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원탁의 동아시아역사 바로보기]

 

홍원탁 wthong@wontockhong.pe.kr

 

김일성이 남침결정을 하게 만든 요인(要因)은 1949년 6월의 미군철수, 중국본토에서 공산당의 승리, 한국이 미국 방어선 밖에 있다는 1950년 1월 미 국무장관의 성명 등이라 한다. 박헌영은 남침개시 즉시 자신의 추종자 20만여 명이 봉기를 할 것이라고 단언했고, 김일성 역시 일단 철수한 미군이 한반도로 되돌아올 시간여유가 없을 정도로 전쟁이 빨리 끝나리라고 믿었다 한다.

김일성은 이승만 정부 요인(要人)들의 식민지 시절 친일 성향을 강조해 남한정부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미 제국주의자에 의한 식민지 노예화 위험성과 민족지상주의를 선전하여 미국과 미군을 남한 국민들 마음속으로부터 격리시키려 노력했었다. (하지만 당시 남한의 언론, 영상매체, 교육현장 등을 장악한 것도 아니고, 친일파 실태를 철저히 파악해 홍보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기 때문에 효과가 없었던 것 같다. 또, 미국 내에 혐한(嫌韓) 감정을 확산시킬 수단도 없었고, 남한 정부가 반미 정권도 아니었기 때문에 미군의 참전을 저지할 내부적 수단도 없었다.])

김일성은 일찍이 1949년 3월에 스탈린에게 남침 가능성을 타진했었다. 스탈린은, 1950년 4월, 모택동의 승인을 얻으라는 단서를 달아 남침을 승인했다. 김일성은 남침 6일 전인 1950년 6월 19일까지 평화적 통일을 제안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3차 세계대전이 불가피 하다고 믿었지만, 유럽이야말로 결정타를 날리는데 가장 적합한 장소라고 믿고 있었다. 7월 1일에 미군이 상륙하자, 스탈린은 7월 4일자로 김일성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소련의 직접적 연관 흔적을 제거했다. 그 날부터 김일성이 UN군과의 전투를 책임지다가, 북한군은 괴멸되었고, 10월 24일에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에게 지휘권을 이양한다. 스탈린은 모택동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확보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한국전쟁의 진행을 조심스럽게 조작해서, 모택동이 미국으로 하여금 유럽으로부터 아시아로 병력을 이동시키게 만드는 부담을 혼자 지도록 하는 동시에, 모택동을 서방과 연결할 수 있는 다리를 모조리 태워버리려 했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한국전쟁: 양극체제 세계의 변두리에서



서울대 명예교수 홍원탁

일시적인 다극(多極)의 세계

1853년, 미국 해군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는 일본 해안에 진입해, 도쿠가와 막부 정권에게 개국을 강요했다. 일본국민은 쇼군(將軍)을 쫓아내고 새삼 황실의 권위 아래 단결하여 명치유신(1868-1912)이란 이름으로 서구화-공업화를 시작했고, 서구열강의 식민지 제국주의를 모방하면서 청일전쟁(1894-5)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903년, 제정 러시아는 일본에게 한반도 39도선 이남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인정 해 줄 테니 39도선 이북은 중립화하자는 제안을 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그 제안을 거절한 다음 러일전쟁(1904-5)에 승리하여 조선을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유사이래 정복왕조를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던 한국은 1910년에 일본에 병탄합병 되었다. 1919년 3월 1일, 한반도 전 지역에서 일본인 통치에 저항하는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다. 1943년 12월 1일, 루스벨트, 처칠, 장개석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이 적절한 단계를 거쳐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가 될 것이라고 천명했다.

