을 준다고 손수 다니시며 입원수속을 하고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날에야 우리들에게 알렸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일을 아버지 혼자서 감당했다니 너무도 억이 막혀 아무런 말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암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아버지는 마치 남의 일처럼 그렇듯 담담하게 태연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 놀라지 말아라. 오늘 입원수속을 하였다. 그리고 모레 쯤  페암수술을 받게 될거다. 수술하여 암덩어리를 뜯어던지고나면 다시 건강을 되찾을수 있고 글도 쓰고 춤추러도 다닐수 있을거다.”
    우리 아버지는 이렇게 락천적인 분이셨고 너무도 강직한 분이셨습니다. 그런 강한 분이셨기때문에 죽음의 신앞에서도 한점 흐트러짐이 없이 태연자약하였습니다. 문인들한테서 문안 전화가 오면 아버지는 항상 소탈하게 웃으시면서 그들과 우스개까지 하십니다.
    “허-허-칠십을 넘겼으면 나도 이만하면 많이 살았소. 인젠 암을 사랑하며 남은 여생 암과 함께 보내야지 않겠소?”
    이런 락천적인 성품을 소유한 아버지였기에 산더미같은 빚앞에서도 아버지는 꺼꾸러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떠올리느라니 내 기억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20여년전으로 흘러갑니다. 가슴 저린 추억. 영원히 묻어두고만 싶었던  떠올리기 쉽지 않은 한단락 가정사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는 집안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있다는것을 감감 모르고계셨습니다. 한창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셨고  글쓰기에만 전념해오신 아버지께서 어찌  어머니가 그런 엄청난 일을 벌렸으리라고 상상이나 하셨겠습니까?
    하지만 1989년의 어느날 갑자기 빚쟁이들이 아버지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정말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셈이였습니다. 사나이 둘이 천연색텔레비죤를 안아가서야 아버지는 집안에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뒤이어 빚군들이 집에 들이닥치기 시작하였고 빚군들의 대오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막부득이 빚문서를 꾸미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아버지는 이름을 올리고 돈 액수를 적었습니다. 천원, 삼천원, 오천원, 만원, 이만 팔천원. 저그만치 ○○여만원이나 되였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로임이 고작 300여원 평생 먹지 않고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어마어마한 천문수자였습니다. 아버지는 30여년을 살을 섞으며 함께 살아온 어머니의 배신에 몸을 떨었습니다.

    산더미갚은 빚앞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돈이란 무엇입니까? 돈이란 특제한 종이쪼각이 아닙니까? 가난하면 기시를 당하고 비굴해집니다. 돈이란 인격이고 힘입니다. 가난은 수치이고 부유함은 자랑입니다. 그런 돈앞에서 아버지는 꼼짝달싹 못하게 되였습니다. 사면초가에 놓이게 되였습니다.
    어머니는 혼자 빚을 안고 집을 나가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이런 딱한 처지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친구들도 마누라와 갈라서면 빚더미에서 해탈될수 있다고 넌지시 귀띔해주기도 하였습니다. 허나 아버지는 그렇게 할수 없었습니다. 사나이로서 모든 책임을 섬약한 녀자에게 밀어맡길수 없었습니다. 아니 그보다도 자식을 낳고 정을 나누면서 한평생 함께 살아온 어머니를 버릴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랜 시간의 고민과 갈등을 겪고난후 아버지는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빚을 갚아주기로 작심하였습니다. 한평생을 정직하게 살아온 아버지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강건너 불보듯 할수 없었고 어려움을 해결해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신거지요. 아니 아버지는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싶었고 작가의 인격을 지키고싶었습니다. 이런 아버지가 바보일가요? 아니면 사내대장부일가요?
    그때로부터 장장 10여년간 아버지의 고달픈 인생고가 시작되였습니다. 빚쟁이들한테 시달리고 돈에 쪼들리고 주위사람들의 기시와 차거운 눈총을 받고 하지만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꿋꿋하게 견뎌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모파쌍이 쓴 소설 “목걸이”를 떠올렸습니다. 소설의 주인공 로와젤부인이 상류계층의 무도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친구의 가짜목걸이를 빌렸다가 잃어버리여 그것을 배상하느라고 진 빚을 10년을 갚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헌데 그 이야기가 어쩜 아버지의 신상에서도 나타나다니 정말 인생은 요지경이였습니다. 

    아버지는 한푼이라도 아껴 빚을 갚느라고 북경대학 작가반을 다니고있던 남동생의 학비도 대주지 못했으며 일생에 한번밖에 없는 남동생의 잔치도 차려주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일이 평생의 한으로 가슴에 옹이 박혀 늘 유감스러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빚은 갚아야 한다고 아버지는 한결같이 생각하고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하나하나 갚아나갔습니다.
    곁에서는 그런 아버지를 “바보”라고 하셨습니다. 자처하여 빚갚는 “바보”도 있느냐고 하면서 아버지를 비난도 하였습니다. 동료들은 청첩장을 받고도 두문불출 한다고 무심히 가시 돋힌 말을 던져오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달마다 송두리채 “바치고”나면 아버지는 늘 호주머니가 텅텅 빈다는것을 그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때마다 우리는 어머니를 원망하였고 아버지의 불행을 가슴 아파 하였습니다. 허나 그 숱한 사람들의 빚을 아버지는 한마디 원망도 없이 갚아갔습니다…
    10여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10년동안 아버지는 이를 악물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갖은 풍상고초를 겪으시면서 끝내 빚을 청산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드디여 생활의 풍파를 이겨냈습니다. 빚을 청산하는 날 아버지는 사나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보통인간으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그 힘든 일상을 그 괴로운 삼천여일의 하루하루를 아버지는 끝끝내 이겨냈습니다.

