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북두성뉴스= 중국 흑룡강성 조선족 문단의 대부로 통하는 한춘시인이 별세하였다. 

한춘시인은 일찌기 흑룡강신문사 문체부 고급기자로 몸 바쳤으며, 시인으로 평론가로 중국 조선족 문단, 특히 흑토의 문학이라 불리우는 하얼빈에서 흑룡강조선족문학창작위원회 회장을 맡아오며 많은 후학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본명이 임국웅인데 한춘(韓春) 즉, 필명을 한춘(韓春)이라 한 것도 고국인 한국의 봄을 그리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라 한다.

「장백산」문예잡지와 길림신문사 사장을 지낸 바 있으며 전중국문단과 학계에 토템시현상으로 각광을 맡고 있는 장춘의 남영전시인이 한춘시인의 별세 소식을 한국 서지월시인에게 전했다고 한다. 

고인은 7월 17일 오전에 별세했으며 발인은 7월 19일이다.

한춘시인은 1943년 만주 흑룡강성 연수현 출생, 1966년 동북농업대학을 졸업했으며 해림시 수리측량설계대 대장 역임, 하얼빈시 흑룡강신문사 문화체육부 고급편집을 맡아왔다. 

<제공=한민족사랑문화인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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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서지월시인의 제1차 만주기행" 글에 기록된 <한춘시인 편>이다.

        - 한춘시인의 삶과 시

▲ 한춘시인은 생전 한국 서지월시인이 찍어준 이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든다며「도라지」잡지 등 특집으로 다뤄질 때 책표지에 게재했다.

먼저 한춘시인에 대해서 이야기해야겠다.

이런 만주땅에 뿌리박고 사는 조선족들은 어떤 연고로 남한도 아니며 북한도 아닌 만주땅에 살아오게 되었는지. 이는 우리가 동족개념으로 말할 수 있는 성질이다.

하나의 태극기가 세찬 바람을 이기다 못해 찢겨 이리저리 조각조각 바람에 날려 흩어진 그 한 조각의 운명이란 말인가.

역사의 운명은 늘 지탱할 수 없는 큰 무게의 등짐을 지고 신음하며 펼쳐져 왔다는 건 우리가 모르는 일은 아니지만. 현재 나이 57세인 한춘시인은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각현리에 고향을 둔 부친이 하얼삔으로 이주했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했을 때 제시간에 기차를 타지 못해서 그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게 인간이 살아가는 최대의 비극적 운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땅을 치고 하늘을 물어뜯어도 소용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까 부친께서 연수현에서 상지역으로 걸어나오는 사이, 전쟁중이라 4일에 한번 또는 10일에 한번 출발하는 기차인데 소련군이 나와서 관리하는 그 기차를 제때에 오르지 못해 조선족 2세인 자신까지 이곳 하얼삔에 머물러 살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한춘시인은 한시도 고향을 잊을 수 없으며 그리워할 뿐이라니, 이런 처지가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사무치는 여한을 지을 수 있겠는가.

또 고향이야기는 파주시 적성면 객현리 임진사댁 후손으로 부친은 일찍 사망하고 모친으로부터 늘 들어왔다고 한다.

▲ 한국 서지월시인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는 장면(하얼빈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리삼월시인과 한춘시인

1989년에는 적성면 면장께 편지해 고향집 전화번호와 새집도 알아냈으며 그해 연말에 초청장이 와 1990년 세계시인대회때 파주로 찾아가서 면장께 인사드리고 만났던 말씀도 내게 말해주셨다.

그리고 그때 이복형도 만났으나 흑룡강신문사 서울취재기자로 한국에 다시 왔을 때는 이복형도 사망했으며 한춘시인이 3세때 만주땅으로 온 게 오늘에 이르게 됐다고 한다.

