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률
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 이사장
연변/평양과기대 대외부총장


Ⅰ. 여행코스 선택
  8월 들어와 이번 여름휴가를 어디로 갈까 의논하다가 결국 아내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3박4일 일정으로 중국 쿤밍이나 옌타이 쪽으로 골프관광을 다녀오자고 우겼는데, 노모(86세)를 며칠간씩이나 집에 혼자 두고 떠날 수 없다는 아내의 말에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아내가 추천한 코스가 부산/거제도/통영을 다녀오는 철도(코레일)이용 관광프로그램이었다.
지난 4월 중국 연변대학 손춘일 교수(민족학원 원장)내외가 서울에 와서 한 달간 머무르는 동안에, 그들과 함께 1박2일 코스로 나주/해남/완도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 여행이 너무 좋았다고, 이번에도 그렇게 1박2일 코스로 다녀오면 좋겠다고 해서 결국 의논 끝에 오랫동안 가보지 못했던 거제도/통영 쪽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Ⅱ. UN기념공원 답사
  8월13일 아침 9시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니 12시가 다 되었다. 부산역 대합실에서 이번 여행을 함께 다녀올 분들을 만났는데, 중국에서 온 조선족 가족 다섯 명이 전부였다. 가장 김학명씨 내외는 12년간 한국에서 일을 해 오신 분이고, 아들 내외는 중국 심양에서 조그만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예쁘장하게 생긴 딸은 랴오닝대학에서 일어를 전공했으며, 현재 대련에서 미국인회사 일어통역자로 근무하고 있다고 자기소개를 했다.

우리 내외를 합쳐 7명밖에 안 되는 단촐한 여행팀이었다. 예순 넘어 보이는 가이드 아저씨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먼저 대연동에 있는 식당으로 가서 점심부터 먹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UN기념공원을 방문했다. 4만평 부지가 한 장의 큰 정물화처럼 잘 가꾸어져 있었다. 이곳을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특히 이곳은 고(故)정주영 회장께서 잔디 대신 보리를 심어 UN관계자로 하여금 땅을 공원부지로 매입토록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남아 있는 곳이다.

▲ UN기념공원에서 이승률 이사장 내외   ‘6.25 전쟁’이 끝난 직후, 보리죽도 제대로 못 끓여먹을 당시, 더군다나 겨울철에 어디서 잔디를 구해 심었겠는가. 푸른 보리밭을 떼 와서 임시변통으로 잔디밭을 조성한 정회장의 역발상적인 아이디어가, 당시 헬리콥터를 타고 부지 상공을 선회하며 관찰했던 UN관계자들의 눈에는 마치 그 땅이 한 폭의 푸른 녹지처럼 아름답게 보였을 것이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가이드 아저씨가 침을 튀기며 자랑삼아 전해주는 설명을 듣고, 동행한 조선족 가족들은 현대그룹의 창업주 정주영 회장께서 일생을 두고 성취한 많은 사업실적들이 이러한 역발상적 기민성과 끈질긴 추진력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비로소 처음 이해하는 것 같았다.

여기에 더하여 ‘6.25 전쟁’이 참전국 16개국과 지원국을 합쳐 모두 30여 개국이 참여한 국제전쟁이었으며, UN군으로 구성된 우군들의 참전으로 한반도가 공산화되지 않고 마침내 지금과 같은 자유대한민국으로 부흥, 발전하게 된 것을 조선족 가족들에게 상기시키는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Ⅲ. 해운대와 오륙도를 돌아보며
  우리는 다음 행선지로, 관광유람선을 타기 위해 해운대 미포선착장으로 갔다. 선착장 옆에는 과거에 한국콘도(주)가 보유했던 부지를 최근 중국기업(CSCEC)이 사들여 100층이 넘는 호텔과 고급아파트 3동을 짓는 현장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부산의 수영만 일대와 해운대에는 중국 자본과 일본기업의 투자가 눈에 띄게 밀려와 센텀시티를 중심으로 80층 이상 되는 아파트 건물이 여러 동(棟) 들어섰을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제일 큰 쇼핑 장소인 신세계백화점이 개관하여 중국 관광객과 일본 관광객을 대상으로 맹렬한 영업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영화의 전당(부산국제영화제), BEXCO(국제컨퍼런스장), 수영만 요트경기장 등을 비롯한 많은 신축건물과 시설들이 빼곡히 들어서서 신국제항만도시로 손색없는 발전을 보이고 있다.

▲ ‘갈매기 밥’을 주며 즐거워 하는 조선족 가족들
우리 일행들은 가이드 아저씨가 권해서 유람선을 탈 때 갈매기 밥으로 ‘새우깡’을 구입했다. 아니나 다를까 승선객들이 던져주는 새우깡을 받아먹으려고 수십 마리의 갈매기가 떼를 지어 우리 배를 뒤따라 왔다. 내 손바닥을 쪼아대는 갈매기가 무척 귀엽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얼마 있지 않아 제13차 아셈회의가 열렸던 동백섬 ‘누리마루 APEC하우스’가 눈에 띄었는데, 마치 큰 버섯처럼 솔숲을 배경으로 해안가 언덕 위에 우뚝 세워져 있었다. 그 앞을 지나 광안대교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바다로 나왔다.

▲ CSCEC 해운대관광리조트 조감도와 광안대교 야경   10여분 정도 지나 오륙도에 다다랐다. 밀물 때 섬이 다섯 개였다가 썰물이 되어 수위가 약간 낮아지면 섬이 여섯 개로 보인다는 뜻에서 오륙도라 불려 지는 부산의 명소이다. 나의 애창곡이기도한 조용필의 ‘오륙도’를 흥얼거리며 오륙도를 한 바퀴 돌아볼 때, 나는 특별한 감회에 젖었다. 저 멀리 부산역 뒤쪽, 하늘과 맞닿아 있는 대청봉 산꼭대기에 성냥개비 몇 개를 세워 놓은 듯한 조그만 구조물이 보일 듯 말 듯 아른거리며 보였기 때문이다.

Ⅳ. 부산시 충혼탑공사에 대한 추억
  여기서는 그렇게 작게 보이지만, 실은 대청공원 정상부에 세워져 있는 충혼탑은 그 규모가 놀랄만큼 큰 구조물이다. 65m 높이의 9개 수직기둥 위에 직경 20m가 넘는 대형 ‘링’ 콘크리트가 허공에 브라켓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링’ 안쪽에서 30m 높이로 9개의 철 구조물이 갈빗대 모양으로 탑신을 떠받치고 있는 형태의 특이한 조형구조물이다.

▲ 대청봉 정상에 세워진 부산시 충혼탑   1983년 당시 부산 지하철 공사에 참여했던 6개 건설업체들이 성금을 모아 원래 용두산에 있었던 부산시 충혼탑을 대청봉으로 이전하는데 필요한 기금을 지원했었다. 그때 현대건설이 대청봉공원사업과 함께 이 충혼탑공사를 수주했었고, 우리 회사(당시 회사명 ‘반도조경’)가 현대건설로부터 일괄 하청을 맡아 완공한 공사였다.

