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로 쓴 논문☆

     ― 中國朝鮮族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管見

                   中國  延邊大學 敎授 金寬雄


      목록:

       1. 中國朝鮮族의 槪念

       2. 中國朝鮮族의 歷史

      3. 中國朝鮮族의 특수한 아이덴티티 - 문화정체성

       4. 中國朝鮮族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5. 변연문화체계로서의 中國朝鮮族의 진로에 대한 생각

 



  요즘은 아마도 연변에서는 사과배(중국어로 苹果梨라고 함)는 의 수확이 끝난 계절이어서 집집마다 사과배 몇 상자씩은 쌓여 있을 것이다. 어제도 집사람이 거리가 가까웠으면 사과배를 두어 상자만 보냈으면 좋겠다고 메신저에서 대화를 하다가 아쉬운 말을 했다. 연변의 특산물 중에는 개고기, 곰쓸개, 인삼, 송이, 더덕, 고사리, 도라지도 있지만 아무리 손을 꼽아보아도 연변의 으뜸가는  명물은 단연코 사과배다. 개고기, 곰쓸개, 인삼, 송이, 더덕, 고사리, 도라지 같은 것들은 다른 고장에도 있다. 그러나 사과배만은 연변조선족의 가장 큰 창조물이고 연변에서만 나는 연변의 특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연변에는 1960년대 초에 나타난 유명한 사과배에 대한 노래가 있다. 그 노래말은 대략 이러하다.

     

       연분홍 진달래야 춤추어 다오.

        우리 마을 과수나무 꽃피어 난다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사과배는요

        소문이 높아서 손님도 많소.

        아,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사과배는요

        삼복철 스리 살살 녹는 꿀맛이라네.


  사과배는 연변 조선족 나아가서는 중국조선족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나는 이 노래를 아주 중요시한다.

 

  사과배는 가접과수(嫁接果樹)이다. 北朝鮮 北靑의 배나무 가지를 연변의 산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야생 돌배나무에 가접(嫁接)해서 두 나무가 결합하여 새로 나타난 과수품종이다. 園藝學에서는 北朝鮮 北靑의 배나무 가지를 접수(接穗)라고 연변의 야생 돌배나무를 접본(接本)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접본은 당지의 야생 나무를 이용하는데 그래야만 새로운 품종이 그 지역의 기후와 풍토에 적응되어 잘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잡종강세는 사과배에서 여실하게 보여진다. 가접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배 품종 - 사과배는 연변의 야생 돌배에 비할 바 없이 크고 달며 심지어 북청의 배보다 더 크고 달뿐만 아니라 또 배 껍질이 두꺼워 오래 보관할 수 있다. 중국 山東 萊陽의 배나 韓國 羅州의 배가 유명하다고는 하나 필자는 연변 사과배의 맛에는 미치지 못한다. 얼마 전 추석에 누가 나주배를 한 상자 선물로 주어 실컷 먹기는 했지만 그래도 연변의 사과배 생각이 났다. 봄철이면 마치 대설(大雪)이 내리기라도 한 듯이 몇 십리 이어진 帽兒山 산자락을 덮고 있는 용정과수농장의 사과배꽃을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마침 츄석 연휴기간이라 “매봉가절(每逢佳節倍思親)이라는 시구처럼 연변 나아가서는 중국에 사는 부모형제 그리고 친구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나에게 있어서 한국은 비록 모국이기는 하지만 고향이 아닌 이국, 타향인 까닭이기도 하리라.

 

  그럼 순서를 잠깐 바꾸어서 먼저 중국조선족부터 말하고 나중에 중국조선족과 사과배의 연관성을 말하려고 한다. 

        

 1. 中國朝鮮族의 槪念

  

  우리들은 스스로 우리 자신을 中國朝鮮族이라고 한다. 우리 중국조선족에 대해서 말하려면 우선 ‘중국조선족’이란 개념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중국조선족’이라는 이 족칭(族称) 연변의 명물 사과배가 ‘사과’와 ‘배’라는 두 단어로 이루어졌듯이 ‘중국’과 ‘조선’이라는 두 단어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이로부터 ‘중국조선족’은 지역성, 시간성, 정치성을 다분히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두 나라의 문화를 아우르는 복합적 성향을 갖고있는 특수한 민족공동체임을 알 수 있다.

