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기획 >

3월 15일 오전, 기자는 중국 조선족의 제1촌 만융촌을 찾았다. 촌 당지부 부서기이며 부촌장인 이영숙씨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성격이 활달하고 결단성 있는 그녀는 평안도 말씨를 썼다. 마침 이날 저녁에는 촌민대표대회가 있는데 근년의 총 계획을 토론하고 결정짓게 되는 마지막회의라고 알려주었다.

중국조선족 제1촌의 실태는?

만융촌은 1934년에 건립되었는데 현재 1600여 세대에 6000여명의 조선족 인구를 갖고 있다. 만융촌은 시 중심에서 8키로, 3환고속도로 및 심대고속도로와는 2키로, 도선국제공항과는 13키로의 거리를 두고 있다. 촌에는 현대화농업시범원, 한국공업단지, 민속오락원, 현대화 아빠트 등이 들어앉아 종합성적인 소도시를 방불케 했다.
만융촌은 특히 1994년 후 박승택 촌장이 부임되면서부터 비약의 날개를 달았다.
먼저 외지 조선족들의 입주와 새 농촌건설을 위해 아파트를 대거 건설했는데 현재까지 이미 26동 아파트에 입주가 되였다.
만융촌은 단순한 농업생산의 틀에서 벗어나 다종경영의 독특한 길을 모색해왔다. 6000천여 무의 농토를 임대시키고 농업첨단기술시범원을 건설하고 포도원 및 관광농업단지를 조성하였다. 현재 한국공업단지에는 이미 38개의 국내외 기업이 입주하였고 마을중심에는 소도시를 방불케 하는 상권이 형성되었는데 90여개의 가게가 들어앉았다.
현재 만융촌은 공업, 농업, 제3산업이 균형적으로 발달하여 총생산액이 1억 5000여만 원에 달하며 인구당 GDP가 1만원이 넘어 해내외에 널리 알려진 부유 촌으로 되였다.
만융촌은 이미 심양시의 중점촌, 심양 동릉구의 시범촌으로 평선 되였는바 2008년에는 전국 문명 촌으로, 향후 10년간에는 마을거주환경을 부단히 개조하여 3000여 가구에 1만여 명의 인구를 가진 사회주의식 새마을로 건설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만융촌의 역사는 중국조선족의 분투사

1934년, 일제통치시기 조선 평안도 출신이었던 3명의 농민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심양 주변으로 이주하면서 만융촌의 역사가 점차 막을 열었다. 이곳은 냉습지로 알려져 있으며 토질이 박하여 한족들도 버린 땅이었다. 처음 이주한 사람들은 깊이 50m의 수로를 파서 10리 밖에 있는 훈하(燻河)강과 연결시켜 논을 만드는 대역사를 시작하였다. 당시 마을 건설의 큰 공을 세운 하덕용(河德勇) 옹이 이 마을이 영원히 융성하라는 의미에서 만융(滿融)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만융촌은 해방 후인 50년대부터 동북3성 방방곡곡에 널려있던 조선족들이 한집 두집 모이기 시작해서부터 집단부락을 형성하였다. 만융촌에는 평안도뿐만이 아닌 경상도, 함경도,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등 조선8도 강산에서 다 모여 있다고 한다.

만융촌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1958년에 시작한 대약진 때부터였다. 마을사람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협동작업으로 생산성을 높였다. 공동으로 트랙터와 자동차를 구입하여 활용하였고 누구보다 먼저 모심는 기계를 사용하였으며 가마니 짜는 기계를 자동화하는 등 농업의 기계화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시멘트공장, 양어장, 과수원, 피복창, 전분공잔 등을 유치하거나 설립하여 농한기에 유휴노동을 소득증대에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요녕성 제일의 모범마을로 되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1969년부터 벼농사에서 과일, 특수작물, 꽃, 남세(채소, 야채) 작물 재배로 전환하는 등 다른 부락보다 앞서 변화를 이뤄나갔다.
촌 당위서기 서기 박승택 씨의 말을 들어보면 만융촌은 5개의 역사단계를 거쳤다고 한다. 해방 전 15년은 피눈물의 정착역사, 1949년부터 1960년전 까지는 황무지 개간의 역사, 1970년까지는 집체기업 경영에 눈뜨기 시작한 역사, 개혁개방 후부터는 외지인 대거 이주와 마을확장의 역사, 1990년대부터는 비약적인 발전을 실현한 역사였다.
현재 마을 내에는 시장과 유치원, 학교, 교회, 식당, 예식장 등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바 13개 촌으로 구성된 금융촌은 규모 상 타지의 향이나 진(한국의 읍)에 해당될 만큼 행정조직을 구전히 갖추고 있다.

박승태는 어떤 사람?