무려 2년간에 걸친 난공사 끝에 작업을 깨끗이 완료해 놓은 날 밤, 내일이면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 참석해서 준공식 테이프를 끊기로 한 전날 밤, 그날 밤에 나는 충혼탑이 있는 대청봉 산꼭대기 언덕위에 올라가 혼자 깡소주를 마시며, 저 멀리 오륙도가 있는 검은 바다를 바라보며, 큰 공사를 완벽하게 잘 끝냈다는 성취감과 함께 이런 공사현장에서 하청이나 하며 사는 게 내 인생의 진로인가 하는 허탈감이 교차하는 심정을 억제치 못해 엉엉 울며 흘렸던 눈물이 지금도 가슴을 찡하게 흐른다.

각박한 공사비에 일은 어렵고 또한 매우 위험한 현장이라 아무도 쉽게 나서지 않았던 일을, ‘할 수 있다’는 신념 하나만 믿고 시작했던 공사다. 이 공사는 당시 울산에 있었던 현대건설 영남지사가 수주해서 본사 품의를 거쳐 하도급 업체를 선정하는 절차를 거치게 되었는데, 공사가 까다롭고 공사비가 부족해서 본사 토목부, 건축부, 주택사업부 산하 업체를 아무리 뒤져봐도 선뜻 일을 맡겠다고 나서는 업체가 없었다. 결국 그 하도급 업무가 수주 부서인 영남지사로 다시 떠넘겨 졌다. 이런 소식을 접한 나는 그 때 제 발로 영남지사장을 찾아가 이런 조건을 제시했다.

“현대가 수주한 공사비를 다 달라고 하면 내가 도둑놈 소리를 듣겠지요. 일괄도급방식으로 처리하고 90%만 주시오. 단 이 공사를 수행하는 과정에 기술적인 문제나 인력관리 요령은 우리 반도가 전적으로 책임지고 할 테니 일체 간섭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조건이면 내가 이 일을 맡겠소.”

▲ 충혼탑 앞에서 이승률 이사장 (2013.10)
그 자리에서 결정되어 우리 회사가 그 일을 맡아 수행했고, 2년간 안전사고 없이 무사히 공사를 완벽하게 마쳤다. 돌아가신 김중업 설계자가 자기도 이렇게 어려운 공사인줄 몰랐다고 하면서 준공식 후 나를 꼭 껴안아 주셨던 그런 공사였다.

그 후 나는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날 때마다, 그 대청봉 산꼭대기 위에 건립했던 충혼탑을 마음에 새기며 남모르는 용기와 힘을 스스로 되살리곤 했다. 관광유람선이 오륙도 앞바다를 돌아갈 때 저 멀리 산과 하늘이 맞닿은 곳에 대청봉 충혼탑이 신기루처럼 서있는 장면이 떠올라 유람선을 타고 가는 동안 내내 가슴이 뛰었다.
유람선 관광을 마치고 선착장 부근에 있는 「부산아쿠아리움」을 관람한 후 일행들은 봉고차를 타고 센텀시티를 한 바퀴 돌아본 다음 광안대교와 부산항대교 그리고, 영도를 거쳐 시내로 들어와 자갈치 시장으로 갔다. 푸짐한 횟거리로 배를 채운 다음 우리 일행은 남항대교와 송도를 거쳐 낙동강 하구둑(을숙도)과 명지오션시티, 녹산산업공단,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을 지나 가덕도를 향했다. 가덕도에는 8년 전에 부산신항(1단계)이 개항되어 기존 부산항의 과적 물량을 분담하는 보조 역할을 해주고 있는데, 필자는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이 가덕도를 한반도 동·남해안의 매우 중요한 교통전략지로 강조해왔다.
Ⅴ. ‘블루오션 브릿지’와 ‘거부경제권’
  상술하면,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과 가덕도 연결구간에 건설된 부산신항의 항만규모와 부대시설도 단계적으로 확장해 나가야 하겠지만, 그보다 포화상태인 김해공항을 이곳 가덕도로 이전시켜 항만, 공항, 도로 및 철도가 복합적으로 연계되는 TRI PORT를 건설하는 것이 부산지역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며, 그리고 이곳을 중간 거점으로 하여 거제도와 부산을 한데 묶어 일본 쓰시마와 큐슈지역경제권에 대응하는 ‘거부(巨釜)경제권’을 조성하는 것이 한반도 지역균형발전에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펴 왔다. 특히 장차 도래할 한일해저고속철도시대를 대비하는 ‘거대전략’으로 부산신항 및 가덕도 신공항을 경북 내륙의 중심도시인 대구와 연결시켜 융복합형의 ‘영남권 클러스트’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내다 봤다.

▲ 부산 거가대교 위치도 및 부산신항   주지하다시피, 그동안 영남권 신공항 입지 선정 문제는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가 처음 공약했으나 2011년 백지화 했고, 그 후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가 다시 공약하면서 논란을 빚어온 전례가 있다. 그러다가 최근에 국토교통부가 ‘영남지역 항공수요조사 연구’ 용역을 통해 영남권 신공항 건설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됨으로써 해상형 공항(부산 가덕도)을 주장해온 부산과 내륙형 공항(경남 밀양)을 희망해온 대구·경북의 유치경쟁이 재점화 될 조짐이다.

사실 필자 본인은, 경북 청도 출신으로 대구·경북이 어릴 적 성장기반이었으며, 또한 ‘팔이 안으로 굽힌다’고 지역감정과 이해관계로 따지자면 당연히 경남 밀양을 지지해야 될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 가덕도를 신공항 입지로 추천하는 이유는, 영남권 신공항은 명실공히 국가전략적인 경제논리에 입각하여 항만과 연계된 동북아광역교통망의 GATE & HUB로 발전시킬 수 있어야지 국내 여건에 묶여 지역공항의 확장개념 정도로 추진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신에 기인하다.

다만 경상남북도의 내륙을 동·남해안의 해양산업벨트와 사통팔달 소통할 수 있도록 지역교통망을 대폭 확장, 초고속화 할 필요가 있는데, 이 경우 부산신항 및 가덕도 신공항과 밀양, 대구, 구미 등의 내륙거점도시를 상호 연결하는 초고속철도(시속 400km 주행) 및 초고속산업도로(8차선 왕복도로, 120km 주행)를 병행 건설하여, 이런 복합교통시스템을 축으로 경북과 경남이 한 덩어리의 ‘영남경제산업공동체’를 이루도록 조치하는 것이 국토균형발전에 혁신적 대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

