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지난 2012년 12월 초 조룡남(趙龍男)시인과 함께 길림성장백산문예상 시상식에 참가하기 위해 2박 3일로 장춘을 다녀오게 되었다.

최근 선생은 중병으로 여러번 병원신세를 졌다고 하지만 오진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건강하고 낙관적이였다. 하루밤은 열차에서, 하룻밤은 자그마한 호텔에서 원로시인과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도 들었다. 선생이 한창 시적재능을 꽃피우던 20세 초반에 재수없이 “우파(右派)”로 몰려 장장 20여년동안 이 풍진세상에서 무진고생을 하였음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하지만 선생의 지지리 고달팠던 인생의 갈피갈피에 기막힌 이야기들이 그렇게 많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 눈물겨운 이야기의 하나가《황성의 달(荒城の月)》이라는 일본가곡에 얽히고설킨 일화(逸話)라 하겠다.

    맨 처음 《황성의 달》이라는 일본가곡에 접한것은 국민학교 교과서를 통해서란다. 그리고 일본사람들이 이 노래를 미칠듯이 좋아한다는것을 알게 된것은 어느 자그마한 양복점에서였다. 1940년대 초반 선생네 일가족은 로씨야 연해주와 이웃한 훈춘의 어느 자그마한 읍내에 살았다. 이 동네에는 아낙네들의 허드레치마나 애들의 옷가지를 만들어주거나 기워주는 조그마한 양복점 하나 있었고 또 동네에서 사오리 떨어진 산기슭에는 일본군병영이 있었다. 주말이면 젊은 일본군인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와서 읍내 장터를 돌아보거나 양복점에 들려 훈련중 찢어지거나 구멍이 난 군복따위를 수선해가지고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이 토끼장만한 양복점 바람벽에 바이올린 하나가 댕그라니 걸려있었다. 이 집에는 애들도 보이지 않는데 이놈의 바이올린을 누가 켜는걸가? 군복을 맡겨놓고 걸상에 앉아 기다리던 일본군인들이 재봉사를 보고 
   “저 바이올린은 주인장이 켜는 겁니까?”
    하고 물으매 사람 좋은 재봉사 아저씨는 잠간 고개를 돌리고 안경너머로 일본군인들을 뻐금히 건너다보더니
   “심심할 땐 가끔씩 한곡 켜지요 뭐.”
    하고 한 손으로 재봉기 바퀴를 그냥 돌리는데 일본군인들이 중구난방으로
   “자, 그럼 어디 한곡 좀 들어봅시다.”
    하고 청을 드는지라 재봉사 아저씨는 마지못해 일어나더니
   “이거 오늘 망신하게 되었구려. 무얼 켜드린다? … <황성의 달>을 한 번 켜볼가요.”
    하고 벽에 걸린 바이올린을 벗겨가지고 활을 당겨 몇번 음을 조정하더니 애수에 젖은 비장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일본군인들이 재봉사 아저씨의 연주에 맞추어 침울한 어조로 노래를 따라 부르더니 다들 시뻘겋게 눈시울들을 적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중 한 녀석은 고개를 돌리고 벌써 쿨쩍거리고있었다.

    바로 그때 꿰진 홑바지를 들고 문지방 옆에 서서 오도카니 차례를 기다리던 개구쟁이 소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룡남이였다. 아니, 이게 《황성의 달》이라는 노래가 아닌가. 이 노래가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소년은 진작 배워서 알고있었던것이다.

    그해 여름 국민학교에서 무슨 연주회가 있었는데 여선생님의 손풍금 연주에 맞추어 조룡남네 학급의 단발머리 소녀가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나비처럼 하늘하늘 독무를 추었다. 그때 연주한 노래 역시《황성의 달》이였다. 이 공연은 차차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합창으로 번져갔고 마침내 연주가 끝나자 앞좌석에 앉아있던 일본인 교장이 성큼 무대우로 뛰어올라가더니 소녀를 닁큼 안고 한 바퀴 빙 도는 것이었다. 팔자수염을 기르고 평소 근엄한 표정으로 교사와 학생들에게 무섭게 굴던 교장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혀있었다. 조룡남은 이 이상야릇한 관경을 보고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황성의 달》이라는 노래만 들으면 왜 바늘로 찔러도 피도 나지 않을 일본인들이 눈물을 보이는것일가?

