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범송 흑룡강신문 논설위원
[서울=동북아신문]1958년부터 본격 추진된 대약진(大跃进)운동의 취지는 낙후한 농업국의 면모와 후진적 산업체제 개선, 공농업생산량의 대폭 제고이다. 대약진은 ‘공산주의 축소판’인 인민공사를 주 모델로 한, 급진적인 좌경사상의 산물이다. 인간의 주체적인능동성을 과대평가하고 생산력 발전의 경제규칙을 위배한 대약진은 거짓보고와 허풍 떠는 사회풍조를 만연시켰다.
 
또한 비과학적인 생산방식에 따른 폐철의 양산, 산림자원의 훼손으로 천재(天灾)가 발생할 빌미를 제공했다. 결국 3년간의 자연재해와 인재(人灾)가 겹쳐 수천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면서 중국식 ‘공산주의’는 고작 3년만에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렸다.
 
1949년에 건립된 사회주의 중국은1952년까지 공장·광산·철도·은행에 대한 국유화와 토지개혁을 완성, 연평균 성장률20~30%의 경제성과를 달성했다. 또한 사회주의 공업화의 기초 마련을 위해 중공업 발전을 우선하는 제1차5개년계획(1953~57년)을 추진, 소련의 무상지원과 기술원조 등에 힙 입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시기 중국은 사회주의 3대 개조(농업·수공업·상공업의 공유화)를 끝내고 합작사 위주의 농촌의 집체화를 대부분 실현했다. 그러나 1957년부터 악화된 중소관계와 소련의 대중국 원조 중단은 큰 악재로 작용했다. 한편 주은래 등의 ‘급진적인 발전을 견제해야 한다’는 반모진(反冒进) 주장이 모택동의 비판을 받았다. 당의 후설인 인민일보는1958년 원단 사설을 통해 농업생산의 대약진을 달성해 ‘15년 안에 영국을 추월한다’는 대약진 개시를 선포했다.
 
1958년 5월 중공(中共) 제8기 2중전회에서 정식 통과된, 인민군중의 열정을 최대한 발휘하고 국민경제의 대약진을 통해 하루빨리 공산주의를 실현한다는 총노선이 인민일보 사설을 통해 발표되었다. 대약진 전주곡이었다. 한편 ‘하면 된다’는 식의 대약진은 단기간 내에 주요 농·공업품의 생산을 2배로 성장시키는 목표를 설정했다. 1958년 식량생산량은 1957년(3900억근)보다 80% 증산(7000억근), 철강생산량은 1957년(335만톤)에 비해 대폭 증가된 1070만톤으로 확정했다. 농촌은 합작사에서 인민공사로 개편하고 생산수단의 공유화와 공동취사, 정사합일(政社合一)의 체제를 확립했다. 중국식 ‘공산주의’ 생산체제를 갖춘 인민공사와 총노선, 대약진은 이 시기의 3면홍기(三面红旗)로 불린다.
 
1958년 6월에 제출된 제2차5개년계획요강에는 ‘5년 내 영국을 추월하고 10년 내 미국을 따라잡는’ 초영간미(超英赶美)의 분투목표가 정식 설정되었다. 이는 1957년 11월 소련 방문 당시, 15년 내에 주요 생산품의 생산량에서 미국을 추월한다는 후루시쵸프의 국정연설에서 큰 고무와 감명을 받았던 모택동의 찬양을 받으면서 곧바로 국가비전으로 확정되었다. 따라서 ‘당이 시키면 백성은 따른다’는 사회풍조의 만연과 급격하게 확산된 공산주의 열조에 힘입어 대약진 고조가 중국 전역에서 일어났다. 또한 인간의 주체적인 능동성과 역할을 크게 과장한 ‘인간의 담력이 클수록 그만큼 식량생산량이 늘어난다’는 슬로건은 1950년대 후반 중국사회에 유행처럼 급속하게 번져나갔다.
 
