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청도는 바다가 있는 아름다운 해변도시이다. 2년 전 청도에 정착해서 바다의 마력에 푹 빠졌다. 수시로 바다를 찾았다.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그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몸속으로 흘러드는 느낌이엇다.

마흔이 넘도록 맘 놓고 바다를 느낄 기회도, 여유도 없었었다. 

고향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풍경, 오늘도 내 마음은 날개를 달고 바다로 날아간다. 환상의 세계가 펼쳐지기 전에 바다 끝에서 물컹물컹 밀려오는 비릿한 짠내가 코끝을 흥분시킨다. 바다 냄새다! 들뜬 외침이 싱그러운 바닷바람을 껴안는 순간, 바다는 곧바로 반짝이는 모습을 드러내고, 하늘 끝까지 망망하게 펼쳐져 있는 그 깊숙한 넉넉함에 그만 넋을 잃고 만다.

바다는 중년의 여인이 아닐까 싶다. 중년의 나의 친구가 아닐까 싶다. 어~이~ 친구야, 어~이~동미야, 나 또 왔네. 반겨줄겨? 그러면 친구는 남실남실 웃으며 아들딸 파도를 줄레줄레 이끌고 으슬렁으슬렁 다가오다가 벼락같은 환호소리를 떠안기고는 헤시시 뒷걸음쳐버린다. 기달려~기달려~ 딸애 손을 잡고 풍덕풍덕 쫓아가면 기분 좋게 둥둥 띄워주다가 불시에 와락 덮쳐들며 자지러지게 웃음꽃을 선사한다. 

중년의 여인은 내가 찾아올 때마다 매번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 있어 감격스럽다.

기분 좋은 날, 은빛으로 산산이 부서져 눈뿌리 아리게 한다. 벚꽃이 그려진 커피 잔을 앞에 두고, 식거나 말거나, 고즈넉이 앉아 가을의 낙엽을 느끼는 한없이 편안해 보이는 친구 같다.

울적한 날, 집체 같은 파도를 집었다 내팽개치며 광란적인 위협을 주기도 한다. 갈고닦던 마음을 불쏘시개로 삼아 가끔씩은 행방 없이 불을 질러대는 성질 드러운 친구같다. 소동이 지난 후에는 맑게 정화된 고요한 세상을 창조해내어 중년의 여인은 더 사람 사는 냄새를 슬슬 흘리는 듯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른 새벽에는 수줍은 각시처럼 물안개 뽀얗게 뒤집어쓰고 쏴악~쏴악 애잔한 숨결로 귀를 간질이기도 한다. 파란만장했던 세월을 짚고 서서, 애절했던 그때 그 사랑의 시를 잔잔하게 읊조리는 중년의 친구같다.

철써덕 철써덕 하염없이 펄럭대며 조가비며 소라껍데기며 예쁜 조약돌을 열심히 해변가에 던져놓아 사람들을 환호하게도 만든다. 엄마라는 여자로서 한없이 베풀어 주기를 거듭하고, 그 끝없는 보람에 파랗게 웃기만 하는 중년의 친구 같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가 스산한 바람을 등에 업고 비실대며 바다를 후려치고 있는 모습이란, 철딱서니 없는 아이가 엄마 품을 두들겨대며 징징대는 듯하다. 이 빠진 사발에 숭늉을 그득 담아 후루룩후루룩 불어 마시는 것이 우리 중년의 격에 어울린다는 친구를 집요하게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다. 누룽지에서 깊이 우러나 구수한 맛을 내는 숭늉의 그 따뜻함과 같이, 세월의 연륜에서 우러나는 여유와 따뜻함으로 모든 것을 너그러이 포용하고 감싸는 바다의 커다란 가슴이 안겨온다.

청도는 고향과 달리 겨울에 눈이 자주 오지 않는 곳이다. 딱 한번 겨울의 바다에 가보았다. 옷깃을 여미며 모래밭을 휘청휘청 걸어 물가에 서니, 써억~써억~ 하는파도소리가 넑두리하듯 한적한 바닷가를 울린다. 인적이 드문 겨울의 바다는 싸늘할만치 조용하여 가슴속에 한이 많은 중년의 친구처럼 서글퍼 보이고 우울해 보인다. 그러나 촐싹거림은 영원히 없다. 처량함도 보이지 않는다. 역시 바다답게 항상 관용을 베푸는 커다란 마음으로 묵묵히 겨울을 즐길 뿐이다.      

때로는 깊이를 알 수 없고, 넓이를 알 수 없고, 그 속내를 가늠할 수 없어 신비롭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는 바다이다. 세월 속에 쌓아진 연륜과, 그 속에서 차곡차곡 숙성된 그 중후한 맛이 멋스럽기도 하다. 바다를 부둥켜안고 얼굴을 비벼보고 싶지만 내동댕이쳐질가 무섭고, 어리광 치며 굴러 오던 파도가 급작스레 뒤통수 갈길가 두렵다. 그러나 나도 이젠 중년의 여인이 아니더냐? 태풍이 들이 닥칠 때 길길이 날뛰는 노한 파도가 되고, 미풍이 흔들거릴 때 찰랑찰랑 부서지는 착한 파도가 되며, 스스로의 감정에 충실한 자연과 같은 진실된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이제는 더 두려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는 중년의 여인, 바다의 여인이 되리라. 

중년의 여인이 있는 풍경, 중년의 친구들이 있는 풍경, 그래서 나는 바다에 푹 빠져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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