아무튼 이런 ‘거부경제권’과 ‘영남경제산업공동체’가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시너지 효과를 올린다면 경기·수도권에 편중되어 있는 국내경제 판도를 지역균형발전 패턴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환황해경제권(한·중·일)과 환동해경제권(한·중·일·러·몽골)을 복합적으로 접속시키는 동아시아지역 초대형 국제물류유통경제권을 형성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구상의 핵심에 ‘가덕도’가 자리 잡고 있으며, 이 중간 연결지대를 통해 부산과 거제도가 한 시간 이내로 소통하는 시대가 곧 다가오리니 그것을 필자는 ‘블루오션 브릿지’로 상정(想定)해온 터다. 즉, 부산 해운대를 출발하여 광안대교/부산항대교/영도/남항대교/송도/을숙도대교(낙동강 하구둑)/가덕대교/부산신항/거가대교/거제도에 이르는 교량 및 산업도로 연결구간을, 필자는 8년 전에 이미 부산시와 부산발전연구원이 공동주최한 국제컨퍼런스에서 ‘거부경제권’ 구상과 함께 ‘블루오션 브릿지’라는 이름으로 명명하고 이를 중심축으로 삼는 신(新)부산발전전략을 제안한 바가 있다.   (* ‘블루오션’은 현재 존재하지 않거나 알려져 있지 않아 경쟁자가 없는 유망한 시장을 가리킨다. 따라서 광범위하고 깊은 잠재력을 지닌 시장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프랑스 인시아드 경영대학원 국제경영 담당 석좌교수이며 유럽연합(EU) 자문위원인 김위찬 교수가 제창한 기업 경영 전략론 「블루오션 전략(Blue Ocean Strategy) 」에서 유래했다.)  
▲ 부산 해안순환도로 7개교량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부산시는 지난 5월 22일 부산항대교 개통을 마지막으로 광안대교~부산항대교~남항대교~을숙도대교~신호대교~가덕대교~거가대교 등 해안순환도로(전 구간 52km) 7개 교량을 모두 완공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날 부산항대교 개통식에서 허남식 부산시장은 “해안을 끼고 7개의 다양하고 특색 있는 교량을 가진 도시는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부산이 유일하다”며 “이 같은 해안교량들을 명품화, 관광자원화 해 부산을 대표하는 도시 브랜드로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글이 난삽하게 길어졌지만, 이런 미래도시형 구상안을 전파하느라 애를 써온 본인 입장에서는 7개 교량 전 구간을 차량으로 직접 주행해 보고 싶었던 바람이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가덕도와 부산신항을 방문하게 되었으니 그 감동이 남 다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4년 전에 개통된 세계 최저심도(-48m)의 침매해저터널을 지나 다섯 개의 대형 사장교로 연결되어 있는 거가대교를 통과해서 거제도에 이르렀을 때의 그 심경은, 남들이 알 수 없는 벅찬 감동과 미래를 향한 비전의 충동으로 심장이 터질듯했다.  
▲ 거가대교 전경   얼마 후 거가대교를 지나 거제도를 횡단해서 마침내 숙박지인 ‘통영’에 도착했다. 이 ‘통영’시는 원래 ‘충무’ 였으나 도시명을 통영으로 개명했는데, ‘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을 줄인 말이라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위업과 유적이 살아 숨 쉬는 지명이다. 한마디로 말해 ‘칼의 노래(김훈 소설)’가 울려 퍼지는 ‘역사의 성지’에 당도한 것이다.

Ⅵ. 비가 와서 속타는 조선족 가족들
  한밤중에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 후다닥 잠을 깼다. 한반도 남부지역에 형성된 저기압권이 많은 비를 동반하고 있어서 하루 종일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를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지만, 여행을 다니는 입장에서는 참으로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조선족 김학명씨는 한국에 온지 12년 만에 벼르고 별러서 중국에 있는 자녀들을 초청해 여름휴가를 왔다고 하면서 어제 저녁부터 연신 불평을 털어놓았다. 우리 내외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심정이었지만, 그분들 입장에서는 너무나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비가 오면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없으니, “남는 건 사진 밖에 없다는데” 라고 하면서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니나 다를까 새벽부터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들은 모텔을 떠나 본디 스케줄대로 케이블카 승강장이 있는 곳으로 가서 아침 식사를 하면서 당일 여행 코스를 어떻게 잡을 것인지 의논했다. 가이드가 어제 저녁 자갈치 시장에서부터 젊은 청년으로 바뀌었는데, 그는 조심스럽게 우리들의 의견을 조정해 나갔다. 결론적으로, 한려수도를 조망할 수 있는 한국 최장 길이의 케이블카 승강은 취소키로 했다.

이 통영 케이블카는 2008년 개장 이후 770만 명의 관광객을 태운 덕분에 ‘국민 케이블카’로 불리면서, 지역경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남해안 유명 관광시설이다. 2000년대 초반 환경단체 등의 반대에 부닥쳐 케이블카 건설이 무산될 위기에 놓였지만, 통영시가 최신 공법을 적용해 중간지주(53m)를 한 개만 세우고, 미륵산 정상 도착지의 탐방로를 전부 나무데크로 설치해 환경 훼손 논란을 잠재우는 등 주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이룩한 성과로 정평이 나 있는 곳이다.

비가 오고 안개가 끼어 정상에 올라가 봐야 한려수도를 조망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일행들은 아쉬움이 컸지만 케이블카 승강을 취소하고 ‘외도’관광에 올인 하기로 했다. 실은 ‘외도’관광도 성사여부가 불투명 했다. 그러나 이곳은 꼭 보고 가야하겠기에, 배가 뜰지 안 뜰지 알 수 없지만 아침식사를 마치는 대로 구조라 항 선착장으로 가서 대기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외도’관광을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런데 가이드가 인심쓰듯 한 가지 옵션을 제안해 주었다. 그것은 케이블카를 못 탄 대신에 부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거제도에 있는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관람시켜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내심으로 뛸 듯이 기뻤다. 왜냐하면 여기까지 와서 꼭 가보고 싶었던 곳 중의 하나가 바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이었기 때문이다.

Ⅶ. 일제(日帝)가 파 놓은 충무해저터널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구조라 항으로 가는 도중에 뜻밖의 횡재(?)를 하나 만났다. 그것은 다름아닌 과거 일제시대에 파 놓은 충무해저터널을 알리는 이정표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조선족일행들이야 어찌 이를 알겠냐마는, 실은 나는 본인이 대표로 있는 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을 통해 설립 초창기부터, 한일해저고속철도와 한중해저고속철도 건설 사업을 병행 실시하는 것이 한반도 역사 발전에 새로운 전환기적 기회를 창출하는 일이 될 것이라는 주장을 계속해온 터이다.

그동안 부산발전연구원이 주최한 ‘부산항만물류발전방안’ 및 ‘부산광역권 신도시개발계획’ 등을 위한 각종 심포지엄에 여러 차례 발제자 또는 토론자로 참여하여 한일해저고속철도를 기축 인프라로 하는 동북아 광역교통망의 관문도시로 부산을 업그레이드 시켜나갈 것을 주장해온 장본인으로서, 옛날 왜정시대 일제가 파 놓은 한일해저터널 시범구간을 알리는 이정표를 만나게 되니 가슴이 뛸 수밖에 없었다.

