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 길림성특파원 윤운걸 기자의 이야기

[서울=동북아신문] 윤운걸 기자는 '흑룡강신문'사 길림성특파원이며, 전 길림성지사장이다. 그는 일찍 연변의학원을 졸업하고 연변대학 부속병원 이비인후과에서 의사로 근무하다가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의사는 한사람의 병을 고치지만 언론인은 사회의 병폐를 파헤쳐 사회의 곪아빠진 곳에 메스를 대겠다는 각오로 임했던 것이다. 그래서 윤운걸 기자는 30여 년간 기자로 줄창 뛰었고, 2013년에 정년퇴직을 했지만 흑룡강신문사에서 오늘까지 지속적으로 연장근무를 하고 있다. 그가 취재하는 모습은 현장에 부단히 나타나고 있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취재1선에서 30여 년간 보여준 프로정신은 우리 언론인들이 따라 배워야 할 본보기임이 틀림이 없다. 편집자 주    

▲ 윤운걸 기자
기자가 기자를 취재한다며 감개무량해하던 윤 기자! 후회 없는 기자인생 39년을 회고하며 감격에 눈시울을 붉히던 그! 부분적인 취재는 이런저런 이유로 별수 없이 접어야만 했었다며 아쉬움을 토로하던 그!…2012년 9월 2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60돐 기념대축제 전날, 쨍쨍한 가을볕이 빙수비위를 자아내는 오후 1시경.“똑똑똑…”“자, 어서 들어와.”노크하기 바쁘게 “드르륵” 출입문이 열리며 선생의 밝은 모습이 나타났다. '흑룡강신문' 길림성특파원 겸 길림성 지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윤운걸 기자이다. 반갑게 수인사를 나누며 집안으로 들어서다말고 주춤했다. 선생의 등 뒤로 작동 중에 있는 컴퓨터의 모니터가 훤히 띄어왔기 때문.“아, 저건 두만강박람회뉴스. 본사에 송고하던 중이었거든…”“두만강박람회뉴스”라면 오늘 오전 진달래광장에서 펼쳐졌던 제8회 중국·연길두만강지역 국제투자무역박람회가 아닌가?…여건이 편리한 현지매체들도 아직 관련기사를 발표하기 전인데 벌써 송고중이라니?“자, 소파에 앉아 조금만 기다려. 금방이면 되니까. 커피 줄까?”내가 멈칫거리자 선생은 바삐 집안으로 안내하며 곁에 선 사모님께 커피를 부탁했다. 그리고는 씨익 웃음을 날리고는 도로 컴퓨터와 마주앉는다. 아, 바른 기자의 모습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내년이면 인생 60인데도 프로근성을 보이는 선생의 모습에 감탄이 갔고 저도 몰래 가슴이 두근거렸다. 분위기만 봐도 프로의 레벨이 엿보이는데 한낱 지방지의 햇내기기자가 언감생심 취재를 한답시고 뛰어들다니?…“허허, 기자가 기자를 취재한다니… 거참 기분이 묘한데.”그런 나의 속내를 짐작이라도 한 듯 시나브로 작동이 멈추는 컴퓨터를 뒤로하고 선생이 다가왔다.혈색 좋은 선생의 얼굴에는 어느새 푸근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환자를 진찰하는 의학도의 안목으로 “기자란 무엇인가고? 글쎄… 하여튼 내 정의라면 기자란 의사와 마찬가지야.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듯 기자 역시 사회를 잘 진찰해야 하니깐…”선생만의 독특한 이한 “정의”는 그의 첫 직업과 무관치 않다. 1953년 10월 훈춘시 춘화진에서 태어난 선생은 연변의학원(오늘날 연변대학 의학원 전신) 의료학부의 유망한 의학도로서 졸업과 더불어 두 명의 특별전형 가운데 한사람으로 모교에 남는다. 그러나 연변 공안국에서 조선족 법의를 선정해 달라는 요청에 의해 윤운걸 선생은 법의 행열에 들어선다. 석달 동안의 법의사업을 하다가 공안당국 정치부에서 당안을 심사하니 친척이 소련에 있고 어머니가 조교이니 부적함의 판정을 받고 다시 재배치되었다. 워낙 연변의학원에서 특별 전형으로 대학에 남기기로 하던 차 그를 연변대학 부속병원 이비인후과에 재배치해 이른바 두 번째 공직, 이비인후과 전문의로 사업하게 했다.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소학시절부터 연변소년보에 작문을 발표하는 등 글짓기에 싹수를 보였던 그는 이후 “연변의학”잡지가 복간되면서 자연스럽게 편집진에 합류했다. 이 기간 중국 라디오텔레비죤방송대학 신문전업 통신공부를 시작하면서 기자인생을 위한 기초 작업에 나섰고, 이어 1983년 중국신문계통 대학단과수준통일시험에 합격하면서 본격적인 기자인생을 시작하였다. “1984년이었어. 연변인민방송국에서 기자공채가 있었지. 그냥 해본다고 했는데 덜컥 합격해버린 거야. 아마 의학도 출신이라는 내 신분이 이목을 끌었던가 봐…하여튼 입사하고 보니까 사회교육부 의학편집으로 배치하더라구.”  