 

   ‘중국조선족’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중국조선족은 중국에 거주하고있는 중국국적을 가지고 있는 조선민족을 뜻한다. 중국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며 중국공민이 가지고있는 모든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또한 중국조선족은 과경(跨境) 민족, 또는 이민(移民) 민족으로서 혈통과 문화전통 면에서 한반도와 같은 맥을 잇는 한반도의 민족과 동일한 민족이라는 것 역시 간과해서도 안 된다. 중국의 조선족은 역사상 朝鮮半島에서 中國으로 이주한 민족공동체로서 150년 남짓한 세월 속에서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생활에 적극 참여하면서 점차 중국문화를 몸에 익히게 되고 점차 中國의 한 小數民族으로 형성되었다.”

 

  총체적으로 보아서 중국조선족은 정치, 경제생활의 측면에서는 기본 상에서 중국화 되었지만 문화적 측면에서는 모국문화의 遺傳因子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中國朝鮮族의 歷史


 중국조선족은 과경(跨境) 민족, 또는 이민(移民) 민족이라는 점에서는 재구미 동포나 재일 동포와 비슷하다고는 할 수 있지만 또 많은 부동한 특징을 갖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중국조선족은 재미, 재일 등 다른 지역의 백의민족동포사회와는 달리 자기의 특수한 이민사, 개척사, 투쟁사를 갖고있다. 즉 중국조선족은 이미 다 개척해놓은 남의 나라 땅에 들어가서 그 기존질서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면서 살아온 재구미, 재일 동포들과는 달리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생활에 적극 참여하는 가운데서 자기의 특수한 이민사, 개척사, 투쟁사를 갖게 되었다. 말하자면 민족의 주체성, 능동성이 在日, 在歐美 동포들보다 더 강하다는 뜻이다.

 

  첫째, 中國朝鮮族의 특수한 이민사와 개척사로부터 본 中國朝鮮族의 주체성과 능동성

 

  중국조선족은 재미, 재일, 재독, 재유럽, 재남미 동포들처럼 다른 민족들이 이미 다 개척해 놓은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중국조선족은 마치도 영국의 청교도이민들이 미국 동부에 이민하여 아메리카 대륙을 개간했듯이 중국조선족도 중국의 동북지역에 이민하여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땅을 개간했다. 중국조선족의 이민은 開拓移民의 性向이 아주 강하다.

 

  중국조선족 移民史에서 가장 이른 移民은 1845년으로 遡及된다. 1845년 평안북도 초산군의 80여세대의 농민들이 압록강을 넘어서 요녕성 통화, 관전의 훈강 유역에 이주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고 벼농사를 지었고 그 뒤를 이어서 환인, 신민, 안동 등지에 조선농민들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벼농사를 지었다. 그 뒤 1860년대에 이르러서는 함경북도의 농민들이 두만강을 넘어서 지금의 연변지역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중국조선족의 동북지역에로의 이민은 중국관내에서의 한족 및 기타 민족의 ‘촹꽌뚱(闖關東)’과 軌를 같이 하며 중국의 漢族을 비롯한 기타 민족과 함께 동북의 미개척지를 개척했으며 중국조선족은 동북 땅에 도작문화(稻作文化)라는 동북 땅에는 없었던 농경방식을 도입했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중국조선족은 중국의 東北지방을 開拓하는 開拓民으로서 중국에 공헌이 있는 민족이며 좌향기성(坐享其成)의 다른 이민집단들과는 그 性向이 다르다.