    선생이 두 번째로 《황성의 달》에 접한것은 1950년대 중반이였다. 연변사범학교에서 공부할 때인데 자료실에 있는 묵은 책들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일본잡지 몇권을 발견했고 그것을 심심풀이로 펼쳐보았는데 그 잡지에《황성의 달》이라는 노래가 실려있었다. 선생은 가사를 반복적으로 뜯어서 읽어보았다. 뜻은 대개 알만 한데 어려운 한자와 평소 잘 쓰지 않는 일본 고유어들이 많았다. 국민학교시절 일본인 군인들과 교장선생님이 이 노래를 듣고 눈물을 짓지 않았던가. 선생은 이 일본가곡을 우리말로 확실하게 옮겨가지고 갖고싶었다. 하지만 선생의 일본어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였다. 게다가 일본어사전도 없을 때였다. 이리저리 고심(苦心)하던 끝에 휴식시간에 백호연(白浩然) 선생을 찾았다. 그 무렵 백호연 선생은 연변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으면서 소설을 창작, 발표해 꽤나 문명을 날리고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어도 일본사람을 뺨치게 잘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백호연선생은 잡지를 받아 얼핏 보더니
   “일본의 명곡이거든. 헌데 이를 번역해선 뭘 하려나?”
   “어릴 때 불렀었는데 곡도 좋고 가사도 맘에 들어서 그럽니다.”
   “그럼 수업이 끝나거든 교연실로 와.”
    45분 수업이 끝나자 교연실로 천방지축 뛰어갔더니 백호연선생은 원고지에 정히 번역한 원고를 건네주면서 빙그레 웃는다. 꾸벅 큰 절을 올리고 원고지를 받아가지고 교실에 돌아와 읽어보니 단편소설《꽃은 새 사랑속에서》를 쓴 작가답게 우리말로 미끈하게 변역해놓았다. 그후 선생은 《황성의 달》의 일본어가사와 함께 백호연선생이 번역한 조선어가사를 몽땅 외웠는데 지금까지도 한 글자 빠짐없이 기억하고있었다. 

   “홍위병들이 백호연 선생 친필 번역문을 압수해가는바람에 아쉽게도 영영 분실하고 말았지요. 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한 글자도 빼앗아가지 못했지요. 그러다가 개혁개방이 되자 나는 여러가지 언어로 된 번역본들을 두루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지금 우리 집에는 이 노래가 실려있는 《일본의 노래(日本のうた)》1, 2, 3집과 삽화와 사진까지 실려있는 대형일본가곡집《고향의 노래(ふるさとのうた)》가 있어요. 내가 보건대는 한국의 번역, 중국의 번역, 지어는 김학철선생의 번역까지 다 가져다 비교해보아도 백호연선생의 번역이 단연 으뜸이라고 생각해요. 노래를 완전히 감정화하고 번역한것이니 그렇게 좋을수가 없지요. 그것도 단 45분, 수업 한번 보는 시간에 번역한것이니 감탄할수밖에 없거든요. 정말 아까운 인재였지요. 어느 술자리에서 내가 한번 백호연선생의 번역으로 된 <황성의 달>을 읊었더니 그때 자리를 같이하고있던 임효원시인이‘누군지 참 멋지게 번역했구만!’하고 찬탄하던 일이 기억되는군요.”

    아무튼 조룡남선생은 은사님이 번역해 준 일본가곡을 보배처럼 정히 간수했다. 그런데 이 일본가곡때문에 또 한번 졸경을 치를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선생은 “우파”로 락인이 찍혀 훈춘지역의 구석진 시골을 전전하면서 말단교사로 일했는데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홍위병들이 선참으로 달려들어 가택수색을 하는바람에 자료함에 정히 보관해두었던 《황성의 달》이 나왔던것이다. 홍위병들과 그 막후에 서있는 좌파교원들은 “우파”가 일본가곡을 번역해 사사로이 숨기고있다는 사실에 일단 주목을 했고 황성(荒城)을 천왕페하가 있는 황성(皇城)으로 해석하면서 “네놈이 지금도 황성의 달을 그리고있느냐?”고 무섭게 닦달질을 했다.“우파”감투를 쓰고 시골소학교에서 조용히 살던 선생은 날마다 고깔모자를 쓰고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고 선생네 댁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났다.

   《황성의 달》이라면 신물이 날법도 한데 그때로부터 또 18년이 지난 1983년, 조룡남선생은 김학철선생의《항전별곡》을 읽다가 세번째로 《황성의 달》과 마주치게 된것이다. 조선의용군은 중국 태항산지역에서 싸울 때, 밤마다 일본군과“대화(對話)”라는것을 하였다. 말하자면 적진 150메터쯤까지 접근하면 우선 징소리 대신 수류탄 한발을 터뜨려 “개막”을 알렸다. 고요한 적막이 뒤덮인 끝없는 전야에 이 느닷없는 폭발음에 놀라 깨지 않는 놈은 없다. 그런 다음 “프롤로그”로 일본여자 이무라 요시코(井村芳子, 당시 스물한살인 포로)가 고운 목소리로 《황성의 달》,《반디불의 빛(莹の光)》과 같은 일본노래를 부른다. 적군의 살벌한 마음을 녹이기 위한 수단이다. 연후에 반전(反戰)을 종용하는 강화(講話) 즉 정치선동을 한다. 모두 끝나면 “에필로그”로 밤하늘에 대고 총 몇방을 쏜다.“안녕히 주무세요”라는 뜻인 셈이다. 