양극(兩極) 세계의 변두리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 8월 초, 미국과 소련은 38도선을 양국 군대의 한반도 점령지역 경계선으로 설정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는 UN 주관 하에 선거가 시행되었다.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73세의 이승만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1 스탈린은 같은 해 9월 9일에 33세의 김일성을 수반으로 북한에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2

1949년 3월,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한에 대한 군사적 공격 가능성을 타진했다. 김일성은 공격이 시작되면 (남조선 공산조직의 지도자 박헌영이 말 해준대로) 즉시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며 스탈린을 설득하려 했다. 1949년 4월, NATO가 결성되었다. 스탈린은 원칙적으로 김일성의 발상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미군이 6월에 남한에서 철수를 한 후에도 계속 김일성에게 게릴라 전을 전개하라고 종용했다. 3 6월과 9월 사이, 김일성은 남한에서 진행 중인 게릴라 전을 강화하기 위해 특수 훈련을 받은 1,200명의 전투요원을 내려 보냈으나, 대부분의 게릴라 조직은 남한 군대에 의해 소탕되었다. 4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생각이 아니라 김일성의 생각"

후루시초프는 그의 회고록(1971: 400-1)에서 말한다.

"1949년 말, 김일성은 스탈린과 협의를 하기 위해 수행원 일단과 함께 도착했다. 북한인들은 남한을 총칼로 찌를 것을 원했다. 김일성은 한번만 찌르면 남한이 내부적으로 폭발해 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스탈린은 김일성의 발상에 반대할 수가 없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다시 한번 잘 검토를 하고 계산을 좀 해 본 다음에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오도록 설득했다" 5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내셔널 신문기자 클럽에서 미국은 군사적 공격이 있을 경우 일본-오키나와-필리핀 이외 지역에 대해서는 보증을 하지 않을 것이란 연설을 통해 한국이 미국 방어선 밖에 있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인 4월 중, 김일성은 남한 공산조직의 지도자였던  (1946년에 월북 후 북한 副首相 겸 外相) 박헌영과 함께 또 다시 모스크바를 찾아왔다. 이번에는 스탈린이 모택동의 승인을 얻으라는 단서를 달아 남한 침공을 승인했다. 6

흐루시초프는 회고록(1971: 401-2)에서 말한다.

"김일성은 집으로 돌아가서 모든 계획을 완전히 수립한 다음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자신이 성공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나는 당시 스탈린이 그렇게 분명하게 확신을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탈린은 미국이 뛰어들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전쟁이 빨리 끝날 것이라는 생각으로 기울었다. 김일성은 전쟁이 재빨리 승리로 끝난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미국의 개입도 피할 수 있을 것이었다.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김일성의 제안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모택동은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모택동은 김일성의 제안을 승인하면서, 이번 전쟁은 국내문제이기 때문에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지 안을 것이라는 의견을 개진했다. 소련은 이미 상당기간 북한에 무기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들은 앞으로 필요한 양의 탱크, 대포, 소총, 기관총, 공병장비, 대공포 등을 제공받을 것이 분명했다"

서대숙(1988: 112, 121)에 의하면, 김일성이 남침 결정을 하게 만든 핵심 요인들은 △미군철수 △중국본토에서의 공산당의 승리 △애치슨의 아시아 미 방위선에 대한 성명 등이다. 뿐만 아니라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남침 개시 즉시 자신의 추종자 20만여 명이 봉기를 할 것이라고 단언했고, 김일성 역시 일단 철수한 미군이 한반도로 되돌아올 시간여유가 없을 정도로 전쟁이 빨리 끝나리라고 믿었다.

김일성은 이승만 정부 요인들의 식민지 시절 친일 성향을 강조해 남한 정부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미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식민지 노예화 위험성과 민족지상주의를 선전하여 미국과 미군을 남한 국민들 마음 속으로부터 격리시키려 노력했다. 미군은 1949년 6월 29일에 철수를 완료했었다. 김일성은 1949년 6월부터 남침 6일 전인 1950년 6월 19일까지 평화적 통일을 제안하고 있었다. 7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비행기, 중형 대포와 전차 등을 제공해 왔고, 모택동은 중국 인민해방군에 소속되어 있던 약 4만 명의 고참 한국인 병사들을 김일성에게 넘겨주고 있었다. 8 1950년 5월, 스탈린은 세부적 침공계획을 수립하고 최종적으로 확정하기 위해 새로운 팀의 소련군 장교단을 파견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중무장을 한 20만 명의 북한군은 가볍게 무장을 한 10만 명의 남한 군대에 공격을 개시했다.

