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지희 초상화
[서울=동북아신문]중국 절강성 소흥시에서 서남쪽으로 약 12km 떨어진 난저산 자락에는 난정(蘭亭)이란 원림이 있다. 이는 중국에서 서예의 성지(聖地)라 불리우는 곳으로 중,한,일 서예계에 널리 알려진 곳 이기도 하다.

필자가 올해 6월1일 이 곳에 찾아갔을 때는 이미 <29회 중국 난정 서예(書法)절>을 치렀으며 중국 서예의 최고 상인 <4회 중국 서예 난정상>이 성대히 폐막한 후였다.

아직 상품화의 물결이 휩쓸리지 않아 노점상들의 잡다한 싸구려 소리가 없는 조용한 난정에는 세월의 고풍을 자아 내는 검은 이끼가 돋힌 <아지비(鵝池碑)>, <난정(蘭亭)> 정자, 곡수류상(曲水流觴), 강희 황제의 <난정서>를 임모하여 돌에 조각해 세운 <어비(御碑)>석, 문아(文雅)한 왕희지의 사당이 수죽(修竹)과 수림, 못에 고즈넉히 어울려 깊은 묵향의 음운과 옛 정서를 담고 있다.

필자는 수림속 개활진 곡수류상처에 이르러 마음은 동진 영화9년 즉 기원 353년 3월 3 짇 날로 간다. 이 날을 <상사절(上巳節)> 이라고도 하는데 주(周)나라 때부터 내려 오는 풍속으로 강가에 나가 세수를 하고 몸을 씻으며 액운을 떨어 버리고 묵은 때를 벗는 수계제(修禊祭)를 지낸다. 왕희지는 소흥 명문가족의 명사와 제자 사안(射安), 사만(射萬), 손작(孫綽), 서풍지(徐豊之), 등 41명을 난정에 초대하여 수계제를 지낸다. 수계제를 지낸 후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는데 바로 이 것이 곡수류상이다. 곡수의 양켠에는 왕희지를 포함해 42명의 명사가 주런히 앉아 있다가 술잔이 물결 따라 누구에게 가면 시녀가 건져주어 마시게 하는데 마시고는 반드시 시를 지어야 한다. 만약 시를 짓지 못 하면 벌주 3두(斗)를 마셔야 하는데 1두는 지금으로 말하면 반근이니 한 근 반을 마셔야 한다. 술은 소흥의 명술 황주이다. 이리하여 11명은 각기 2수, 15명은 각기 1수 를 지었으며 16명은 벌주 3두를 당하였다. 시들을 걷어 한데 모으고 서문을 쓰게 되었는데 손님들의 제의하에 왕희지가 쓰게 되었다.

왕희지는 그 날 따라 기분이 좋고 주흥이 도도하여 쥐의 수염으로 만든 서수필(鼠鬚筆)을 들고 누에 고치로 제작한 잠견지(蠶繭紙)에다 28행 324자의 붓글을 썼다. 이것이 바로 훗날 서예계에 지고무상으로 떠 받들린 <난정서(蘭亭序)> 혹은 <난정집서>이다. 왕희지는 집에 돌아와 몇 번이고 다시 베껴 쓰려 하였지만 처음 쓴 경계에는 미치지 못 하였다. <난정서>는 당 나라에 이르러 <고금서첩제일>과 송 나라에 이르러 <천하 제일 행서>로 왕희지는 <서성(書聖)>의 추대를 받게 되었다.

당 나라의 서예가 손과정은 성공된 서예의 창작 요소를 말할 때 5합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신이무한 (神怡務閑), 감혜순지(感惠徇知), 시화기윤(時和氣潤), 지묵상발(紙墨相發), 우연욕서(偶然慾書) 이다. 왕희지는 <난정서>를 쓰는 당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영감적으로 모두 극치에 도달하였음을 말해 준다.

왕희지는 평생 거위와 난초를 각별히 사랑하였다. 그는 거위와 난초에서 서예 창작의 영감을 얻었으며 필묵을 숙련시켰다. <난정서>에는 갈 지(之)가 20자 들어 있는데 한 글자도 같은 것이 없으며 수면에서 거위가 헤엄치는 각양각색의 평온한 자태와 같다. 그리고 필획은 난초가 바람에 나부끼는 것 같은 자유자재의 풍격이다.

