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남양- 명천행 열차에서 
                    
나는 어릴 때 아버지의 이력서를 보고 우리 조상들과 아버지의 고향이 함경북도 명천군이라는 것과  그 부근에 함북의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칠보산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연고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지만 명천과 칠보산은 내 마음속에 따스하고 유정한 곳으로 또렷이 각인되었고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고 작심하였다.

그러던 차 칠보산 관광코스가 개설되었고 마침 우리 회사에서 칠보산 관광을 조직하여 나는 행운스럽게  꿈에도 그리던  칠보산 관광길에  오르게 되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유람을 하였지만 이번처럼 흥분되고  기쁜 적은 없었다.

▲ 이영자 작가, 칠보산에서.

2012년 5월 17일, 오후 4시경에 90여명의 관광객들과 함께 나도 흥분된 심정으로 도보로 도문- 남양 다리를 건넜다. 두만강은 예나 제나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 두만강의 물소리를 들으니 새삼스레 민족의 수난사가  떠올랐다.  오늘은 두만강이 친선의 강, 우정의 강이었지만  지난날에는 설음의 강, 눈물의 강, 한의 강이었다.

 1637년  병자호란 당시 몽골군대에 끌려간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과 여인들이 노예로, 기녀로 충당되었고 일제강점시기에는 수 천 수만의 조선의 백성들이 살길을 찾아 남부녀대하고  이 강을 건넜다. 그리고 수많은 항일지사들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제와 피어린 싸움을  벌렸다.  처절썩- 처절썩 두만강이 흐른다. 사품치며 흐르는 물결 속에서 애환에 서린 노래 소리도 방불히 들리는 듯싶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배사공
흘러간 그 옛날의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대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시려나

 우리는  조선해관에서 검시를 마치고 남양에서 몇 시간 기다린 후  열차를 탔다.
열차는 중국의 것이었고 승무원들은 조선인들이었다. 승무원처녀들이  마치 자기집  구들을 닦듯 수시로 쪼크리고 앉아  열심히 바닥을 닦았다.  많은 관광객들이  혀를 찼다. 서비스도 나무랄 데 없어  승무원처녀들이 항사 미소를 머금고  수시로 더운 물을  따라주었다.

▲ 칠보산

중국시간으로 19시가 넘어서야 기차바퀴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칠길 양켠에는  금방 심어 놓은 듯한 포플라나무들이  질서 정연하게 줄지어  서 있었고 묘목주위에는 하얀 자갈들이 동그랗게  둘려져 있었다. 무릇 마을이 있는 곳마다 회칠을 한 널판자울타리가 집을 둘러싸고 있었고 八자형 기와집의 추녀들도 모두 횐 색으로 꾸며져 있어 짜장 말끔하고 정가롭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 모습에서 또한 조선인민들의  알뜰한 마음씨도 함께 읽어낼 수 있었다.

열차는 시름없이 달린다.  나의 사색도 달린다.  그러나 열차는 앞으로 달리고 나의 사색은 반대로 뒤로 달린다. 나는 20년 전에 아이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회령, 삼봉, 남양 등지를 들락거리며  생필품장사를 하면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맛보았다. 피땀으로 번 돈으로  조선의 친척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2003년에는 이미 고인이 된 82세의 아버지를 모시고 쌀과 옷 등 생필품들을 가득 싣고 삼봉 친척집에 갔었고 그 후에도 나와 어머니가 수차례 다니면서  조선의 친척들에게 식량과 옷 등을 갖다 주었다.

열차는 그냥 달린다. 금방 어슴프레 잠들었는데 미구하여 열차가 종성역에 도착했다.  나의 생각도 다시 깨여나 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조선실록.지리지”(조선.실록)의 기록에 따르면면 세종대왕 때 김종서라는 명신(名臣)이 6읍을  세우면서 여진어로 된 지명들을  고쳐버렸지만  김종서의 공을 기리어 종성(钟城) 이라고 지명을 새롭게 지었다고 하고  또 일설에 의하면 6읍 개척 당시 종성에는 큰 종이 하나 있었으므로 고을 이름을  종성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높은 누(樓)에 매달려있는  종이 울리면 그 소리를 명령으로 받들고 백성들과 군인들이 모여들어 쳐들어오는 외적과 싸웠다고 한다.  종성군은  6읍중의 하나다, 6읍이란 세종대왕 시절에  두만강연안에 설치한  부령,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 등 6개의 고을을 말한다.  6읍 개척을  위해  진두지휘하던  김종서가  군무를 보다가 여가 에 읊었다는  시조 한수가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삭풍은 나무끝에 불고 명월은 눈속에 찬데
만리변성(万里边城)에 일장검(一长剑)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소리에 거칠것이 없어라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
썩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냐
엇덧타 린각화상(麟阁画像)에 누가 먼저 오르리요