흐루시초프는 회고록(1971: 401-2)에서 말한다.

"나는 그 전쟁이 스탈린의 생각이 아니라 김일성의 생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김일성이 벌린 것이다. 물론 스탈린은 김일성의 생각을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나는 스탈린이 김일성을 부추긴 것을 책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김일성의 성공을 바랐고, 투쟁에 승리할 날을 고대하며 북한 지도자들에게 축배를 들었던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회고록(1964: 328, 330)에서 말한다.

"남한은 38도선을 따라 4개의 사단을 배치하고 있었다. 남한 군대는 일선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군대로서가 아니라, 치안유지 병력으로 조직되고 장비되어 있었다. 그러한 결정은 미국 국무성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말인즉, 남한이 북한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라는 것이다" 9

1949년 8월, 소련의 원폭장치 폭발은 미국의 원자폭탄 독점에 종말을 고했다. 곧이어 장개석이 중국본토에서 축출되었고, 프랑스가 베트남과의 전투에서 밀리고 있는 인도차이나 국경지대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호치민 정권을 인정하라고 설득했다. 10 영령 말라야와 친미 필리핀에서는 공산 반군들이 압력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북한군이 38도선을 넘어옴으로 한반도는 전세계 무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흐루시초프는 회고록(1971: 402-3)에서 말한다.

"김일성이 진군을 준비할 때, 스탈린은 북한군 사단과 연대에 배치되어있던 소련군 고문단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내가 스탈린에게 그 이유를 묻자, 스탈린은 내게 화를 내며 날카롭게 말했다 '우리 고문단을 거기 놓아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 줄 아느냐? 포로가 되면 어떻게 하느냐? 우리가 이 일에 개입되었다고 추궁 받을 증거가 생기면 안 된다. 이 전쟁은 김일성의 사업인 것이다' … 정해진 시간이 왔고, 전쟁은 시작되었다. 침공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북한군은 재빨리 남쪽으로 쓸어내려 갔다. 하지만 불행히도 첫째 번 총성과 동시에 내부 반란이 일어나고 이승만이 실각될 것이라는 김일성의 예측은 실현되지 않았다.” 11

미 8군 휘하 제24사단의 스미스 중대가 7월 1일 선발대로 부산에 상륙을 했다. 스탈린은 한반도에서 미군과 싸우기를 결코 원치 않았기 때문에, 7월 4일자로 김일성을 북한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자신과 소련의 직접적 연관 흔적을 제거했다. 6월 25일에 남침을 개시한지 10일이 지난 7월 4일에 비로서 최고사령부가 조직되고 김일성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최용건이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 날부터 110일간 김일성은 UN군과의 전투를 책임지다가, 북한군은 괴멸되고, 10월 24일에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에게 지휘권을 이양하게 된다.

트루만은 유화정책이 공산침략을 조장할 뿐이라고 믿었다

트루만은 재빨리 행동했다. 미군의 파견을 승인하고, 6월 28일 자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의 유엔군 파병 결의안을 얻어냈다. 12 맥아더 장군은 6월 29일에 한강 전선을 시찰했고, 7월 1일에는 미군의 첫 부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7월 14일, 맥아더는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한국군과 미군은 한반도 남동쪽에 위치한 낙동강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했다. 장개석은 대만의 정부군을 유엔군에 참여시키라는 제안을 했다. 세계는 아시아판 Dunkirk 대규모 철수 사태를 예측하고 있었다.

1950년 7월 23일, 맥아더(1964: 346)는 워싱턴으로 전문을 보냈다. 