내심으로는 그곳에 잠시 들렸다 가자고 요청하고 싶었으나, ‘외도’관광이 가능할지 몰라 노심초사하고 있는 조선족 일행들을 생각하니 도저히 입이 떼이질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가이드에게 ‘이곳’ 해저터널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을 해 달라고 요청을 했으나, 뜻밖에도 관광가이드라는 분이 전혀 ‘이곳’ 내용을 잘 모르고 있었다. 통영 출신이 아니라서 모르기도 했겠지만, 한일해저터널에 대한 관심 자체가 지역주민이나 관광객들에게 별로 어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한 낱의 과거 ‘에피소드’형 유적지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국제관계사를 연구해온 필자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팩트’(事實)로 인식되어 왔었다. 그래서 참다못해 일행들을 위해 내가 먼저 아는 데까지 ‘이곳’을 설명해 주었다.  
▲ 충무해저터널과 일본 가라쓰지방 한일해저터널 조사갱 입구   “충무해저터널(길이 461m, 높이 3.5m, 너비1m)은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에 있으며, 통영운하의 바닥 밑을 가로지르는 터널로 1932년에 완성되었는데, 해저터널로서는 당시 동양 최초였다. 인마와 차량이 통행할 수 있고 관광요소도 충분히 있어서 한동안 충무·통영 지방의 명물로 소개되어 왔으나, 바닷물이 스며드는 등 시설이 점차 노후화 되어 1976년에 운하교인 충무교가 완성된 후로는 차량의 터널이용을 금지해 왔다.

일제시대 때 시공된 이 터널은 일본 정부가 한일 간 해저터널을 구상하는 시범구간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학계뿐만 아니라 국민여론상 논란이 컸고, 또한 이를 모델로 하여 통일교가 1986년도에 굴착한 일본 큐슈 가라쓰(唐津)지방의 해저터널 초입부 현장은 양국 간 외교 문제로 등장할 만큼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특히 일본 관료출신 지식인 및 한일우호관계를 지향하는 우익단체에서 ‘일·한터널연구원’을 설립하여 이 사업을 적극 추진하는 과정에 한국 정계에 로비를 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 한일 해저터널 노선 구상안 (부산발전연구원)   한국 측의 한일해저터널에 관한 구상은, 1981년 통일교 문선명 총재가 제안한 이후 1990년 노태우 대통령, 2000년 김대중 대통령 등이 일본에 건설을 제의하면서 양국 간에 관심사항으로 떠올랐던 일이 있으며, 특히 김대중 대통령은 햇볕정책의 연장선상에서 한일해저터널을 경의선 복원사업등과 연계하려는 ‘꿈의 구상’에 집착했던 적이 있다. 그 후 노무현 대통령도 200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식 참석차 내한한 고이즈미 일본 총리에게 “북한 문제가 해결되면 해저터널 착공문제가 경제인들 사이에 다시 나올 것”이라며 터널 개발에 관심을 표명했다는 소식이 있다. (주간동아, 2003년 9월 30일)”
  아무튼 한일 양국 국민의 민족감정, 기술적 가능성, 공사비 부담 등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이 프로젝트는, 일제시대는 차치하고라도 한일수교 이후 본격적으로 논의된 지 3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원론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머물고 있다.

그런 가운데 최근 아시아나그룹의 박삼구 회장이 일본 경단련(經團連)과 한국 전경련(全經聯)소속 재벌기업들과의 대화에서 한일해저터널 추진을 공식 거론했으며, 더 나아가 한중해저터널까지 염두에 두는 동북아 광역교통망건설사업을 주장하면서 선도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

아무튼 충무해저터널을 기점으로 해서 한일해저터널 추진에 관련된 여러 가지 에피소드와 경위를 10분 정도 열을 내어 설명을 해 주고 나니 스스로 기운이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이렇게 떠들어 봐야 이 일이 우리 사회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갑자기 엄습해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과연 한일해저터널 건설이 우리 한반도 경제발전과 동북아경제공동체 결성을 위해 도움이 될지 아니면 오히려 위해가 될지 정확히 예견할 수 없는 불확실성 때문에 본인 스스로도 때때로 많이 갈등해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나는 중국 시진핑 정부가 취하고 있는 글로벌 ‘가오톄(高鐵: 고속철도) 외교’의 확장을 보면서 큰 위기감을 느끼는 만큼, 반드시 한일해저터널을 전제로 하는 한중일광역교통망을 짜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졌다. 그 연유는 6월 30일자 주간조선을 읽고 나서다. 시진핑 주석의 방한이 있기 직전에 발간된 주간조선 2313호 표지의 제목이 이랬다.
 

▲ 주간조선 2313호(2014.6.30)
“시진핑의 숨은 어젠다, 한·중 해저터널”

내용인즉, 시진핑이 복건성(福建省) 당서기로 있을 때 대만과 중국 본토와의 해저터널 건설에 관여했고, 현재 최종 준비단계에 있는 산동반도 옌타이~요동반도 대련 간 123㎞의 해저터널 건설에도 관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 전에도 언급했지만) 아시아나그룹 총수인 박삼구 한중우호협회장을 통하여 한국 정부와도 심도 있는 막후교섭을 해온 것도 시진핑 정부 요인들임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만일 이런 구상(한중해저고속철도건설)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구체화된다고 가정했을 때 오는 가장 큰 리스크는, 한국경제가 ‘중국 변방경제권으로 추락한다’는 점일 것이다. 다시 말해 블랙홀과 같은 중국의 거대경제권에 우리 경제가 완전히 예속되어버리는 사태가 올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불을 보듯 확실하다. 지금도 23%이상 중국경제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중국이 한번 헛기침만 해도 한국은 독감이나 폐렴에 걸릴정도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아무튼 나는 복잡다단한 심정으로 ‘한중일해저터널’에 얽힌 여러 가지 상황을 설명해 주면서, 다시 한번 우리 한반도는 일본이나, 중국 어느 한쪽 편에만 매달려 있으면 결국 상대방의 정치, 경제, 군사력에 예속되어 버리는 결과가 올 것이라는 점을 힘써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관점에서 주창하는 한반도국가발전전략이 곧 ‘Two Wings Strategy’이다. 즉 독수리 같이 양날개를 펼치며 비상하자는 전략이다.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있는 넛 크래커 또는 샌드위치 같은 신세를 극복하고 새로운 역사 전환을 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주도적으로, 적극적으로 양국을 우리의 양쪽 어깨에 매다는 공격적 시도를 해야 된다고 믿어진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한반도가 몸통과 같은 중추적 역할을 감당해서 한중일경제공동체, 곧 유기적이고 운명공동체적인 지역경제통합구조를 형성함으로써 동북아 번영과 평화협력사회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기능주의적 토대 구축작업을 시도해야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신념과 비전이 나의 ‘동양평화사상’의 기저에 깔려있는 기본 철학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상징적으로 예표하는 사안이 곧 한일·한중해저고속철도를 복합적으로 연결하는 동북아광역교통망 건설사업이다. 여기에 스마트 그리드와 같은 광대역 전력망과 에너지망을 복합적으로 연계시키고, 이와 동시에 한중일FTA, 동북아개발은행, 캠퍼스 아시아(유럽 에라스무스운동과 같은 초국경 인재교류 프로그램) 등과 같은 융복합형 기재(機材)를 중층구조형태로 쌓아가는 과정이 곧 동북아공동체사회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겠는가. 그 중간지대에서 중추적 역할을 감당해야하는 지역이 곧 한국과 북한을 포함하는 한반도이며, 그럴 때 비로소 우리 남북한 간에도 정치, 경제, 사회적 통합과정을 거치며 ‘통일국가’를 이루는 전환기적 ‘기회’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의 ‘한반도 통일관’이다.

