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족(漢族) 조정에 대한 흉노-선비(匈奴, 鮮卑) 등 이민족의 갈취(喝取) 행위는 화친(和親)정책 혹은 조공(朝貢)관계 등과 같은 완곡한 표현으로 포장이 되었었다. 소위 “야만족”을 정벌한다는 것은 비용도 비용이지만, 상당히 위험한 도박이었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칭호의 수여, 다양한 공물(貢物)의 제공, 보조금 성격의 국경무역, 등을 대가로 하는 평화조약은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중국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수단이었다.

 

한족 지배자들은 복속(服屬), 신종(臣從)의 예(禮), 조공 등의 표현을 구사해서 외형상으로 이민족 사절을 마치 속국에서 온 조공사인 것처럼 취급하면서, 이념상의 자기만족을 하고, 중국 중심의 허구적 중화세계관을 내세울 수 있었다. 본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평화공존: 화친(和親)정책 혹은 조공(朝貢)관계의 실체


洪元卓 (서울대 교수)

유방(劉邦)이 한나라를 세우기 3년 전인 BC 209년, 흉노족 중에 매우 뛰어난 지도자가 나타났다. 묵특(冒頓, r. BC 209 - 174)의 영도 하에 흉노족은 유목 부족들을 통합하여 단일 세력으로 조직했고, 느슨한 부족연맹체를 유목제국으로 만들었다.1 묵특이 처음으로 선우가 되었을 당시에는 동호(東胡)의 세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었기 때문에, 동호들은 자주 흉노의 땅을 침범하였다. 하지만 묵특의 등장으로 상황은 곧 역전되었다. 묵특은 기습공격을 하여 동호를 정복하고 복속시켰다.2



당시, 목축과 사냥을 주로 하는 유목민들에게는 민간생활이나 군인생활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말타고 활쏘는 것은 일상 생활이고, 계절에 따라 천막을 걷고 이동을 하는 과정에서, 또 전 부족이 참여하는 사냥을 통해 단체의 일원으로, 조직적으로 행동을 통일하고 협조-조정하는 습관을 훈련 받고 몸에 익힌다. 장기간에 걸친 원정을 떠날 때는 가축들을 함께 데리고 가기 때문에 생산활동이 중단되지 않았고, 이들에게는 오히려 군사행동 자체가 수익성 높은 모험사업이었다. 전장에서 각 부족은 자신들의 부족장의 직접 지휘를 받는 조직으로 전투작전을 수행했다 세습적 귀족제도를 기반으로 조직된 유목민 군대는, 대를 이어 내려오는 부족 내 충성심으로 백인장(百人長), 천인장(千人長), 만인장(萬人長)들 간의 유대를 공고히 했다. 유목국가는 전 부족의 모든 구성원이 총동원되는 개병제(皆兵制)를 효과적으로 유지했다. 3



흉노의 신앙은 하늘을 받들고, 특정한 산을 신성시 하여 모시는 샤머니즘이었다. 그들은 무당이 하늘의 심령과 의사소통을 하여 병을 고치고, 적을 저주하며,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고 믿었다. 모든 원시 투르코-몽골족들에게 공통된 영적 문화는 샤머니즘의 이었으며, 이는 북몽골로이드 인종 전체를 연결시키는 고리가 되었다. 한반도와 만주의 문화적 공통성은 남자보다 여자 무당을 선호하는 샤머니즘의 지역적 변형의 특색이다 일본 열도의 아이누족 또한 시베리안 샤머니즘과 북유라시아 곰 숭배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Janhunen, 1996, p. 175 참조)



BC 200년, 한 고조(漢高祖, BC 206-195) 역시 진시황과 같은 실수를 범하여 흉노를 공격했다. 묵특의 군대는 평성(平城, 현 산서성 大同)에서 고조의 군대를 완전 포위했으나, 묵특은 자신이 호의를 베풀면 그 대가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고조가 달아날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한나라 조정은 흉노와 형제지간 임을 선언하면서, 선우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 보내고, 온갖 호화사치품을 선물로 주고, 현금, 명주솜, 비단, 술, 쌀과 기타 식료품 등 막대한 량의 공물을 제공하고, 또 보조금 성격의 국경무역을 한다는 조건으로 흉노와 화친(和親)관계를 맺었다. 4  만리장성이 양 제국간의 국경으로 인정됐다



흉노의 지배자는 자신 휘하의 모든 부족장들에게 충성의 대가를 정기적으로 지불할 수 있는 막대한 규모의 수입과 사치품들을 확보했고, 일반 유목민들에게는 유리한 조건으로 교역을 할 수 있는 국경무역 기회를 제공했다 흉노가 획득한 엄청난 양의 비단은 소그드족과 파르티안, 인도상인 등등의 중개상을 통해 당시 로마에까지 도달하였다. 대략 5천만명 정도의 인구를 가졌던 것으로 추산되는 진-한(秦漢)제국은, 백만명 내외의 유목민 흉노제국과 힘의 균형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대치(對峙)했다. 5



아리안 계통 유목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월지국(月氏國) 사람들은 묵특에 의해 감숙성(甘肅省)에서 내몰려, BC 160년경에 박트리아(옛 그리스인들이 중앙아시아에 세운 왕국)와 접경한 페르가나 지역으로까지 달아날 수 밖에 없었으나, 1세기경에 와서는 아프카니스탄의 카불과 인도 북서부를 포함하는 쿠샨왕조를 세울 수 있었다. 이 사례는, 초원의 한쪽 끝에서 누군가가 누군가에 의해 밀리게 되면, 그 결과 예기치 않은 연쇄반응이 어디까지 일어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BC 141-87)는 BC 111년에 중국대륙 남부연안의 절강, 복건, 광동 지역 등을 정복하고, 광서와 베트남의 북쪽지역까지 진출하여, 대대적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한나라 군대는, 투르키스탄의 도시국가들로부터 흉노가 징수하는 수입원을 차단해 흉노의 오른팔을 자르기 위해, 타림분지의 도시국가들을 정복하였다. 6  