 

  둘째, 中國朝鮮族의 특수한 鬪爭史와 革命史로부터 본 中國朝鮮族의 주체성과 능동성

 

 중국조선족은 중국에로 이주하기 시작해서 20세기 50년대초까지 한족등 중국의 기타 민족과 함께 한국과 중국의 반제반봉건투쟁과 항일전쟁, 해방전쟁, 조선전쟁에서 중화민족의 해방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 그리고 ‘보가위국(保家衛國)’을 위하여 불후의 공헌을 세웠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기의 붉은색 바탕에는 우리 중국조선족의 붉은 피도 적잖게 중국의 구민주의혁명시기 식견 있는 조선인들은  孫文을 따라 청왕조를 전복하는 투쟁에 헌신했고, 1920년에는 김좌진, 홍범도의 지휘하에 獨立軍은 鳳梧桐, 靑山里 전투에서 일제를 타격했고, 중국의 북벌전쟁 중에서 200여명의 조선청년들이 참가하여 공훈을 세웠고, 황포군관학교에는 제1기부터 제 7기까지 교관과 학생 중 200여명의 조선인이 있었고, 1927년 중공이 영도했던 광주, 남창 봉기 중에 조선인이 각각 200명, 150명이 참가했고, 2만리5천리장정대오에도 양림, 무정 같은 우리의 조선인들이 있었다. 동북의 항일무장투쟁 중에서 중국조선족은 더욱 많은 피를 흘렸다.

 

  1931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14년 동안 동북 항일무장투쟁 중에서 10여만의 조선족인민들이 참전했고 수만을 헤아리는 조선족이 항일 聖戰에서 목숨을 바쳤다. 연변지역의 항일전쟁시기 조선족 열사는 3026명인데, 연변지역 항일열사의 96.8%를 차지한다. 중국조선족은 항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막대한 대가를 치렀으며 불멸의 공헌을 세웠다.

 

  1946년부터 1949년에 이르는 4년 해방전쟁 중에서 조선족 청년이 6만 3천명이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가했다. 제 4야전군의 164사, 166사, 156사 등은 조선족을 위주로 구성되었다. 遼沈, 平津 戰役과 湘西 토비숙청, 四川해방, 海南島 해방에 모두 우리 조선족이 목숨 바쳐 싸웠다.

 

  해방전쟁시기 연변 6개 현은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입대한 조선족이 5만 2천명에 달했고 민병, 공안, 지방 무장대오 등을 합치면 모두 10만 명이 참가했다. 그래서 중국의 시인 賀敬之는 "산기슭마다 진달래가 붉게 피어 있고 마을마다 렬사비가 솟아 있네(山山金達萊, 村村烈士碑)"라고 읊었던 것이다.

 

  중국조선족은 바로 이런 중국에 대한 공헌으로 당당하게 중화인인공화국의 공민으로 되었던 것이다. 이 점은 중국조선족이 기타 해외동포와 다른 중요한 특점이며 중국의 기타 소수민족과도 다른 특점이다.

 

 세상만사는 塞翁之馬라고 중국조선족의 이러한 적극적인 정치참여의식은 부작용도 파생시켰다. 자기의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고 과분한 정치적극성을 발휘할 때가 있다. 특히 연변의 조선족들이 이러하다. 그래서 “중국의 혁명은 북경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연변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조크가 생겨나기까지 했다.

 

  아무튼 중국조선족은 자기의 특수한 투쟁사와 혁명사를 갖고있으며 이로하여 중국에서 살아 갈 수 있는 당당한 권리를 갖고 있다. 우리 중국조선족은 중국에서 살 수 있는 권리를 일방적으로 중국으로부터 하사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싸워서 그 피의 代價로 중국으로부터 당당하게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코 鄭判龍의 말처럼  ‘중국에서 이 눈치 저 눈치를 살피면서 살아가야 하는 가련한 며느리 신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중국조선족은 특히 중국공산당에 대해 많은 공헌을 하였다.

 

  3. 中國朝鮮族의 특수한 아이덴티티 - 문화정체성

 

   중국조선족의 특수한 민족정체성에 대해서 처음으로 이론적 차원에서 언급한 분은 정판룡 선생이다. 이 분은 주장을 간단하게 “조선족문화의 이중성”으로 귀납했으며 문학인답게 대가족에 시집 온 며느리 처지로 중국에서의  중국조선족의 입지를 메타포를 동원해 비유했다.

 

  말하자면 중국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시집을 온 며느리이기에 시집에서 갖고 온 문화적인 계승성도 있고  동시에 시집에 와서 익힌 시집의 특성도 몸에 배여 있다는 것이다. 중국조선족은 우선 시집살이를 잘 하고 다음에는 친정집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이 분의 주장이다. 특히 시집살이를 하면서 늘 친정 생각만 한다면 시집으로부터 의심을 받고 따라서 왕따를 당하게 된다고 인정했던 것이다.

