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바지를 입고 싸우던 옛조상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좀 실례가 되는 말이긴 하지만 절로 웃음이 터져나온다. 그런 루스한 옷을 입고 날쌘 외적과 어떻게 싸움을( 그것도 한두번이 아닌) 할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한복바지의 평면성
    한복이라고 좋은 특징만 있는것은 아니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만큼 또 변화 없는 옷이라고도 할수 있다. 특히 남자들이 입는 바지를 보면 아무리 칭찬해주고싶어도 차마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핫바지를 입고 싸우던 옛조상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좀 실례가 되는 말이긴 하지만 절로 웃음이 터져나온다. 그런 헐렁한 옷을 입고 날쌘 외적과 어떻게 싸움을(그것도 한두번이 아닌) 할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나뽈레옹시대의 남자바지(타이즈)를 보면 그 바지가랭이가 마치 스타킹이나 메리야스의 내의처럼 몸에 딱 달라붙어있다. 서부 활극에 나오는 카우보이들이나 오늘의 청바지가 모두 그렇다.
    그런 옷이라면 한번 입고 세계정복의 야심을 품어봄직도 하다. 어느것이 앞이고 뒤인지, 또 어느것이 박서방 옷이고 어느것이 김서방 옷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한국의 바지는 두루뭉수리다.
    웬만한 스타일리스트도 한국바지를 입혀놓으면 멍청해보이고 헐렁해보이는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온돌방아래목에 앉아 공자왈 맹자왈 할 때나 어울리는 복장이지 분명히 활동적인 옷은 아니다.
    고대에는 대가 녀자나 남자나 치마를 입었다. 그리스, 로마시대만 해도 남자들은 마치 숙녀의 잠옷 같은 내리닫이 옷을 입고 다녔었다. 일본에서는 오늘도 《하카마》를 걸치고 다닌다. 스코틀랜드의 군대 제복은 현재에도 치마로 되여있다.
    그러므로 남자가 치마를 입고 다니는 국민도 있는데 핫바지 정도야 그래도 활동적인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짧은 치마라면 몸을 움직이는데에 있어 핫바지보다는 훨씬 편할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바지가랭이가 그렇게 넓고 비둔한 바지는 모르면 몰라도 한국바지만이 갖는 특징이 아닌가싶다.
    둘째로는 서구의 옷이 립체적이라고 하면 한복은(동양 일반에 해당되는것이지만) 평면적이다. 그 컬러나 줄을 세운 양복바지는 누구나 다 말하고있듯이 립체감을 준다. 그러나 한국의 바지는 줄을 세우는 일이 없이 편편한 그대로다. 평면적이란 뜻이다. 그래서 양복은 부자연하고 한복은 자연스럽다고 평가할수 있지만, 그들이 3차원의 의상을 개척할 때 우리는 2차원의 의상감각밖에는 발견하지 못했다는 리론도 설수 있는 일이다.
    의상뿐만아니라 서구의 문화는 립체적인것이요, 한국(동양)의 그것은 평면적인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립체는 공간이다. 공간을 리용할줄 알았던 그들은 빌딩을 세우고 비행기를 만들었다. 립체속에서 문명의 볼륨이 생겨나고 매스가 생겨났다. 우리에겐 그것이 없었다.