아버지는 뼈를 깎아내는 아픔을 감내하면서 무언의 행동으로 인간은 정직하게 성실하게 대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가장 평범한 인생의 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이는 또한 아버지의 삶의 자세의 바탕이며 아버지 인생의 좌표계였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행동으로 인간의 대바른 성품과 작가로서의 인격을 수호하였습니다.
    이런 역경속에서도 아버지는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버지는 꺼꾸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붓대만은 옳게 잡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것입니다. 빚군들이 매일같이 들이닥쳐 돈을 내라고 성화를 부리고 야료를 부리였으며 가장집물을 들부쉬고 란동를 부리는 악렬한 환경에서도 아버지는 완강한 의력으로 장편소설 “아리랑 열두고개” 집필에 달라붙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들을 찾아 답사의 길에 오르시고 발이 닳도록 취재를 다니시고 소설속의 주인공들과 함께 지내시며 친히 생활체험을 하시고 이렇게 해야 소설속의 인물들이 생동하게 살아 숨쉬고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독자들의 심금을  울릴수 있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혼신의 힘을 다 하셨습니다. 이 시기에 창작된 “아리랑 열두고개”에는 작가로서의 아버지의 령혼과 불굴의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져있었습니다. 아니 아버지는 그 어떤 역경속에서도 작가의 사명을 종래로 잊지 않고 계셨던 것이였습니다.
    “아리랑 열두고개”의 집필이 끝나자1993년 아버지는 또다시 두만강 천리답사의 길에 올랐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한 민족의 작가라면 응당 민족의 정감을 그려내고 민족의 애환을 보여주고 민족의 업적을 가송하는 선각자여야 한다는 신념을 굳게 지니고 계셨습니다. 
    이런 신조를 지니셨기에 아버지의 글에는 우리 민족이 걸어온 파란만장한 거창한 흐름이 담겨져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인생의 험난한 가시밭길을 하나하나 헤쳐나가시면서 장편, 중편, 단편 실화, 칼럼, 평론 등 350여편을 발표하고 책도 20권 펴내시여 주옥같은 글들을 세상에 남겼습니다.
    실로 아버지는 우리 민족의 훌륭한 작가로 되기에 손색이 없으신 분입니다.
지금도 병상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은 내 어깨너머로 아스라하니 들려오는듯 합니다.

    아버지가 간암말기 진단을 받고 병원에 계실 때였습니다. 후배작가분들이 아버지의 병문안을 왔을 때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은 작가로서의 자신의 인격을 최고경지로 승화시켰습니다.
    “많은 작가분들이 글에서 인간의 죽음을 나름대로 다루었는데 진실하지 못하오, 내가 직접 체험하여 당신들에게 알려주면 좋겠는데 그 느낌이 아직 안 오는구만,”
아버지는 바로 이런 분이셨습니다. 이 한마디 말로 아버지는 작가로서의 인격과 작가로서 갖추어야 할 인간의 숭고한 경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아버지셨기에 자신이 간암말기라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먼길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무한에 다녀오셨습니다.
    “놀라지 말아라. 무한에 갈 때 벌써 징조가 좋지 않았고 나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알았다. 이번에 힘든 걸음을 하였지만  헛걸음을 하지 않았구나? 네 동생을 설복하여 돈을 얻어오지 않았니?  네 동생이 나서서 앞뒤로 뛰여다닌 덕분에 동생회사에서 2년간 작가협회에 협찬을 해주기로 하고 “석화컵” 문학상을 설치하였다. 연변에서 경비때문에 신인작가들을 발굴하지 못하고 글쓰는 사람들을 고무격려를 해주지 못하는 현실이 내내 마음에 걸리고 안타까웠는데 다문 얼마라도 작가협회를 위하여 경비를 해결하였다고 생각하니 이 아버지는 저 세상에 가도 인생에 유감이 없구나…”

    아, 돈때문에 온갖 기시와 수모를 다 받아오신 아버지는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돈앞에서 그렇듯 대범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욕심을 다 내려놓으시고 우리 자식들에게 거대한 정신적유산을 남겨놓고 떠나셨습니다.
이런 아버지 앞에서 무슨 말을 더 해야합니까? 이 시각 제한된 지면에 아버지의 성품을 다 담기에는 내 언어가 모자랍니다.
    이런 아버지앞에서 나 자신을 비춰봅니다. 나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봅니다. 나자신은 아버지처럼 인생을 정직하게 대바르게 살아왔던가고. 아버지처럼 내 생활의 힘든 일상들을 하나하나 헤쳐왔던가고.
    인생을 살아오면서 생활의 뾰족산을 만나면 힘들다고 주저 앉은 적이 그 얼마였고 남편을 한국에 보내 놓고 혼자서 아들을 키우면서  생활이 고달프다고 눈물을 평평 쏟았던 적은 그 얼마였으며 학생들이 좀만  말썽을 부려도 반주임사업을 포기하려고 생각했던 적은 또 그 얼마였는지 모릅니다. 이런 나를 아버지와 비해보니 나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고 작아집니다. 

    그러면서 이제부터라도 아버지를 닮고 싶은 마음을 새롭게 가져봅니다. 아니  이제 이 딸은 아버지를 닮겠습니다. 아버지를 닮아 남은 여생 아버지의 부끄럽지 않은 딸로 당당히 살아가렵니다. 아버지처럼 인생을 정직하게 성실하게 대바르게 살렵니다. 아버지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는 그런 인생을 살렵니다.
    이것은 인생이 저에게 부여한 사명이고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의 딸로 거듭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를 닮고싶은 이 딸은 오늘도 제일 간고한 교육의 제 일선에서 아이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자신의 남은 여생을 보람차게 알차게 보내고있습니다. 연변인터넷방송/ 수기공모 은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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