한 무제는 화친정책이 유발한 막대한 비용과 굴욕감을 참지 못하여, BC 133년에 유화정책을 폐기하고, BC 117년에는 흉노를 공격하여 몽골초원 북부로 내쫓았다. 무제는 또 흉노의 왼팔을 잘라버린다며, BC 108년에 고조선을 정복하고, 요하 하류 유역과 한반도 서북쪽 해안지대에 한 사군을 설치하였다. Janhunen(1996: 194)에 의하면, 중국 정권을 대표 해 한반도와 만주로 이주해 온 한족 관료, 군인, 상인들은 그 불안정적 특성 때문에, 결국에는 모국으로의 귀환이 강요되거나, 아니면 주변 야만인들에 동화될 수밖에 없었다. 7



처음에는 흉노와의 싸움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얼마 못 가 형세는 역전되고, 한 무제 말기에는 수세로 전환되었다. 후세 사가들은 한 무제가 순간적인 영광을 쫓느라 조정의 재정을 파탄시켰다고 비난하였다. 무제는 대규모의 군대를 먹여 살리고, 막대한 전비를 지출하고, 또 전승한 장군들을 승진시켜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광활한 초원지역에서 유목민 병사를 추적하는 한족 군대에 식량과 기타 군수품을 보급한다는 것은 엄청난 비용지출을 의미 하였다. 사마천은 한나라 경제가 몰락하고, 관료의 부패가 만연하게 된 것은 모두가 무제의 군사활동 탓이라고 말했다 (Jagchid and Symons, 1989, pp. 62-3을 참조)



무제의 공격적인 정책이 폐기되고 한참 후인 BC 54년에 흉노는 한족의 의례적인 조공관계를 --단지 이름뿐인 상징적 복속으로, 실질적인 의미에서는 화친과 그 내용이 동일한 관계를-- 수용하였다. 이것은 복속, 신종(臣從)의 예, 조공 등과 같은 완곡한 어구로 포장된 갈취였다. 한 나라 지배자들은 외형상으로 흉노 사절을 마치 속국의 온 조공사인 것처럼 취급하면서, 이념상의 자기만족을 하고, 중국 중심의 허구적 중화세계관을 내세울 수 있었다. 8



Jagchid and Symons(1998: 116)에 의하면, “신중히 선택된 용어와 조공 이라는 수사학적 표현으로 포장을 하여 유목국가에 대한 보상을 숨겼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한족 왕조가 무력충돌을 회피하기 위하여 자신들보다 훨씬 강한 유목세력에게 조공을 바친 것이었다. 정착-농경 국가는 평화공존을 위해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군가적 해결책 보다는 공물을 바치고 국경무역을 제공하는 편이 훨씬 비용이 싼 셈이었다”



BC 33년에 한 조정은 궁녀들 중 5명의 여인을 뽑아 흉노 선우에게 선사 했다. 그들 중 한명인 왕소군(王昭君)은, 한나라 공주인 것처럼 하여, 선우의 두 아들을 낳았다. 선우는 BC 31년에 죽었고, 그녀는 흉노의 관습에 따라 새로운 지배자의 아내가 되어 다시 두 명의 딸을 낳았다. 그녀는 중국 민속의 가장 유명한 미인이 되었으며, 중국문학의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 왔다.



흉노는 그들 군대의 숫자가 야만적 약탈을 자행 해 한나라 조정을 겁주기에는 충분하지만, 중국 전역을 정복하여 통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로 중국대륙을 정복하려 들지 않았다. 흉노는 정주농경 지대를 점령하고 통치를 할 관료조직도 없었다. 흉노는 수적인 면에서의 자신들의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고, 또 기동성을 잃지 않으면서, 중국을 착취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막대한 공물을 빼앗아 내고, 한족의 저항 의지를 제거하는 최상의 도구가 바로 한족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것이라 믿었다. 평화협정의 잦은 파기는 받아내는 물자의 량을 늘리려는 방책이었다. 9  

 

중국 주변의 정주농경 국가들은 중국문화를 모방하려 애를 썼지만, 말 타는 유목민들은 항상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푸른 하늘을 지붕 삼아 천막을 치고 우유와 고기를 먹는 목축생활을 선호하였다.



한나라 조정은, 비록 매년 세수의 10% 이상을 지불해야 하지만, 이런 식으로 흉노를 매수하는 것이 야만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값싸다고 믿었다. 한 무제 방식으로 초원지대를 정벌한다는 것은 비용도 비용이지만, 상당히 위험한 도박인 것이었다

 

평화조약은 그럴 듯 하게 들리는 칭호의 수여, 다양한 공물의 제공, 보조금적 국경무역을 대가로 안전한 국경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 모든 비용은 국경에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적었다. 중앙집권화된 유목국가에서 작은 부족장들은 중국 조정과 직접적으로 협상을 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고, 최고통치자가 조공제도를 홀로 장악하였다.

 

대선우는 매년 증가하는 한족으로부터의 조공 수입을 부하 부족장들에게 분배해 주면서 그들로부터 지속적인 충성을 확보했다. Barfield (1989: 248)는, 한족 조정이 현상유지를 원하는 유목제국으로부터 종종 군사적 도움을 받아 내부 반란을 진압하거나 혹은 다른 외적의 침입을 격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7 (2005. 2. 5.)
정리: 강현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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