―호주머니가 없는 바지
    셋째로 한국의 바지에는 호주머니가 없다. 호주머니가 옷에 붙어있느냐 없느냐는 꽤 간단한 차이인것 같지만, 거기에는 벌써 과학적인것과 비과학적인 사고의 갭이 놓여있는것이라 할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옷에 호주머니를 달 생각을 하지 않고 따로 주머니를 만들어가지고 다녔다.
    그러고보면 《호주머니》란 말부터가 혹시 《호(오랑캐)의 주머니》, 즉 이방의 주머니란 뜻을 가지고있는것이 아닌가싶다. 방언에 《호주머니》를 《호랑(胡囊)》이라고 하는걸 보아도 그런것 같다.
    어원이야 어쨌든, 호주머니(포켓)는 한국의 발명품이 아니라는 섭섭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가 고의춤속에서 주머니나 쌈지르르 꺼내 부싯돌을 켤 때, 그들은 간단히 호주머니에 소지품을 넣고 꺼내고 했던것이다. 한복바지는 양복바지에 비해 그만큼 비과학적이였다고 볼수 있다.
    넷째로 우리 나라(동양)에는 《팬티》나 《언더셔츠》란것이 없었다. 의상에 있어 내의가 발달하지 못했다는것은 중대한 문제다. 저고리우에 조끼를 입고 조끼우에 두루마기를 입듯 외의(外衣)는 그래도 격식을 갖추며 발전해갔지만, 여전히 알몸뚱이에다 바지를 입고 윗저고리를 직접 입는 풍습은 오늘날에도 다를것이 없다.
    물론 녀성의 의상에 있어서 한국에서는 《단속곳》, 그리고 일본에서는 《고시마키》가 있었지만 이것은 모두 《팬티》와는 개념이 다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한국(동양)에서는 옷을 외식물(外飾物)로만 생각한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내의가 없었다는것은 곧 실속을 차리지 않았다는 말과 통한다.
    물론 경제력과도 관련이 있다. 그러나 어떻게 두루마기까지 입으면서도 불과 보자기만 한 천으로도 만들수 있는 《팬티》를 입으려 들지 않았던가? 그렇게도 도덕적이였던 국민이 어찌해서 《팬티》를 입고 다닐 생각을 하지 못했던가?
    따라서 옷의 가지수에 있어서도 우리의 그것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시간에 따라 《모닝 드레스》, 《애프터눈 드레스》, 《이브닝 드레스》가 있고, 또 집에서는 《홈 드레스》, 파티에서는 《칵테일 드레스》 등을 입는 서구의상의 그 다양한 품목을 볼 때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것 같다.
    한국에는 실상 외출복과 캐주얼한 평상복의 구별도, 그리고 《잠옷》조차도 없었던것이다.



백의시비


    공작새나 극락조의 그 아름다운 날개를 보라. 그런데 한국에서는 남녀관계가 완전히 페쇄되여 그 의상의 색채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기녀(妓女)들이나 신부(新婦)들의 백의가 아니라 유색 옷을 입었던 리유를 생각하면 알것이다.


―백의는 태양 숭배
    한국사람들은 흰옷을 좋아한다고 했다. 옛날 아주 옛날 부여때부터 내려오는 풍속이라 했다. 그래서 심지어 백의민족이란 말까지 생겼던것이다. 어째서 하고 많은 빛가운데 흰색을 택했을가? 또 우리는 정말 흰옷을 좋아했던것일가?
    그 유래를 살피고 그 마음을 헤아린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닌것 같다. 그리하여 그에 대한 억측도 구구하기만 하다.
    누구는 말했다. 그 백색은 태양의 광명을 상징한것이라고… 우리 민족은 태양을 하느님으로 섬겼기때문에, 태양의 자손이라고 믿었기때문에 그 신성한 해빛(백색)을 옷 빛갈로 삼았다는 이야기다.
    누구는 또 말했다. 《지봉유설(芝峯類設)》의 고문헌(古文獻)을 보면 알것이라고. 그것은 명종(明宗) 을축년 이후에 국상(國喪)이 잇달아 일어났기때문이라는것이다. 나라에 상이 있을 때마다 백성들은 흰빛의 상복을 입어야 했다.
    그것이 오래동안 계속되다보니 백의를 입는 습관이 굳어버렸다는 설이다.
    누군가 또 한편에서 말한다. 원나라의 풍속도를 보라. 그들은 흰옷을 입었다. 옷도 지금의 우리 두루마기와 같다. 원나라가 고려를 지배했을 때에 궁정에서는 모두 원의 풍습을 좇지 않았던가! 임금의 식사를 원나라 말을 따 《수라》하고 했듯이, 옷빛도 그들을 따랐던것에 지나지 않는다.
    고려때 농민은 백저포를 입었던것이다. 그러나 논의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 종교의식이나 사회의식이나 혹은 정치적리유에서만 볼것이 아니라, 사회 경제적인 면으로 그것을 따져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필원잡기(筆苑雜記)》에도 적혀있듯이, 사실은 염료가 부족했었다는것이다. 옷에 물을 들여 입을만한 염료가 발전되지 않았다는것이다. 또 그만한 생활의 여유도 없었다. 목화에서 실을 뽑아 원색(백색) 그대로의 천을 짜 옷을 만들어 입기에도 바빴던것이 사실이다. 목화색이 붉었다면 홍의민족이 되였을것이고 그것이 까만 빛갈이였다면 흑의민족이 되지 않을수 없었다는 리론이다.
    그러나 이 말에 대해서 이렇게 추가하는 사람도 있고 이렇게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즉 염료가 발달되지 않았다는것은 그만큼 색채에 대해서 무관심한것이 아니였던가? 본시 의복의 색채는 인간의 성욕을 자극시키는데에서 생겨난것이다.
    공작새나 극락조의 그 아름다운 날개를 보라. 그런데 한국에서는 남녀관계가 완전히 페쇄되여 그 의상의 색채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기녀(妓女)들이나 신부(新婦)들이 백의가 아니라 유색 옷을 입었던 리유를 생각하면 알것이다.