 

  정판룡 선생의 ‘이중성론’과 ‘며느리론’을 계승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면서 자기의 견해를 보다 합리하게 내세운 사람은 중국조선족의 소장학자 연변대학정치학부의 김강일 교수같은 친구들이다. 김강일은 『중국조선족사회 문화우세와 발전전략』이란 책에서 중국조선족문화는 “문화의 변연성”을 갖고 있다는 관점을 내놓았다. 물론 이는  문화인류학에서 구미의 학자들이 이미 제기한 이론이기는 하지만 김강일 씨가 이 이론을 중국조선족문화의 연구에서 활용했을 따름이다. 김문학 씨는 중국조선족문화, 특히 연변조선족문화를 ‘박쥐형문화’라고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나 자기를  ‘무국적세계인’이라고 뻥튀기를 한 것도 다 구미의 문화인류학에서의 ‘다이애스포라’ 거나 ‘경계인(境界人)’ 개념에서 힌트를 받고 떠벌린 것이다.

 

  본인도 중국조선족문화가 “文化의 邊緣性”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한다.

  첫째, 변연문화란 부동한 문화의 변두리에서 일정한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문화계통은 세계 각지에 산재해있으며 자기로서의 특수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를테면 세계 각지에 산재해있는 유태인 공동체, 유럽의 스위스 의 독일인공동체, 캐나다의 퀘벡의 프랑스후예에는 이런 문화계통이 존재한다. 변연문화구역은 자기의 특수한 문화적인 특질을 갖고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문화구역은 두 개 이상의 문화계통과의 쌍개방(雙開放) 性格에 있다.

 

  둘째, 변연문화계통은 그 특수한 다중문화구조(多重文化構造)로 인해 새로운 문화 요소를 창출할 수 있기에 단일문화구조(單一文化構造)를 가진 문화계통에서는 갖출 수 없는 기능을 갖고 있다. 시스템론의 시각에서 보면 변연문화란 새로운 문화계통을 의미하며 그것은 일반적인 문화계통보다 더 강한 문화기능을 나타낼 수 있다.

 

  셋째, 변연문화의 성격은 인류 문화발전의 필연적인 추세이다. 미래의 세계는 문화계통간의 부단한 교류로 인해 복합적인 성격을 보다 강하게 나타내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 어느 문화계통이든지 모두 자기가 교유했던 전통적인 문화만을 고수할 수 없을 것이며 복합적인 문화계통으로 새로운 문화기능을 창출해야만 발전에 필수적인 문화적인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 어떤 변연문화계통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그 존재의 합리성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문화란 부단히 변해 가는 생활환경에 대한 인간들의 필연적인 반응이고 적응방식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생활리듬의 가속화로 더욱 그러할 것이다.

 

변연문화의 함의에는 두 개 이상의 문화권을 연결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문화계통이 내포하고 있다. 즉 그것들은 두 개 혹은 두 개 이상의 문화계통이 서로 맞닿은, 문화의 중심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에서 형성될 수도 있고  문화의 중심지역에서도 형성될 수도 있으며 또 두 개 혹은 두 개 이상의 문화계통들간의 상호 문화교류과정에서 형성될 수도 있다. 예컨대 중국조선족사회는 전자에 속한다면 미국의 한인사회는 문화의 중심지역에 형성된 변연문화계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두 민족공동체는 모두 두 개 이상 문화계통간의 교차형태를 이루고있기에 그것들은 모두 변연문화의 특징을 갖고 있다.