한편 대약진 추진과정에서 생산량을 부풀린 거짓보고가 난무했다. 지방정부간의 과도한 실적경쟁으로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무당 생산량이 만근을 초과한 위성(卫星, 대풍수)이 난발되었다. 대표적 사례는 연생산량 12억 근으로, 일약 ‘대약진 스타’로 부상한 하북성의 서수현이다. 이러한 실적 부풀리기는 인민일보와 전국의 지방신문에 여과 없이 보도되었다. 결국 이는 식량징수량의 증가로 이어졌고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한편 중공업 발전 전략의 핵심인 ‘철강생산을 기간산업으로 한다’는 이강위강(以钢为纲)의 구호가 제출되면서 전국민이 철강제련에 동원되었다.
 
농촌마을에는 소형용광로가 설치되었고 농민들은 임무를 완성하기 위해 농기구마저 원료로 사용했지만 합격품은 겨우 30%밖에 안 되었다. 또 이 기간 많은 문물이 파괴되었고 심각한 산림훼손은 천재(天灾)의 빌미가 되었다.
 
‘공산주의 모델’인 인민공사의 각종 폐단이 갈수록 표면화되면서 중공 지도부는 문제의 엄중성을 의식했다. 그러나 1959년 여산회의에서 대약진에 대한 팽덕회의 정확한 의견이 모택동에 의해 부결되고 반우파(反右派) 투쟁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좌경착오노선에 대한 시정이 지연되었다. 게다가 연속적인 자연재해(1959~1961)와 중소관계 악화에 따른 소련 기술고문 전격 철수(1960년)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결국 ‘천재 3할, 인재 7할’로 평가되는 대약진 운동은 수천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면서 실패했다. 대약진의 발기자인 모택동은 권력2선으로 물러나고 유소기·등소평 등 실용파가 전면에 나섰다. 1961년 1월 제8기 9중전회에서 유소기 국가주석이 조정정책을 발표하면서 3년간의 대약진 운동은 드디어 종말을 고했다. 미상불 한 시대의 인위적 비극이 사필귀정으로 종결되었다.
 
1960년 농업생산량은 1957년의 25%로 감소되었고 엄중한 식량난은 수많은 비자연적 사망자가 속출하는 악과를 초래했다. 선진적 과학기술과 생산력의 발전이 없이 강행된 정치운동과 인해전술은 ‘수요에 따라 분배’하는 공산주의 목표를 근본상에서 달성할 수가 없었다. 결국 대약진 운동의 실패는 중국인들에게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첫째, 대약진 시기의 큰 가마밥(大锅饭)은 오늘날까지 중국인들에게 잔존해있는 ‘평등의식’과 나태한 관습을 낳은 장본인이다. 둘째, 당시 지방정부간의 과도한 실적경쟁에서 기인된 허위보고 관행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는 외국인들이 지금까지도 중국의 경제지표를 불신하는 이유이다. 셋째, 인민공사 시기 공산풍 범람에 따른 각종 사회폐단은 오늘날 중국인들이 공산주의에 대한 불신과 실망, ‘언급을 회피하는’ 주요한 이유이다.
 
무지와 맹종, 좌경사상으로 점철된 인민공사는 결코 공산주의 천당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었다. 결국 인간의 주관적인 능동성을 확대해석하고 경제발전의 객관적 법칙을 무시한 대약진 운동은 참담한 실패를 초래했다. 이는 오늘날 중국정부가 선진생산력과 과학발전관, 실사구시를 주창하는 이유이다. 8억 농민과 농촌의 환골탈태가 없다면 ‘모든 백성이 잘 사는’ 중국몽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21세기 현재 사회주의신농촌 건설을 추진하는 중국이 1950년대 실패한 ‘공산주의 모델’인 인민공사의 전철을 밟아서는 결코 안 된다.
 
자연의 섭리와 이치를 어기면 천벌을 받게 된다. 역사가 인류에게 남겨놓은 침통한 교훈이다. 오늘따라 온고지신의 중요성이 새삼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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