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영
(사)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 부설
동아시아국제전략연구소 소장
2014년 9월 25일부터 28일까지 연변과학기술대학 초청에 따라 아시아공동체론 강좌의 일환으로 실시된 “동아시아 평화안보 : 현 실태와 미래전망” 제하의 특강과 봉오동 전투지역, 두만-훈춘-핫산을 연하는 북·중·러 국경지역 일대를 다녀왔다.
   또한 백두산 정상에서 천지로부터 매섭게 휘몰아치는 강풍과 맞서면서 꿈틀거리는 신비의 민족의 영산(靈山)을 다시 한 번 접할 수 있는 귀한 경험을 하고 귀국하였다.

6·25전쟁에 참전한 학도병이 사랑으로 세워진 연변과학기술대학
     연변과기대는 6·25전쟁에 참전하였던 김진경 15세 중학 3학년 학도병이 수많은 죽음을 보면서 우리와 대항하여 싸웠던 북한과 중국 조선족 동포들에게 전쟁이 아닌 보다 나은 길을 보여주기 위해 일하겠다고 한 다짐이 결실을 거둬 세워진 대학이다.
   “죽고 싶지 않으면서 죽음을 강요당하는 것을 정당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의 생명보다 더 위에 있는 이념이라면 그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모든 이념 자체는 지극히 사회적인 것이고,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지 이념을 지키기 위해 인간의 생명을 내놓아야 한다면 이는 지켜야 할 가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김진경 소년, 그는 “전쟁이 아니라 진정한 평화로 이끄는 하나님의 사랑과 협조의 길이 보다 나은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정신과 소명으로 설립된 연변과학기술대학, 이를 바탕으로 북한 당국의 요청에 따라 평양과학기술대학교가 개교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과거를 접고 새로운 미래를 위해 남북이 오늘 대화를 하자
     3년 만에 다시 찾은 연길, 말끔히 단장된 모습이 예전의 옌지(연길)가 아니었다. 공항에 마중 나온 김태현 교수와 조교의 안내를 받고 호텔에 여장을 푼 후, 김 교수의 안내를 받아 연변과기대를 찾았다. 필자가 김진경 총장님께서 이따금 연변과기대 대외부총장으로 봉사하고 계신 이승률 이사장이 이끄는 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을 방문하여 메시지 있는 특강을 들었지만 개별적으로 깊은 말씀을 나눈 적이 없었던 터라 총장님을 예방할 수 있었던 것은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본인의 드라마틱한 삶을 엮은『사랑주의』저서를 주면서 연변과기대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기 위해 방문한 필자를 환영해주었다.
   9월 24일 평양과학기술대학에 다녀오셨다는 총장님, 9월 30일 서울상공회의소에서 개최되는 통일부 후원 세미나 기조연설을 하실 계획이라는 총장님은 “박왕자씨 사건으로 6년 이상이 지났는데도 금강산 관광문제가 아직도 풀리지 않은 남북관계 상황이 아닌가. 6·25전쟁을 일으켰던 김일성도, 천안함 연평도사태의 당사자였던 김정일도 떠난 상태에서 과거를 접고, 새로운 인물과 미래를 위해 오늘 대화를 해야 되지 않는가? 9월 30일 연설에서 남과 북이 새로운 물꼬를 트기 위해 서울과 평양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할 것을 제안”할 생각이라고 말씀하신다.
   연변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공동묘지터 위에 이처럼 우뚝 세운 학교 캠퍼스 곳곳을 김 교수의 안내를 받으면서 둘러보았다. 조선족을 중심으로 고려인, 한족(漢族)과 한국을 포함한 외국에서 온 유학생 등 2천여 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국, 미국, 캐나다, 호주 등에서 오신 250여명의 다국적 교수들이 가르치는 국제대학인 연변과학기술대학은 2,600여개의 중국 대학 중에 100대 중점대학으로 선정되었다. 1992년 9월 16일 개교한지 20년 만에 이처럼 명성을 떨치는 원인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이념을 넘어 사랑주의로 학교를 설립한 김진경 총장의 그 높고 깊은 비전과 헌신의 리더십, 과학기술정보화 시대에 전문성과 전인격적인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온 자원봉사자인 교수들의 투혼이 어우러진 학교에서 배운 6천여 명의 졸업생이 중국의 곳곳에서 귀하게 쓰임 받고 있기 때문에 거두어드린 결실이 아닐 수 없다. 만나는 학생마다 한결같이 교수들에게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는 청아한 모습들이 그렇게 대견스럽고 아름다울 수 없다.