한춘시인은 1943년 만주 흑룡강성 연수현 출생으로 쓰고 있으며 1966년 동북농업대학을 졸업했으며 해림시 수리측량설계대 대장 역임, 현재는 하얼삔시 흑룡강신문사 문화체육부 주임편집으로 있다. 

시집으로는 「쌍무지개」, 「주소없는 편지」 「서로운 별」 등이 있으며 흑룡강성 정부문예대상, 흑룡강성 소수민족문학상, 도라지문학상, 연변작가협회상을 수상한 그곳의 대표적인 중견시인이며 언론인이다.

1996년 10월 「문학의 해」 세계한민족문학대회 중국측 대표로 발제문을 발표해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는가 하면 1990년 8월의 제12차 세계시인대회와 1997년 8월 제17차 세계시인대회때 서울에 참가했으며 흑룡강신문사 서울지사 특파원으로 한국에 수년간 머물기도 했다.

곧 새 시집 「파랑새는 있다」가 출간된다는 기쁜 소식도 전해주셨다. 그리고 연변대학에서는 연변대학 교수들이 「한춘시세계 조명」 세미나가 연길에서 열린다고 한다.

또한 앞서 잠깐 소개한바 있는 도문의 「두만강.여울소리」 기념비가 그것인데 이는 1998년 도문시정부산하 문화원과 연변작가협회에서 세웠으며 동북삼성 만주땅 일대의 문인들 모임인 「두만강여울소리 시가탐구회」가 발촉되어 매년 100명이 넘는 문인들이 참여해 생활을 이룬다고 한다.

이 행사에서 참여한 시인들은 자작시낭송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에 대한 시론도 제기하는게 이 시가탐구회의 특징이라 했다.

「두만강여울소리 시인상」 시상식도 가지는데 무기명으로 시를 제출해 참여문인 전체의 다수결 득표에 의해 5~10명의 공동수상자를 내는 아주 공평한 시인상의 성격이었다.

목단강시의 은하수잡지사의 「은하수우수작품상」은 1983년부터 실시되어 왔으며 시 소설 수필 세장르에 걸쳐 시상을 하며 이곳 흑룡강신문사는 한국통일원에서 협찬해 주어 매년 시 소설 수필을 뽑아 시상해 온 것이 17년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한춘시인은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견해는 뚜렷했다.
참여의식과 정치의식을 배제하며 자아찾기의 시쓰기 그것이었다.
원래가 그래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데 세상은 그렇지 못하니까 말이다.

즉 우리의 전통과 감정을 정착시켜 망향의식을 조화시키는게 조선족 문학(시)의 나아갈 길이라고 역설해 온 한춘시인인 것이다.

이래서 지금까지 중국조선족 현대시개척자로 한춘시인을 꼽고 있다.
바로 「두만강 여울소리」 행사에서도 한춘시인 이런 점을 역설해 온 것으로 중국 조선족 시문학의 뿌리를 재정립해야 된다고 나섰던 것이다.

여기에 으뜸가는 평론가로는 연변의 최삼용씨를 꼽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체제 속에 놀아났거나 사회주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데올로기문학을 순수문학으로 전환시키는데 큰 공헌을 해왔으며 「문학은 문학이다」라고 관념을 괘변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한 시인이었다.

그럼 한춘시인의 시 한 편을 감상하고 또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 보기로 하자.

오늘만의 기쁨이 아니라 해도
나는 시를 쓰고 노래했다
그대의 사랑이 내 살결에
닿아오지 못한다 하더라도
꽃대궁은 키를 높이였다.

오늘만의 아픔이 아니라 해도
외로운 마음 더욱 단단해졌다
한점의 향기 풍기고
지쳐서 쓰러진다 하더라도
꽃은 피여나고 만개하였다

오늘만의 기다림이 아니라 해도
서러운 꿈은 아름다왔다
그대와 헤아리던 별은
나홀로 사육한 사랑의 물증
꽃씨는 여물어가고 있다.

<한춘시 「무궁화련가」 전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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