 

  변연문화계통의 가장 돌출한 문화적인 특징은 그것이 갖고있는 강력한 文化轉換機能에 있다. 우리는 오늘의 시대를 정보화시대, 지식산업시대라고 한다. 오늘날의 새로운 시대에 있어서 변연문화는 세계의 각종 문화를 轉換하여 傳達하는 정보망의 망점을 이루고 있으며 그것이 각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제반 영역의 발전에 주는 영향은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한 변연문화계통으로서의 중국조선족이라는 문화공동체는 한 세기 반 남짓한 동안에 자기의 민족문화전통을 굳건히 지킴과 동시에 중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점차 형성되었다. 이 둘 중에서 그 어느 한 쪽을 홀시해도 중국조선족문화는 변연문화계통으로 형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중국조선족이 현지사회인 중국의 문화만을 수요하면서 자기의 문화전통을 포기했다면 13억 중국인 중의 하나로 되어 자기의 개성을 상실하게 되었을 것이고, 만일 자기의 민족문화의 전통만 고수하면서 중국문화에 대한 수용을 포기했다면 중국사회에 적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중국조선족은 총체적으로 보아서볼 때, 중국성구를 동원해 표현한다면 “각답량지선(脚踏兩只船)”, 즉 중국과 한반도라는 이 “두 文化의 배”에 발을 붙이고 지금까지 살아온 셈이다. 이 점을 두고 정판룡은 중국조선족문화를 ‘이중성’을 갖고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중성, 복합성은 다 같은 뜻이다. 이 말은 지금도 옳은 말씀이다. 

 

  문화적인 성격으로 보면 중국조선족문화의 기반은 母國文化인 韓半島文化의 要素로서 그것이 민속, 생활방식, 사고방식, 언어 등 면에서 아직도 강하게 나타나므로 중국조선족문화의 主體는 여전히 韓半島文化 要素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조선족의 문화는 총체적으로 볼 때 韓半島에서 갖고 온 모체문화의 접본에 중국문화라는 접목을 가접시켜 새롭게 생겨난 문화라고할 수 있다. 연변의 사과배는 이런 의미에서 중국조선족이라는 이 변연문화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연변의 사과배는 북조선 북청에서 가져온 잡목에다 연변의 돌배라는 접본(接本)에 가접시켜서 만든 새로운 배품종이다. 연변의 명물 사과배와 유사한 것이 우리 중국조선족문화이다. 본인은 대학학부생시절에 연변대학의 한어학부를 ‘사과배계’라고 명명한 바 있다. 그것은 한어전업은 조선족대학생이라는 이 접본에 중국언어문학이라는 이 접목을 가접(嫁接)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이었다.

 

  일언이폐지하면 중국조선족의 복합문화도 원문화의 기본적인 성격을 보전한 기초 우에서  중국문화를 수용하였다. 이 점이 중국조선족 문화의 주체성 확보에 더 없이 중요하다. 이러한 주체성이 확보되면 일정한 기한과 조건하에서도 동화란 결코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중국조선족사회와 같은 변연문화계통은  문화자체의 주체성만 확보하게 된다면 그것은 모체문화보다도 더 많은 기능을 가지게 된다. 즉 원 문화계통속에는 없는 언어중개와 문화 중개의 작용이 있음은 물론이고 두 개 문화 계통을 연결하는 문화전환계통까지 생겨나게 된다. 특히 변연문화구역은 지리적으로 두 개 이상의 문화권을 연결하는 위치에 처해 있으므로 정치, 경제, 문화 등 각분야에서 교류의 중요한 매개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며 그의 문화전환기능으로 빠른 시일 내에 보다 효과적으로 두 개 부동한 문화계통의 연계를 강화할 수 있다. 하기에 이러한 변연문화는 일반적인 문화계통에서는 구비할 수 없는 정치 경제, 문화, 적인 중요한 가치와 의의를 가지고 있다. 지금 연변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족사회는 조선의 페쇄성으로 말미암아 반폐쇄상태에 처해 있기에 자신이 갖고있는 변연문화구역의 특수한 기능을 완전히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그의 부분적인 기능은 한국과 중국간의 교류에서 많이 나타나나고 있는데, 지정학적인 원인으로 하여 아직도 제한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만일 조선이 개방한다거나 한반도가 통일되면 중국조선족 사회가 지니고있는 변연문화구역의 특징이 충분히 나타날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그의 戰略적인 위치도 급격이 부상될 것이다.