   김진경 총장의 사모님께서 정성스럽게 모아온 민속 공예품들이 즐비하게 진열된 복도를 지날 때 자연스럽게 민족의 얼과 혼을 체감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대학에서 일하다 순직한 교직원들의 골회(骨灰)를 조각공원에 뿌려 추모하고 있었다. 최근 작고하신 대한민국 원자력 1호 박사이신 박인용 교수님의 이름이 조각비에 새겨져 있었다. 캠퍼스의 구석진 곳에 기아엔진을 놓고 연변기술학원으로 시작했다는 연변과기대가 이처럼 번창하여 경상대학의 경우 6층 최신식 건물 등이 들어섰고, 학교 건물과 건물은 서로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 혹한기 영하 30도의 추위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강의실을 옮겨가면서 수강할 수 있도록 지어있었다.
   김태현 교수의 소개로 강의가 시작되었다. 아시아공동체론을 수강하는 40명을 포함하여 연변과기대 상경학부 학생 등 70여명의 학생이 강의실을 메웠다. 마침 학교행사로 하루 앞당겨 실시한 저녁 6시의 강좌임에도 학생들의 수강 자세는 그렇게 진지할 수가 없었다. 참석한 학생들을 살펴보니 조선족이 30여명, 한족이 20여명, 기타 유학생 20여명으로 이루어졌다. 영어로 ppt를 만들었으나, 학생들 모두가 한국어를 알고 있거나 배우고 있기 때문에 한국어로 강의를 하였다.
 
동아시아 격랑의 도전에 응전하기 위한 평화안보 제도화를 통한
공동번영의 길

     “동아시아 평화안보 : 현 실태와 미래 전망” 강좌는 먼저 글로벌 차원에서 전략환경평가로부터 시작되었다. PMESI+PT(Politics, Military, Economic, Society, Infra + Physical Environment & Time) 분석틀에 의해 세계정세를 내다보았다. 오늘 날 세계는 미중 간 패권경쟁이 심화되고 있으며, 각국은 배타적 민족주의와 영토주권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신흥강대국의 부상에 따른 분쟁 가능성이 증대되고 있으며, 인간의 안전과 기본권이 중시되는 인간안보와 자연재해·국제범죄·전염성 질병·기후 온난화 등의 초국가적 위협이 증대되고 있다. 또한 많은 나라들이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며, 지역경제통합이 가속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기독교·유교·이슬람문명 간 충돌이 심화됨은 물론 계층·이념·인종·성별 간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도로와 철도, 항만과 공항, 광케이블 등의 인프라가 국가발전의 바로미터가 되는 시대이며,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고, SNS와 IT, 생명공학, 나노기술 등으로 인류역사상 인간은 초유의 문명된 삶을 누리고 있으나, 조화와 협력을 통해 다양한 도전과 위협에 공동대처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공멸을 자초할 수 있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사진> “동아시아 평화안보 : 현 실태와 미래 전망” 제하의 강의
 
   한편, 동아시아 차원에서 미중 간 전략적 경쟁과 협력이 공존하며, 중일 간 지역경쟁이 첨예하다. 또한 신동방정책과 적극적 개입전략을 추구하는 러시아,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남북한 등 지역차원에서도 요동치고 있는 전략환경이다. 특히 미국의 아시아재균형전략은 미얀마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치적 차원에서 시장경제, 인권, 법치주의 등 보편적 가치를 확산시키고, 경제적으로 앞서가는 한·중·일 동북아 국가는 물론 자원과 새로운 시장인 동남아와 무역 등 경제협력을 강화시켜 나가고, 중국이 국제규범과 질서를 지키면서 평화와 안정을 위해 전략적 협력을 추구하면서도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는 전략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2049년 중국 몽(夢)을 실현하기 위해 신형대국관계론에 따라 미국과 핵심이익을 상호존중하면서 글로벌 및 지역이슈에 대해 전략적 협력을 추진하겠다는 국가전략 하에 지속적인 경제발전에 긴요한 해상무역을 보장받을 수 있는 해로(海路) 보호와 영토 등 핵심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공세적 해양확대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은 자국의 안보를 미국에만 의존하기에는 너무도 위협적인 중국과 북한의 도전에 대처하기 위한 국가안보전략을 재정립하고 과거의 대동아공영권의 웅지를 재현하기 위한 비전하에 역사적 수정주의를 내세우면서 적극적 평화주의와 집단적 자위권을 추구하고 있다. 러시아는 크림을 전격 병합하고 우크라이나사태 개입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구소련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야심과 극동러시아의 집중적인 개발을 위한 신동방정책은 지역내 유사시 영향력 행사에 보다 공세적일 것이다. 한반도의 남한은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남북한 신뢰를 구축하여 통일시대를 열어가고, 동시에 지역차원에서 경제교류협력은 활성화되었으나 정치·군사적 갈등은 오히려 심화되는 동아시아 패러독스를 극복하기 위해 환경 악화 방지, 원자력 안전, 자연재해 대처 등을 통한 동북아평화협력구상과 중앙아시아의 자원과 우리의 기술과 자본이 어우러지고 이곳과 물류가 가능하도록 북한을 통과하는 도로와 철도가 중앙아시아로 연결되는 유라시아 구상을 갖고 있다. 