"9월 중순, 적 후방에 2개 사단 병력으로 상륙작전이 계획되어 있다. 남쪽으로부터 8군의 공격과 연계하여 적군을 포위 섬멸할 목적이다. 나는 초기 단계에서 강력하게 적 후방을 공격하여 주 보급로를 차단시키면 적에게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철퇴를 가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이 방법을 택하지 않고 정면 공격을 택한다면, 전투가 길어지고 많은 희생이 따를 것이다"

9월 15일, 맥아더의 천재적인 인천 상륙작전은 전세를 역전시켰고, UN군은 북으로 진격했다. (김일성은 적화통일의 꿈을 완전히 무산시킨 인천상륙 작전과 맥아더에게 천추 유한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스탈린은 중공군에게 공군의 엄호를 제공하고, 중공군이 패하게 되면 소련이 직접 개입한다고 약속을 하면서 모택동에게 김일성을 구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13

흐루시초프는 회고록(1971: 405)에서 말한다.

"주은래가 모택동의 지침을 받고 스탈린을 보러 날아왔다. 당시 북한군은 거의 괴멸되었다. 주은래는 미군과 한국군의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 중국 인민해방군을 북한 땅으로 진입시켜야 하는가를 스탈린에게 물었다. 그들은 중국이 북한에 적극적인 지원을 해 주어야 한다는 점에 합의를 했다. 인민해방군은 이미 국경지대에 포진을 하고 있었다. 스탈린과 주은래는 이정도 병력이면 사태를 충분히 수습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주은래는 다시 북경으로 날아갔다"

공산주의 세계와 자본주의 세계 사이의 전쟁

스탈린은 공산주의 세계와 자본주의 세계 사이에 3차 세계대전이 불가피 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마지막 결전의 때와 장소를 자신이 결정하기를 원했다. 김일성에 의한 한반도 통일은 일본을 침공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해 줄 것이지만, 스탈린은 한국전쟁이 소련과 미국 사이의 주 전장터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스탈린은 유럽이 10년-20년 이내에 세계 제국주의를 박멸하는 결정타를 날리는데 가장 적합한 장소라고 믿었다. 스탈린은 모택동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장악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의 진행을 조심스럽게 조작해서 모택동이 미국으로 하여금 유럽으로부터 아시아로 병력을 이동시키게 만드는 부담의 대부분을 혼자 지도록 하는 동시에, 모택동을 서방과 연결할 수 있는 다리를 모조리 태워버리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4

1950년 10월 19일, 약 20만 명의 '인민 의용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15 11월 25일, 모택동의 장남이 폭격으로 사망했다. 11월 29일, 맥아더는 빠른 시일 내에 장개석의 군대를 UN군 사령부 산하로 편입시킬 것을 제안하는 전문을 보냈다. 1951년 1월 4일, 유엔군은 서울을 또 다시 빼앗겼다. 소련 공군은 1951년 1월 10일 이후에 전투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16

맥아더는 합동참모본부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문을 받았다.

"앞으로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우리를 한국 밖으로 쫓아 내보낼 수 있을 충분한 규모로 전선에 대규모의 군대를 집결시킨다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그 조건 하에서는 귀관에게 일본으로 철수를 시작할 것을 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당시 모택동은 한국군을 섬멸하고, UN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커 장군이 자동차 사고로 죽은 다음, 그 후임으로 1950년 12월 26일 자로 8군의 지휘를 맡은 리지웨이 장군은 방어선을 안정화 시키고 제한적인 규모나마 공격을 시작했다. 17 1951년 4월부터 6월까지 70만 명을 동원한 제5차 대공세가 실패로 끝나자, 모택동은 한국전쟁에서의 완전한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스탈린은 12개 항공사단을 번갈아 가며 만주에 주둔시켰다. 전쟁 후, 소련 공군 사령관은 한국전쟁 중, 단 345대의 소련 전투기 손실로 1,300대의 미군 비행기를 격추시켰다고 자랑을 했다. 18

후르시초프는 회고록(1971: 406)에서 말한다.