▲ 왕지희 난정서

여기서 짚고 가야 할 것은 잠견지이다. 잠견지는 고려지라고 불리우는데 중국에서는 생산할 수 없었던 종이로 최상의 품질을 자랑하는 우리의 선조들의 지혜으로 제작한 종이었다. 명주와 같이 하얗고 비단과 같이 질기며 먹물이 잘 배어 중국에는 흉내낼수 없었던 몹씨 부러워하는 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 조각도 발굴된 것이 없으며 제지 기술도 영영 실전되고 말았다.
왕희지는 죽으면서 <난정서>를 가보로 진장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하여 270년 동안 아무 사회적 효과를 내지 못하고 가문에 묻혀 있었으며 왕희지의 7대 손 지영 (智永)이 소장하고 있었다. 지영은 월주 영흠사 스님이 되여 물려 줄 자손이 없게 되자 죽으면서 자기의 제자 변재(辨才)에게 물려 주었다.

당 태종 이세민은 서예에 대하여 조예가 깊으며 왕희지의 서예를 특별히 숭상하였다. 그는 황제로 된 후 민간에 소장된 왕희지의 필적을 2300여 첩을 수집하였다. 그러나 <난정서>만을 수집 못 해 한스러워 하였다. 그는 사람을 파견하여 변재를 찾아 가게 하였으나 번번이 빈 손으로 돌아 왔다.변재는 모른다고 딱 잡아 떼였던 것이다. 이세민은 강산과 황후를 제외하고 어떤 대가를 치렀으라도 <난정서>를 손에 꼭 넣을 정도로 집착하였다. 이세민은 감찰어사 소익(蕭翼)을 불러 네가 가서 찾아 오라고 하였다. 소익은 당 태종에게 왕희지의 서예를 몇 첩 얻어 가지고 산동 선비로 가장하여 영흠사에 갔다. 몇 달 동안 접촉하면서 소익은 변재의 신의를 얻었다. 하루는 소익이 왕희지의 서예을 변재에게 보이면서 진품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변재는 유심히 바라 보다가 진품이 맞다고 하면서 자기에게도 있는데 보려면 내일 오라고 하였다. 이튼 날 변재는 자랑스럽게 침실의 대들보에 구멍을 파고 숨겨 두었던 왕희지의 필적을 소익에게 보여 주었다. <난정서>다 ! 그토록 당 태종이 찾으려던 <난정서>이다 ! 몇 일 후 소익은 변재가 강으로 목욕 간 틈을 타서 영흠사에 들어가며 문 지키기 중에게 스님께서 정건(淨巾)을 가져오라 시켰다며 들어가 <난정서>를 도적질해 줄행랑을 놓았다.

당 태종은 <난정서>를 받아 쥔 후 용안에 희색이 만면해 당장 소익을 원외랑(員外郞)으로 진급 시켰으며 변재에게는 왕을 속인 죄로 처벌이 마땅하나 사면하고 비단 삼천필과 량곡 삼천석을 하사하였다. 하지만 변재는 소익에게 배반 당한 원통감과 목숨처럼 여긴 <난정서>를 도적 맞히고 나서 병들어 일년이 못 되여 죽었다. 이로하여 황제인 이세민의 인격에는 큰 오점을 남겼으나 <난정서>가 사회적 효과를 발휘하는데는 크게 기여하였다. 소익의 비 도덕적인 행위는 지금도 중국 소장가들의 질책을 받고 있다.

당 태종은 최고의 서예가들을 시켜 임모하고 탁본하게 하였으며 십여첩을 가족이나 대신들에게 하사하였다. 지금 북경고궁박물관에 있는 <난정서>는 그때 풍승소(馮承素)가 임모한 것으로 필법, 묵기(墨氣),행관(行款),신운(神韻)이 원래의 것과 근사한 것이다. 당 태종은 죽을 때 <난정서>를 순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후량의 휘주 절도사 온도(溫韜)가 소릉(昭陵)을 도굴하면서 행방은 사라졌다. 또 어떤 설은 당태종과 순장한 <난정서>는 모품이며 진품은 당 태종의 아들 이치가 가지고 있다가 이치가 죽은 후 무측천과 함께 순장되어 건릉(乾陵)에 있을 것이라 한다.

 

▲ 70년대 <연변문학>으로 시단데뷔
2007년 8월 26일 11회 연변 지용제
정지용 문학상 수상
KBS성립 45주년과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망향시 우수상 두차례수상
연변작가협회 회원
료녕성 작가협회 회원
심양조선족문학회 부회장
심양 시조문학회 부회장
시집 <달밤의 기타소리> <징검다리> <자야의 골목길>
<팔공산 단풍잎(한국 학술정보(주)에서 출판)><다구지길의 란>
<료녕성조선족 시선집(리문호편찬)>가 있음
이메일; lwh0312@hanmail.net

 

역대 서예가들이 쓴 <난정서>의 모본은 수 천 첩이 넘는다. 그 누구나 서예가면 왕희지의 서예 경지에 오르려고 노력 하였던 것이다. <난정서>는 서예의 경서일 만큼 서예가들의 심리를 휘여 잡았다.
각종 베일에 쌓인 서성 왕희지의 <난정서>, 그의 행방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천고에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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