북한은 경제건설과 핵무장 병진노선을 채택하여 주민의 삶을 개선하려 하나 지난해 2월 12일 3차 핵실험과 금년 들어 20여 차례에 이르는 미사일 발사와 방사포·포병 집중사격으로 더욱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고 경제적 제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마당이 성행하고 자영농업 시행 등으로 일부 경제가 활성화되고 있으나 장성택 숙청·처형과 핵보유 야망을 포기하지 않는 북한의 행태 등으로 북중경제협력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남북이 분단된 상태 보다 통일된 한반도가 한민족은 물론 지역 내 평화와 안정, 공동번영에 기여할 것이다. 한반도가 둘로 나눠져 있는 이상, 지역 불안정과 불확실성은 물론 갈등과 대립, 충돌의 진원지가 됨에 따라 동북아 지역공동체 형성에 암초가 될 것이다.
   한편, 러일 간 쿠릴/북방영토분쟁, 한일 간 독도/다케시마분쟁, 남북 간 NLL분쟁, 한중 간 이어도/수옌자오 해양관할권 분쟁, 중일 간 센카쿠/댜오위다오분쟁, 중국·대만·필리핀·베트남·말레이·브루나이 간 난사군도·남중국해 분쟁 등의 영토분쟁은 가스, 원유, 희토류 등 엄청난 자원과 풍부한 어족자원은 물론 주요한 해로가 지나는 길목에 있어 결코 양보할 수 없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러한 첨예한 이해관계로 인해 자칫 무력충돌로 비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군사적 강점(强占)이 아닌 공동개발을 통한 윈윈전략을 추구하고, 위기를 막는 핫라인 등 위기관리시스템 구축이 절실하다. 특히 동북아는 한·중·일·러·북한과 군사력을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치열하게 군비경쟁을 하고 있는 지역이자, 방공식별구역 확장에 따른 중첩문제는 물론 역사문제, 배타적 민족주의 등으로 세계 어느 지역보다도 무력충돌 가능성은 물론 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수 있는 지역이다. 동시에 지역의 안정과 평화가 보장된다면 높은 수준의 무역과 직접투자 등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추구하고 있는 지역이다. 유교 문화의 동질성과 교육과 관광의 상호교류 등 세계 어느 곳 못지않은 기회요인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도전요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기회요인을 적극 활성화하기 위한 지름길이며 지역 내 평화안보를 제도화시키는 데서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한·미·중·일·러는 물론 북한과 몽골까지 아우르는 동북아평화안보 아키텍처를 실현하는 것이다. 지역 내 국가들 간 정상회담을 통해 신뢰를 구축하고, 외교·국방·재무장관이 함께 회의를 통해 지역 내 안보와 경제를 연계한 지역 이슈들을 협의, 전략을 개발하며, 한·중·일 3국협력사무국을 모체로 동북아협력사무국 산파역을 담당하면서 안보·경제협력인식공동체 구축을 위한 캠페인과 안보 및 경제협력교류 활성화 방안을 강구하면서 동시에 자연재해, 원자력 안전, 환경악화 방지를 위한 대응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조기경보시스템 구축과 우발사태 대비를 위한 시뮬레이션센터 운용, 실제 사태 발생 시 즉각 전개해서 인명과 재산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군과 경찰, NGO로 구성된 신속대응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동시에 동북아의 갈등과 출돌의 진원지인 한반도가 평화롭고 안정되면서 동북아 역내국가 모두가 잘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3자간 소다자주의가 다차원적으로 병행 추진될 필요가 있다. 한·미·중 간 북한의 국지도발, 비핵화, 통일문제 등에 대해 전략대화를 추진하고, 한·미·일 간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공동 대처하며, 한·중·북한 간 북한의 서부지역의 TCR-TKR연결, 황금평, 개성공단 공동참여를 위한 협력과 한·러·북한 간 북한의 동부지역의 TKR-TSR연결, 가스관 건설과 전선망 구축을 위해 협력하고, 한·일·북한 간 금강산-설악산공동개발, 한·미·중·일·러 및 국제금융기구가 참여하는 북·중·러 초국경지역공동개발을 위한 국제컨소시엄 구축 등을 다차원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이 북한의 경제를 소생시키고 동북아 역내 국가 간 협력체제를 심화, 발전시켜 결국 북한 핵이 무용지물화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전략은 지역의 안정과 평화 속에 공동 번영할 수 있는 간접접근전략이자 전쟁을 통해서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과 승자독식의 세계와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최소의 비용을 투자하여 최대의 효과를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윈윈전략이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지역 내 안보도전과 시련에 대해 우선적으로 자연재해, 환경악화, 원자력 안전 등 초국가적 위협에 공동대처할 수 있는 동북아평화안보구상을 제도화함으로써 신뢰를 구축하고 지역경제공동체를 건설해 나갈 때 비로소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통해 항구적 평화와 번영된 동아시아가 21세기 인류문명을 선도하는 지역이 될 것이다.