조선인과 여진인 사이의 싸움은 세종조 이후 세조 때에 와서도 계속 이어졌다.  세조 때   여진징벌에서 영용히 싸운  영웅호걸이 있었으니 그가 곧 남이 (南怡) 장군이다. 그는 나라를 지키려는 큰 포부를 안고 다음과 같은 시조를 읊었다.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어지고 (白头山石磨刀尽)
두만강의 물은 말이 마셔  다 없어졌노라 ( 头满江水饮马无)
사나이 이십에 나라를  평정 못하면 (男儿二十未平 国)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할손가( 后世谁称大丈夫)

열차도 달리고 사색도 달리는 중에 어느덧 열차가  명천에  이르렀다. 시계를 보니 아침 여섯 시었다.  나는 기차에서 내려  주위의 산과 마을을 바라보면서  이 땅의 그 어디인가에 조용히 잠들어 계실  우리 조상님들에게 합장하고 묵념으로 인사를 올린 다음 명천역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신기할손 , 천하명승 칠보산이여

함경북도  명천군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동해, 북쪽으로는 경성만에 흘러드는 어랑천, 남쪽으로는 화대천을 경계선으로 하는 넓은 지역을 포괄하여 자리 잡고 있는  칠보산은 그 면적이 무려  250여 평방에  달한다.

명천의 지명에는  또 다른 한 가지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깃들어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남녘이 고향인 한 사대부가 함경도 감사로 부임해왔는데 하루는 숙수가 동태국을  끓여 올렸다고 한다. 남녘의 바다에는 명태가 나지 않는지라 동태국을 처음 먹어본 그 감사가  하도 시원하고 맛이 좋으니 이 고기가 대관절 무슨 고기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동태국을 끓여 올린  숙수마저도 고기 이름을 대지 못하자 감사가 또  “그럼 이 고기는 누가 잡아다 바친거냐?” 하고 물으니 숙수가  “명천군의 태씨라는 어부가 바다에 나가서 잡아다 받친 것이올시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감사가 명천(明川)과 태(太)에서 각 각 한 글자 씩 뜯어다가 맞추어서 “그럼 이 물고기의 이름을 명태라고 하여라.”하고 분부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명태 명칭의  유래이다.
백두대간에 우뚝 솟아 누루 천년 그 절묘한 비바람에 씻고 다듬어진 칠보산, 일곱 가지 보물이 묻혀있는 산이라 하여 불리워진 칠보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진짜 제 눈으로 보니  과연 칠보산은 금강산, 묘향산에 비겨도 결코 손색이 없는 천하명산이었다.

▲ 칠보산

 
칠보산에는 다른 명산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산악미(山岳美),계곡미(溪谷美),  해경미(海景美)가 돋보였고 또 계절에 따라 자기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명승지도 있었다. 칠보산은 지역별특성과 관광코스에 따라 내칠보, 외칠보, 해칠보로 나뉘어 있었다.

외칠보여관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관광을 시작하였다. 버스를 타도고 반시간 가량 가다가 도보로 4리를 걸어 만물상 관광대에 올랐다. 평소에 2,3리를 걸어도 좀 힘들어하던 나였건만 길 양켠에 늘어선 아름답고 기묘한 바위들과  산봉우리들이 하도나  멋있고 공기 또한 청정하여 나는 힘겨운 줄을 모르고  “아!-오!”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산에 올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감탄사가 나를 업고 정상에 오른 것이다.

승선대에 오르니 웅장하고 기기묘묘한  오봉산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날따라 하늘도  한점 티 없이 맑디맑아서 오봉산의 경치를 만끽할 수 있었다. 게다가 망원경까지 있어 오봉산의 진면모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외칠봉의 주봉인 오봉산은 말 그대로 봉우리가 다섯 개인데 봉우리마다 기이한  형태를 갖고 있어 저마다 독특한 이름을 갖고 있었다. 만개의 절간이 모여서 만들어진 신기한 봉우리라 하여 첫 번 째 봉우리의 이름은 만사봉(万寺峰)이요, 천개의 불상을 모아놓은 것 같다하여 두 번 째 봉우리의 이름은 천불봉(千佛峰)이라. 세 번 째 봉우리는 마치 종을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하여 종각봉(钟阁峰)이요, 네 번 째 봉우리는 삿갓을 쓴 나한이  염불을 하는 모양 같다고 하여 나한봉(罗汉峰)이요, 다섯 번 째 봉우리는 흡사 노적가리를 쌓아놓은 것 같다고 하여 그 이름이 노적봉(露襀峰)이라. 실로 그 이름이 생동하기를 이를 데 없다. 나는 선경에 도취하여    당장에서  시조 한수를 지었다.