▲ 러시아에서 취재를 하고있는 윤운걸기자(오른쪽 첫 번째 사람)
연변인민방송국에 입사한 선생이 편집한 자연과학 보급위주의 프로그램인 라디오잡지에서의학과학 보급 글이 전파를 타면서 그 시청률이 올라가는 것은 물론, 라디오잡지프로그램에 더 이채를 발산했다. 의학도의 예민한 안광으로 현실생활을 진맥해 처방처럼 편성한 프로그램은 방송국의 인기프로로 부상했다. 애청자들의 편지도 잇따랐다. 해당 프로가 진정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알찬 내용들이여서 즐겨 듣는다는 사연과 방송이다 보니 시간대만 놓치게 되면 그처럼 아쉬울 수가 따로 없다며 이미 지나간 내용도 괜찮으니 적어서 보내줄 수 없느냐는 간절한 청구였다. 한통, 한통 편지들을 읽어 내려가던 선생의 두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매사를 처리함에 있어서 환자를 진찰하듯 신중을 기하던 선생의 의학도적인 안목이 재차 열렸던 것이다. 그 무렵 고고성을 울린 “생활안내” 신문이 바로 그 결정체였다.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수차 길림성출판국 책임자들을 찾아다니며 정식간행물등록번호를 따내는 등 집요함과 추진력을 발휘했던 그는 당시 사회교육부지도부 및 “라디오잡지”의 십여 명 편집일군들과 함께 '생활안내'신문을 편집, 발행하는데도 앞장섰다. 선생의 말에 따르면 당시 “생활안내”신문은 도합 4개 지면의 타블로이드판에 주간으로 발행됐는데 판매부수만 해도 무려 5만여 부에 달했다고 한다. 한편, 선생은 자신의 글 농사에도 등한시하지 않고 짬짬이 살손을 댔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 출품한 선생의 다큐멘터리작품 '돈의 하소연'이 바로 그 성과였다. 이 작품은 1987년 중국라디오텔레비죤방송국, 중국과학기술자협회, 중국위생부, 중국애국위생운동협회가 공동주최한 공모에서 국가 2등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올렸다. 이해 선생은 연변방송국 청소년부 부주임으로 발령을 받았고 이듬해(1988년)에는 사회교육부 책임자로, 4년 뒤에는 대외연락부 책임자로 발령받는 등 방송국 지도부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으며 휘황한 한 페지를 장식했다. 선생에게 물어봤다. 방송기자로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언제인가고.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선생이 '이산가족 찾기'프로라는 답을 했다. 지난 1992년부터 공식 개시된 '이산가족 찾기'프로는 그야말로 그 무렵 연변방송의 간판프로나 진배없었다. 미국, 소련(구소련), 일본, 캐나다, 호주, 한국, 조선 등 나라의 이산가족들이 여진 혈육을 찾아 줄을 섰던 프로… 사실 이 프로 역시 선생의 의학도적인 안목의 소산이기도 했다. 중한수교 이후의 국제형세를 재빨리 진단했던 선생은 1992년에 있은 한국방문길에서 특별히 한국 KBS사회교육방송국을 찾아 이산가족프로를 합작해 제작키로 했다. 뒤이어 얼마 안지나 연변라지오방송에서는 매일 15분길이로 세계각지 동포들의 혈육 찾는 사연을 속속 방송했는데 방송개시 반년 만에 53명의 이산가족을 찾아주었다고 한다. “정말이지 반세기동안 갈라졌던 혈육들이 전화로 만나 울고 웃다가 우리들한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할 때 그때가 처음이었지요. 아, 언론기자란 바로 이것을 먹고 크는구나!… 하는 생각을 소스라치듯 가져보는 순간이도 했고.” 흐뭇하게 추억을 더듬는 선생의 눈시울이 젖어들고 있었다. 민족의 아픔을 투시하는 렌트겐으로 “왜 일터를 옮겼느냐고?… 하하, 그게 무척 궁금했던 게지? 하긴 구면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질문했던 물음이었지…”주저주저하다 용케 꺼낸 물음에 선생은 껄껄 웃었다.“한계를 느낀 거야. 기자로서 가장 욕심나는 전면보도, 추적보도의 한계를 방송에서 실감했던 거지. 알다시피 방송은 시간대만 놓치면 다시 전달할 수 없는 최대 약점을 갖고 있거든. 