   강의하는 중에 김진경 총장님께서 오셔서 겸임 초빙교수증서를 학생들의 박수갈채 속에 증정해주셨다. 필자와 학생들은 총장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지극한 사랑을 접할 수 있었다. 본인께서 착용한 연변과기대 빼지를 빼서 직접 달아주시는 총장님의 따스한 사랑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미국을 포함 주변국이 한반도 통일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있었다. 이에 대해 통일한국이 중국으로 기울 경우, 미국이 원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며 미국이 주도하는 통일에 대해 중국이 원치 않을 것이다. 일본 역시 통일한국이 반일정책을 추진할 때 위협으로 인식하여 통일에 반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북이 주도하는 평화통일이 이루어질 때 미국을 포함 주변국 어느 나라도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민족의 의지와 의사와 무관하게 한반도가 분단되었기 때문에 단순히 남북문제가 아닌 미·중·러·일본까지도 협력과 지지가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는 차원에서 남북은 물론 모든 주변국이 함께 풀어야 할 공동의 과제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젊은 학창 시절의 인생설계는 지렛대와 나침판 역할을 하기 때문에 너무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자아정체를 재정립하고 사명과 비전을 찾아 인생의 중장기 로드맵을 발전시켜 한 학기, 한 달, 한 주,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정진해 나갈 때 승리하고 성공하는 삶이 펼쳐질 것이라고 메시지를 남기면서 강의를 끝냈다.
 
항일무장독립운동과 봉오동 전투
     금번 중국 방문 이튿날 봉오동 전투지역과 포스코건설과 현대상선의 물류단지를 조성하고 있는 훈춘국제협력단지와 북·중·러의 국경이 만나는 방천을 가기 위해 김병진 교수의 안내를 받아 출발했다.
   연길에서 훈춘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따라 펼쳐지는 능선은 청산리 전투와 함께 독립군이 항일무장독립운동을 펼쳤던 봉오동 전투가 있었던 지역이다.
   1910년 한반도가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으로 식민지가 된 후 항일민족저항운동이 국내외에 걸쳐서 전개되었다. 3·1독립운동을 기점으로 민주적 공화제를 지향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 운동과 간도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항일무장 독립투쟁을 하였다. 국내외 각지에서 의열투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항일 독립운동은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줄기찬 민족운동으로서 민주, 민족국가 설립과 주권 회복을 위한 항일운동이었다.
   1850년대 철종시대 3정의 문란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질 때 평안도 함경도 백성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서간도, 북간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길림성에는 1910년대 이주 한국인이 20만 2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였고,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연해주지역에는 1910년 8만 명이 정착하였다.