만사봉과 천불상이 마주 보며 웃고
나한의 독경소리 계곡에 넘치나니
오호라, 예가 바로 선경이요 무릉도원 아닌가

 내칠보는 수많은 봉우리들과 기묘한  바위들이 창공을 뚫고 우뚝 치솟아 장엄함과 수려함을  떨치고 있었다. 부부바위는 전방에 나갔던  낭군이 돌아와서 투구도 미처 벗을 새 없이 아내와 포옹하는 장면을 방불케 했다. 남편의 가슴에 몸을 맡긴 젊은 여인의 왼쪽 팔은 은근히 감추어져 있다. 관광가이드의 익살맞은  한마디가 부부바위의 신비를 한층 더해주고 있다.
 
“여인의 왼쪽손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내 마음속에서 즉흥시 한수가 머리를 내밀었다.

저주로운 싸움으로 갈라진지 몇 해던고
하늘이 유정하여  낭군님 돌아왔거늘
그 품에 길이 안겨  천년만년 살고지고

시집가는 색시들이 들려보면 백년해로 한다는 예문 앞, 그 앞에서 내일을 약속하는 젊은이들과 부부동반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느라고  야단법석이었다.

칠보산은 용암이 솟아나와 식으면서 굳어진 것으로 진짜 천연조각품 전시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의 숨결이 어려 있는 유난히 큰 기와집, 머리를 맞대고 촘촘히 박혀 소곤거리는 초가집들, 악상에 잠겨 있는 듯한 작곡가와 피아노를 방불케 하는 바위, 그리고 바로 그 옆에 붙어있는 가수바위, 이러한 황홀경을 어찌 그대로 지나칠 수 있으랴. 하물며 음악을 사랑하는 내가 아닌가. 나는 가수바위를 배경으로 멋지게 사진 한장을 찍고 즉흥시도 한수 썼다.

신선이 내려와 피아노를 치는가
지장보살이 올라와 노래를 부르는가
어화라 나도 가수가 되여  한곡조  뽐노라

내칠보의 장수바위는 우람지고 늠늠하고 위엄이 어려 있었다. 장수바위를 보면서 나는 조선이 왜놈들에게 먹힌 후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의병들을 이끌고 북청, 명천 일대에서 신출귀몰하면서 왜놈들을 호되게 족쳤던  홍범도장군의 모습이 떠올랐다.

칠보산을 관광하는 중에  자그마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칠보산의 바위돌에는 도처에 한자로 새겨진 이름들이 많았다. 지난 날 이곳을 다녀갔던 묵객들이나 정객들이   자기의 이름이 칠보산의 절경과 더불어 영생할 것을 바라는 마음에서  새겨놓은 것이리라.  한 한족 여인이 절벽에 새겨진 한자 이름들을 보면서 가이드에게 물었다.

“ 이렇게 도처에 한자 이름이 새겨진걸 보니 여기가 원래는 중국땅이 아니였는가요?”
한어에  익숙하지 못한  조선가이드가 어리둥절해 하니 내가 대신 해석하였다.

▲ 사진자료= 북한의 가이드
“많은 사람들이 한자는 한족의 점유물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렇잖아요. 한자는 동방의 여러 민족이 공동으로 창조하고 사용한 글자예요. 1444년에  조선의 성군이신 세종대왕이 집현전의 학자들을 동원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기까지 조선에서는 모두 한자를 사용하였답니다. 훈임정음이 창제된 후에도 사대부들이나  글깨나 안다는  초야의  선비들이 한글이 너무 쉽고 천하다고 여겨 오래 동안 한자를 사용하였지요. 지금도 한국에서는 한글과 함께 한자도 사용합니다. 한글이 창제 된지는  6백년도 안되지만 지금 한글은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문자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나의 역사지식은 그렇게 해박한 것은  아니지만  돈화에서 왔다는 그 한족 여인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었다.

우리들을 태운 버스는 산을 에돌아  굽이굽이 내려오다가 기원 826년, 발해시기에 지은 유적지  개심사(开心寺)에도 들렸다. 발해 때 명천군을  비롯해 조선 함경북도의 대부분의 지역이 발해의 한 행정구역이었던 남해부(南海部)에 속해 있었다.  그 남해부의 소재지가 지금의 칭진시 근처에 있는 경성이었다고 한다. 나는 조상의 얼이 슴베 있는 이 작고 소박한 절간에서 진정어린 시주를 한 다음 경건하게 두 손을 합장하고 조선의 번영창성과 조선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빌었다. 그리고 어설프게나마 속에서 우러러 나오는 시 한수를 지었다.