―백의는 순응의 상징
    한국인은 흰옷을 좋아한것이 아니라 할수없이 흰옷을 입는데에 지나지 않고, 한걸음 나아가서는 의상의 색채감에 대해서 둔했던 까닭이라는 리유도 없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이 왜 생겼겠는가. 신분이 높은 임금은, 궁녀는 어째서 백색의 의상을 입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 옆에서 이렇게 부정의 머리짓을 하며 대들 사람들이 있다. 한국인의 얼굴에, 그리고 기후와 자연에 가장 잘 맞는것은 백색이다. 도리여 색채의 미감이 세련되였기때문이다. 황색 대륙의 주민에게는 짙은 남색(藍色)이 어울리고, 한국처럼 화창하고 푸른 하늘밑에서는 흰빛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기때문이라고…
    우리는 백의의 유래에 대해서 이렇게 많은 가설을 세울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백색은 색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난에서 온 사실이다. 이 두개의 시점에서 우리의 백의를 보지 않으면 안된다.
    백색옷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옷감 그대로의 자연색이였음을 부정할길이 없다. 즉 《물감을 들이지 않고 그냥 입었다》는것이 우리가 말하는 백의의 정체인지도 모른다.
    베옷과 무명옷과 모시옷의 색감은 각기 다른 법이다. 원해서 그건 색갈을 만든것이 아니라 주어진 색감을 그대로 좇을수밖에 없었다. 주어진 운명을 운명 그대로 살려고 했듯이, 백의는 곧 순응의 색채였던것이다.
    가난해서, 염료가 없어서 할수 없다기보다는, 즐겨 그럴수밖에 없는 조건에 자기 자신을 순응시켜갔다는데에 한국의 그 비밀이 있다. 한국인은 악마까지도 그게 피할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할 때는 사랑하려고 들었다. 불편을 느끼면서 백의를 입은것이 아니라 백의를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러기에 염료가 있다 할지라도 백색 그것처럼 소박하고 은은한 《옥색》을 물들여 입었던것이다. 화려한 색채에 대한 동경을 억제했다. 현실에의 불만을 억제했다. 그러나 단순한 억제가 아니라, 보잘것 없는 그 형편을 언제나 사랑해보려고 한 운명애였다.
    그러나 우리의 백의는 자랑할것도 탓할것도 없다. 그것은 가난에서 생긴 색채임이 분명하지만, 또한 그것은 우리가 즐겨 입으려 한 옷 색갈이기도 한것이다.
    백의에서 우리는 우리의 운명애와 순응의 그 슬픈 풍속을 보는것이다.



모자의 론리


    《갓 쓰고 망신당한다》는것은 한국의 속담이지만, 바람에 모자가 날려 그것을 주으려고 허둥대는 신사의 꼴을 풍자한것은 영국의 유머다. 그만큼 영국사람과 한국사람은 모자와 체면을 밀접한것으로 생각했다.