   서간도 지역에는 이회영 중심이 된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였으며,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1917년부터 4회에 걸쳐 385명을 양성하였다. 노령지역에는 이상설이 중심이 된 권업회를 결성하여 8,579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여 항일전쟁을 하였고 이동휘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다. 북간도 지역에는 간민회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였다.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 용정에서는 3·13운동과 훈춘의 만세시위 운동이 있었고, 동만주 지방에도 독립군이 편성되었다. 1919년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가 청산리 대첩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봉오동 대첩에서 대승하였다. 특히 봉오동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 깊은 협곡에서 집중적으로 훈련을 실시하여 왜군을 유인, 봉오동에서 무찌를 수 있었다.   〈 그림 〉 봉오동 전투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는 1920년 6월 6일~6월 7일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신민단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 남양수비대 예하 1개 중대와 싸운 전투이다. 교전 당시 독립군은 1천 2백여 명, 일본군은 5백여 명이었다. 6월 7일 홍범도는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고 봉오동 골짜기 인근에 포위진을 구축하여 일본군을 유인, 일본군 부대는 선봉으로 올라가던 일본군 부대를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사격을 가하면서 교전이 개시되었다. 고지 정상까지 올라간 홍범도 부대는 이를 내려다보고 일본군에게 사격을 가했다. 6월 7일 오후 1시쯤, 일본군이 봉오동 상동(上洞) 남쪽 300m 지점 갈림길까지 들어오자 홍범도는 신호탄을 올렸다. 삼면 고지에 매복한 독립군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면서 시작된 봉오동 전투는 3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봉오동 승첩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전사한 반면 아군은 불과 4명만 전사했다.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된 북로독군부군은 청산리로 옮겨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연합하여 청산리 대첩을 전개해 나간다.
   한편 1919년 8월 이승만 대통령과 이동휘 국무총리로 구성된 상해임시정부 노선은 지정천, 윤봉길, 김홍일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과 함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와는 별도로 1926년 5월 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을 세우고,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은 중국 항일의용군과 연합작전을 펼쳐 일제 침략군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조선의용군은 일본 관동군 25개 사단 100만 명에 대항해서 팔로군과 연합하여 항일전투를 벌렸으며, 화북전투에서 김무정은 일본군 축출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팔로군과 함께 싸운 조선의용군, 6·25전쟁시 수도 서울 3일 만에 함락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이 내선일체의 기치하에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일제 패망인식이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국내무장봉기론이 대두되었으며, 일제 전시 파쇼에 맞서 비밀결사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1937년 중일전쟁시에 중경임시정부를 수립하고, 1940년 9월 17일 지정천 사령관, 이범석 참모장으로 하는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광복군은 미군 OSS와 연합작전을 실시하였고 국내 침투를 위한 독수리 작전을 준비하였다.
   만주지역은 한국독립군과 조선 의용군이 두 부류로 나눠 동녕현성 전투에서는 한국독립군과 관동군 간 전투, 영릉가 전투에서는 중국 항일의용군과 1941년 1월 10일 팔로군 총정치부 승인 후 김무정을 중심으로 화북 조선청년연합회를 결성하여 정치학습, 유격구 선전활동, 적구 공작반 활동을 전개하였고, 조선의용군 간부들은 모택동의 신민주주의론을 학습하고, 무산계급의 주동 하에 공산혁명에 참가하였다.
   이들 5만 여명의 조선의용군은 관동군을 축출하고 국공내전에 참전하여 장개석 군대를 대만으로 축출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동북항일연군에서 활약했던 보전보 전투에서 첫 명성을 떨친 후 김일성이 남북야영을 통합하고 시베리아로 도피, 88특별여단에 가입하여 빨치산 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바로 김일성은 항일무장전투와 국공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조선의용군 5만 명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출범이후 입북(入北)하여 6·25남침 시 선두제대에서 수도서울을 3일 만에 함락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945년 8월 소련군의 일본 관동군 섬멸