반도가  동강난지 어언 57년
그 사이 어느 하루도 개심한 적 없었더라
언제면 백의민족 한 식구로 살아가랴
부처님 앞에 엎드려 간곡히 비노니
개심사여, 이젠 그만 깨여나
 통일의 문 여소서
활짝 여소서!

외칠보는  높이 솟은 웅대한 봉우리들과 기암절벽, 수정같이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골짜기가   많아 산악미와  계곡미를  이룬것이 특징이다. 외칠보는 높은 산발들이 바다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삼라만상을  모두 껴안고 있는 만물상구역(万物相区域),장수봉구역(长寿峰区域), 노적봉구역( 露襀峰区域), 덕골구역(德沟区域),강선문구역(江仙门区域)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름답고 기묘한  자연경관이 더 이를 데 없었지만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이 덕골폭포를 보러가는 로정이었다.  덕골폭포로 가자면 깊은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야 했다. 길 양 켠에는 아츨한 봉우리들이 솟아 있었고 계곡에서는 수정 같은 냇물이 졸졸  흐르고  청청한 소나무숲
에서 내뿜는 공기는 청신하기를 이를 데 없었다. 금상첨화라고 할까. 거기다 가지각색 꽃들이 만개하여 짙은 향기를 풍기니 대자연이 나를 품고 있는지 내가 대자연을 품고 있는지 저도 몰래 자연과 내가 혼연일체가 되어버렸다. 이마도 이런 경우를 일컬어 무아지경이라고 하리라.

덕골폭포로 올라가는  길로 한참 걸어가니 신통히도 두개의 손가락을 빼여닮은 쌍지암(双指岩)이 나타났다. 하늘을 행해 치솟은 쌍지암은 마치도 하늘에다 구멍을 뚫으려 하는 듯 싶었다.  관광객들이 그 희구한 형상을 렌즈에 담느라 분망했다.  폭포앞에 이르니 상쾌한 기운이 페부에까지 파고 들었다.  폭포는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그윽함과 청정함이 마음을 사로 잡았다.

낮12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차를 타고 해칠보에 도착하였다. 해칠보는 황잔리에서 무수단까지 약 40키로메터의 바다가를 차지한다. 여기에는 소나무로 장관을 이룬 솔섬이 있고  무지개를 방불케 하는 무지개바위가 있고 코끼리와 비슷한 코끼리바위가 있고 세상에서 제일 크다는 붓바위도 있다. 그중에서도 눈을 못 떼게 하는 것이  바로 달문이다. 달문은 정말 신비 그 자체였다. 나는 달문을  바라보면서 시 한수를 지었다.

 물에서 달이 뜨니 달문이더냐
달을 닮아서 달문이더냐
달이 드나드는 곳이여서 달문이더냐
신비를 가득 안고 생각에 잠긴 달문이여
길손이 너에 반해 발걸음 못 떼누나

여러 가지 기이한 모양들이 동해의 푸른 물결우에  비끼여 한폭의 화려한 절승경개를 수놓고 있었다.

외칠보려관과 민속촌소묘

우리의 관광일정은 4박5일, 갈 적 올 적 두 밤은  열차에서 자고 하루밤은 외칠보여관에서 자고 다음 하루밤은 해칠보민속촌에서  민박했다. 

외칠보여관은 날아가던 매도 경치가 하도나 좋아  구경하다가 굳어져 자리잡았다는 매바위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뒤에는 기묘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 있었고  앞에는 맑은 샘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안내원은  이 여관이 십여년 전에 조선정부의 수장들이 들었던 여관이라고  소개했다. 여관앞 길 옆에는 사과나무꽃, 장미꽃 , 배꽃, 살구꽃,복숭아나무꽃들이 만개하여 짙은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여관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차디찬 고루대하가  아니고  구수한 땅냄새, 싱그러운 풀냄새, 향기로운 꽃냄새를 한껏 향수할 수 있는 단아한 단층집이어서 좋았다.