훤칠한 키에 검정양복을 입고 점잖게 안경을 건 박승태 씨는 5십대중반의 지식인스타일이었다. 초면에는 누구도 그의 몸에서 갖은 풍파를 다 겪어온 억척스런 기질을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래에 그의 경력을 간단히 짚고 넘어간다.
박승택: 1974년 심양농업대학 농업과 졸업 후 1975년까지 농업에 종사. 1993년부터 1995년 사이 한국에서 미장공, 목수 등 건축과 관련된 일을 하다. 1996년부터 1997사이에는 한국회사 고신 목재에서 총무부 대리로 재직. 그 후 자동차 유리를 생산하는 채색유리회사 생산 공장장, 심양전기기계공사 생산과 과장을 지내다. 1997년 12월 23일부터 초빙되어 만융촌 건설에 큰 기여하다- 보다시피 박승택의 풍부한 사회경험과 굳은 의지는 금융촌을 일떠세우는 초석이 된 것이다.

만융촌의 구심점은 어디에?

근년 내 중국조선족인구는 급격한 감소를 보이고 있다. 특히 농촌지역의 인구감소와 토지유실상황은 심각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만융촌에는 조선족인구가 늘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근간에는 돈 많고 의식수준이 괜찮은 조선족들이 모여들어 더더욱 주목을 끌었다.
이곳의 주민들 중 85% 이상이 한국방문을 했으며 현재 국외로 나간 사람 1,200명 중 80%가 한국에 취업 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만융촌의 구심점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기자의 물음에 이영숙 부서기는 이렇게 말꼭지를 뗐다.
“우선 살기 좋으니까 모여드는 것이겠죠. 바꿔 말하면, 우리 촌민위원회가 걷고 있는 길이 옳다고 봐야겠지요…”
심양시내와 가깝고 교통이 발달한데다가 아파트가격이 싸고 촌의 재정내원이 좋은 것, 조선족의 문화 분위기가 농후한 것, 등이 결정적인 요인일 것이다.
금년에 그들은 또 북쪽으로 11동, 남쪽으로 3동의 아파트를 지을 예정이며 광장 앞으로 도서관, 헬스클럽, 노인정 등이 구전한 1500~2000평의 만융문화궁을 세울 계획이다.
오물처리장도 짓고 병원도 확대하고 800~1000만원을 투자하여 옥수대로 생산하는 값싼 가스 생산기지도 앉힐 예정이며 더 많은 국내외기업들을 안주시킬 생각이다. 그러다 보니 마을노동력을 갖고는 이런 기업과 공장들의 인재와 노동력수요를 절대적으로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형편, 일례로 양말수출공장만 해도 400여명의 일군을 쓰고 있다고 한다.
현재 촌내의 소학교에는 400여 명이 취학 중이고 중학교는 촌에서 3키로 쯤 떨어진 소가툰(苏家屯)에 다닌다고 한다. 금년에 만융조선족소학교는 구교육국의 직속학교, 즉 만융실험소학교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촌민위원회에서도 150여만 원을 투자하여 새로 장식을 하고 운동장도 흙이 없는 질 좋은 마당으로 변화를 줄 예정, 그러니 부모들도 안심하고 자식을 맡기고 돈을 벌수가 있는 것이다.

세 마리 토끼 전설은 영원하라

이영숙 부서기는 금융촌과 관련된 세 마리 토끼전설에 대해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니 1931년, 일제의 말발굽이 봉천(심양)땅을 짓밟기 시작하던 시기였지요. 설상가상으로 이 고장에는 큰물까지 나서 이곳 훈하 양안은 망망대해로 변하고 말았데요. 몸을 의탁할 손바닥만한 땅도 보이지 않았다나? 그런데 홀연 멀지 않은 곳에 세 마리 토끼가 안온히 엎드려 있는 것이 보이더랍니다. 몇몇 조선족 농부들은 그제야 죽을 힘 다해 그 곳까지 헤엄쳐 가 목숨을 건졌데요…큰물이 빠지자 농부들은 이곳을 복지로 단정하고, 물곬을 빼고 땅을 개간해서 마침내 370여 호의 큰 부락을 일궈냈데요. 그래서 세 마리 토끼에 대한 전설은 한입두입 건너 지금까지 전해오게 된 것이지요…만융(滿融)이란 이름은 ‘양식이 창고에 넘치다, 물건이 고간에 가득 차다, 돈이 궤에 넘치다, 사람들이 만족해하다.’는 뜻이거든요. 마을사람들은 또 길을 굽게 빼서 돈과 재산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지요…”
그랬다, 세 마리 토끼는 부와 화목과 길함을 상징하고 있다. 봉천 땅 깊숙이 뿌리 내린 중국조선족 제1촌은 세 마리 토끼의 영원한 매력으로 갈 길에서 헤매고 있는 우리 조선족들을 끌어당기고 우리 조선족 농촌이 살아갈 앞길을 명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주. 강위원교수 <만융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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