     한편, 1945년 2월 11일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과 조셉 스탈린 소련 수상은 얄타협정에서 독일군이 항복할 경우 일본 본토에 미군이 상륙하고, 소련군이 만주와 한반도에 진주하고 있는 왜군을 섬멸하기로 비밀 합의하였다. 1945년 5월 7일 독일군이 항복하자, 유럽전선에 투입된 165만 명의 소련군이 시베리아대륙철도를 따라 전략적 전개를 하였다. 중소 국경지역에 배치되는 소련군은 8.6, 8.9일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자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파죽지세로 남하, 기동전에 의해 만주에 있는 일본 관동군을 몰아내는 데는 2주도 채 안 걸렸다. 결과 소련군은 사할린과 한반도의 38이북을 장악하게 된다.   〈 요도 〉 1945년 8월 소련군의 일본 관동군 섬멸작전
 
신 북방경제의 북·중·러 국경지대
     애환의 역사를 안고 있는 길림성을 가로지르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멀리는 고구려 선조들의 웅혼이 펼쳐지고 발해의 최북단 성도였던 훈춘지역은 가히 서울에 버금가는 광활함이 전개되고 있었다. 내년 준공을 목표로 고속전철이 이곳 훈춘 인근까지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먼저 김정일 생존 시 중국을 방문하여 귀로길에 올 때는 이곳 도문으로 연결되는 철도를 따라 왔다는 곳, 북중 간에는 19개의 세관이 있다. 북중교역의 80%이상은 단동과 신의주간 이루어지며 이곳 세관으로 진입하는 입구에 10여대의 화물트럭이 보이나 일부 열린 화물트럭이 텅 비어 있었다. 북한에 들어가 북한 자원을 실어올 모양이다. 망원경으로 두만강 다리 건너 원정리 마을 경비병이 보인다.   〈 그림 〉 북중 및 북러연결 철도 및 두만강 유역 개발
     훈춘-두만-핫산을 연하는 소삼각지역개발계획과 옌지-청진-블라디보스토크를 연하는 동북아 신네트워크는 가히 새로운 북방경제의 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는 지경학적인 메카라는 인상을 받았다.   〈 그림 〉 훈춘-나선-포시에트 소삼각지역과 옌지-청진-블라디보스토크 대삼각지역
     중국 상무부에서 밝힌 신 두만강대교의 공식명칭은 중조변경 권하통상구대교이다. 신 두만강대교는 중국 3성 개발계획 중 하나인 창춘-지린-투먼 프로젝트와 북중러 접경지역에 위치한 훈춘, 그리고 북한 나진항으로 이어지는 라인에 위치한 북중국경지역의 연결지점이다. 훈춘 권하세관과 두만강을 두고 북한 원정리를 잇는 권하대교가 늘어나는 물동량에 대비하기 위한 계획이다. 중국은 동해로의 출해권 확보를 위해 2008년 나진항에 대한 50년 동안의 사용권을 획득하였다. 북방경제 내 물류 네트워크상에서 신 두만강대교는 물류의 흐름에 변화를 줄 것인 바, 2008년까지 창춘-지린-투먼구간, 2011년 훈춘-권하세관-북한 원정리-선봉항-나진항 구간의 고속도로 및 확장도로가 개통되면서 동북3성의 석탄, 물류, 농산물이 나진항을 통해 태평양 연안국가와 상하이로 이어진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근혜 정부가 제시한 실크로드 익스프레스와 밀접한 관련이 있은 지역으로 북·중·러 경협지대인 옌지-청진-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大삼각지역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바로 이곳은 북중경협에 대한 재평가와 대한민국의 전략적 지형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곳으로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2003년 중국이 동북진흥계획이 발표된 이후 동북3성인 창-지-투 개발개방 선도지역의 창구인 훈춘은 2012년 4월 중국 국무원이 두만강 지역 국제협력시범구로 북중러 3개국 인접 지대에 자리 잡은 국경 도시이자 국경경제협력단지, 수출가공단지 및 중러 공동무역단지를 통합한 지역이다. 러시아, 일본, 한국 및 길림-홍콩기업이 참여하였고, 국무원이 훈춘 국제협력 시범단지의 건설을 허가하였다. 중앙정부가 두만강지역 협력 개발에 대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동북 3성 집중개발과 국경지대 개발 및 개방 수준 향상, 인근국가들과 경제무역 협력 촉진, 상호 우호협력과 동반성장에 기여할 것이다. 시범단지의 건설 촉진을 위해 종합계획 발전·추진, 인프라 건설, 핵심 산업의 발전 촉진, 체제ㆍ메커니즘 구축에 주안을 두고 있다. 특히 훈춘 국제협력단지내에 있는 포스코-현대국제물류단지는 45만평의 부지에 2,000억 원을 투자하여 1단계 공사를 완성하고 내년초부터 영업을 개시할 예정이며, 2단계 공사가 내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 사진 〉11층 높이의 방천 망해대(望海臺) 및 중러 국경 비석 토수패(土守牌)
     한반도 북단의 국경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끼고 있는 북중 국경선 1,353.2km와 두만강을 끼고 있는 북러 국경선 16.2km로 총 1,369.4km이다. 특이한 현상은 중국이 동해 40여리를 앞두고 더 이상 진출을 못하고 러시아의 차단에 의해서 방천일대에서 영토가 끊긴다는 사실이다.
   중국이 토수비가 세워진 곳까지 20여km 이상 우측 두만강을 따라 북한과, 좌측 도로로부터 10m 내외에 철조망이 있으며 그 너머는 러시아 땅이다. 이는 중국이 치열하게 동해로 진출하려했으나 러시아가 차단하였음을 의미한다. 훈춘까지 75km, 라진항 75km, 블라디보스토크까지 180km떨어진 지역이다.