그리고 또 쉽게 잊혀지고…”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선생은 대담히 정든 일터를 떠나 새로운 일터를 찾는다. 1995년 4월 흑룡강신문 연변지사(1989년 설립, 초대지사장 장문)에 전직기자로 전격 입사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1986년 5월 흑룡강성위상무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처급(處級)으로부터 부청급(副廳級)으로 승격하면서 국내 소수민족문자 언론지 가운데 최고의 행정 급별로 부상한 흑룡강신문사는 그 무렵 이미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발 빠르게 부응하면서 국내외 한겨레 사회의 변화와 발전상에 취재의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특히 바로바로 중국조선족사회를 진맥하고 관련 부서와 민족지도자들을 찾아 대안을 제시하는 그 모습은 선생의 호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고, 단연히 일터를 옮긴 이유이기도 했다.“용장지무약졸(勇將之無弱卒·용맹한 장수 밑에 나약한 병사는 없다)”란 말처럼 흑룡강신문사에 입사한 선생은 이후 그 자신의 주 무기인 프로근성으로 중국조선족언론사에 굵직굵직한 기념비적 작품들을 남긴다. 중한수교이후 1996년부터 중국조선족사회의 비극으로 등장했던 중국동포 한국초청사기사건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민족의 아픔을 투시하는 렌트겐(x射线)으로 이 비극을 예민하게 관조하던 선생은 “동포가슴에 못을 박은 한국위정자들”이란 제하의 특별계열기사를 쏟아냈는데 무려 십여 편에 달했다. 특히 국내 조선족 기타 언론사들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해당사건을 기피하던 상황에서 선생이 백여 명의 사건 관련 피해자들을 집중 취재해 대담하게 터뜨려낸 기사는 가히 특종의 연속이었고, 이로 인해 흑룡강신문사는 또 한 번 민족의 대변지라는 동포사회의 찬사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중한 두 나라 해당 정부기관의 중시를 불러일으켜 사건처리에 발판을 마련하는 전기가 되기도 했다. 2007년부터 2009년에 있은 장백산한국인호텔철거사건 역시 그랬다. 민족의 희로애락에 그 취재원천을 두고 펜과 셔터를 다뤄오던 선생은 장백산에 호텔을 세운 한국인들에게 합당한 보상이 없이 강박 철거한다는 사실을 요해하고 주위로부터 오는 압력에 굴하지 않고 관련사건을 집중 취재하여 흑룡강신문에 속속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순조롭게 보상 문제를 해결 받은 그 생면부지의 한국인은 뒤늦게야 선생에게 물질적으로 고마움을 표하려고 했으나 선생은 단연히 거절했다. 연변대학과학기술학원(이하 연변과기대)도 마찬가지. 연변에 갓 일떠선 연변과기대는 당시 동포사회에 기독교를 믿는 외국인들이 꾸리는 저질대학교, 별 볼일 없는 대학교로 부정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사정을 알게 된 선생은 연변과기대 김진경 총장을 단독 인터뷰해 “김진경, 그는 누구인가?”라는 제하의 인물기사를 발표했다. 이 기사는 당시 중국조선족언론에 거의 공백상태나 다름없던 연변과기대를 동포사회에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고 이후 대폭 학생을 모집하는데도 큰 약발이 됐다. 뜻밖에도 선생이 지금까지 가장 애정을 갖고 있는 취재원은 용정3.13만세운동(1919년) 관련기념활동과 행사들이었다. 흑룡강신문사에 입사하여 최초로 국내 매체에 용정3.13만세 운동 기념활동을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보도해왔던 선생은 이로 하여 지난 2009년 용정시정부로부터 공로패를 수여받기도 했다. 반면 유감도 적지 않다고 했다. 때때로 보이지 않는 공권력과의 싸움과 그 압력으로 부득불 어떤 취재는 중도에서 꺽어야만 했는데 그것을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도 아쉬움과 한숨이 묻어난다고 했다.  
