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환(시인/문학평론가)

  [서울=동북아신문]‘無爲而無不爲무위이무불위’라는 이 말은, 노자(老子:기원전 571년~기원전 471년 추정)의『道德經』제37장“道常無爲而無不爲도상무위이무불위”에서 나왔다. 노자는‘도(道)’라는 것의 역할 내지는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말을 했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기본적인 태도 내지는 방법으로서 이 말을 곧잘 인용한다. 인간이 도를 따라 살면, 다시 말해, 도를 좇아 처신하면 - 도가 무엇인지 먼저 설명돼야 하겠지만 - 큰 문제가 생기지 않기에 가장 이상적인 삶의 태도이자 방법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 동방문학 발행인 이시환 시인
그럼, 문제의 이 말을 한 노자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에게 있어 ‘도(道)란 늘, 언제나, 영원히, 일함이 없음으로써 일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하지 않음으로써 일을 다 한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도는 분명히 꾀하지 않지만 꾀하지 않는 게 없고, 일하지 않지만 일하지 않음이 없으며, 행(行)하지 않지만 행하지 않음 또한 없다는 뜻이다. 맙소사! 일을 하면 하는 것이고, 안 하면 안 하는 것이지 무슨 놈의 말이 그러한가. 세상에 모순어법 치고 이런 모순어법은 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나의 판단인 즉은 이러하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생각하기에, 도는 일하지 않고 행하지 않으며 꾀하지도 않아 보이지만 실은 일하고 행하고 꾀한다는 것인데, 문제는 도가 인간처럼 말하고 움직이고 갖가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제반 활동을 해야 하는 주체로서 몸을 지닌 가시적(可視的)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인간을 도(道)와 동일선상에 놓고 얘기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도는 모든 생명과 현상을 나타나게 하는 바탕으로서 그 원리일 뿐이고, 스스로 존재한다는 자연현상까지도 그것의 작용이자 결과일 뿐이라는 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노자는 그 바탕이자 원리를 스스로 존재하는 도라 하여 자연과 동일시하였고, 그것은 형태가 없기에 눈에 띄지 않는 것뿐이고, 눈에 띄지 않기에 보이지도 않지만 부단히 일하고, 행하고, 꾀하여 제 현상과 제 생명들을 내어 놓는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노자에게 있어 도는 늘 행하지 않지만 늘 행한다는 역설적인 모순어법을 피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인간은 그 바탕이자 원리인 도가 있기에 존재하는 하나의 현상이자 결과로서 생명체일 따름이다. 그래서 사는 동안 도를 벗어나려하거나 거역하려해도 사실상 벗어나지 못하고 거역하지도 못하는 것처럼, 인간이 어떻게 살든 도 안에서 살고 어떻게 죽든 도 안에서 죽는 것이다.  그런데 노자를 좀 안다는 사람들은 도를 좇아 자연처럼 살라고 요구하며 말하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한 말이지만 실은 불필요한 말이다. 왜냐하면, 자연 속에서 욕심을 적게 부리며 살아가는 것이나, 도심 속에서 욕심을 많이 부리며 문명적인 생활을 하는 것도 그 본질은 조금도 다를 바 없으며, 있다면 양태의 차이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도가 놓이는 자리에 ‘신(神)’이나 ‘천지(天地)’나 ‘자연(自然)’ 등을 대입시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 자리에는 다름 아닌 인간(人間) 자신을 갖다 놓으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이나 자연이나 천지조화나 도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부처(기원전 563년 ~ 기원전 483년 추정)나 노자나 예수(기원전 4년 ~ 기원후 30년 추정)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은 가시적인 자연현상을 빗대어서 인간 삶의 태도나 방법을 일깨워 주려 노력했고, 창조주에 해당하는 도나 자연이나 천지조화나 신의 뜻을 이해하고 본 받아 살자고 주장해 왔던 것이다.  실은, 오늘날도 그 연장선상에 있지만 적지 아니한 사람들은 노자의 도를 운운하며‘無爲而無不爲무위이무불위’함으로 자연(自然)이 무위(無爲)하는 것처럼 우리 인간들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거나 살자고 요망하며 주장한다. 그러나 깊은 의미는 없다. 있다면, 인간사회 속에서 결정되는 상대적인 의미이다. 그 상대적 의미란 무엇인가?  곧, 일하고 행하며 꾀하되 겉보기에는 일하지 않고 행하지 않고 꾀하지 않는 것처럼 하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일하는 과정에서 ①표 내지 말고, ②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소리 소문 없이 ③적절하게 하라는 뜻이다. 여기서 표 내지 말라는 것은, 그 뜻이나 과정이나 결과 등에 대해서 과대 포장하여 떠벌이지 말고 자랑하지 말며 우쭐대지도 말라는 뜻이고, 일으키는 문제란 시기・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부터 능력 밖의 일을 도모하다가 사고・질병・죽음 등을 앞당기거나 초래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적절하게 하라는 것은 근심걱정 없이 오래오래 살고자 하는 가장 근원적인 욕구충족을 방해하지 않는 테두리 안에서라는 뜻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결국 갖가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활동에 지나지 않지만, 어떠한 활동이든지 간에 의도(意圖)하거나 기도(企圖)하지 않는 것처럼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하라는 뜻이며, 설령 겉으로 드러났다 하더라도 겸손하라는 뜻이다. 이를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욕심이 없는 것처럼 일하지 않고, 유유자적하면서,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태도로써 살아가되 늘 무언가를 생각하며, 행하고, 꾀하되, 그것의 결과는 주변(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며, 균형을 유지하며, 일신상으로는 안전한 생활을 하라는 뜻이다. 내가 보기에 노자의 눈에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 곧 도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많은 생명들을 품으며, 많은 현상들을 부리어 놓는다고 판단했던 것 같고, 또한 생명과 현상, 그것들이 언제나 조화롭게 상생하며, 균형을 유지하고, 욕심내지 않아 평화롭게 살아가거나 존재하는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태양도, 지구도, 지구의 자연도 생멸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생멸이 있는 한 늘 욕구가 존재하게 마련이며, 그 욕구가 존재하는 한 늘 충돌하며 대립하는 가운데 협력 상생의 관계가 있을 수 있으며, 바로 그 때에 양자 혹은 다자간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큰 틀에서 보면 과정이며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마치, 시기와 질투와 폭력이 난무하는 인간 세상조차도 위에서 내려다보면 질서정연한 세상으로 보이듯이 우주 안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고,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생로병사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다. 다만, 우리는 그 과정의 어느 한 순간에 머물며 그것을 보는 것뿐이다. 간단히 말해, 노자의 도를 들먹이는 것은, 자연도 문명도 공히 도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따름이지만, 우리는 자연 속의 질서를 인간사회 속의 질서로 끌어들여서 대립과 갈등의 관계를 균형과 조화의 관계로 바꾸어 상생하자는 의도나 목적이 내재되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2015. 01. 19. *이제 앵무새 같은 소리 지저귀지 않았으면 좋겠다. 입만 열면 노자, 부처, 예수 운운하면서 대단한 것을 알고 가르치려는 짓거리 하지 말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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