나는 새들이 지저귀는 노래소리에 놀라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카텐을 헤치고 밖을 내다보니 죄꼬만 노란꽃이 미풍에  하느적거리며 미소를 머금고 나를 빠끔히 쳐다보고 있었다. 미소의 힘에  이끌려 문을 열고 나가서 노란꽃 옆에 앉았다. 이슬을  눈물처럼  단 애어린 노란꽃이 마치도  왜 인제야 왔는냐 나도 데리고 나가 세상 구경 시켜주면  안 되는냐 하고 어리광을  부리는 것만 같았다. 왠지  가슴이 뭉클하여 노란꽃을 달랠 제 문득 또 싱그러운 꽃내음이 진동하여 옆을 보니 커다란 배나무의 새하얀 배나무꽃이 환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 청신한 아침에 누리는 자연의 향연이여, 나는 몸과 마음이 삽시에 샘물에 씻은 듯 말할 수 없이 개운해졌다.
외칠보여관이 마음의 정화로  인상이 깊었다면  민박촌에서의 하루밤은 조선사람들과 한집에서 자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선물도 줄 수 있어서  좋았다.
민속촌의 뒤는 웅장한 산이요, 앞은 일망무제한 바다다.  아침이면  동해의 해돋이 또한 장관이었다. 2001년부터 건설했다는 민박촌의  기와집들은 아주 아름답도 고풍스러웠고 또 여러 나라 풍격으로 지은 집들도 적지 않아서 구경할 멋이  더 있었다.  실내설비도 비교적 구전하고 편리하여 좋았다

바다가의 향연 , 그리고 우아한 연출

이번 유람길에서  칠보산의 절승경개로 눈이 즐거움을  만끽했을 뿐 만 아니라  조선의 예술도 한껏 흠상할 수 있어  일거양득이었다.

해칠보 바다가에서 우리 관광객  일행이 해물구이를 안주로  맥주를 마시며 오락을 할 때였다. 우리와 불과 100여메터 사이둔 곳에서 외지에서 온  어느 전문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오락판을 벌리고 있었다.  기나긴 고난의 행군을 겪느라고 심신이 지쳤으련만 꼬믈만치도 그런 내색이 없이 한결같이 맑고 명랑하고 활발하였다. 나는 속으로 조선인민들의 불요불굴의 정신에 탄복하였다

그들의 유쾌한 놀이에 감염된 우리는 저도몰래  그들한테로 가서 구경하였다. 함께 간 친구가 조선 선생님에게  “중국에서 온 이분이 노래를 잘하니  한번 들어보는 것이 어떻냐?”하고 추천하는 바람에  나도 조선 선생님의 경쾌힌 손풍금반주에 맞추어 조선민요 두수를 불렀다. 절승경개를  배경으로  이국 학생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노래를 부르니 마음이 한량없이 기뻤다.

이번 관광에서 조선예술단의  연출은  더구나 우리를  감동시켰다. 환한 조명과 복장, 조선특유의 멜로디와 선녀들을 방불케 하는 우아한 춤가락, 어디 그뿐이랴. 그들은 중국노래도 아주 멋지게 불렀다.  우리 관광객들은  예술의 매력에 빠져 모두가 넋을 잃고 구경하였다.  연출이 끝난 후 북경에서 왔다는 한 중년관광객은 20년만에 처음으로 이렇게 높은 수준의 예술을 감상했다면서 찬탄을 연발하였다.

칠보산 관광 마지막 날 코스는 경성군 주을이었다. 우리는  주을온천에서 온천욕을 하였다. 주을온천은 한반도에서 가장 크고 이름이 있는 온천인데 주을온천이 알려진 것은  500년전이라고 한다. 지하 60메터 깊이에서 솟아나는 물은 온도가 51-64도이며 두개의 샘구멍에서 하루에  400톤 가량의  물이 솟아난다.  물에서는 약간 닭알냄새가 나고 색갈은 노르슴하다. 주을 온천은 라듐성분이  많아 관절염, 신경통, 부인병, 수술후유증 치료에 좋다고 하였다. 온천욕은 돈을 따로 내고 했지만 온천욕을 하고 나니 몸이 날 듯이 거뿐하여서  기분이 좋았다.

떠나는 날 저녁식사는 청진시 청진호텔에서 평양냉면으로 하였다. 보기 좋고 맛이 또한 특색이 있어 유람객들 모두가  먹고난 뒤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유람을 마치고  열차에 올랐건만 아름다운 칠보산의 모습은  내내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지척에 두고도 만나볼 수 없는 친척들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 찡한 슬픔도 솟아올라 안타까웠다. 나는 이땅 그 어디에서 깊이 잠들고 계실 조상님들께 다시 한 번 작별 인사를 하고 시간이 허락하면 가을철에 다시 와서 가을철 칠보산을 구경하려고 작심하였다.

잘 있거라, 함북의 금강 칠보산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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