    조룡남선생이 어느 날 김학철 선생을 찾아뵙고《항전별곡》에 나오는 《황성의 달》에 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니까 김학철 선생은 그 특징적인 천진무구한 미소를 짓고 껄껄 웃더란다.
   “아무렴 잊을수 없는 곡이지요. 그 구슬픈 노래를 들으면 일본군인들이 향수병에 걸려 밤잠을 설쳤고 전의(戰意)를 상실해간것은 더 말할나위가 없지요. 사실은 그 무렵 태항산에는 일본의 반전작가(反戰作家) 가지 와다루씨와 그의 부인 이께다 사찌꼬씨가 와있었어요. 그때 나는 일본놈이라면 무조건 악귀, 살인귀로만 보여서 이를 갈았는데 이들 부부를 보고서야 ‘이런 일본사람도 있구나!’하고 시야가 갑자기 넓어진 느낌이 들었다구요. 밤에는 가끔 오락회를 열곤 했는데 사찌꼬 부인이 <황성의 달>을 불렀고 어느새 만좌(滿座)가 다 같이 따라서 불렀지요.‘봄날의 높은 루각에 꽃놀이 잔치, 돌고 도는 술잔에 그림자 비치고 …’하고 말입니다. 가지씨 부부도 그렇고 조선용군 젊은이들도 그렇고 일본제구주의가 망하지 않으면 다들 고국땅을 밟아볼수 없는 신세들였기때문이지요. … 마침 잘 됐어요. 며칠 후면 오오무라 선생이 연변에 오시게 되는데 그 량반이 무슨 선물을 할가 하고 고민을 하기에 <황성의 달>을 담은 녹음테이프 하나 구해달라고 부탁을 했지요. 우리 해양에게 말해서 조선생에게도 하나 복사해드려야지요.”

    오오무라선생은 일본 와세다대학 교수요, 해양(海洋)씨는 김학철 선생의 아드님인줄은 독자 여러분들도 잘 아시리라. 해양씨는 녹음테이프를 CD로 바꾸어 드린다고 했으나 워낙 바쁜 사람이라 차일피일 미루고있었다. 그만 참을줄이 끊어진 조룡남선생은 한국 원광대학교에서 류학하고있는 아들에게 부탁해 《황성의 달》과 함께 10여명의 일본 유명가수들이 부른 노래파일을 이메일로 받았다고 한다. 조룡남 선생은 요즘도 《황성의 달》을 틀어놓고 소파에 앉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옛일을 되새기는것이 하나의 큰 즐거움이라고 하였다.

    그 날 장춘에서 돌아오는 길에 조룡남 선생은 언제든지 한번 놀러오면 들려주겠노라고 하였지만 나 역시 참을줄이 끊어져 집에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를 켜놓고 한멜 검색창에 “황성의 달”을 입력했다. 몇초 사이에 일본의 남녀가수들이 부른 《황성의 달》이 떠오를뿐만아니라 이 가곡의 작사자와 작곡자에 대한 상세한 소개와 해석도 실려있었다. 그중 하나를 풀어놓았더니 애수에 젖은 비창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봄날 고루(高樓)에 꽃의 향연
       돌고 도는 술잔에 그림자 비치고
       천년송(千年松) 가지 사이로 비추는 달빛
       그 옛날의 달빛은 지금 어디에

       전쟁터의 가을에 서리 내리고
       울며 날아가는 기러기 몇 마리
       빛나던 긴 칼에 비추이던
       그 옛날의 달빛은 지금 어디에

       황성의 밤하늘에 떠있는 저 달
       변함없는 달빛은 누굴 위함인가?
       성곽에 남은 건 칡넝쿨뿐
       소나무에 노래하는 건 바람뿐

       밤하늘의 모습은 변함이 없건만
       영고성쇠(榮枯盛衰)는 세상의 모습
       비추려함인가 지금도 역시
       아아, 황성의 달이여

    가만히 들어보니“나라는 망해했어도 산천은 의구해/ 봄 깃든 성곽에 초목만 우거졌네 ”라고 노래했던 당나라 대시인 두보의 명시《춘망(春望)》을 련상케 하는 노래요, ”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페허에 실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라고 노래했던 1930년대 초 우리 류행가 《황성옛터》에 큰 영향을 끼친 노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가사는 일본 고유의 음영의 미(陰影の美)가 서려있고 곡은 비창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이 들었다. 4절로 된 노래를 다 듣고보니 부서진 성터, 옛날의 부귀(富貴)와 영화(榮華)는 오간데 없고 천년 묵은 솔가지 사이로 무심한 달빛만 흘러드는데 영고(榮枯)와 성쇠(盛衰)는 세상의 섭리인듯 어디선가 거친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듯싶었다. 