(‘어휴, 글이 너무 길고 자꾸 복잡해진다. 휴가에 관한 ‘글’을 쓴다고 시작한 게 어찌 하다 보니 이상한 방향으로 늘어지는 것 같다. 이제는 그만! 이런 복잡한 생각을 접고 ‘외도’관광에만 올인 하는 것이 좋겠다.’)

▲ 구조라 항 유람선 안내도 (외도 보타니아 + 해금강 코스)   마침내 우리일행들을 태운 미니버스가 구조라 항에 도착했다. 선착장으로 갔더니, 여기 저기서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 있고, 대부분 사람들이 우의를 착용한 채 줄을 서 있었다. ‘외도’로 가는 배를 타기위해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다. 다행히 ‘외도’로 가는 항로의 파도가 그리 높지 않아 배가 출항할 수 있다고 하니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외도’를 지나 거제도에 있는 또 하나의 명소인 ‘해금강’ 관광은 파도가 높아 도저히 갈 수 없다는 방송이 연이어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외도’만이라도 구경할 수 있다는데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아쉬움이 풀리는 심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외도’로 가는 ‘거북선호’ 라는 이름의 유람선에 승선하게 되었다. 그때가 10시 반이었다.

Ⅷ.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외도
  한반도의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섬인 거제도의 구조라 항에서 더 남쪽으로 내다보면 ‘안섬’인 내도(內島)를 지나 ‘외도’가 보인다. 그러므로 ‘외도’는 거제도에서도 ‘바깥’이라 불리는 오지의 외딴섬이다. 이 오지의 외딴섬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으로 탈바꿈시켜 놓은 입지적인 부부가 있다. 이창호·최호숙 부부의 인생 이야기가 곧 ‘외도’의 전부인 셈이다.


▲ 외도해상공원 기념관 내 소개자료
“고(故)이창호는 1934년 평안남도 순천 생으로 1.4후퇴 때 맨손으로 월남하였다. 고려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성신여고에서 8년간 교사활동을 하였다. 그 후 동대문시장에서 의류 원단사업을 활발하게 펼치다 우연한 기회에 맺어진 외도와의 인연을 시작으로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척박한 바위섬을 ‘지상의 낙원’으로 탈바꿈시킨 역사의 주인공이다. 그의 인생 전부를 외도를 위해 바쳤으며, 2003년 3월 1일 고인이 되기까지 마지막 순간까지도 외도를 위해 일을 했다.

부인 최호숙은 1936년 경기도 양주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서울사범과 성균관대 국문과, 이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18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외도를 일구기 시작, 어느새 외도에 있는 풀 한포기와 나무 한그루, 돌 하나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다. 남편의 별세로 홀로된 이후 지금까지 그녀는 외도를 위해 온 열정을 쏟아 붓고 있다.”
이상은 ‘외도해상공원’ 기념관에 진열되어 있는 두 부부의 이력을 전문 그대로 옮겨 쓴 글이다.

내가 ‘외도’의 풍경과 감상 및 정취를 논하기 전에 이 분들의 이력을 먼저 전하는 이유는, 이분들이 가꾸어 놓은 ‘외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일지라도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에 드러난 현상(現象)이지만 그 현상 속에 내재하는 두 부부의 정신적 가치, 즉 자연과 인공을 하나의 합목적(合目的)적인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켜 놓은 그 놀라운 융합형 가치지향의 인생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며 마음에 깊이 새겨두고 싶기 때문이다.

해마다 겪는 태풍과 그로 인한 좌절을 딛고 30여 년 만에 ‘불가능한 낙원’, ‘땅 위의 천국’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해상공원을 가꾸어 낸 이들의 입지전적인 노력과 불굴의 의지는 문자 그대로 ‘오지를 천국’으로 변화시킨 神의 한 수와도 같은 ‘인간승리’다.

▲ 외도해상공원   1995년 개장한 이후 현재 해마다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남해안 최대의 관광지가 된 ‘외도’의 매력은 바로 이러한 ‘인간승리’의 정신적 가치가 곳곳에 혈맥처럼 흐르고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비밀이 숨어 있는 정원’으로 모양을 갖추어 가는 사이에 ‘비너스 가든’, ‘천국의 계단’ 등과 같은 신비한 이름을 달고 수많은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명소가 되어 있는 것이다.

▲ 외도해상공원에서 이승률 이사장 내외   함께 동행한 김학명씨는 눈물을 글썽거릴 정도로 즐거워하고 기뻐했다. 비가 많이 와서 혹시나 ‘외도’구경을 하지 못 할까봐 노심초사했는데, 이렇게 좋은 구경을 가족들과 같이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기분이 얼마나 좋았겠는가! 섬에 도착하여 한 시간 반 정도 관람을 하는 동안, 하늘이 도와서 그런지 비가 그치고 날씨가 아주 평온해졌다.
김씨는 가족들을 이리저리 줄지어 세우면서 사진을 찍어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 내외가 자청해서 번갈아가며 ‘찍사’ 노릇을 해주었다. 우리 내외 역시 고맙고 기쁘기 한량이 없는 심정으로 ‘외도’ 관광을 즐겼다.

▲ 조선족 김학명씨 가족들   그런 가운데 정상부에 있는 커피숍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며 종업원과 대화할 시간이 있었다. 내가 물었다. “여기에 계시면서 제일 좋다고 느낀 점이 뭡니까?” 뜻밖에 30대 여성의 대답이 마음에 깊이 와 닿았다. “좋다하고 찾아오시는 분들이 많아서 참 좋아요. 그게 제일 좋아요.” 그래 맞다. 그 대답이 가장 맞는 것 같다.
이창호·최호숙 부부가 30년을 넘기면서 가꾸어온 이 ‘외도’가 비록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공들여 꾸며 놓은 섬이라 할지라도, 아무도 찾아 와 주지 않는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결국은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더 가치 있고 유명해진 ‘외도’가 된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이렇지 않을까? 우리가 애써 가꾸고 길러온 그 ‘무엇’을 세상 사람들이 공정하게 평가하고 인정해 줄 때 비로소 그 ‘무엇’은 제대로의 가치와 의미를 향유하게 될 것이다. 결코 위선적인 홍보나 가식적인 자랑을 일삼고자 하는 게 아니라, 진실과 순수함으로서의 감화력 있는 공감대가 형성 될 수 있도록 하는 ‘진정성의 소통과 전달’은 우리의 삶을 더욱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발효공정(醱酵工程)’임에 틀림없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내가 왜 ‘외도’를 찾아왔는지 번쩍 정신이 들 정도로 일순 깨달음이 왔다. 그것은 우리 모두 각자의 삶에 있어서 남 다른 ‘외도’를 하나씩 가꾸고 향유하는 ‘멋진 인생’을 살아보자는 각성이었다. 그렇다면 내 인생에 있어서의 ‘외도’는 무엇인가? 글의 지면을 줄이기 위해 빨리, 한마디로 답해 보련다. 내 인생 후반전에 있어서 나의 ‘외도’는 바로 25년째 자비량 봉사로 사역하고 있는 연변과학기술대학(YUST)과 이에 결속하여 세운 평양과학기술대학(PUST)이다. 중국과 북한에 설립·운영하고 있는 두 대학을 통해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공동체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이 남다른 인생 역정과 행로야 말로 내 인생 후반전에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외도’일수 있다. 할렐루야!