   나룻배가 유유히 두만강 하류지역에서 어로활동을 한다. 라진-핫산을 잇는 철도가 개 보수되어 최근 개통이 되었다. 마침 방천 망해대에서 북에서 러시아로 철교를 통과하는 기차가 느릿느릿 북상을 하고 있었다.   〈 사진 〉라진-핫산을 잇는 두만강 철교
 
이순신 장군이 무관 급제 후 지켰던 녹둔도
     1432년 세종의 6진 개척이후 우리나라에 편입된 후 400년 동안 우리의 영토였던 녹둔도는 이순신 장군이 무관 급제 후 최초 부임지로서 두만강 하류에 있는 섬이다. 강의 퇴적작용으로 연해주로 연결되었으며 1860년 북경조약에 의거 청나라가 러시아에게 연해주를 제공할 때 러시아 땅으로 편입되었다. 고종은 1889년 청에 반환을 요구했으나 받아드리지 않았다. 1937년까지 고려인들이 살다가 스탈린이 강제이주로 무인도가 되었다. 1984년 북러변경조약에 의거 녹둔도를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게 된다.   〈 그림 〉 녹둔도 분쟁
 

집어삼킬 것 같은 백두산 천지의 회오리 강풍
     세 번째 찾는 백두산이다.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찾는 데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갈 때 마다 민족의 정기가 솟구쳐 오는 체험을 하곤 했던 백두산, 옌지에서 이른 새벽 4시에 출발, 5시간여를 달려 백두산 일대에 진입하면서 상쾌한 기분은 이 지역이 유별나게 웅장한 산림지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장백산으로 불리는 이곳을 관광특구화하겠다는 구상 하에 산 중턱에 꽤나 큰 도시를 만들고 있었다. 사통팔달의 도로망이 구축되고 공공건물 등 거대한 건물이 완공되었고, 아파트, 상가가 들어서고 있다. 1km 남짓 계곡을 따라 백두산 폭발 시 낙진의 잿더미가 쌓여있고 곳곳에 기운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을 볼 때 백두산이 언제 분출할지 모른다는 예측이 틀린 말이 아님을 느끼게 했다. 천지(장백)폭포를 다시 보았다. 백두산 천지에서 수맥을 따라 뿜어 나오는 68m 폭포수의 장관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웅장하게 둘러싸인 암벽산 중턱 사이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가까이서 지켜보노라니 기를 받는 듯하다. 노천 온천이 흘러내리는 것이 인상 깊다. 뜨거운 온천물에 삶은 계란을 사서 먹었다.
   봉고로 갈아타고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곡예길을 수없이 오르는 차안에서 승객들의 상체가 좌우로 넘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운전기사는 대담하고도 난폭하게 운행을 하였다. 중간쯤 올라갈 때는 햇볕이 보여 천지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부푼 기대와 달리 짙은 먹구름과 안개로 인해 정상 4-500m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천지 표지석이 있는 정상에 올랐을 때는 칠흑 같은 먹구름에 강풍이 불어왔다. 철주로 만든 안전지대 난간에 두 손을 불끈 쥐고 천지를 내려다보았다. 천지로부터 용솟음쳐 휘몰아오는 강풍으로 온몸이 날라 갈 것 같은 상태에서 20여분 사투를 하면서 농무와 먹구름으로 첩첩이 뒤덮인 천지를 내려다보았다. 그 사이 천지의 끝자락이 희미하게 보였다가 먹구름과 안개가 휘감으면서 매서운 회오리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 이러기를 몇 번했는지 모른다. 강풍과 함께 날아든 모래자갈들이 얼굴을 때릴 때는 무척 아팠다. 그러나 천지를 보고야 말겠다는 비장감은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었다. 드디어 저 멀리 능선기슭까지 검푸른 천지가 펼쳐진다.   〈 사진 〉 백두산 천지
     백두산 높이 2,750m(북한지역의 장군봉), 넓이 9,165㎢, 둘레 14.399km, 평균수심 213m, 최대수심 384m이다. 그 장엄한 자태가 온통 전율하듯 사로잡는다. 그것도 순간 다시 짙은 먹구름과 안개로 천지의 시퍼런 물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다. 이러기를 3-4차례 하면서 우리민족에게 감당할 수 없는 시련과 도전이 밀려오고 있음을 느낀다. 온힘을 다하여 함께 이 위기를 대처하지 못한다면 한민족을 순식간에 집어삼키고야 말겠다는 위기라는 의식이 온 몸을 휘감아 갔다. 끝까지 천지를 보고야 말겠다는 비장감이 감도는 한국에서 온 젊은이들이 함께 이심전심이 통했는지 버텼다. 드디어 확 트인 천지가 한 눈에 들어 왔을 때 환성과 함께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참으로 감격어린 순간이었다.