    이 노래를 반복적으로 풀어놓고 다른 자료들을 검색해본즉, 이 노래는 도이 반스이(土井晩翠, 1871-1952) 작사에 타키 렌타로(瀧廉太郎, 1879-1903)의 작곡으로 되여있었다. 도이 반스이는 동경제국대학 영문학과 출신의 유명한 시인으로서 오래동안 문명을 날리면서 81세를 살아 천수(天壽)를 다 누렸지만 타키 렌타로는 24살의 애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적인 작곡가였다. 

    타키 렌다로는 1879년 8월 24일 도쿄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버지 요시히로(弘吉)는 대장성에서 근무하다가 내무성의 지방관리로 전직하여 가나카와현, 토야마현, 오이타현 다케다시 등지로 자주 이사를 하였다. 그래서 타키 렌타로는 어릴 때부터 부모를 따라 일본 각지를 떠돌게 되였다. 그는 1894년 도쿄음악학교(현재는 도쿄예술대학)에 입학해 1994년 본과를 졸업하고 연구과에 진학해 작곡과 피아노로 재능을 키워갔다. 

    명치시대 전반기에 많은 번역창가가 생겼으나 일본어가사를 무리하게 끼워 넣은 어색한 노래가 많아 일본인 작곡가에 의한 오리지날의 노래를 바라는 소리가 높아지고있었다. 그러한 요청에 가장 빨리 응한 작곡가가 바로 타키 렌다로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황성의 달》,《하코네 80리(箱根八十里》,《꽃(花)》,《사계(四季)》 등이 있는데 그중《황성의 달》은 1900년, 그러니까 그가 21살때 지어서 1901년 3월 《중학창가(中學唱歌)》에 처음 발표한 작품으로서 일본을 대표하는 불후의 명곡이였다. 이 곡을 구상한 곳은 오이타현 다케다시에 있는 오카성지(岡城址)다. 성안에는 타키 렌타로의 동상이 세워져있고 지금도 다케다역(竹田驛)에 렬차가 도착할 때면 이 곡을 들려주고있다고 한다. 이 곡은 세계로 펴져나가 1910년에서 1930년까지 구라파의 벨기에서 찬송가로 부르기도 하였다.

    타키 렌다로는 1901년 일본인 음악가로는 두번째로 문부성 장학생으로 뽑혀 독일의 Leipzig음악원에 류학해 피아노와 대위법(對位法) 등을 배우게 되였다. 하지만 불과 2개월 후에 불행하게도 페결핵을 얻게 되어 1년 만에 귀국했고 부친의 고향인 오이타현에서 료양하지 않으면 아니 되였다. 하지만 1903년 6월 29일 그는 24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아쉽게도 세상을 하직하고말았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어느 철인의 말도 떠오르지만, 아름다운 예술작품은 국경을 넘고 민족과 리념의 벽을 넘어 영원히 정직한 인간들의 마음속에 메아리로 남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된다. 그 험난한 항일전쟁시절에 벌써 흑백논리를 벗어나 오히려 적국(敵國)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가지고 향수를 달랬던 우리 조선의용군용사들의 넓은 흉금과 안목을 생각할 때, 무릇 자본주의나라의 작품이면 덮어놓고“황색가곡”이라고 벌벌 떨거나 길길이 뛰였던 우리가 얼마나 초라하고 부끄러운 존재였던가를  깊이 반성하게 된다. 더우기 모진 세파에 부대끼면서도《황성의 달》.《반디불의 빛》과 같은 명곡을 가슴에 안고 살아왔고 또 그러한 명작들을 밑거름으로 인생의 아픔을 딛고 《반디불》, 《황소》,《옥을 파간 자리》와 같은 주옥같은 명시들을 남긴 우리 원로시인 조룡남 선생의 한평생은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진정한 예술작품은 그 누가 만들었는지를 막론하고 그것은 력사의 상흔(傷痕)밑에 돋아나는 새살이요, 세계의 모든 인종과 민족의 마음을 소통시키는 맑은 령혼의 샘물이며 별빛이라고 생각한다. 하기에 요즘도 나는 조룡남 시인의 바이러스에 전염되여《황성의 달》을 내 애창곡의 하나로 간주하고 짬만 나면 컴퓨터를 틀어놓고 흥얼거린다. 
   “봄날의 높은 루각에 꽃놀이 잔치, 돌고 도는 술잔에 그림자 비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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