"중국은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그냥 의용군을 한반도로 보냈다. 이들 군대는 모택동이 가장 중히 여기는 팽덕회가 지휘를 맡았다. 팽덕회는 상황보고에서, 적군을 포위와 치명적인 측면 공격으로 아주 끝장을 내버릴 수 있다고 단언했다. 불행히도 말처럼 그렇게 빨리 끝이 나지 않았다. 중공군은 여러 차례 대규모의 패배를 당했다. 전쟁은 질질 끌어가기 시작했다. 양측이 참호를 파고 들어 앉아버리자, 전장에서는 점점 더 사상자 수가 커지기 시작했다.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는 것 같았다"

맥아더는 회고록(1964: 384)에서 말한다.

"나는 중공군을 한국에서 섬멸할 장기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내 결정적 목표물은 그들의 보급로이다. 나는 적의 주요 보급로 전역에 걸쳐 방사능 폐기물을 뿌려 한국을 만주로부터 분리시킬 것이다. 지금 오고 있는 미국의 증원군과, 대만의 국민당 군대로 보강을 한 다음, 북한의 북쪽 끝 양쪽 해안으로 상륙과 공중낙하를 동시에 실시할 것이다"

1951년 3월 중순, 유엔군은 38도선에 도달했다. 맥아더는 냉전이 한국전쟁에서 이기든지 지든지 결판이 나리라고 믿었다. 그는 만주를 폭격하기를 원했고,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를 한국에서 사용할 것을 원했다. 1951년 4월 11일, 트루만 대통령은, 맥아더가 (영국의 처칠 수상이 반대하는) 전쟁확대를 계속 고집한다는 이유로 유엔군 사령관 직위에서 해임시켰다.

1951년 6월 10일에 시작된 휴전협상은 질질 끌기 시작했다. 1952년 9월 8일,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독립을 회복했다. 공산주의자들은 휴전협상에서 마치 승전국인 양 행동을 했고, 소모적 전쟁은 계속되었다. 19

휴전협상을 촉진키 위한 핵전쟁 위협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일찍이 맥아더의 부관 노릇을 했었다. 그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인기 없는 전쟁이 되어버린 한국전쟁을 가능한 한 최단 시일 내에 종결시킨다는 암묵적인 공약을 하고 1952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의 아들 잔은 당시 한국전에서 중위로 싸우고 있었다. 1월 달에 취임한 후 한달 도 채 안되어, 아이젠하워는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핵폭탄 사용 선택권을 거론했다. 당시 미국은, 필요하다면 3차 대전을 치러도 충분하다고 판정되는 수량인 1,161개의 핵폭탄을 제조, 보유하고 있었다. 덜레스 국무장관은,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휴전협상을 조속히 종결시키도록 유도하기 위해, 인도의 네루 수상을 통해 모택동에게 핵폭탄 사용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스탈린이 1953년 3월 5일 사망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북쪽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2만 6,930명의 반공 포로들을 1953년 6월 18일 날 석방해, 휴전협상을 방해했다. 20 1952년 5월에 릿지웨이 후임으로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된 클라크 장군은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쿠테타 계획을 세웠다. 1953년 7월 4일, 공산측 협상 대표들은, 포로들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송환을 한다는 방침에 동의했다. 이승만은 상호방위조약 등을 포함한 미국측의 주요 양보 제안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휴전협상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은 조인되고 즉시 이행되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3-8 (2005. 9. 10.)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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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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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이승만은 1875년에 태어났다. 그는 전통적인 한학 교육을 받았고, 1894년에 서울의 메소디스트 계통 배재학당에 들어가 영어를 배웠다. 1896년, 왕정을 개혁하고 일본의 식민지 야욕을 추방하려고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활동을 하다가 (일반 선거로 의회를 구성한다는) 정부 전복 죄목으로 1898년에 투옥되었다. 1904년에 출옥하자,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George Washington 대학에서 인문사회 계통의 공부를 하여 1907년에 학사학위를 받고, Harvard 대학에서는 국제관계와 역사 공부를 하여 1908년에 석사학위를 받고, Princeton 대학의 정치학과에서는 국제법을 전공해, 한국이 일본에 합병된 1910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승만은 Woodrow Wilson 대통령 집안과는 Princeton대학 총장 시절부터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1910년에 귀국하여 잠시 YMCA의 일을 보고, 중학교 교장 노릇을 했다. 1912년, 일제 식민지 당국의 체포 위협 때문에 미국으로 도피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스승이었으며,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된 Woodrow Wilson을 보고 한국을 지원해 줄 것을 청했지만, Wilson으로부터 한국을 독립시키기 위한 국제적 간섭이 부적절하다는 말을 들었다. 1919년 4월,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초대 국무총리가 되었고, 1920년에는 대통령이 되었다. Burton I. Kaufman (1999: 101) 참조.