   조국은 이처럼 우리에게 무서운 도전을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합심해서 응전하겠다는 비장한 결의로 맞서는 한, 이 시련은 엄청난 온전한 광복의 축복이 올 것을 믿는다. 바로 영산인 백두산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왜 북한은 북한지역의 백두산을 개방하여 남과 북한이 함께 정상을 오르면서 통일에 결의를 다지는 길을 막고 있을까 ? 아니다. 우리는 백두산의 정기와 혼백으로 하나가 되어, 남북이 통일이 되고, 동아시아의 등불이 되어 21세기 인류문명을 이끌어 가는 향도(嚮導)역할을 하는 한민족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한편, 조선과 청나라는 1880년대에 두 차례 걸쳐 백두산과 그 동쪽의 국경을 명확히 획정(劃定)하기 위한 감계(勘界)회담을 가졌으나, 회담은 모두 결렬되었다. 1885년 제1차 감계회담에서는 백두산정계비에 쓰여진 동위토문(東爲土門)의 "토문(土門)"이 두만강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양측이 다투었다. 당시 조선측은 정계비의 위치상 '토문은 두만강과 별개의 강이다'고 주장하였고, 청측은 양국의 기본적인 국경선이 두만강이라는 전제하에 '토문은 곧 두만강을 지칭 한다'고 주장하였다. 1887년 제2차 감계회담에서 조선측은 백두산 산정(山頂)에서 가장 가까운 두만강 상류인 홍토수(紅土水)를 국경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고, 청측은 삼지연에서 흘러나오는 두만강의 지류인 홍단수(紅丹水)를 국경으로 주장했다가 조선측 대표인 이중하의 논리에 밀리자 홍토수의 남쪽 지류인 석을수(石乙水)를 경계로 삼자고 수정제의하였다. 1909년 9월 4일, 조선이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청나라와 일제(日帝)는 간도 협약을 체결하여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고, 백두산정계비를 기점으로 하여 석을수를 그 상류의 경계로 정하였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함으로써 일제가 체결한 조약인 간도 협약은 무효가 되었다. 이에 새로 국경선을 정하기 위해 체결된 조약이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이다.
   조중변계조약은 1962년 10월 12일 북중 간 평양에서 체결한 국경 조약으로, 1964년 3월 20일 베이징에서 양국이 의정서를 교환함으로써 발효되었다. 이 조약은 백두산 · 압록강 ·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양국의 국경선을 명확히 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 김일성과 중국 저우언라이가 양국을 대표하여 서명하였다. 백두산 천지(天池)의 경계선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마루의 서남쪽 안부(鞍部)로부터 동북쪽 안부까지를 그은 직선'으로 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현재 천지의 54.5%는 북한에, 45.5%는 중국에 속한다. 또한, 조약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경계 및 두 강의 하중도와 사주(砂洲)의 귀속에 관한 내용도 담고 있다. 이 조약의 의정서에는 양측 국경의 총 451개 섬과 사주 가운데 북한은 264개의 섬과 사주로 총면적 87.73㎢에 대해, 중국은 187개의 섬과 사주를 포함하여 총면적 14.93㎢에 대해 영토권이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압록강이나 두만강의 경계는 중간기선을 적용할 수 있으나 홍수 등으로 변화 가능성이 있어 하천의 차안과 대안까지를 북중 공유지로 하여 단동에서 탄 유람선이 북한의 강안까지 관람할 수 있는 것은 북중 간 변계조약의 합의에 기인한다.   〈 그림 〉 북중 변계조약에 따른 백두산 국경선
 

사랑으로 남북이 하나가 되고 동북아 공동체 구축에 헌신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하면서

     귀국하기 전 공동묘지 화장터였던 곳에 세운 연변과기대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이곳까지 미친 기적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주님 안에 거하면서 주님의 사랑과 헌신의 자양분을 공급받고 주님 안에 머물고 희로애락을 함께 하면서 친밀하게 만날 때 놀라운 에너지와 축복이 충만할 것을 믿는다.
   사랑으로 학생들을 귀하게 쓰임 받는 인물로 키우고, 사랑으로 남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을 이룩하고, 사랑으로 동북아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헌신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하면서 조국 대한민국의 품안으로 돌아왔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