   4. 중국조선족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중국조선족은 지정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서 살고 있다. 이런 까닭에 중국조선족의 역할은 중국과 한반도 양쪽에서 다 보여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조선족은 중국과 한반도에서 자기의 작용을 발휘하면서 때로는 바람직한 방향에서 작용을 발휘했지만 때로는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에서 작용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볼 때 중국조선족은 많이는  바람직한 방향에서 작용을 발휘했다.

 

  중국조선족은 중국에서 살면서도 이중사명을 지니고 한반도의 민족독립과 국가주권의 회복을 위해 많은 작용을 하여왔음은 더 말 할 나위조차 없다. 동시에 중국조선족은 중국의 혁명과 건설을 위해 수많은 기여를 했다.

 

  지금 한반도의 남과 북이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거나 통일을 맞이하게 될 경우에 중국조선족은 또 다시 새로운 역사의 전환점에서 동북아의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는 초점에 서게 될 것이며 새로운 기회와 도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중국조선족사회와 한반도간에는 상당히 큰 이익구도가 존재하고 있으며 또 멀지 않은 미래에 이러한 이익구도는 점점 뚜렷해질 것이다. 이를 경제, 정치, 문화 등 여러 측면에서 말할 수 있다.

 

 첫째,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중국조선족의 역할

 

  중국조선족사회는 중국과 한반도의 경제교류에 있어서 중요한 중개창구이다. 1980년말부터 이루어진 한국의 대중국 만일 한반도가 보다 높은 전력적인 차원에서 중국조선족사회를 인식하고 활용한다면 그 뒤따른 경제적효과가 거대할 것이다. 진출에서 중국조선족사회의 매개적인 작용이 아주 컸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중국조선족 사회의 존재로 하여 한국은 일본보다도 월등히 좋은 대중국 진출의 여건을 갖고있다는 점이다.  중국조선족사화는 한반도의 원 문화와 중국문화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특수한 변연문화구역이고 한반도와 중국을 이어주는 문화전환계통이므로 한반도의 대중국 진출에서 극히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반도의 미래에 있어서 중국과의 협력이 필수적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중국조선족사회가 지니고있는 문화적 중국의 경제력의 신장과 함께 대한반도 수출의 기능은 더 없이 귀중한 문화자원이다. 동시에 이런 과정 중에서 중국조선족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며 자기의 민족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점은 중국의 시각에서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한중수교이래 중국조선족이 한국에 진출하여 벌어온 외화는 그 량이 전 중국적으로 따지면 얼마 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연변을 비롯한 중국조선족 집거 지구와 산재지구에서는 아주 중요한 외화 획득 원으로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금 연변의 아줌마들이 한국에서 송금해보내는 외화만 해도 전반 연변의 재정수입보다 더 많다고 한다.

 

  둘째 정치적 측면에서의 중국조선족의 역할

 

  중국조선족사회는 지정학적으로 남한과 북한과 다 가까운 위치에 있으며 특히 북한과 밀착되어 있다는 점은 한민족의 민족적 대단합과 국가의 통일에도 역동적인 기능을 갖게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조선족사회는 북한과 친인척관계과 아주 많으며 또 중국조선족사회는 사회주의적 문화와 자본주의적 문화에 다 익숙하며 남한과 북한을 제한적이나마 다 방문할 수 있는 여건을 갖고있기에 한반도의 통일과정에서 문화전환계통의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중국조선족 사회의 문화의 복합성에는 한반도문화와 중국문화가 결합되어 있고 문화권이 사회주의주의 문화와 자본주의 문화에 다 비교적 익숙했기에 남북의 교류에서 중개적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중국조선족사회가 남북통일 과정에서 일으키는 작용은 남과 북을 이어주는 매개적 역할뿐만 아니라 남과 북 서로가 접수할 수 있는 문화신호를 전환하여 전달하는 극히 중요한 문화전환의 기능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중국조선족은 문화적으로 남북한을 이어주는 문화전환의 문화전환계통도 갖고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문화전환계통 혹은 문화중개계통의 기능은 상대방의 문화를 피접수자가 접수할 수 있는 문화신호로 전환하여 전달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두 개 문화체계가 서로 대립되어 있고 대방의 문화를 이해할 사유방식과 가치관이 결핍할 때 문화전환계통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남북한 과 같은 이념과 제도의 차이로 하여 반세기 이상 분단된 상태에 처해 있었던 문화계통간의 교류에는 문화적인 이해의 결핍으로 하여 많은 문제점들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소하고 빠른 시일내에 문화적인 융합을 이룩하자면 중국조선족사회와 같은 문화중개계통을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남북한의 통일과정에서 중국조선족사회의 작용이 중요하다는 이론적인 전제는 곧바로 남북한의 문화적 갈등이 너무나도 심각하고 또 단시일내의 교류로 이러한 문화심층의 갈등을 해소할 수 없다는 점이다.