▲ 중국 최초의 국제사립대학 연변과기대(연길시 북산가 언덕)  
▲ 남북간 합작 국제대학 평양과기대(평양직할시 낙랑구)   나는 잠시 이런 생각에 빠져 있다가,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 되었다는 아내의 전갈에 몸을 추스려 일으켜 세우면서, ‘외도’란 섬이 비행접시가 되어 우주공간으로 날아오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만큼 ‘외도’는 나에게 새로운 감흥과 기쁨을 선사해 주었다. 이런 점은 나뿐만 아니라 아내도 동일했다.

▲ ‘외도해상공원’ 최호숙 대표의 저서
(2006년, 김영사 출판)
구조라 항으로 돌아가는 ‘거북선’호 유람선 안에서 우리 두 내외는 이창호·최호숙 부부가 가꾸어 놓은 ‘외도의 정서’를 되새기며 그들의 삶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가치와 의미를 더 한층 깊이 있게 소통하고 즐기고 존중하는 그런 기쁨을 맛보았다. 참으로 귀한 진정성 있는 체감관광이 되었다.

(*끝으로 독자들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인생을 살면서 언젠가 꼭 한 번씩은 가족들과 함께 ‘외도’ 관광을 다녀오시도록 권유하고 싶다는 말씀과 최호숙 부인께서 쓰신 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외도(김영사 출판)」를 구입해서 읽어 보십사하는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Ⅸ.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외도’관광을 마치고 구조라 항으로 돌아온 일행들은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인근 식당에서 해물탕으로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비가 그치는가 하더니 또 궂은비가 다시 오는 가운데, 우리 일행들은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방문했다.
 
▲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입구 전시관 앞에서 이승률 이사장   2만평 가까운 부지에 많은 시설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비가 왔지만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한 가지라도 더 보고 갈려고 진지한 태도로 꼼꼼히 관람하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참고사항으로, 거제포로수용소의 설립 경위와 친공 및 반공포로들 간의 유혈사태, 소요 및 폭동 사건, 피해 참상 그리고 폐쇄될 때까지의 운영 실태를 「두산백과」에서 발췌하여 독자들께 기록으로 남긴다.
  “1950년 발발한 6·25전쟁 중 유엔군과 한국군이 사로잡은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거제도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포로 관리에 인력과 경비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 급수가 용이하다는 점, 포로들이 먹을 식량을 재배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점 등이 고려되었다. 포로 수용 규모는 처음에는 6만 명이었으나 나중에 22만 명으로 확대되었다.
1950년 11월부터 섬의 중심부인 일운면 고현리(지금의 거제시 고현동)를 중심으로 용산리·장평리·문동리·양정리·수월리·제산리와 연초면의 임전리·송정리 그리고 동부면 저구리 일대의 총 1200만㎡ 부지에 수용소를 설치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와 함께 부산에 있던 포로들을 이송하여 1951년 2월 말에 이미 5만 명의 포로를 수용하였고, 1951년 6월 말까지 북한군 15만 명, 중공군 2만 명과 의용군 그리고 여성 포로 300명 등을 포함하여 최대 17만 3000여 명의 포로를 수용하였다.

포로수용소는 한국군과 유엔군의 경비 하에 포로자치제로 운영되었는데, 포로 송환 문제를 놓고 북한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와 송환을 희망하는 친공포로로 갈려 대립하였으며 유혈사태를 빚기도 하였다. 친공포로들은 수용소 내부에 조직을 만들어 소요 및 폭동 사건을 일으켰으며, 1952년 5월 7일에는 친공포로들이 수용소장 프랜시스 도드(Francis Dodd) 준장을 납치하는 이른바 거제도포로소요사건을 일으켜 한 달이 지난 6월 10일에야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내 전시시설
유엔군 사령부가 반공포로와 친공포로를 분리 및 분산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1952년 8월까지 북한으로 송환을 희망하는 포로들은 거제도를 비롯하여 용초도·봉암도 등지로,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은 제주·광주·논산·마산·영천·부산 등지로 이송되어 소규모로 분산되었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된 뒤 33일간에 걸쳐 거제도에 수용된 친공포로들이 모두 북한으로 송환됨에 따라 포로수용소도 폐쇄되었다.

잔존 건물의 일부만 남아 있던 포로수용소 유적은 6·25전쟁의 참상을 말해주는 민족역사교육장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1983년 12월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고, 1995년부터 유적을 공원화하는 사업이 추진되었다. 유적공원은 1998년 9월에 착공하여 1999년 10월 1차로 유적관을 개관하였고, 2002년 11월 완공하였다.”

Ⅹ. 반공포로석방사건의 의의
  상기 문단에서 보듯 전쟁포로 문제는 수용 및 관리, 송환 협상 및 이행 절차 등 여러 면에서 고통스러울 정도로 큰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과 국제연합국 및 미국과의 휴전 외교협상이 난항을 겪는 가운데 드디어 특별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그것이 곧 이승만 정부가 결행한 ‘반공포로석방사건’이다. 필자는 군 복무시절(1970년~1972년, 영남대 학훈단 조교로 복무) 반공포로석방사건이 주는 민족사적 의의와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외교적 결단을 높이 평가하여, 남·북 진영 간의 사상적 투쟁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제3의 인문학적 접근방법으로 소설 한권 (제목: 돌아오지 않는 다리)을 써본 경험이 있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이 결행한 반공포로석방사건의 전모를 개략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두산백과 참조).

▲ 이승만 대통령과 반공포로석방(1953.6.18)   “1953년 6월 18일 새벽 0시를 기하여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남한에 수용 중인 북한 및 남한 출신의 반공포로를 석방한 사건이다.
1953년 6월 8일 판문점휴전회담에서 체결된 ‘포로송환협정’에는 귀향을 원하는 포로를 휴전 성립 후 60일 내에 송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미방위조약 체결 전에는 휴전할 수 없다고 반대하던 이승만은 반공·애국 동포를 북한으로 보낼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며 그 협정을 묵살하였다.
마침내 이승만은 포로석방을 단행시켜, 영천·대구·상무대·논산·마산·부산·부평 등 7개 수용소에 있던 3만 7000명 중 2만 7092명의 반공포로 석방을 21일까지 완료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휴전교섭 파기를 위한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미군 감시원을 내쫓으면서 강행된 이 사건은 온 세계에 큰 충격을 주어 국제연합군 긴급회의, 영국의 긴급내각회의, 한국전참전국회의 등을 열게 하였고 휴전을 낙관시하던 미국으로 하여금 이승만의 동의 없이는 휴전이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게 하였다.
북한은 석방포로의 재수용을 요구하였으나 한국은 완강히 거절하였다. 한편 미국이 체결한 협정을 한국이 깨뜨렸기 때문에 한·미 간에도 갈등이 생겼으나 6월 25일 내한한 미국 국무부 차관보 로버트슨과 절충한 끝에 원만한 해결을 보았다.”
  고백하건데, 필자는 군 복무 중 1년 동안 소설을 쓸 당시에 거제포로수용소 현장에 한 번도 가 보지를 못했고, 그 후에도 장승포, 충무, 고성 등에 잠깐 회사용 출장을 다녀간 경우는 있었지만 이 지역을 의도적으로 탐방해볼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소설 구성에 필요한 참고자료로는 6.25전쟁 관련 국방부(육본) 문건 자료와 해외 외교문서, 포로 석방 수기 등을 약간 참조했을 뿐이다. 여기에 작가 나름의 소박한 상상력과 전쟁 중에 있을 만한 러브 스토리를 버물려 ‘습작’형태로 쓴 글이기 때문에 문학적 가치는 별로 없었다고 자평해본다.

