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인물탐구>중국 조선족이 낳은 가장 걸출한 혁명가, 인민예술가 한락연

  2011년 7월 30일, 한락연 선생 타계 64주기를 맞으며 용정시락연공원에서 동상제막식이 있었다.

[서울=동북아신문]2011년 7월 30일, 한락연 선생 타계 64주기를 맞으며 용정시 락연공원에서 동상제막식이 있었다.

용정사람들은 그를 두고 고향-용정이 낳은 가장 훌륭한 아들이라고 말한다. 조선족들은 그를 두고 중국조선족이 낳은 가장 걸출한 혁명가, 정치 활동가, 예술가라고 말한다. 등소평으로부터 ‘위대한 국제주의 전사’로 불린 루이 앨리(1897-1987 뉴질랜드사람)는 자기의 전우 한락연을 이렇게 평가했다. “중국공산당 당원인 한락연은 동북 길림성의 한 조선족가정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사업 작풍과 그의 혁명정신은 그의 이름과 같이 낙관적이었다. 임무 앞에서 그는 종래로 곤란에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혁명 사업에 대한 그의 굳은 절개와 열정은 혁명의 화염마냥 그와 함께 공작하는 모든 사람들을 덥혀주었다.”

농민의 아들에서 독립운동가로

1898년 12월 8일, 길림성 용정촌 토성포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어난 한락연의 원명은 한광우고 자는 락연이며 윤화라는 아명과 소공이라는 별명을 쓰기도 하였다. 어렸을 때 그의 가정은 부유하였으나 9살 나던 해 아버지를 여의고 가세가 기울어졌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한락연은 하학 후면 묘지에 가서 나뭇가지로 땅에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가 1914년에 소학교를 졸업한 후 선후로 전신국과 세관에서 일하며 집안 살림을 보태지 않으면 안됐다. 이 시기 세관에서 일하는 편리를 이용하여 외국의 서적과 신문을 통해 한락연은 서방예술을 접하는 한편 진보적인 사상을 접수하게 된다.

1919년 조선의 3.1반일운동에 동조하고자 용정에서도 3월 13일에 2만여 명이 참가한 반일시위가 일어났는데 당시 한락연은 시위자들이 들 플래카드와 태극기 수백 개를 손수 만들었다. 14명의 희생자와 48명의 부상자를 내고 94명이 체포된 이 시위에서 한락연은 일본침략자들의 만행을 보았고 젊음의 끓는 피를 조선독립과 민족해방 사업에 바칠 결의를 다진다.

일본경찰의 지명수배자가 된 한락연은 그해 사랑하는 아내 최신애와 배속에 있는 딸 인숙이를 용정에 둔 채 결연히 용정을 떠나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조선혁명가들을 따라 중국혁명의 성지-상해로 간다.

1920년에 상해미술전과대학에 입학한 한락연은 미술공부에 전념하는 한편 조선혁명가들을 자주 만나 고려공산당 활동에 참가하였으나 내부 종파투쟁과 암투에 크게 실망하고 그들과 결별한다.

독립운동가에서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아내 최신애와 딸 한인숙과 함께

한락연은 중국공산당의 기관지인 ‘향도’ 주필 채화삼을 알게 되며 그의 인도로 1923년 여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된다. 한락연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첫 조선족이며 또한 동북에서 사업을 개시한 첫 공산당원이기도 하다. 1923년 말에 우수한 성적으로 상해미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 이듬해에 동북에 파견되어 당 창건 사업에 뛰어든다.

심양, 하얼빈, 치치할 등지를 전전하면서 그는 화가, 미술교원, 사진관의 촬영사, 공원의 감리 등 신분으로 당 조직을 발전시키고 공산당원을 발전시켰다. 이로부터 광활한 동북대지에는 한 점의 불꽃이 요원의 불길로 활활 타올랐다.

1929년 말, 당의 부름으로 상해에 돌아온 한락연은 한차례의 행동에서 공산당원의 신분이 탄로되자 당 조직의 동의하에 프랑스로 근공검학을 떠난다.

유럽에서 화가, 세계 반파쇼투사로 성장

낯설고 물선 예술의 나라 프랑스에서 한락연은 목마른 사람이 물마시듯 동서양의 미술에 빠져들었다. 생계 때문에 중국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그림을 그려 팔기도 하였지만 그는 항상 낙관적인 모습이었으며 리옹박물관이나 중불대학에 가서 동서양미술에 대한 연구와 탐구를 이어나갔다. 1931년 파리 루브르미술학교에 입학한 한락연은 서양화를 전공하는 한편 루브르박물관의 고대미술의 걸작들을 게걸스레 탐독한다. 이 시기에 그의 새 인상주의가 점차 틀을 잡게 된다.

루브르미술학교를 졸업한 한락연은 스케치북을 메고 구라파전역을 돌면서 서방문화를 고찰하는 한편 각국의 정세와 노동운동에 대하여 깊이 연구했다. 1936년 그는 스페인인민전선에 합류하여 인민대중의 승리를 이끌기 위한 거대한 변혁을 직접 목격하였다. 하지만 그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진 것은 중국대륙의 정세였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방송과 신문을 통해 중국의 정황을 예의주시했다.

1937년 노구교사변이 폭발한 후 당시 파리시보의 기자로 근무하던 한락연은 파리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양호성 장군을 따라 결연히 귀국길에 오른다.

8년만의 귀국, 당시 그는 마음만 먹으면 미술대학에 교수로 취직할 수도 있었지만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동북항일구망총회’의 연락공작에 참가한다. 그는 종군기자의 신분으로 대아장전역과 서주전역에 참가, 전선에서 직접 찍은 사진을 외국 언론에 배포하여 국제적으로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다.