 

  중국의 입장에서도 중국조선족의 존재는 정치적으로도 불편한 점도 있겠지만 유리한 점도 상당히 많았음은 6.25전쟁에서 분명히 나타났다. 6.25전쟁에 중국의 인민해방전쟁을 겪은 조선족장병들이 몇 만명이나 파견되었으며 그 중에는 지금 조남기 장군 같은 분들도 있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우리중국조선족의 자기의 위상과 지위를 언제나 잘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중국의 성구인 ‘불재기위, 불모기정(不在其位, 不謀其政)’라는 말과 조선 속담인 ‘자리를 봐가면서 다리를 펴라’라는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백년 남짓한 중국조선족의 역사에서 우리는 삐치지 말아야 될 일에도 삐치면서 많은 헛된 희생을 한 교훈도 없지 않다. 그 단적인 실례를 해방전쟁, 합작화운동, 문화대혁명, 6.4동란시의 연변사람들의 부적절한 참여에서 보아낼 수 있다. 중구의 대 정치에 있어서 사실 중국조선족은 주역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마치도자기가 주역인 것처럼 태도표시를 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중국조선족은 중국의 대 정치에   ‘감 놔라 배 놔라’하거나 무턱대고 적극성을 발휘하는 일은 앞으로 꼭 삼가해야 할 것이다.

   

  셋째, 문화적 측면에서의 중국조선족사회의 역할

 

  는 중한 두 나라의 문화교류를 주요한 문화전환의 기능을 f수행하여왔으며 또 앞으로도 수행할 것이다.    중국에서의 조선어, 한국어교육을 연변대학, 북경대학, 복단대학, 중앙민족학원 등 몇 십개 대학의 한국어, 조선언어학과의 중국조선족교원들이 중요한 기능을 발휘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한류의 열풍을 일으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 한국드라마 『사랑이 뭐길렌를 중국어로 번역한 이들도 우리 김련란, 김득보 등 중국조선족 번역가들이였음은 이 점을 잘 말해준다. 중국조선족의 문화적 측면에서의 문화전환의 기능은 앞으로도 유감없이 발휘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과정 중에서 중국조선족은 자기의 가치를 실현하고 돈도 많이 벌면서 삶의 질을 높이면서 중구에서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우리중국조선족의 자기의 위상과 지위를 언제나 잘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갖고 지금 돌이켜보면 중국조선족은 이용을 당해도 값어치 있게 이용 당한 적도 있지만 갑어치 없게 억울하게 이용당한 적도 있다. 

  

  

   5. 변연문화체계로서의 중국조선족의 진로에 대한 생각


  변연문화체계로서의 중국조선족문화는 많은 자신의 長點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의 많은 短點도 갖고 있다. 양쪽에 문화에 발을 붙이고있기에 늘 자신의 문화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되며 방황을 하게 된다. 즉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의 문화는 도대체 어떤 문화여야 하는가? 어느 쪽 문화에 기울어져야 하는가? 이리하여 중국조선족문화의 이런 변연성은 아주 많은 가변성을 갖고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우왕좌왕한다.

 

  1960년대에 일었던 조선바람에 우리 중국동포들은 근 10만 이상이나 조선으로 도망쳤다. 작년 년말에 발생했던 한국에서 체류하고 있는 우리동포들의 국적포기운동은 모국문화에로의 일변도의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나 중국에서의 조선족민족교육 취소론자들은 중국문화에로의 일변도의 경향을 대표하고 있다. 그래서 몇 년전 김문학씨가 연변조선족들을 “바람에 불리는 갈대”라고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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