2. 스탈린은 1879년에 조지아에서 태어나, 레닌 사망 후, 1924년에 집권을 했다. 김일성은 1912년에 태어났고, 1919년에 가족 모두가 만주로 이주를 했다. 1932년에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자, 김일성은 항일 게릴라 운동에 가담했다. 후에 일제가 게릴라 박멸 작전을 전개하자, 1939년(혹은 1940년)에 소련의 극동지역으로 건너가 소련군 대위로 한국인 부대를 지휘했다. Goncharov, Lewis, and Lita ( 1993: 131) 참조.
    
3. 소련 정부가 1949. 9. 24일 자로 북한 주재 소련대사에게 보낸 훈령: “한반도 통일을 위한 투쟁을 하는 현 시점의 임무는, 첫째로 빨치산 운동을 개발하고, 해방 지구를 만들어 내고, 반동 정권을 쫓아내 한국 통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전반적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둘째로, 인민군을 모든 면에서 좀더 강화하는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 할 것이 요구된다.” Kaufman (1999: 119)

4. Stueck (1995: 30-31) 참조. 서대숙(1988: 121)에 의하면 1949년 9월부터 1950년 3월까지 3,000명 이상의 게릴라들이 남파되었다.

5. Nikita Khrushchev, Khrushchev Remembers, commentary by Edward Crankshow, and translated by Strobe Talbott (Little Brown, 1970; Bantam, 1971). Stueck (2002: 2-3)은 일부 서클에서 이 회고록의 합법성-정확성을 의심한다고 말한다.

6. Goncharov, Lewis, and Lita ( 1993: 213-4, 136-7, 138-54) 참조.

북한주재 소련 대사 Shtykov가 1950. 1. 19일 자로 Vishinsky에게 보낸 전문 해독: "김일성은 자신이 모스크바에 갔을 때 스탈린 동무가 자기에게 이승만 군대가 북쪽을 공격하면 남한으로 반격을 해 내려가도 좋다고 말했는데, 이승만이 아직 공격 할 생각을 안하고 있기 때문에 남한 동포를 해방하고 통일을 한다는 것이 지연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다시 스탈린 동무를 찾아보고, 남한 국민을 해방하기 위해 인민군이 공격을 해도 좋다는 허가와 명령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일성은, 자신은 공산주의자이며, 규율을 존중하는 사람이고, 또 자신에게는 스탈린 동무의 명령이 법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공격을 시작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Kaufman (1999: 120)

Stalin이 1950. 1. 30일 자로 Shtykov에게 보낸 전문 해독: "김일성은 그렇게 큰 사업을 벌리려면 대대적인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너무 큰 위험부담이 없도록 사업이 조직되어야 할 것이다" Kaufman (1999: 121)

7. 서대숙 (1988: 105, 113, 120) 참조. 하지만 김일성이 당시 남한의 언론, 영상매체, 교육현장 등을 장악한 것도 아니고, 친일파 실태를 철저히 파악해 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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