▲ 연변축구협회 회장으로 있을 때
 친구가 많은 기자, 세계로 가는 기자 지난 2008년 선생은 친우와 동료들의 권유에 못 이겨 처음으로 자신의 기자문집을 출간했다. 흑룡강신문사 전 부총편집으로 근무했던 박일 선생은 그 책머리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윤운걸 기자는 흑룡강성과 길림성을 끈끈히 이어주는 착실한 ‘대사’이고 러시야, 일본, 한국, 조선 등 주변 국가들을 제집처럼 나드는 ‘국제신사’이며 어디에서나 좋은 글감을 부지런히 물어오는 ‘꿀벌’로 통한다.… 분주한 사회활동가인 윤운걸 기자는 사람만나기를 특별히 좋아한다. 그의 대부분 일과는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해서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 끝나는 듯싶다. 그래서 기자직업은 윤운걸 선생의 천직일 것이고 또 바로 그래서 그의 붓끝에서는 색다르고 맛다른 글들이 샘물처럼 흘러나오는 것 같다…” 박일 선생의 이 평가에 선생은 빙긋이 웃기만 했다.조선족매체가운데 최초로 러시야 고려인들의 상황을 중국에 소개했던 선생, 조선, 일본, 한국 등을 단위 또는 개인일로 방문해도 동포언론지의 기자라는 사명감을 잊지 않고 동포사회의 뉴스에 신경을 도사려왔던 그였던 만큼 발이 넓고 친구들도 많았다. 남녀노소에 직업을 불문하고 가슴을 터놓는 친구들이 주위에 “쌔고버렸길래(많다는 연변사투리)” 그 비결을 물었더니 단마디다. "진심을 주는 것", 바로 그것이란다. 최근 중한언론사에 훈훈한 화제로 회자되고 있는 사건이 떠올랐다. 한국 최초의 중국 선양 주재특파원이었던 연합뉴스의 故조계창 기자가 지난 2008년 12월 도문시로 취재 가던 도중 차사고로 순직했던 사건이다. 당시 사건을 처리하던 경찰은 고인의 휴대폰에서 윤운걸 선생의 전화번호를 발견하고 연락을 했고, 연락을 받는 즉시 윤운걸 선생은 사망자 확인에 나서는 한편, 현지 한인회와 연합뉴스 본사에 연락했다. 한편 유가족이 고인 확인 시 최소한 슬픔을 덜어주고 저 전문일군을 찾아 한국인의 풍속대로 정중하게 염습을 대신하고, 또 며칠 뒤 사재를 털어 한국방문 조문길에 오르기도 했다. 이런 선생의 인간 됨됨이는 중국을 자주 찾는 한국의 언론기자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지금도 연합뉴스를 비롯한 한국의 생면부지의 기자들도 연변에만 오게 되면 방문이 당연지사인 듯 선생을 찾는다. 이런 선생에게 고민이 있다. 다름 아닌 여태껏 수걱수걱 내조해온 아내(박진숙)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다. 박진숙녀사가 기자 “재미”에 오히려 밖을 집처럼 생각하는 선생을 대신해 다년간 행동에 장애가 있는 89세의 시어머님을 돌보는 한편, 응석둥이 외동자(윤철성)를 미국에까지 유학보내 당당한 사업가로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사모님이 들어오자 아무리 입담 좋은 선생이래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웃음만 벙싯거린다. 기자인생 브레이크는 없어 내년이면 선생은 공직에서 은퇴한다고 한다. 60세 정년에 법적으로 제정한 퇴직과 조우하기 때문이다.선생에게 퇴직 후의 진로에 대해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돌아온 대답은 왕청같았다. 기자에게 있어서 “정년퇴직”이란 단어는 합당치 않다는 선생의 대답이다. 민족사회가 존재하는 이상 민족기자의 세상은 마냥 열려있고 사회가 발전할수록 인터넷을 비롯한 더 많은 언론발표 플랫폼장치들이 마련되기 때문이란다. 그렇다. 환자를 진단하듯 사회를 진단하는 기자에게 있어서 “정년퇴직”이란 브레이크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까지 장장 39년 기자인생에 멋지게 시동을 건 선생의 경우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만큼 선생의 정년퇴직은 또 하나의 취재원천으로 이동하는 새로운 출입문에 불과할 것이다.…“노화순청(炉火纯靑)”의 경지에 오른 선생의 필봉이 잔뜩 부럽기만 했다. 윤운걸 기자 약력- 현재까지 4000여 편의 작품 발표.- 작품 '돈의 하소연'이 1985년 중국라디오영화TV방송부·중국과학기술자협회·중국위생부·중앙애국위생운동위원회 등에서 주최한 국가 급 '백학컵'2등상을 수상하면서 과학보급 작품, 신문작품이 중앙 급, 성급, 지구급 상 수차 수상. 수차 국외 각종 세미나서 논문 발표.- 주필(4명 공동주필)로 중국과학기술협회 중점항목 '무엇 때문에' 총서 10권을 2002년에 출판발행. - 부주필(4명 공동부주필)로 '농촌과학기술보급총서'8권, 2004년에 출판발행.2009년 '건강의 적-불량한 심리위생' 저서 출판발행.- 1992년부터 한국 KBS방송 해외통신원으로 중국에서 사상 처음 등단하며 오늘까지 중국의 개혁개방정책, 조선족 및 재중한인사회의 이모저모를 정규방송.- 2002년 대한민국 한국방송공사 KBS로부터 감사패 수상.- 현재 흑룡강신문 길림성특파원(길림성지사장)으로 활약 중.(신철국 기자 씀)   조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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