다만, 군 복무중이지만, 한국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뜻’을 갖고 ‘6.25전쟁’이라는 우리 민족 최대의 동족상잔 비극과 공산·자유 진영 간의 사상적 대립 및 갈등의 폐해를 어떤 형태로던 극복해 보려는 철학적, 애국적, 인도주의적인 의지만은 높이 평가해줄만하다고 본다.

그 습작물은 불행히도 탈고 시점에 불태워 없애버리고 말았지만, 언젠가 완성도 높은 전쟁소설로 다시 한번 재구성해 보고 싶은 의욕이 남아 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의 줄거리는 대략 이러했다.

ⅩⅠ. 미완의 소설, 「돌아오지 않는 다리」

“1950년, 주인공 김하빈은 평양의대를 졸업한 후 대학병원에서 인턴 코스를 밟고 있었다. 6.25직전에 차출되어 군의관으로 근무한지 한 달도 안 되어 인민군과 함께 38선을 넘었다. 여주인공 최정희는 중학교 교사로 복무 중 타자수로 차출되어 인민군 부대장의 행정비서로 참전했다. 두 사람은 서울 점령 시 지휘관 회의 때 만난 이후 상호교감을 나누며 연인관계로 발전한다.

낙동강 전선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을 때 김하빈은 미군기의 공습으로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고, 이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인민군이 퇴각할 때 부상병들과 함께 유기 당한다. 최정희는 상관인 부대장 이진철의 강제로 본의 아니게 김하빈과 헤어진다.

마을에 숨어 있던 김하빈은 다른 부상병들과 함께 미군의 포로가 되어 대구, 부산을 거쳐 거제도포로수용소에 수용된다. 의사 신분으로 포로생활 2년을 지내는 동안 온갖 고초를 겪었으며, 친공집단과 반공집단사이에서 처절한 사상적 갈등과 학살, 소요사건 등의 참상을 경험한다. 그러다가 친공집단으로부터 테러를 당할 위기에 처하자 김하빈은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구조라 항 등대로 피신한다. 거기서 등대지기의 딸 손인숙을 만나 헌신적인 도움을 받는다.

심신을 회복한 김하빈은 손인숙의 안내로 거제도를 떠나 부산으로 가서 한미합동헌병대에 자수 한다. 조사과정에서 거제도포로수용소의 참상이 상부에 보고된다. 그 후 김하빈은 수복된 서울로 이송되어 육군 본부와 기무사 요원들로부터 재조사를 받았고, 어느 날 경무대로 불려간다. 거기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난다. 그 후 김하빈은 대통령 특명으로 국군 의무장교로 보임을 받고 반공포로석방을 위한 특수임무에 중요인물로 참여한다. 드디어 6월 18일, 반공포로석방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영국 처칠 수상이 면도를 하던 도중에 급보를 듣고 놀라서 얼굴을 다쳤다는 일화가 전해질정도로 이 사건은 세계를 경악시켰다.

그동안 김하빈의 연인 최정희의 역경도 사뭇 컸다. 낙동강 전선에서 퇴각할 때 부대장 이진철로부터 폭력을 당하며 북쪽으로 끌려가다시피 한 최정희는 그 다음해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남하 할 때도 이진철의 부관 겸 정부(情婦)로 인민군 진영에서 복무한다. 중공군의 전투 지원으로 충청도 일대 중부 전선까지 내려온 이진철 부대는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한국군과 UN군의 공세에 막혀 보급로가 차단되자 덕유산 빨치산부대로 편입되어 장기 전선을 꾀한다.

그 후 빨치산 부대에 잔류하고 있는 동안 이진철의 아이를 출산한 최정희는 공산게릴라들이 인근지역에 출몰하여 평민 학살을 일삼는 만행을 보고 심한 정신병을 앓기도 한다, 그런 중에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한 한국군 및 경찰의 집요한 공격으로 이진철부대도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이 과정에 이진철이 전투 중에 사망한다.

어린아이를 등에 업은 채 능선을 따라 도망치던 최정희는 결국 국군토벌대에 붙잡혔고, 나중에 다른 게릴라 생존자들과 함께 대전감옥소로 수감된다. 그런 과정에 부대장의 정부(情婦)라는 신분이 탄로 나면서 처형 위기에 놓인다. 그때 최정희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군목(軍牧) 김성진 소령이 구명운동을 펴 처형 직전에 간신히 구제된다. (이때 최정희는 기독교 복음을 처음으로 접한다.) UN군과 북한 인민군 간에 포로 송환협정이 타결되자, 이 소식을 접한 최정희는 자진해서 북쪽으로 돌아갈 의사를 표시했다.

당시 귀환 의사를 밝힌 포로들의 건강상태와 심리전을 총괄하고 있던 김하빈 대령은 포로심사 현장에서 마침내 최정희와 극적인 재회를 하게 된다. 그 후 최정희는 김하빈의 권유로 남한에 체류할 뜻을 비쳤으나, 김하빈을 돕고 있는 구조라 항 등대지기의 딸 손인숙을 만나본 다음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북한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1953년 6월말, 드디어 남북한 포로 송환이 실시되었다. 김하빈과 손인숙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있는 강 언덕위에 올라 저 멀리 북으로 떠나는 최정희를 송별한다.”
  소설의 제목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사랑하는 남녀의 운명적 이별, 전쟁과 평화, 이승과 저승, 생과 사(死)의 갈림길에서 몸부림치는 인간군상(群像)의 한계상황, 그리고 친공포로와 반공포로 간에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이념 갈등의 상흔들을 상징하며, 존재의 본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간 실존(實存)의 비극을 예표하는 메타포(metaphor)로 이해해 주면 좋을 것 같다.

아마도 내 기억에 소설은 이렇게 끝난 것 같다.
 
“당신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내가 떠나는 것이 당신을 위해 좋을 거예요. 나····. 정말이지, 떠나기 싫어요, 그러나 가야 해요. 내가 여기 있으면 안되요. ···· 사랑해요. 나를 잊지 말아줘요. 난 당신만 생각하며 이날까지 살아왔어요. 다시····. 올께요.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겠지만, 그래도 난. 항상 당신 곁으로 돌아올 거예요. 영원히····. 영원히 당신 곁으로 돌아올 거예요.”
김하빈의 품에 안겨 콧물까지 흘리며 서럽게 울던 최정희는 그렇게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 떠나갔다.
  돌아올 수 없는 길임을 알면서도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말하는 최정희의 고백은, 그의 개인적 비극일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 주어진 실존적 한계상황임을 일러준다. 전쟁, 죽음, 생이별, 남북 분단상태, 거역할 수 없는 국제정세의 흐름 등 이 모든 한계상황 속에 갇혀 있는 민족적, 국가적 상흔의 덫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도대체 언제쯤이면 이 처절한 한계상황으로부터 풀려날 수 있을까? 통일시대가 오면, 통일이 되면 이 검은 상흔이 지워질까?
 
