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동포 서예가 신현산 선생의 감동 스토리

신현산 서법가
[서울=동북아신문]“예술창작의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습니다. 견지할 수록 어렵고, 갈 수록 험난한 것이 예술창작의 길입니다. 그러나 시작한 이상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네요. 저의 시 작품 ’매화’에서 읊었듯이 ‘남은 향기 품어 안고 화석이 되고 싶다’는 심정입니다. 여생의 순간마다를 열심히, 알찬 생활로 채워 가는 일, 그것만은 지켜갈 겁니다. 앞으로 개인 전시회도 갖고 작품집도 낼 생각입니다.”

 지난 203년 한해만 해도 서예공모전에서 “2013 제1회 대한민국’나라사랑’ 미술공모전 입선 2회, 2013대한민국 기로미술협회공모전 동상 2회, 2013대한민국 제11회 아카데미미술공모전 삼체상, 2013대한민국정조대왕서예대전 입선, 2013대한민국’향토미술대전’금상 2회…” 등 10차나 수상을 한, 재한중국동포 서예가 일목 신현산(본명 신은산, 56년생)선생의 말이다.

 서예가 신현산선생이 선호하는 서체로는 주로 한글 '판본체' ,한자의 행서체, 초서체, 예서체 등이다. 한국체류 수년 동안 신현산 서법가는 고된 막노동의 지친 생활 속에서도 여가시간을 이용하여 연습과 창작을 병행하여 왔고, 각종 전시회, 공모전에 출품하여 자신의 실력을 검정 받는 기회를 만들면서 수준향상에 심혈을 쏟았다. 결과 올해 한 해동안 다섯 차례 공모전에서 16점 작품으로 12개 입상의 영예를 따낸 것이다.

 "소년명창은 있어도 소년서예가는 없다는 말이 있지요. 그 만큼 일조일석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서예의 어려움이지요. 시간이 필요하고 흐르는 세월을 놓치지 말고 노력을 거듭해야 이루어지는 일입니다."하고 그는 웃으면 말했다.

 그만큼, 신현산 서법가는 서법에 반생을 바쳤다. 그가 서예를 알게 되기는 소학교 4학년 쯤, 중국문화대혁명 때 대자보쓰기광풍에 휩싸였던 시절이었다. 처음으로 벼루와 붓을 보게 되였고, 어른들이 신문지에다 글씨 쓰는 모습과 붙여놓은 대자보를 보고 "이것이 붓글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후 중학시절, 사범학교시절, 학교교직생활을 거치면서 짬짬이 배워 익혀온 세월이 어언간 수십년이 되었으며, 고국에 와서도 그 맥을 끊지 않고 열심히 이어왔기에 오늘의 열매가 맺힌 것이다.

 2005년부터 그는 2년이란 시간을 들여 펜글씨서예 장편 두루마리 작품 20여 미터 씩 전권, 후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썼으며, 한글 판본체로 조선고전명작 '춘향전'(운문체소설) 상, 하권을 썼는데, 그 자수가 무려 5만여 자가 됐다.

 신현산 서법가는 길림사범학교 졸업 후 1976년 부터 교직에 종사하면서 문학과 서예를 애호하였다. 선후로 그는 길림시조선족미술, 촬영, 서예가협회 회원, 연변문자예술협회 이사 겸 길림시지회장, 한중동포서예가협회 회원, 재한동포천자문서예가협회 부회장,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으로 활약했다.

 중국에서도 그는 1987 중국조선족서예대전 우수지도자상, 1991제2회 중한’정음상’서예대전 은상, 1991중국’洞庭湖’컵 서예공모전 우수상 등을 수상했으며, 전국조선족서예콩클 출품전시, 중국 호남성 장사시 '洞庭湖杯’서예공모전 출품전시, 제1회 대한민국’나라사랑’공모전 출품전시 등 10여회 출품전시도 가졌다.

그의 말대로, 그가 중국과 한국에서 이토록 자타가 공인하는 성과를 따낼 수 있은 것은, "생활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서법 예술의 끈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신조를 갖고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이다.

[갤러리]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