―무엇이든 머리에 쓰라
    《충성이 사모(詐謀)냐.》 운운하는 옛날 민요가 있다. 연산군(燕山君)이 왕위에서 쫓겨났을 때 류행되였던 노래라고 한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충성이 실은 사모에 불과한것이었더냐 하는 뜻으로 기회주이적인 조관(朝官)이 향배를 비웃는 말이지만 그것의 연유를 캐면 훨씬 더 함축성 있는 뜻이 된다.
    조선조 궁정의 벼슬아치들은 모두들 《사모(紗帽)》를 쓰고 다녔다. 그리고 의례 그 사모에는 충성이란 글자가 수놓여있었다는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뿐 실제로는 《사모》를 쓰고 온갖 《사모(詐謀)》만을 생각하고 다녔다. 그래서 《紗帽》와 《詐謀》가 음이 서로 같은것을 꼬집어 《충성의 사모냐》하는 유머를 만들어낸것이다.
    또 《사모 쓴 도적》이란 말도 있다. 벼슬아치들이 점잖은 사모를 쓰고 도적질을 해먹었다는 뜻으로 관료의 부패상을 지적한 속담이다. 그러고 보면 당대의 사모는 권력의 상징이며 곧 허위의 상징이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 같다.
    조정에서뿐만아니라 일반인들도 머리에 무엇을 쓰기를 좋아했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이 모자 쓰기를 특히 좋아했던 모양이다. 최남선씨도 언젠가 그 점을 지적해준 일이 있다.
    원래 망건이나 사모는 중국에서 건너온것이지만 중국이상으로 널리 류행되였고, 그 기술도 그들을 릉가할만큼 발달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실이 아니라 인모(人毛)나 말총으로 망건을 만드는 방법이 생겨났고, 그것이 도리여 중국에 역수출되여 《마모 망건(馬毛網巾)》으로 애용되였다는것이다.
    사실 우리는 모자의 왕국이였다. 모자를 쓰기 좋아했다는것은 그만큼 례의가 밝았다는 뜻으로 해석될수도 있다.
    유럽에서는 영국인들이 특히 모자에 대해 관심이 크다. 말하자면 서양의 《실크 해트(영국)》에 대항할수 있는것은 동양의 《갓(한국)》이라고 말할수 있겠다.
    《갓 쓰고 망신당한다》는것은 한국의 속담이지만, 바람에 모자가 날려 그것을 주으려고 허둥대는 신사의 꼴을 풍자한것은 영국의 유머다. 그만큼 영국사람과 한국사람은 모자와 체면을 밀접한것으로 생각했다. 모자는 신사와 군자를 만들어내는것이다.
    영국의 수필가 체스터턴은 모자에 대해서 참으로 기발하고 풍자적인 예언을 한 일이 있다. 언젠가 바람이 몹시 부는 봄날의 언덕에서 신사 숙녀들의 모자줏기대회가 열리게 될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제각기 바람에 날려 뒹구는 모자를 주으려고 신사 숙녀들이 허둥대는 모습은 하나의 스포츠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으며, 틀림없이 많은 관객들의 갈채를 받게 될것이라는 의견이다.
    모자는 신사 숙녀를 한층 근엄하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있다. 그래서 《갓 쓰고 망신당하는 일》은 그 역효과에 있어서도 만만찮다.
    모자를 사랑하고 모자의 위엄을 아는 국민들만이 《갓 쓰고 망신당하는》 그 묘미를 절실히 맛볼수 있는것이  아닌가싶다.



―모자는 례의의 기발
    그런데 영국보다도 한국이 한층 더 모자의 존엄성을 인식하고있다는 증거를 우리는 가지고있다. 왜냐 하면 영국인들은 아무리 모자를 애중해도 높은 사람앞에 나설 때는 반드시 그것을 벗는다. 그것이 하나의 례의로 되여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모자(갓)를 벗기는커녕 도리여 더 단단히 쓰고 가는것이 점잖은 례절로 되여있다.
    임금앞에서도 모자를 벗지 않는다. 갓을 쓴채 엎드리는것이다. 그것을 보면 영국의 《실크 해트》보다 한국의 《갓》이 한층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있는것이 아닌가싶다.
    뿐만아니라 모자를 두개씩이나 쓰고 다닌다는 면에 있어서도 이 민족은 단연 모자애호에 있어 세계 제일의 영광을 차지할것 같다. 우리의 옛 조상들은 탕건우에 다시 갓을 쓰고 다녔던 까닭이다. 또 얼마나 그것을 중시했으면 튼튼한 끈으로 매고 다녔겠는가.
    바람에 날려 떨어진 모자를 줏기 위해서 여지없이 신사체면을 망쳐버리는 영국인의 그 거동과는 도시 비교도 안된다. 그들이 모자에 끈을 다는 경우란 생사를 결단하고 나서는 전쟁처에서 군모를 쓸 때에 한한 일이다.
    또 《갓》은 얼마나 가벼운것일가? 모자가 가볍다는것은 그만큼 그것이 발달했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분명히 모자쓰기를 좋아하는 민족인것 같다. 모자로써 기혼자와 미혼자를 가렸고, 모자로써 일생의 축제인 결혼식을 장식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자를 그렇게 쓰기 좋아했다는것은 그만큼 례의를 존중했다는 증거이지만 반면에 겉치레로써 세상을 살아간 권위주의, 형식주의, 보수주의 등의 풍습이기도 하다.
    못살고 헐벗은 나라에서 《갓》만 쓰고 허청거리던 우리들이였다. 모자로 한몫 보려던 텅 빈 그 허례와 권위의식은 오늘날 《감투》란 말을 남기고말았다. 감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감투싸움》을 벌이고있는 오늘날의 그 정쟁은, 기실 모자를 사랑하던 민족의 유습(遺習)이 아니였던가?
    속이 텅 빈 《갓》을 바라보고있으면 한숨이 나올 때도 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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