1938년 한락연은 주은래, 곽말약이 영도하는 중국국민혁명군 정치부 제3청에서 조직한 작가, 예술가연안참관단 일원으로 연안을 방문, 연안여자대학 학생들에게 ‘항일전쟁시기의 민족예술문화에 대하여’란 유명한 강연을 하였다. 당시 모택동 동지가 친히 그들을 접견하였다.

  1935년에 그린 자화상
1938년 4월 한락연은 중경에서 기독교청년회 향촌간사로 일하는 지적인 처녀 류옥하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는 20대 초반에 최신애와 결혼했고 딸 하나가 있다는 사실도 류옥하에게 알려준다. 조직의 동의하에 그들은 중경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한국임시정부 김구, 뉴질랜드 작가 루이 앨리와 국공양당의 핵심인물들이 참석하였다.

1939년 5월, 한락연은 국민당전지위원회 소장 지도원으로 임명되어 항일선전과 통일전선공작을 하게 된다. 그는 이 신분을 이용하여 두 차례나 진동남전선에 가서 사회조사를 하고 민심을 살피고 전황을 조사하면서 항일통일전선의 연락공작을 하였다.

1940년 6월, 한락연은 93군과 팔로군전선총부의 연락공작을 하다가 신분이 탄로되어 보계에서 국민당 특무에게 비밀리에 체포된다.

옥중에서 한락연은 공산당원의 절개를 굽히지 않았고 지혜롭게 적들과 투쟁하였다. 당 조직의 노력으로 1943년 초에 ‘국민당전지위원회, 동북항일구망총회로 돌아가지 못하며 서북을 떠나지 못하며 그림을 그리되 노동대중의 형상을 그리지 못 한다’는 몇 가지 조건하에 가석방된 한락연은 화가의 신분으로 통일전선사업에 참여하라는 당 조직의 지시로 오랫동안 놓았던 붓을 다시 잡을 수 있게 되었다.

키질 천불동에서 석굴벽화를 연구

한락연은 출옥한 후 섬북, 성도, 감숙 일대를 전전하면서 풍경화와 풍속화를 창작하였는데 섬서, 사천 일대의 농민들의 형상을 담은 그림도 있었다. 이 시기 그는 훗날 유명한 화가로 된 황주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함께 8백리 진천평원을 누비며 사생하였다.

1944년 한락연은 가족을 이끌고 서북행을 한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한편 장치중, 도치악, 조수산 등 서북지구의 국민당 상층인물들과 접촉하면서 통전공작을 하였는데 훗날 광대한 서북지구의 평화적 해방에 뚜렷한 공훈을 세웠다.

일찍 프랑스 유학시절 한락연은 돈황의 벽화를 찍은 우표를 보고 중국에도 이런 위대한 문화유산이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았는데 이번 기회에 문화유적을 답사하면서 동방의 찬란한 문화 보고를 확인하리라 작심한다. 그곳에는 외국사람들에 의해 발굴이라기보다는 도굴이라는 것이 더 적절한 발굴 작업이 시작된 곳도 있었고 아직도 발굴하지 못한 부분들이 더 많았다.

1946년 4월, 한락연은 부인과 딸과 함께 우루무치에 도착, 키질의 천불동에 묵으면서 많은 벽화를 모사하였다. 천불동은 돈황, 용문, 운강 석굴과 더불어 중국 4대 석굴의 하나로 꼽히는데 벽화가치 역시 으뜸이라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한락연은 중국을 대표하는 벽화와 서방문화를 결합시켜 예술창작을 한 첫 중국화가로서 그림과 고고학을 융합시켜 고대문명을 보호하는데 막대한 공헌을 하였다.

비행기사고로 조난

1947년 봄, 한락연은 두 번 째로 키질 천불동을 고찰하였다. 고찰임무를 완성한 후 한락연은 우루무치로 돌아와 그림전시회를 개최했다. 7월 30일, 한락연 일행이 탄 우루무치-난주행 257호 비행기(국민당군용기)는 오후 2시 가욕관 상공에서 악천후를 만나 3~4,000미터 상공에서 방향을 잃고 선회하다가 기련산에 추락했다.

한락연의 조난소식은 서북 각계를 진동하였다. 그의 조난소식은 국내의 여러 큰 신문은 물론 영국의 타임스지를 포함한 큰 신문들에서도 취급하였다. 주은래는 “그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중국 미술계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잃었다”고 아쉬워했다. 건국 후 한락연은 혁명열사로 추인되었다.

1970년대 주은래 총리는 한락연의 20여년 지기였던 염보항의 아들인 염명복을 불러 “왜 한락연을 쓰는 사람이 없소? 그를 잊지 말아야 하오. 참 애석하오”라고 환기시킨 바 있다.

2010년 9월에 용정시 락연공원 공원비에 새겨진 한락연의 약력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의 사명을 짊어지고 젊음을 불살랐고, 반일투쟁과 전반 동방인민의 해방사업을 위해 공산주의전사로 성장, 중국대륙을 무대로 혁명투쟁에 나섰던 혁명가 한락연. 서방 예술기법과 동방예술의 정수를 교묘하게 접목시키고 소중한 중화문화를 발굴, 보호하는 사업에 지울 수 없는 공훈을 세운 인민예술가 한락연. 그의 전기적인 색채가 짙은 경력은 중국조선족혁명사는 물론 국내외문화교류사와 세계혁명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출처 : 길림신문)

  2010년 9월에 용정시락연공원 공원비에 새겨진 한락연의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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