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철 시인, 수필가
[서울=동북아신문]내가 근무하고 있는 회사 바로 옆에는 나지막한 언덕이 있는데 거기에는 나무가 꽤 우거져 숲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신록이 뒤 덥혀 보이지는 않지만 숲속에는 까치가 둥지를 틀고 살고 있다. 논산으로 이사 와서 이 회사에 출근한지도 어언 1년이 되어가지만 유달리 내 마음을 빼앗아 가는 것은 아마 저 까치둥지일 것이다. 작년 6월 웰빙랜드에 입사해서 낯선 환경에서 적응해 나가느라 몇 달간 긴장을 풀지 못하고 지내다가 어느 정도 회사일이 몸에 베어가면서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주위환경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고 그 무렵에 문득 소소리 높은 상수리나무 윗부분에 걸려있는 까치둥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기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살랑살랑 가을바람에 낙엽이 떨어지면서 까치둥지는 더욱 뚜렷하게 보이자 나의 시선은 그곳에 집중할 때가 더 많아졌다.

현장에서 일하면서 창밖을 보노라면 까치 몇 마리가 숲속을 들락날락했다. 가끔은 회사 정원에 내려앉아 꽁지를 깝죽거리며 저희들 끼리 꺅꺅거리며 부산을 떨기도 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한동안 법석을 떨고 까치가 날아간 후 회사의 정원에는 단조로운 기계의 소음만 감돈다. 가을이 저물고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까치둥지는 너무나 서글프고 처량해 보였다. 혹한의 바람을 막아 줄 것 하나 없는 저 나무위에 그네 타듯 높은 가지에 걸려있는 둥지에서 까치들은 겨울을 잘 견딜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떠올리기만 해도 내 몸이 움츠러들었다.

하기야 까치의 둥지는 여느 새들의 둥지보다 견고하게 짓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천적인 독수리의 목표물이 될 수 있는 위험이 있는데도 굳이 높은 가지 끝에 둥지를 튼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까치는 왜 높은 곳을 고집할까? 멀리 보기위해서? 시흥(詩興)적으로 남쪽에서 올라오는 봄소식을 먼저 듣고 보기 위해서? 아니면 전설처럼 견우직녀를 위해 은하수에 오작교 놓는데 더 빨리가기 위해서? 이유가 무엇이든 높이 걸려있는 까치둥지는 내 눈엔 그저 허전하고 처량하고 고독해 보였다. 하기야 땅위에 득실거리는 개돼지와 동류(同類)가 되지 않겠다는 까치의 고고함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소소리 높은 상수리의 가지 끝에 저 까치둥지는 나의 보금자리처럼 간단하고 수식이 없다. 그러나 저 까치는 직장 따라 아지트를 옮기는 나와 달리 한 곳만을 고집하는 것 같다. 나는 까치의 이런 일편단심에 은근히 질투심이 생기기도 했다. 추운 겨울이 되면 여름철새를 따라 따뜻한 강남에서 추위를 피하고 봄이 되어 다시 돌아와도 되는데 말이다 이를 일러 신토불이라고 해야 하는가?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내 편리대로 살아가는 나와는 아주 다른 삶을 고집하는 저 까치는 토박이로 사는 것이 더 좋은가 보다.

겨울의 혹한은 사람도 힘들다. 하물며 난방이란 개념마저 없는 까치는 더욱 어려운 계절일 것이다. 눈이 쌓여 얼어붙은 들에서 모이를 찾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시련이겠지만 그나마 착한 농부네 가 감나무에 남겨둔 몇 개의 언 감을 부리로 쪼아 먹으며 우짖는 까치소리는 그저 즐거운 노래로만 들렸다. 가끔은 회사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물 찌꺼기를 잠시 모아 두는 곳에서 까치들이 정신없이 밥알을 쪼아 먹는 광경을 볼 때면 공연히 측은하기도 했다. 꺅꺅, 꺅꺅, 꺅꺅꺅꺅, 부지런히 밥알을 부리로 찍으면서도 부산하게 우짖는 저 까치소리. 까치는 아마 고맙다고 하는 것일 것이다.

계절의 혹독한 시기가 있듯이 우리들의 삶에도 시련의 시기가 찾아온다. 풍차처럼 돌고 도는 희로애락을 경험할 때 나는 약해지지는 않았는지? 나는 내 자신을 향해 채찍질하며 강인하게 살아온 것처럼 착각 하지만 돌이켜 볼 때면 수시로 약해지고 비겁해지는 내가 부끄러울 때가 많다. 만족할 줄 모르고 상대적 박탈감에 공연히 환경을 원망하고 운명에 돌리며 비관하는 그런 순간순간들이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드는 것을 알면서도 그 연약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가 한스럽기도 하다. 어찌 보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불후의 명언을 까치가 더 잘 알고 그 명언에 충실하며 사는 것 같다.

동장군의 기세에 눌려 얼어있던 시간도 슬금슬금 도적 걸음으로 2월의 문턱을 넘어 선다. 눈이 햇빛에 녹아 모락모락 아지랑이 같은 안개가 피어오를 때 얼어있던 나무에도 뿌리에서부터 生氣가 뻗쳐오름을 나는 가슴으로 느껴진다. 높은 가지에 걸려있는 까치둥지에도 따뜻한 햇볕이 오롯이 내려앉는다. 까치둥지를 보면서 나는 저 까치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둥지를 중심으로 대여섯 마리 까치들이 서로 붙좇으며 날아예는 모습을 볼 때면 공연히 내 마음은 서글퍼지기도 한다. 역마살이 낀 내 운명의 장난인지 30년 나의 결혼생활 속에 10여년의 시간은 가정과 떨어져서 홀로 살아왔다.

10여년의 고국의 생활은 대부분 나 홀로 살아오면서 중국에 두고 온 처자식을 그리워했다. 가끔 아내를 만나는 기회가 있었어도 부부의 온기를 채 느끼기도 전에 그는 떠나야 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홀로 자기의 삶을 개척하는 사랑스런 딸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간절했지만 상봉의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고 나는 또 나대로 홀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출근하는 나를 향해 우짖는 듯 저 까치들, 혹한을 이겨낸 저 까치들의 부산을 떠는 저 소리가 왜 그리 정다운지, 저 까치들이 나에게 더 많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오리라 나는 굳게 믿어마지 않는다.

이영철 :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시, 수필 수십편 발표. 동방문학 신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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