▲ 반공포로석방 (1953.6)
오! 하나님!
「돌아오지 않는 다리」위로 남북한 간에 새로운 화해와 소통의 재결합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이를 통해 죽음의 껍질을 뚫고 자유와 평화의 노래가 온 천지에 울려 퍼지는 그날이 어서 빨리 올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래야만 혹여 그때쯤이면, 저렇게 슬피 울며 떠났던 최정희도 꽃단장을 하고 다시 연인의 품으로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진정으로 하나의 몸으로 되살아나게 하는 부활의 생명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ⅩⅡ. ‘명량대첩’으로 이어지는 1박2일의 ‘특별한 휴가’
  이번 여행은 기대 이상으로 많은 추억과 민족적 정감을 느끼게 했다. 또한 새로운 희망과 각성을 깨닫도록 만드는 정신적 활력소 같은 휴가가 되었다.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관람하고 부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조선족 일행들에게 그런 정신적 활력을 전수해 주기라도 하듯 한반도 통일을 위해 조선족 사회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 사명이 얼마나 고귀한 일인가를 애써 강조했다.

중국에 있는 조선족들은 중국과 북한, 중국과 한국 사이를 오가며 얼마든지 유용한 매체 역할과 중간 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중국 개방이후 지금까지 경제·문화·인적교류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유용한 중간 통로역을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향후 통일 문제를 풀어 가는데 있어서도 그 어느 집단보다 생산적이고 융합적인 매체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집단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점을 애써 강조하면서, 나는 그들에게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을 일깨우며 부탁조로 말을 이어 갔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탈북자와 조선족 간의 화합이다.

북한이탈주민 즉, 탈북자들과의 관계에서 조선족 사회가 ‘큰 집’, ‘형님 댁’이라는 개념으로, (지금까지도 잘해왔지만 앞으로 더욱 중요한 일을 함께 도모하기 위해) 좀 더 넓은 이해와 아량으로 이들을 적극 끌어안아주기를 요청했다. (과거)일제강점시대와 (현재)북한통제사회를 통해 역사적 고통을 같이 감내해온 동변상련의 형제로서,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도래할 한반도 통일시대를 대비하는 차원에서 한마음의 동지로, 한 시대의 동역자로 힘을 합쳐 나가는 선한 일꾼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러면서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우리 이런 큰 뜻을 품고 열심히 살아가면서, 각자의 인생에서 ‘외도’와 같은 멋진 작품을 하나씩 남겨보자, ‘외도’를 가꾸듯 자식들을 잘 교육하고, 이웃과도 잘 소통해서 당대에 행복한 가정을 이룰뿐만 아니라 대대로 명문 가정을 일으키는 진정한 의미의 인생 승리자가 되어보자고 격려했다.

실은, 이 말은 나 자신에게 스스로 하고 싶었던 격려의 말이기도 하다. 나도 모르게 열을 올리며 일장 훈시와도 같은 스피치를 하게 되었는데, 의외로 다들 싫어하지 않고 진지하게 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박수까지 쳐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 미니버스가 거가대교와 가덕도, 명지공단, 을숙도를 지나 부산시내로 진입했으며, 마침내 자갈치 시장에 당도하여 마지막 저녁 식사를 마쳤다. KTX 출발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쉴 틈도 없이 곧장 부산역으로 돌아온 우리 일행들은 역사 대합실 로비에서 아쉬운 작별인사를 했다. 조선족 김학명씨 가족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1박2일간의 아름다운 인연을 마음에 되새기는 ‘이별의 정’을 나누었다. 행복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우리 두 내외도 너무나 기분 좋은 감흥을 느꼈다.
여행이 주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여행을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처럼 소중한 것이구나 하는 점을 다시 한번 깨닫는 여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짧은 1박2일의 여정이었지만, 부산 해운대를 출발하여 광안대교/부산항대교/영도/ 남항대교/송도/을숙도대교(낙동강 하구둑)/가덕대교/부산신항/거가대교/거제도에 이르는 ‘블루 오션 브릿지’의 대로를 통행하며, 동북아경제공동체의 관문수역인 ‘거부경제권(巨釜經濟圈)’을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21세기 한반도의 미래상을 꿈꾸게 된 것, 참으로 귀하고 행복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래, 이 꿈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자.
혼자서 꾸는 꿈은 개꿈으로 끝나지만, 여럿이서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본 연구재단을 섬기는 임회원 동지 여러분!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공동체의 이상을 위해 우리 다 함께 꿈을 나누고, 그 꿈을 현실화 시키는 과정에 각자 멋진 ‘외도’ 하나씩 가꾸어 보지 않으시렵니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으로 우리의 인생을 다시 한번 새롭게 가꾸어 보지 않으시렵니까.

KTX를 타고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나는 이런 여망과 집념을 되뇌이며, 1박2일 휴가가 끝나는 다음날인 8월15일에 있을 ‘특별 이벤트’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더욱 설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영화 ‘명량’을 단체 관람하고, 이어서 영화관 인근에 있는 강남 터키전문음식점(파샤)에서 오찬을 함께하는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8.15광복절 기념행사 ‘번개팅’(2014.8.15)   제 69주년 8.15광복절 기념행사로 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에서 북한이탈주민, 중국동포(조선족), 중국인,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선착순 30명 규모의 ‘번개팅’을 기획한 것이다.
목적은, 세계 해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중의 하나인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의 기개와 전략과 희생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우리들이 제2의 광복, 즉 한반도 통일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는 ‘시대의 역군’이 되어보자는 취지로 특별모임을 가지려 한 것이다.

▲ 영화 <명량>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必生卽死 必死卽生)”

진실로 가슴 떨리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신념이요, 온몸을 불사르는 ‘거룩한 헌신’의 열정이다.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호국명령’을 우리 회원들 모두가 ‘신성한 결단’으로 받아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나는 마음속으로 1박2일간의 특별휴가를 마치는 마지막 독백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제게도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일할 수 있는 연한이 아직도 12년은 족히 남아 있으며, 함께 일할 자식과 이웃들도 최소한 12명은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게는 예수님을 따르는 12명의 사도들이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 있어서 늘 저와 함께 신앙의 동역자가 되어 주시니 제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러하오니 하나님! 저에게 분단된 한반도의 사막에 강을 내고 각축하는 동북아의 광야에 길을 내는 비전과 능력, 그 아름다운 지혜와 빼어난 용기를 더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통일의 그날이 오기까지 ‘동북아 블루오션’의 길목을 지키는 선봉장이 되게 하옵시고, 마침내 우리 한반도가 새의 양날개를 퍼덕이듯 중국과 일본을 양 어깨에 매달고 저 푸른 창공으로 비상하는 독수리의 몸통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KTX가 서울역에 도착한 시간은 8월14일 밤 9시 40분이었다. 참으로 긴 여행을 다녀 온 듯한 감회와 기분 좋은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끝으로, 여기까지 함께 동행하며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충만히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14년 9월 5일
(사)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 이사장 이승률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